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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
마르크 로제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월
평점 :
“내가 낭독을 멈추자, 두 개의 링거에서 꾸르륵거리는 소리 외에는 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끔찍하다. 모니터의 녹색선은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마르크 로제, [그레구아르와 책방할아버지]에서
—스포일러포함—
학업을 포기한 아이, 학생을 포기하는 학교.
이런 일들이 공공연하게 제도라는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강백의 희곡 <파수꾼>에서 통제에 유용한 “질서”와 권력에 대해 풍자한 것이 떠올랐다.
그레구아르는 제도 안에서 제도에 배척 당한 학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 복지(?) 서비스에서 제공하는 일자리인 요양원에 취직한다.
뚜렷한 역할을 할 수 없어 조리실로 세탁실로 필요에 따라 불려 가 더 지옥과 덜 지옥의 노동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던 그에게 은근하게 추파를 던지는 노인이 있었으니 바로 피키에 씨다. 방 가득 쌓인 책으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둘은 책을 의식한다.
그러다 마침내, 책방 주인 출신의 피키에씨는 그레구아르에게 하루 한 시간 낭독해줄 것을 제안하고, 업무 중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도록 정식으로 원장에게 요청 한다. 더 지옥과 덜 지옥을 전전긍긍하던 그레구아르는 마지 못하는 척, 기대를 안고 낭독가의 길에 들어선다.
엄마 마저 별 볼 일 없게 생각했던 그레구아르가 칭찬을 듣고 선망을 받기 시작한다. 낭독 기술이 늘고, 좋은 책을 선별할 수 있게 되었다. 들고 다니는 책들이 많아졌다. 이전과 다른 평판을 갖게 되었다.
낭독으로 유대 관계를 형성한, 셀레스틴 할머니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그레구아르의 모습은 죽음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할머니가 평생 사랑한 음악이자 히틀러가 악마의 음악이라 낙인 찍은 피아노 재즈 음악을 크지 않게 귀에 꽂는다. 종종 피아노 건반을 누르듯 할머니의 손을 누른다. 어떤 미동도 없지만 유대감을 느낀다.
1시간 30분이면 끝나는 낭독을 하며 천일야화를 생각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만큼 낭독하여 할머니의 목숨을 잡아둘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권의 낭독이 마치자 바로 심전도의 지그재그 선은 일직선이 되고 만다.
홀로 세상을 떠나야했던 할머니에게 그레구아르의 낭독은 얼마나 든든한 동행이었을까.
죽음이 기다리는 곳인가, 죽음을 기다리는 곳인가...
책방 할아버지 피키에씨도 결국 그레구아르 곁을 떠난다. 그를 위해 250Km를 걸으라는 부탁을 하고 그 여정이 다 끝나가는 가운데 사그라들 듯이, 예견한대로.
그레구아르는 피키에 씨의 부고를 듣고도 끝까지 걷기로 한다. 자신에게 위대했던 친구 피키에 씨를 위해서. 그리고 걷기 전의 자신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
피키에 씨는 그걸 알고 그레구아르를 보낸 것이다. 어쩌면 그의 마지막 우정이자 사랑을 위해.
죽음을 다시 생각한다.
농축된 하나의 도서관이 닫히는 것인데, 거칠게 둘둘 말아 보내지 말고 서고를 정리하듯 보관할 것들을 잘 관리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