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이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임을 알리는 성명서를 일부러 남거두고 온 것이나 다름없다. 현장에 있는 것을 이미 목격당했으면서도 꼼꼼하게 지문을 지워 오히려 범죄의 증거를남기는 어리석은 범인의 수법과 똑같지 않은가.
- P99

탈출구라고 생각하고 몸을 던진 철책의 틈새가 실은 우리의 입구였다는 것을 간신히 깨달은 짐승……. 몇 번이나 콧잔등을 부딪히면서야 비로소 어항의 유리가 통과할 수 없는 벽이라는 것을 안 금붕어………. 다시금, 알몸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지금 무기를 쥐고 있는 것은 그들이다.
- P120

가령 의무란것이 인간의 여권이라 해도, 어째서 그런 놈들에게까지 비자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인가! ......인생이란 그런 종잇조각이 아니지 않은가…... 반듯하게 덮인 한 권의 일기장이다...... 첫 페이지는 한 권에 한 페이지면 족하다. 앞 페이지에 이어지지 않는 페이지에까지 일일이 의리를 지킬 필요 따위 없다......설사 상대방이 굶어 죽어간다 해도, 일일이 상대하고 있을 여유는 없는 것이다…... 제길! 물! ……그러나 아무리 목이 마르다 해도, 죽은 사람 모두의 장례식에 돌아다녀야 한다면, 몸이 열이라도 남아나지 않는다!
- P124

막상 일을 시작해 보니, 생각했던 것만큼의 저항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 변화의 원인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물 배급이 중단될까 봐 두려워서인가, 아니면 여자에 대한 자책감 때문인가, 아니면 또 노동 자체의 성격 때문일까?
과연 노동에는, 목적지 없이도 여전히 도망쳐 가는 시간을 견디게 하는, 인간의 기댈 언덕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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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당황이라고 말하는 감정을 느끼는 데 30초, 기억을 되돌려서 신발이 사라졌을 수 있는 수많은 장소와 경우의 수를 되짚어 보는 데 30초, 이미 사라진 신발을 절대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하는 데 30초, 채 2분이 안 되는 찰나에한쪽 운동화에 대한 아쉬운 감정과 사후관리에 대한 방안을 정리했다.
- P98

여행 마지막 밤 온전히 내 소유였던 옅은 흐뭇함이 그 안에 고스란히 함께 담겨 있었다. 내 긍정적인 성격을 한껏 즐기라는 듯 마침 오른쪽 발에 신을 수 있는 한쪽이었다. 잃어버린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을 우연히 찾은 듯 희열에 가득 찼던 난 얼른 그 운동화를 신고 다시 길을 나섰다.
- P101

진실이라는 것 자체가 상대적인 거니까.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에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쓰는 사람이 한계를 짓지 않는다면 한계가 없다는 겁니다. 화자가 내가 될 수도 있고, 타인이 될 수도 있고, 사건이 평탄하게 진행되지만, 마음은 용광로같이 뜨거울 수도 있고, 반대로 엄청난 사건에 휘말리면서도 겉으로는 냉철해 보이는 인물을 등장시킬 수도 있죠.
- P136

소설을 쓰는 건 자기가 주인공인 또 다른 세상을 하나 만든다는 거예요. 거기에서는 아무리 많은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습니다. 안전하니까요. 가상의 세계를 창조하면서 느꼈던 만족감만 실생활로 끌고 와서 또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는 겁니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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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살 생각도 없으면서
같이 죽을 생각도 없으면
서하나의 풍경이 된다

지나가는 풍경으로부터
아무도 없는 풍경까지

풍경은
조용히 있다
조용히 흐르고 있다
- P130

시란 무엇인가
버틸 힘을 주고, 버틸 힘을 <버릴> 힘을 주는 것,
살아 있으라고 속삭이고, 그게 다가 아니라고 속삭이고, 절망과정착하게 통과하라고 말해주는 것.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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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저는 그나마 남아 있던 약간의 진실마저 각자의 기억이라는 무서운도구로 채색될 걸 느끼고 있었나 봐요. 
- P71

전 당신이 그때의 우리, 아니 우리라는 말은 이제 좀 과분하네요. 그날들의 ‘당신과 나‘를 성실하게 잊도록 노력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 당신의 편지를 읽고 괜찮지 않게 되어버렸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괜찮지 않은지 뚜렷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요. 당신의 편지를 읽고 총체적 난국에 빠져버린 저, 이제는 만족하시나요.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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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 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 P90

하지만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인가. 난 아직 나 자신조차 구원하지 못했는데.

- P110

하지만 오늘당신이 대면하게 될 적은 다른 종류입니다. 당신을 망가뜨릴 수도 있지만, 반대로 가장 좋은 동반자가 될 수도 있는 가상의 적이죠. 죽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 P180

마찬가지로, 제자는 자신을 이끄는 이의 걸음걸이를 결코 흉내내어서는 안 됩니다. 삶을 바라보고, 고난과 정복을 체험하는 각자의 방식이 있는 것이니까요. 가르친다는 것은 가능한 것을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배운다는 것은 그 가능성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고요.
- P211

"알았소? 일단 결심을 하고 나면, 문제는 놀랄 정도로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겁니다."
- P213

"삶은 신비로운 산티아고 순례길보다 언제나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지요."
그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삶이 가르쳐주는 것을 우리가 그다지 신뢰하지 않을뿐이죠."
- P256

"비밀은 바로 이것입니다."
한참 만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군가를 가르칠 때 비로소 배울 수 있다는 것. 함께 신비로운 산티아고 순례길을 따라 걸어오면서, 당신이 의례들을 배우는 동안 나는 그 읭시를 깨달았습니다. 당신을 가르침으로써 나는 진정으로 배울 수 있었던 것이지요. 안내자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비로소 나 자신의 길을 찾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 P280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먼 훗날인 오늘..
오래전 그날 페트루스와 함께 지나갔던 이 바에 앉아 내 아내는책을 읽고, 나는 노트북을 두드리며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미래를 향해 걷고 있다. 1986년 8월 그날 오후를 떠올리며.
-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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