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일의 관련이나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미래를 두려워하게 된다.
징조는 도처의 거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관념은 신학적인 것이다.
잘 알려진 우화가 있다. 어느 시인이 집이 무너져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다.
그는 밤중에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신들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독수리가 그의 대머리를 돌로 착각해 그 위에다 거북이 한 마리를 떨어뜨린 것이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어떤 왕자가 사자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았다.
왕자는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집 안에서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왕자는 벽에 걸린 사자 그림을 보고는 화가 치밀어 주먹질을 하다가 녹슨 못에 손을 다쳐 괴저병으로 죽었다.
이런 이야기에서 나온 관념이 훗날 신학자들에 의해 예정설로서 이론화된 것이다.
즉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전혀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숙명론은 결국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벌어지는 결과는 같다."는 결론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원인이 다르면 결과도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다음과 같은 논리를 통해 미래는 피할 수 없다는 환상을 깨뜨릴 수 있다.
가령 내가 어느 날 몇 시에 벽에 깔려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 예언을 무산시킬 수 있다.
우리 삶은 그런 것이다. 순간순간 우리는 불행을 모면하고 있다.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미리 아는, 더구나 합리적으로 알고 있는 불행은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만약 내가 도로 한복판에 서 있다면 자동차에 치여 죽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곳에 멈춰 서지 않는다.

그러면 운명을 믿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주로 두 가지 원인에서 온다.
우선, 공포를 느끼고 기다렸다는 듯이 불행에 빠져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만약 내가 차에 치여 죽는다는 예언을 들었고, 불운에 직면한 순간에 그 생각이 떠오른다면 그것만으로도 제대로 대처 행동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순간 나에게 필요한 것은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곧바로 행동이 뒤따른다.
이와는 반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같은 매커니즘에 의해 몸이 마비되고 만다.
이것은 일종의 현기증이지만, 그 덕택에 점술가들이 재산을 불리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정념이나 악덕은 어떤 길을 통해서도 같은 목적에 도달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겠다.
도박꾼이 도박을 하리라는 것을, 수전노가 돈을 모으리라는 것을, 야심가가 계책을 꾸미리라는 것을 예언하는 것은 쉽다.
점술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자신에게 일종의 운명을 내뱉는 경우가 있다.
"나는 늘 이 모양이야.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는 말을 하는 경우 말이다.
이것 역시 현기증이며, 이것 역시 예언을 적중시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주위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느 변화나, 여러 가지 사소한 원인의 다양성과 계속되는 변화를 잘 알고 있다면, 스스로 숙명 같은 것을 만들지 않게 될 것이다.
르사주(1668~1747 프랑스 작가)의 <질 블라스>를 읽어보라. 딱딱한 책은 아니지만, 이 책에서 우리는 행운도 불운도 마음에 두지 않고, 배를 예로 든다면 바닥의 짐을 버리고 바람 부는 대로 순응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우리의 과오는 우리보다 먼저 소멸된다.
그것들을 미라로 만들어 소중히 보존하지 말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