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리 속된 사람이라 해도 자기의 불행을 연출하라고 하면 위대한 예술가가 된다.
팔로 자기 가슴을 조이면 모든 근육이 서로 당기는 느낌이 든다.
어떤 적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악물고, 가슴을 방어하고, 주먹을 휘둘러 보인다.
이와 같이 요란스러운 동작은 외부로 드러내지 않는다 해도 묵직하게 움직이지 않는 육체 내부에서는 그런 동작이 이미 준비돼 있다는 사실과 그 때문에 더 강한 효과를 낳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둬야 한다.
때때로 잠이 오지 않을 때 으레 불쾌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멤돈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런데 이 불쾌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미 준비됐던 동작이다.
정신적인 질병도 육체적인 질병의 초기 증상처럼 긴장을 푸는 체조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대게 이 방법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아무도 이런 요법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예의를 지키는 관습은 사람의 사고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상냥함, 기쁨, 친절을 모방하는 것은 우울감은 물론 위장병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든지 미소를 짓는 운동에는 그와 반대되는 노여움 · 불신 · 우울과 같은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장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교 생활 · 방문 · 의식 · 축하 등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다.
그것은 행복을 연출해 보는 기회이다.
그리고 이러한 희극은 분명 우리를 비극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이것은 대단한 일이다.

종교가 제시하는 행위는 의사도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무릅을 꿇고 몸을 구부리고 다시 편한 자세로 돌아오는 동작을 하면서, 몸의 여러 기관이 편안해지고 생명의 기능이 한층 활발해지기 때문이다.
"교만한 시칸브루 인(프랑크왕 클로비스)이여, 고개를 숙이라!" 이 말은 결코 그에게 분노나 교만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하면 거친 성격이 사라지게 된다.
물론 오랫동안 또는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사라져서 당분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종교상의 여러 기적은 이른바 기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니다.
어떤 이가 지겨운 생각을 어떻게 몰아내는가를 지켜보는 것은 많은 도움을 준다.
그는 마치 근육을 푸는 것처럼 어깨를 들썩이고 가슴을 움직인다.
지금 보고 있는 것과는 다른 지각, 다른 꿈을 얻을 수 있도록 머리를 빙빙 돌리기도 한다. 또한 자유로운 동작으로 걱정거리를 멀리 내던지고, 손가락 관절을 꺾어 소리를 내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춤의 시작이다.
이때 다비드의 하프가 그의 마음을 현혹하고, 이런 몸짓이 절도와 부드러움을 부여해주고, 모든 분노나 초조함을 몰아낸다면 울화병 환자는 곧 치유될 것이다.
나는 난처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취하는 몸짓을 좋아한다.
그들은 뒷머리를 긁적거린다. 그런데 이 동작은 돌이나 창을 집어던지는 것과 같은 과격한 동작을 유화시키고 무마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여기서 인간의 마음을 해방시키는 연기가 사람을 끌어들여 몰두하게 만드는 동작과 아주 흡사한 것이다.
염주는 구슬을 세는 행위에 생각과 손가락을 동시에 집중시키는 훌륭한 발명이다. 그러나 현자의 마음에 있는 비결은 더욱 뛰어난 것이다.
의지는 정념에 대해 무기력하지만, 운동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지배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이른바 어쩔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것보다 바이올린을 켜는 것이 지름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