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가장 좋은 계절이잖아.
맞아. 모두 여름을 기다리면서 살지.
예쁜 이름이야. 기억하기 좋은 이름이야.
햇살, 바다, 모래, 호수, 나무 그늘, 풀벌레, 지푸라기 모자, 수박, 파라솔, 아이스티, 레이스 커튼... 여자들은 여름의 이름들에빠져들었고 나는 아네뜨의 회색 소파에 깊숙이 몸을 밀어 넣었다. 한없는 여름 예찬에 귓불이 더워 왔다. 그것이 우리가 함께하는 지금 이 계절의 이름이든, 나라는 사람의 이름이든 상관없었다.
- P71

하루에 한 가지 이상의 것을 하지 않는 일정도 그렇다. 오늘허니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다면, 내일은 할아버지의 유품을, 다음 날은 아네뜨의 가족사진을 본다든가 하는 식이다. 우리의 일정은 오후 5시면 끝났고, 간단한 저녁을 지어 함께 혹은 따로 먹은 후, 곧장 각자의 공간으로 흩어져 각자의 시간을 가진다.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긴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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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어린애였던 나를 휘어잡았던 바로 그 현기증이 어른이된 나의 눈을 캄캄하게 만들었어요.
- P361

그때, 나는 깨달았습니다. 나야말로 나의 온 힘과 정신을 기울여 바로 그 페스트와 싸운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그 오랜 세월 동안 내가 끊임없이 페스트를 앓고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나는 내가 간접적으로 인간 수천 명의 죽음에 동의했다는 것, 필연적으로 그러한 죽음에 이르도록 만든 행위나 원칙들을 선이라고 인정함으로써 나 자신이 그러한 죽음을 야기하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P362

"그렇지만 말입니다. 나는 성인들보다는 패배자들에게 더 연대 의식을 느낍니다. 아마 나는 영웅주의라든가 성자 같은 것에는 취미가 없는것 같아요.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그저 인간이 되겠다는것입니다."
- P368

물론인간은 희생자들을 위해서 싸워야 하죠. 그러나 사실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게 되고 만다면 투쟁은 해서 뭣하겠어요?
- P369

손바닥 밑에 바윗돌의 울퉁불퉁한 감촉을 느끼는 리유의 마음속에 이상한 행복감이 가득 차올랐다. 
- P370

한편, 한 인간을사랑한다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님을, 적어도 사랑이라는것이 자신의 표현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력한 것이못 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와 그는언제나 침묵 속에서 서로를 사랑할 것이다.
- P417

그리고 그는 자기 어머니에게 울지말라고 하고,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몹시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하면서 그는 다만 자신의 고통이 새삼스러운 것은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여러 달 전부터, 그리고 이틀 전부터 계속되어 왔던 똑같은 아픔이었다.
- P416

어떤 의미에서는 페스트가 너무나 별안간에 끝난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그는 얼떨떨했다. 행복은 전속력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일들은 기대하던 것보다 더 빨리 진행되고 있었다. 랑베르는 모든일이 일순간에 복구될 것이고, 기쁨은 음미해 볼 겨를도 없이닥쳐온 불지짐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P422

노인의 말이 옳았다. 인간들은 늘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그들의 힘이고 순진함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리유는 모든슬픔을 넘어서 자신이 그들과 통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P442

왜냐하면 그는 그 기쁨에 들떠 있는 군중이 모르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수십 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서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고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P443

이로써 우리는 <페스트>가 표면에 드러내 보이고 있는 거부와 ‘부정‘ 속에는 억누를 수 없는 하나의 ‘긍정‘이 감추어져 있음을, ‘반항‘ 속에는 ‘행복에 대한 조바심‘이 전제되어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 P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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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건축을 통해서 인간을 좀 더 이해하고 싶다. 우리가 왜 이런건축을 만들었는지 살펴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도 보이고,
그것을 만든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P13

모닥불이 만든 공간의 또 다른 특징은 모두가 한곳을 바라보게 한다는 점이다. 
- P40

동굴 벽화는 인간의 생각이 공간화된 첫 사례이며, 이를 통해서 새로운 ‘목표 지향적 사회‘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소들이 그려진 벽화를 보면서 사냥의성공과 풍요를 함께 기원하는 사냥꾼들이 생겨났을 것이다. 
- P50

얼핏 보면 효율적으로 정리되는 것 같지만, 단어를 단순화하면서 사람의 생각을 단순화시켜 조종하기 쉬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이다. 인류는 단어를 더 많이 만들고 사용하게 되면서 더 복잡하고 복합적인 사고가 가능해졌다. 한마디로 단어가 늘면서 더 똑똑해졌다.
- P50

벽화는 상상을 공간으로 현실화시킨다. 벽화를 그리는 일을 통해서 그 화가는 공간을 변화시키고 사람들을 다른 세상으로 인도한다. 그 안에 있는 사람은 가상의 세계로 빠져든다. 그 공간은 현실 세상의 모방일 수도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상이될 수도 있다. 
- P54

집단이 고인돌을 만든 것이아니라, 고인돌을 건축하는 일이 집단을 만들었다 할 수 있다. 
- P62

건축에서 벽은 공간을 구분하고, 구분된 공간은 집단을 규정한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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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페스트는 이제 그정점에 편안히 자리 잡고 앉아서, 착실한 관리처럼 매일매일의 살인에서 정확성과 규칙성을 과시했다.
- P339

 "당신에게 우정을 느끼고 있지요.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에겐 시간이 없었죠."
"좋습니다,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그럼 이 시간을 우정의 시간으로 할까요?"
- P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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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타루가 끄덕거렸다.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선생님이말하는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뿐이죠."
리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언제나 그렇죠. 나도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싸움을멈추어야 할 이유는 못 됩니다."
- P190

"그 모든 것을 누가 가르쳐줬나요, 선생님?"
대답이 즉각적으로 나왔다.
"가난입니다."
- P191

"그런데, 타루." 그가 말했다. "뭣 때문에 이런 일에 발 벗고나서지요?"
"저도 모르죠. 아마 제 윤리관 때문인가 봐요."
"어떤 윤리관이지요?"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 P193

그러나 인간들은 다소간 무지한 법이고 그것은 곧 미덕 또는 악덕이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믿고서, 그러니까 자기는 사람들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따위의 무지의 악덕인 것이다. 살인자의 넋은 맹목적인 것이며, 가능한 한의 총명을 다하지 않으면 참된 선도 아름다운 사랑도 없는 법이다.
- P195

아마도, 적어도 초기에는,
분명히 이런 식의 처리가 가족으로서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을 해친다고들 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페스트의 유행 기간 중,
그러한 감정의 고려는 염두에 둘 수가 없었다. 즉, 모든 것을효율성을 위해서 희생했던 것이다. 
- P254

무시무시한 불행은 오래 끌기 때문에 오히려 단조로운 것이다. 그런 나날을 겪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페스트를 겪는 그 무시무시한 나날들이 끝없이 타오르는 잔혹하고 커다란불길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발바닥 밑에 놓이는 모든 것을 짓이겨버리는 끝날 줄 모르는 답보 상태 같아 보이는것이었다.
- P262

처음으로 그들 생이별당한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헤어져 있는 사람 얘기도 하고, 제삼자 같은 말투를 쓰기도 하고,
자기들의 생이별 상태를 전염병의 통계 숫자와 똑같은 시각에서 검토해보기도 했다. 그때까지는 자기들의 고통을 한사코집단적인 불행과 떼어서 생각해 왔지만 이제는 두 문제를 섞어서 생각해도 좋다고 여기게 되었다. 기억도 희망도 없이, 그들은 현재 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실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현재로 변해버렸다. 페스트는 모든 사람에게서 사랑의 능력을, 심지어 우정을 나눌 힘조차도 빼앗아 가버리고 말았다는 사실도 말해야겠다. 
- P265

그것은 끝이 없는, 동시에 환상도 없는 똑같은 체념이고 똑같은 참을성이었다. 다만 생이별에 관해서는 그 감정을 천배 이상의 단위로 확대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생이별은 또 하나의 굶주림이긴 하지만 그것은 모든 것을 다 집어삼켜 버리는 굶주림이니 말이다.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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