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에는 우리가 헤어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어떤이유에서든 영지의 마음은 이미 떠났는데 무너질 나를 위해 유예기간을 주는 거라고. 
- P130

열심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영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야말로 ‘안물안궁‘의 기분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나는 네가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인 네가 자라는 내내 나와의 가정 내 이권 다툼에서 늘 교묘히 우위를 점하던 네가 나와는 점점이 거의 없어 십 분 이상 대화를 이어나가는 게 무리인 네가 나에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생각이란 걸 하든 말든, 이해를 하든가 말든가, 응원이고 나발이고 아무 관심이 없었지만, 정말 어쩌라고 싶었지만, 내 인생 하나 살기도 벅차다! 하고 외치고도 싶었지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보여준 하해와 같은 아량에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같은 표정을 짓는 것 정도는 전혀어렵지 않았다.
- P134

"고마워."
하지만 정말 고맙기도 했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나니 더욱 그했다. 곱씹을수록 단맛이 배어나는 쌀알처럼 그 마음은 점점 진해졌다. 진심이라는 건 형식에 뒤따르기도 하는 법이니까. 고마운 마음이 뒤늦게 다시 밀려왔다.
- P134

아주 어릴 때 내가 울면 할머니는 커다란 솜이불을 덮어주었다.
"그 안에서 실컷 울어라."
눈을 떠보면 어둡고 솜이불은 무거운데 그 어둠과 무게가 나를달래주었다. 
- P146

하지만 더는내 이야기가 그런 식으로 흘러가버리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에게는 할머니 중심의 서사가 나에게는 나 중심의 서사가 있다. 할머니의 서사가 발단, 전개, 위기, 절정을 거쳐 결말부근에 이르렀을 때 내 서사는 전개 비슷한 것을 지나는 중이었다. 내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할머니의 이야기에 영향을 받으면서, 할머니의 이야기를 부정하면서 전개된다.
- P147

"내가 거길 어떻게 가. 가서 뭐 먹고 살라고."
"엄마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큰이모도 있고."
"엄마가 제일 걱정이야."
- P149

 가족들을 사랑하는 건 이미 주어진 일 같은 거였는데, 그 사랑을 이어가는 일, 계속해서 사랑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무조건적인 사랑 같은 건 없으니까. 
- P450

시간이..... 멈취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당연히 시간은 내 마음 같은 건 아랑곳 않고 자기 할일을 했고 우리도 그저 우리 할일을 할 따름이었다.
- P151

다만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 병원 신세를 오래 졌고, 악착같이 사는 대신 적당히 사는 법을 배웠다고 했다. 이만큼 사는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 뭐든 나쁠 게 없다고 했다. 
- P166

고작 냉면 한 그릇을 함께 먹었을 뿐인데, 왜 이토록 내밀하고 사적인 이야기를 털어놓는지의아한 기분이 들었으나 이유를 묻진 않았다. 다만 그 시간들이순미에게 얼마간 힘겹고 고단했을 거라고 짐작했을 뿐이었다.
- P166

자신의 허기를 깨운 것이 다만 그런 것만이 아님을 만옥은 모르지 않았다. 만옥은 지난 사흘간 병원을 찾아온 사람이 아무도없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잠든 승석을 내려다볼 때면 불안한 예감이 무섭게 떠오른다는 말도, 병실 한쪽에서 정신없이 묵을 삼키는 자신의 모습이 처량하고 서글프다는 말도 참았다.
- P168

뭐든 남들보다 천천히 한다고 생각하면 돼. 아무 문제 없어요.
밥 잘 먹으면 그걸로 된 거야. 걱정할 거 없어.
그것이 순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단순하고 시시해서 싱겁게까지 여겨지는 그 말이 왜 항상 일렁이는 마음을 단번에 진정시키는지도.
- P169

좋은 일인지 아닌지도 살아봐야 알지. 좋은지 나쁜지 뭐든 당장 알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 P179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오는 동안 어쩌자고 서로의 사정을 이렇게 속속들이 알아버렸을까 생각했고, 그게 뭐든 차라리 몰랐으면 나았을 거라고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지난 시간 동안 저 낡은 집이 자신에게 선사한 좋은 일이란 고작 이런 것이고, 이제 이것마저 지킬 수 없게되었다는 것을, 이 집을 팔면서 자신이 각오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된 셈이었다.
- P180

만옥은 순미와 처음 냉면을 먹었던 그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가 아주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고, 새삼 좋았다고 생각되었다. 아니, 불행과 비극 속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여겼던 그 시간들이야말로 정말 좋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 P182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복도를 걷는 그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허물어지는 것이 다만 눈에 보이는 저 낡은 주택들만은 아닐 거라고 말이다.
- P184

집을 채우는 것은 가구와 가전, 온갖 물건들이 전부인 것 같지만 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한 사람의 시간이 더해져서 비로소 집이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면 당시 나는 누구와도 나눌 수 없고 돌이킬 수도 없는 집과 나만이 공유했던 어떤 순간들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 P186

하지만 타인의 속사정을 알게 되는 일은 "마음의 부채감" (173쪽)을남긴다. 그건 ‘마음을 쓰는 일‘이 언제나 ‘마음이 쓰이는 일‘에 뒤따르는 까닭이고, 이 ‘마음 쓰임‘은 이미 주고받은 ‘마음 씀‘을 상쇄하는 잔여물을 남기기 때문이다. 요컨대 마음 쓰임의 여러 양태인 기쁨과 슬픔과 사랑, 분노, 연민과 동정 등의 감정은 나 이외의 다른 대상으로부터 받은 어떤 영향의 결과이자, 뒤따르는 마음 씀의 원인이다.

목화멘션의 임정균 평로가의 해설
- P191

무엇보다 그것들에 마음이 쓰이고 마는 까닭이다. 만옥과 순미가 서로의 속사정을 ‘가만히 들어주었듯이 우리도 그저그 속내와 민낯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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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터보니 인문학 책도 좀 읽는 것 같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가운데 가끔은 위트 있는 농담도 할 줄 아는 그런대로 말이 통하는 상대였다. 우리는 정확한 지칭을 피하면서 연구소 꼰대들에 관한 시니컬한 농담을 나누었다. 
- P9

그에게 딱히 바라가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연구소같이 삭막한 곳에서는 작은 우정같은 것도 꽤나 소중했으므로 그와의 마주침은 내게 의미 있는일로 여겨졌다. 
- P10

우리는 별 의미 없지만 묘하게 평등한 분위기로 잡담을 나누었다. 묘하다고 한 이유는 연구소의 계급 체계가 매우 철저했기 때문이다. 나는 계약직 행정사무 보조였고, 으레 내 몫으로 남곤 하는 복사기와 물티슈와 커피 필터를 앞에 두고 종종 불가촉천민이된다는 건 이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잠겼다.
- P10

그는 적당한 무관심과 호의로 나를 대했다.
- P10

나는 왜인지 매번 그에게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리운 기분을 느꼈고, 그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그건 뭐랄까. 아무 뜻도 없는 말이지만 어쨌거나 너무 사적인 감정이었고, 일단 튀어나오기만 하면 종잡을수 없는 고백 비슷한 게 되어버릴 것 같았다. 아무튼 오다가다 만나는 사이에서 불쑥 꺼내 보이기엔 선을 넘는 주제였다. 
- P11

너무 부드러운 나머지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의 진심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겸양이 묻은 언짢음. 예의바르지만 단호한 거부. 나는 못 들은 척 넘겼지만 어쩐지 거절당한 기분으로, 어쩐지 도둑맞은 감정의 주인으로서, 그와 나의 신분 차이를 다시금 환기했다. 익숙한 일이었다. 
- P11

나를 스스럼없이 대하던 것도 나이든 여자, 아예 이성의 범주에 들지 않는 상대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쾌하진 않지만 뭔가 모든 것을 납득시키는 설명이었다. 
- P14

한때 소유했던 드넓은 영지를 바라보는 몰락한 귀족처럼 언덕길과 그너머를 훑어보았다. 인생에 별로 기대하는 바가 없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그의 것보다는 단명한 듯한 나의 젊음을 잠시 애도했다. 나의 우울과 상관없이 봄날은 아름답기만 했다. 불과 며칠 만에 계절이 변한 것이다. 
- P15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사랑이란 어떤 시기로의 지속적인 퇴행을 뜻하는지도 모른다.
- P22

 장 피에르는 완벽한 삼십칠세의 삶을 살고 있었다. 나는 장 피에르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 P23

장 피에르 같은 사람은 모든 걸다 소유하고서도 불행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야. 저런 우울감은 특권층만 가질 수 있는 거라고. 그게 자기 매력이라는 것조차 의식할 필요가 없어.
- P23

그는 소년 같은 남자였다. 자신을 소년으로 생각하는 부류의 남자였다. 그리고 우리는 더 자랄 것도 없다는 듯이 굴고 싶어하는 여자애들이었다.
- P32

그즈음 나는 연수가 장 피에르를 만나고 오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고다르를 싫어하면서 왜 장 피에르를 만나고 다니는지, 나는연수를 이해할 수 없었고, 없었으나, 또 동시에 완벽히 이해했다.
- P41

삶의결정적 순간들과 돌이킬 수 없는 잘못들도 아직은 일어나기 한참전인 그때.
- P45

한때 그가 대항했던 권위는 그 자신이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커스터마이즈되어 찬란히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 P50

명심하라. 반드시, 네가 싫어하던 그 무엇이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 P50

우리 모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각자의굴욕을 꿋꿋이 견디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 P51

우리는 동시에 키득거렸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어떤 시간은 때에 따라서 수백 년 전의 일처럼도, 혹은 불과 몇 달 전의 일처럼도 느껴졌다.
- P53

그중 가장 인상적으로 남은 것은 우연히 집어든 책들에서 어떤문장을 발견했을 때다. 아주 평범한 얼굴로 페이지 속에 숨어 있던 그 글자들이 어떤 단서를 암시하며 내게 다가왔을 때 느꼈던그 미세한 전율, 어렴풋한 존재감으로만 감지되던 미지의 의미망에 접속하던 그 찬란한 순간. 어쩌면 무심코 스쳐지나가버렸을지도 모르는 백 퍼센트의 무엇. 그런 우연들에 주저하지 않고 따라나선 것을 지금도 기쁘게 생각한다. 
- P61

어느 날 두 사람은 학생회관 옥상에 앉아 부당한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존재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하다 그 미움을 사랑으로 바꿔 특별한 목적 없이 세상을 향해 온정을 베푸는 일을 도모했다. 
- P91

그녀는사람에게 다가가 마음을 주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먼저 주고, 준만큼 되돌려받지 못해도 다시 자기의 것을 주었다. 결국 그건 자기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했다. 멀리, 크게 보면 그렇다고. 그런 말을 할 때 체의 얼굴은 느긋하면서도 단단해 보였다. 앙헬은 체보다 여러 가지 일에 능숙했지만 사람을 대하는 체의 태도에는자신이 다 헤아릴 수 없는 크고 높은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 P94

봉사고 명예고 공짜로 부려먹을 생각 하지말고 제대로 돈을 지불해요. 앙헬은 가끔 체가 아무에게나 마음을 주고 돈을 헤프게 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체의 그말을 떠올렸다.
- P95

믿음이란 상대가 자신을 해치거나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안심의 또다른 표현이라고 앙헬은 생각했다. 
- P99

다만 어떤 베품은 인과적인 타당성을 설명할 수 없듯 어떤 거부도 합당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 P107

이유를 묻고 그 답을 찾으려는 간절함만큼이나 답을 모르고 사는 힘도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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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절주절 적었지만, 그저 ‘낭만‘이라 줄이면 더 좋을 것이다. 낭만은 무형의 사랑을 일컫는다. 사랑을 구축하려는 자세. 그 자체를의미한다. 세간 사람들은 낭만을 마치 우습게 하는데, 남만을 알기 전에 사랑을 먼저 알 수는 없는 법이다. 사랑은만 아래 있으니까. 사랑이 낭만보다 뒷장에 적혔을 테니까.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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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한 해 나는 몇 가지 급진적이라 할 수 있는 변화를맞이했는데, 흔히들 사람 쉽게 변하지 않는다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사람이란 지나치리만큼 간단하게 변해버리지 않나 싶다. 
- P136

삼삼오오 모여 술기운을 곁들여서라도 애써 상기시키지 않으면 기억 속에서 영영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 가련한 옛 추억들. 해가 묵을수록 속상한 일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많은 기록을 남겨둬야 했다. 입에서 입으로 남겨도좋고, 사진도, 글도 아무렴 다 좋다. 뭐가 됐든 더 많은 추먹거리를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는 미처 몰랐는걸.
그저 성인이 되면 훨씬 더 재미난 일들이 마구 일어날 줄알았는걸.
- P159

나는 낭만을 언제나, 어디에나 있는 것이라 믿고 싶다.
다만, 그게 늘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언제나, 어디서나 무수히 다양한 형태로 우리들 일상에 녹아 있지만, 그러니만큼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으면 못 보고지나쳐 보내기 십상이다.
- P160

의학적으로 기억은 왜곡이 가능하다. 즉, 조작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지나간 일들이 아름답게만 기되는 현상을 향해 기억이 왜곡됐다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시간이 지나야 진가를 발휘하는 낭만도 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이란 그러한 설익은 낭만의 농도가 매우 높은 시기다. 그리고 나는 그 설익은 낭만이 가장 때깔 좋게 영근 때를 보내고 있는 듯하다.
- P161

버스에 올라타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까지 피곤에 절어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는 잘 몰랐던 거다. 이제막 예고에 입학한 십 대와 벌써 몇 년째 같은 버스에 올라탔고, 앞으로 몇 년이나 더 그래야 하는지 장담할 수 없는어른들 사이에는 우주만큼 큰 차이가 있다는 거.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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