행복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는 무엇일까요?


 


에픽테투스에 의하면 사물들 중에는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있고, 할 수 없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를 위해 삶의 주사위가 어떻게 던져질지 하는 것은 우리의 소관사항이 아닙니다.


우리가 조종할 수 있는 것은, 일단 주사위가 던져졌으면 그 결과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것뿐입니다.


 


질병이나 죽음이나 가난을 피하려고 하면 더욱 비참하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중 어느 것도, 특히 죽음의 경우, 우리가 어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우리가 조정할 수 있는 것들을 잘하는 데서 생겨납니다.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수 없이 되풀이하는 질문입니다.


물질적인 풍요에도 불구하고 행복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분명 경제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명에와 인기에도 불구하고 자살과 우울증으로 치닫는 이들이 많은 것도 우리에겐 이해 못할 일입니다.


오히려 행복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지극히 평범한 경우가 많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최근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세계 178개국 가운데 하위권인 102위(OECD회원국 중 30개국 중 25위)로 월드 밸류 서베이(WVS)에서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슬픔과 행복은 서로 뒤엉켜 있으면서도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한 채 상호보완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결국 행복의 가치는 슬픔이 작아질 때 커지는 법이므로 반비례의 법칙으로도 통합니다.


슬픔 뒤에 찾아오는 기쁨은 행복이 배가됩니다.


다시 말하면 슬픔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행복의 가치는 훨씬 초라해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언제나 행복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신기루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지금 현재가 더 중요하다는 점과 끊임없이 행복의 편에서 삶을 바라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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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속된 사람이라 해도 자기의 불행을 연출하라고 하면 위대한 예술가가 된다.


팔로 자기 가슴을 조이면 모든 근육이 서로 당기는 느낌이 든다.


어떤 적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악물고, 가슴을 방어하고, 주먹을 휘둘러 보인다.


이와 같이 요란스러운 동작은 외부로 드러내지 않는다 해도 묵직하게 움직이지 않는 육체 내부에서는 그런 동작이 이미 준비돼 있다는 사실과 그 때문에 더 강한 효과를 낳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둬야 한다.


 


때때로 잠이 오지 않을 때 으레 불쾌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멤돈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런데 이 불쾌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미 준비됐던 동작이다.


정신적인 질병도 육체적인 질병의 초기 증상처럼 긴장을 푸는 체조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대게 이 방법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아무도 이런 요법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예의를 지키는 관습은 사람의 사고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상냥함, 기쁨, 친절을 모방하는 것은 우울감은 물론 위장병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든지 미소를 짓는 운동에는 그와 반대되는 노여움 · 불신 · 우울과 같은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장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교 생활 · 방문 · 의식 · 축하 등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다.


그것은 행복을 연출해 보는 기회이다.


그리고 이러한 희극은 분명 우리를 비극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이것은 대단한 일이다.


 



 


종교가 제시하는 행위는 의사도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무릅을 꿇고 몸을 구부리고 다시 편한 자세로 돌아오는 동작을 하면서, 몸의 여러 기관이 편안해지고 생명의 기능이 한층 활발해지기 때문이다.


"교만한 시칸브루 인(프랑크왕 클로비스)이여, 고개를 숙이라!" 이 말은 결코 그에게 분노나 교만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하면 거친 성격이 사라지게 된다.


물론 오랫동안 또는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사라져서 당분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종교상의 여러 기적은 이른바 기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니다.


 


어떤 이가 지겨운 생각을 어떻게 몰아내는가를 지켜보는 것은 많은 도움을 준다.


그는 마치 근육을 푸는 것처럼 어깨를 들썩이고 가슴을 움직인다.


지금 보고 있는 것과는 다른 지각, 다른 꿈을 얻을 수 있도록 머리를 빙빙 돌리기도 한다. 또한 자유로운 동작으로 걱정거리를 멀리 내던지고, 손가락 관절을 꺾어 소리를 내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춤의 시작이다.


이때 다비드의 하프가 그의 마음을 현혹하고, 이런 몸짓이 절도와 부드러움을 부여해주고, 모든 분노나 초조함을 몰아낸다면 울화병 환자는 곧 치유될 것이다.


 


나는 난처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취하는 몸짓을 좋아한다.


그들은 뒷머리를 긁적거린다. 그런데 이 동작은 돌이나 창을 집어던지는 것과 같은 과격한 동작을 유화시키고 무마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여기서 인간의 마음을 해방시키는 연기가 사람을 끌어들여 몰두하게 만드는 동작과 아주 흡사한 것이다.


 


염주는 구슬을 세는 행위에 생각과 손가락을 동시에 집중시키는 훌륭한 발명이다. 그러나 현자의 마음에 있는 비결은 더욱 뛰어난 것이다.


의지는 정념에 대해 무기력하지만, 운동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지배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이른바 어쩔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것보다 바이올린을 켜는 것이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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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방향이나 위의 상태에 따라 불쾌함을 느끼는 일은 누구나 엇비슷하다.


그럴 때 어떤 사람은 문짝을 걷어차고 또 어떤 사람은 마구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그러나 고매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이러한 우발적인 일을 모두 망각 속에 흘려버린다.


남이 했든 자기가 했든 간에 우발적인 일은 모두 용서한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불쾌감을 받아들이고 또 기분대로 행동하겠다고 맹세하여,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이렇게 해서 스스로 하나의 성격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누군가가 불쾌한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그를 싫어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를 용서하는 일이 필요하지만 거의 실행되지 않는다.


남을 용서하려면 먼저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하지만 반대로 뭔가 회한 같은 것이 남았다면 울화통 같은 무엇이 끝없이 솟아올라 종종 타인의 과오를 확대시킨다.


그리하여 각자 자기가 생각해낸 불쾌감을 되새기며 말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이런 말투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까지도 지껄이게 된다.


 


냄새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꽃다발이나 향수에 대한 기분은 언제나 똑같지는 않다.


아주 약간의 향기라도 찾아내어 맡고는 머리가 아플 것이라 판단한다. 이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연기 때문에 기침을 하는 것처럼 무슨 일에도 잔소리를 해댄다.


누구나 이런 부류의 가정 내 폭군을 알고 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은 처음부터 잠이 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작은 소리에도 깨서 성화를 부리는 것은, 사실 어떤 소리든 나기만을 기다렸다가 모든 식구를 괴롭히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결국에는 잠깐 잠이 든 것까지도 화를 낸다.


마치 불면증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해서 잠든 것처럼 말이다.


모든 일에 지나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카드놀이에서 지는 일에까지 자부심을 갖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건망증이 심해졌다거나 실어증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경우에 그 증거는 찾지 않아도 곧 발견된다.


그리고 자못 진지한 이 희극이 때로는 비극으로 변하기도 한다.


진짜 질병이나 나이로 인한 결과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의사들은 오래전부터 환자들이 증세를 찾으려고 하면 너무 쉽게 발견하는 무서운 집념, '틀에 박힌 사고방식'을 갖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런 과대망상에서 대부분의 정념이 생겨난다. 그리고 특히 대부분의 정신질환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샤르코(1825~1893 프랑스 정신병학자)는 여자 환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어떤 종류의 병은 의사가 질병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멸되거나 또는 거의 소멸되었다.


 



 


한때 유명했던 프로이트의 교묘한 학설이 벌써 신뢰를 잃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즉 불안해하는 사람, 스탕달 식으로 말해서 자기의 상상력을 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이든 쉽게 믿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학설의 바탕이 되는 성욕의 무넺는 사람이 그것을 중요시하고 있고, 그리고 거기에는 누구나 알고 있듯 야성적인 시가 있지만 그것은 논외로 한다.


 


의사의 생각을 안다는 것은 환자에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누구나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에 비해 덜 알려진 사실은, 환자가 의사의 생각을 재빨리 눈치 채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의사들이 세운 훌륭한 가설은, 아직 가설임에도 불구하고 곧 진실로 간주되어 버린다.


이렇게 해서 어떤 부분의 기억만이 체계적으로 상실되는 놀라운 기억상실증이 설명된다.


환자의 마음속에는 저 두려운, 틀에 박힌 사고방식도 있다는 사실이 오래동안 잊혀진 채로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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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의 관련이나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미래를 두려워하게 된다.


징조는 도처의 거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관념은 신학적인 것이다.


잘 알려진 우화가 있다. 어느 시인이 집이 무너져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다.


그는 밤중에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신들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독수리가 그의 대머리를 돌로 착각해 그 위에다 거북이 한 마리를 떨어뜨린 것이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어떤 왕자가 사자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았다.


왕자는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집 안에서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왕자는 벽에 걸린 사자 그림을 보고는 화가 치밀어 주먹질을 하다가 녹슨 못에 손을 다쳐 괴저병으로 죽었다.


 


이런 이야기에서 나온 관념이 훗날 신학자들에 의해 예정설로서 이론화된 것이다.


즉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전혀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숙명론은 결국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벌어지는 결과는 같다."는 결론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원인이 다르면 결과도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다음과 같은 논리를 통해 미래는 피할 수 없다는 환상을 깨뜨릴 수 있다.


 


가령 내가 어느 날 몇 시에 벽에 깔려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 예언을 무산시킬 수 있다.


우리 삶은 그런 것이다. 순간순간 우리는 불행을 모면하고 있다.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미리 아는, 더구나 합리적으로 알고 있는 불행은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만약 내가 도로 한복판에 서 있다면 자동차에 치여 죽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곳에 멈춰 서지 않는다.


 



 


그러면 운명을 믿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주로 두 가지 원인에서 온다.


우선, 공포를 느끼고 기다렸다는 듯이 불행에 빠져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만약 내가 차에 치여 죽는다는 예언을 들었고, 불운에 직면한 순간에 그 생각이 떠오른다면 그것만으로도 제대로 대처 행동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순간 나에게 필요한 것은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곧바로 행동이 뒤따른다.


이와는 반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같은 매커니즘에 의해 몸이 마비되고 만다.


이것은 일종의 현기증이지만, 그 덕택에 점술가들이 재산을 불리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정념이나 악덕은 어떤 길을 통해서도 같은 목적에 도달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겠다.


도박꾼이 도박을 하리라는 것을, 수전노가 돈을 모으리라는 것을, 야심가가 계책을 꾸미리라는 것을 예언하는 것은 쉽다.


점술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자신에게 일종의 운명을 내뱉는 경우가 있다.


"나는 늘 이 모양이야.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는 말을 하는 경우 말이다.


이것 역시 현기증이며, 이것 역시 예언을 적중시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주위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느 변화나, 여러 가지 사소한 원인의 다양성과 계속되는 변화를 잘 알고 있다면, 스스로 숙명 같은 것을 만들지 않게 될 것이다.


 


르사주(1668~1747 프랑스 작가)의 <질 블라스>를 읽어보라. 딱딱한 책은 아니지만, 이 책에서 우리는 행운도 불운도 마음에 두지 않고, 배를 예로 든다면 바닥의 짐을 버리고 바람 부는 대로 순응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우리의 과오는 우리보다 먼저 소멸된다.


그것들을 미라로 만들어 소중히 보존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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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소한 일 때문에 좋은 하루를 망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구두가 뻣뻣해서 발이 아프다든지 하는 경우이다.


이런 때는 무엇을 해도 재미가 없으며 머리가 멍한 상태이다.


그러나 치유는 간단하다. 옷을 벗듯이 그런 불행을 벌어내 버리면 된다. 그런 건 누구라도 잘 알고 있다.


그러한 불행은 왜 그런지만 알아내면 심각한 상황으로 가지는 않는다.


 


바늘에 찔린 아기는 마치 큰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울어댄다.


왜냐하면 아기는 원인도 치유법도 모르기 때문이다. 때로는 너무 우는 바람에 몸 상태가 나빠져 더욱 심하게 울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병이다. 이 병은 다른 병과 마찬가지로 명백한 병이다.


다만 그것이 심적인 것이라는 것은, 스스로 병을 키우고 있으면서 외적인 요인 때문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우는 일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신경질을 내는 것은 비단 아기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불쾌감은 일종의 병이고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들 말한다.


내가 앞에서 마음가짐을 바꾸면 고통이나 신경질을 치유할 수 있다고 한 것은 그 때문이다.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아무리 참을성이 좋은 사람이라도 종아리에 경련이 일어나면 비명을 지르게 된다.


그러나 발바닥을 펴고 바닥을 힘껏 밟으면 금방 낫는다. 눈에 벌레나 잡티가 들어갔을 때 눈을 비비면 두세 시간은 고생하지만, 가만히 코끝을 바라보고 있으면 곧 눈물이 나와 낫게 된다. 이처럼 간단한 치료법을 알게 된 후, 나느 스무 번 이상 시험해보았다. 이것은 처음부터 주위 사람이나 상황을 탓하기보다는 우선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현명하다가는 증거이다.


 



 


때로는 불행을 몹시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다. 그것을 과장한 것이 어떤 미치광이들에게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여기에서 어떤 생각 즉, 신비롭고도 악마적인 어떤 생각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것은 상상력의 착각이다. 자기 몸을 긁어대는 인간에게는 깊은 생각이 없다.


고통을 즐기느 ㄴ것도 아니다. 욱하고 초조해서 그러는 것이라 오래 지속되는 것이다.


 


말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불편함이나 균형을 잃은 동작에서 생기는 것이다.


가장 나쁜 것은 함부로 몸을 움직임으로써 말을 겁먹게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사실에서 스키타이 인처럼 "말을 탈 줄 아는 사람은 모든 지혜, 아니 거의 모든 지혜를 갖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싶다.


심지어 말에서 떨어지는 데도 능숙한 기술이 있다. 술에 취한 사람은 넘어져도 다치지 않는다.


소방수 역시 신체 훈련을 통해 공포심 없이 떨어지는 기술을 습득한다.


 


우리는 미소가 불쾌한 기분을 바꾸는 데 아무 도움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의범절이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미소를 짓고 인사를 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완전히 바꾸어놓는다.


심리학자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미소는 하품과 마찬가지로 우리 몸 깊숙이 도달해 목, 허파, 심장을 편안하게 해준다.


이처럼 신속하고 신통하게 효력을 발휘하는 약은 의사에게도 없다.


 


상상력은 진정 작용으로 우리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 안도감은 상상력이 야기하는 고통과 마찬가지로 실재한다.


또 상대에게 마음대로 하려고 말하며 어깨를 으쓱하는 경우가 있다.


잘 보면 이 동작은 결국 폐에 공기를 바꿔주는 동작이다


결국 coeur을 진정시켜주느 것이다. 왜냐하면 coeur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심장, 폐, 마음, 기분, 의욕)를 가지고 있지만, 심장은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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