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에서의 도피 - 세계적 지성 프랜시스 쉐퍼의 대표작 완전 개정판
프란시스 쉐퍼 지음, 김영재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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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복음주의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준 프랜시스 쉐퍼는 미국 복음주의 선교사이자 장로교 목사이며 강연가, 철학자로 소개된다. 오늘날 사회 병리적인 현상에 대하여 주원인을 진리는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이라고 여기는 사상에 있다고 보고 해결책은 바로 성경적 절대 기준으로 돌아가는 것 뿐임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전에는 아득히 먼 곳에 있는 지극히 거룩한 하늘의 것들을 크게 강조했으며, 또 이것을 묘사할 때는 상징을 사용했고, 자연 그 자체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퀴나스가 등장함에 따라 진정한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적 요소들이 비로소 탄생하게 되었다.

아퀴나스의 자연과 은총에 대한 견해에는 이 양자 간의 완전한 불연속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양자 간의 통일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퀴나스 시대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자연과 은총의 통일을 위한 끊임없는 논란이 있었으며, 합리성이 이 양자에 대한 어떤 설명을 해주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22쪽

 

동양 사상과 서양 사상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 둘 간의 시각차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그 이유에 대하여 두 가지로 설명한다. 그중 하나는 서양세계의 탈 기독교 현상을 들 수 있다. 성경적인 기독교인은 서양 여러 나라에서 소수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지적한다. 또한 세속주의가 팽창하고 비기독교 신비주의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국가라고 알고 있던 서양의 나라들이 복음의 불모지가 되었다는 표현은 낯설지 않다. 문화가 발달하고 편리해질수록 세속화가 가속된다는 것일까? 또 다른 하나는 서양에서 시작된 현대 세속주의 사상과 종교 사상이 전 세계 학생들에게 널리 유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속하게 보급되고 있는 현대사상은 대학교육이나 소년들이 즐겨듣는 음악과 영화를 통해 보급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때문에 저자인 프란시스 쉐퍼는 20세기를 살아가는 기독교인 자녀들이 현대 사상에 물들지 않고 보호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 이성에서의 도피를 통해 기독교가 지성인들의 욕구를 비롯한 일반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올바른 해답을 준다는 사실의 이해를 돕고자 함이라고 저술 의도를 밝히고 있다.

 

아퀴나스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의 의지는 타락하였으나 지성은 타락하지 않았다. 성경이 말하는 타락에 대한 이 불완전한 견해로 말미암아 갖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되었다. 인간의 지성이 자율적인 것이 되었다. 인간은 이제 이 한 영역에서만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이었다.

-23쪽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피할 수 없는 이 땅에서 느끼는 삶의 고뇌나 문제들이 있다. 어떤 문화나 가치관에 의해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문제들을 극복하고 이해하는 척도가 달라짐을 부인할 수 없다. 세상 풍조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또 다른 한 편에서는 그 어떤 흐름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세상의 기류를 인지했다면 그것들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프란시스 쉐퍼는 르네상스 이후 현대에 이르는 문예와 철학 사상을 쉐퍼만의 특성으로 파헤쳐 현대 사상과 현대인들의 고민, 문제들을 분석하고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설명해 준다.

 

1장 자연과 은총

자연과 은총 | 아퀴나스와 자율 | 화가와 저술가 | 은총 대 자연 |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라파엘로

 

2장 자연과 은총의 통일

자연과 은총의 통일 | 종교 개혁과 인간 | 인간의 모습 | 종교 개혁과 르네상스와 도덕 | 전인(全人)

 

3장 절망선

초기의 근대 과학 | 칸트와 루소 | 현대적 근대 과학 | 현대적 근대 도덕 | 헤겔 | 키에르케고르와 절망선

 

4장 도약

도약 | 세속적 실존주의 | 종교적 실존주의 | 신신학 | 상층부 경험 | 언어 분석과 도약

 

5장 상층부로 도약하는 예술

상층부로 도약하는 예술 | () : 후기의 하이데거 | 예술 : 앙드레 말로 | 피카소 | 번스타인 | 외설 문학(포르노그래피) | 부조리 연극

 

6장 신비주의

정신 이상 | 영화와 TV에서 보는 상층부 | 상층부의 신비 | 정의되지 않은 표상(表象), 예수

 

7장 이성과 신앙

이성과 신앙 | 성경의 독자성(獨自性) | 자신에게서부터 시작했으나 | 필요한 지식의 원천 | 어둠 속에서 도약하는 정신 | 변하는 세계 속에 있는 불변의 것

 

성경의 가르침은 다른 사상과는 전혀 다르다. 성경은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 즉 자신에게서부터 시작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를 말해 주는 유일한 종교 또는 철학 체계이다. 사실상 우리 자신을 떠나서는 문제를 다룰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눈을 통해 사물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진정한 문제가 있다. 무슨 권리로 내가 여기에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다른 종교나 철학은 그러한 권리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내가 해야 할 일, 즉 자신에게서부터 시작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를 제시한다.

우선 성경은, 태초에 만물이 인격적이고 무한하신 언제나 존재하시는 하나님에 의하여 지음 받았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만물은 근원적으로 비인격적이라기보다는 인격적이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이 자신 밖에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나는 이 자신 밖에라는 말이 20세기 사람들에게 창조를 설명하는 데에 가장 적절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을 공간적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는 신의 본질의 연장이라고 보는 범신론적 견해를 부인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그분은 언제나 존재해 온 인격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자신 밖에 만물을 창조하셨다.

-156쪽

 

이 책 이성에서의 도피 본문에서 키에르케고르의 도약을 설명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키에르케고르 그가 설명하는 신앙인의 도약, 키에르케고르이 도약이 해놓은 일이란 통일에 대한 희망을 앗아간 것이라고 설명한다. 낙관론은 비합리적이어야 한다/모든 합리성=비관론이라는 것이다.

위 두 영역을 연결할 접촉점에 대한 희망이 사라졌고. 양 영역의 침투나 상호 교류란 있을 수 없다는 완전한 이분법이 있을 뿐이라니 다음엔 어떤 연결고리를 제시할지 기대하며 이 책을 읽게 된다. 사회의 병리 현상, 지성, 이성 이들은 어떤 연결고리로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지 사뭇 기대가 큰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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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경고 - 교회여, 회개하라
존 맥아더 지음, 조계광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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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경고」 메시지를 저자는 요한계시록에 소개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 보낸 편지를 토대로 한 가지씩 언급하고 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교회가 얼마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준행하고 있는지를 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는 동기와 기회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성경상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에 소개되는 내용들은 비단 그 당시 지명된 교회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메시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에서 우리가 발견할 메시지는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처음 사랑을 버려서 예수님의 경고를 만나게 된 에베소 교회는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않고 교회의 순결을 지켰지만 처음 사랑을 버린데 대하여 책망을 받았다. 주님은 처음 사랑이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촉구하신다. 간혹 회중을 대표해서 기도하시는 분들의 기도 내용에서 접하게 되는 처음 사랑을 회복하게 해달라는 기도는 우리 각자의 행위를 성찰하게 해달라는 의미로 받곤 한다.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회개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허물게 해주는 회개는 성도 및 교회가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아직 완전히 벼랑 아래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비록 첫사랑을 버리고 영적으로 무감각해졌지만 아직은 주님 외에 다른 것에 마을을 송두리째 바치지 않았고, 세상과 타협해 완전히 부패해지지도 않았다. 죄를 뉘우치고 다시금 이전처럼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었다.

-93

 

그리스도인들은 언제 어디서라도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은 박해를 통해 순결해졌고 주님은 변함없이 충실했던 그들을 칭찬하셨다. 역경과 고난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성도의 모습을 주님께서 기뻐하셨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박해는 정화라는 효과가 있다. 위선자와 사기꾼들은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친다. 교회가 공격을 받으면 이단과 삯꾼들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불법으로 간주되면 신앙을 사고파는 자들도 자리를 정리하고 달아난다. 박해는 거짓 교사, 거짓 복음, 거짓 신앙고백을 교회에서 제거한다.

-104

 

이교주의가 만연한 서머나, 지역적 특성 때문에 생활은 물론 신앙을 지키기가 어려웠을 서머나 교회의 신자들은 가난한 정도보다 더 극한, 궁핍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신자들에게 큰 위로는 주님께서 그들의 편이 되어주신다는 것 밖에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발람의 교훈을 지켜는 사람들이 있었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할 뿐만 아니라 행음하게 한 행위로 인하여 주님께 책망을 받은 버가모 교회에게 필요한 것은 신속한 회개의 촉구이다. 세상과 타협한 버가모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는 실로 위협적이기까지 한 것을 알 수 있다. 불신 세계와 철저하게 구별되지 못했던 바가모 교회의 모습이 와는 무관한지 성찰해야 하겠다.

 

세상이 복음을 더욱 강하게 적대시할수록 죄인들에게 우호적인 교회는 계속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더 많은 타협을 시도해야 한다. 그런 교회는 그 누구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영적 예배보다는 육신의 감정을 더 강조하고, 죄를 깨우치기보다는 무작정 인정해 주며, 신학보다는 정서를 더 중시하고, 훈육보다는 즐거움에 더 큰 비중을 두며, 엄숙함보다는 경박함을 더 선호한다.

-128

 

부패한 교회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를 무엇일까? 바로 이세벨을 허용한 행위이다.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한 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 함께 먹지도 말라...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고전 5:11, 13)

 

죽은 교회, 사데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 메시지도 강력하다. 주님은 교회에 성령을 주실뿐 아니라 자신의 목자들을 통해 교회를 주권적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죽어서 생명력이 없는 사데 교회가 주님의 존재를 바로 알고 자신의 행위들을 신속히 되돌릴 뿐만 아니라 회개할 수 있길 바란다. 경건의 모양을 있으되 경건의 능력이 없는 교회, 사데 교회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바로 알고 영광 돌릴 수 있어야겠다.

 

골로새서 213절에 기록된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이것이 주님이 사데 교회를 가리켜 말씀하신 죽음이다.

-183

 

충성스러운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시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배반하지 않은 빌라델비아 교회, 바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갖추어야 할 신앙인의 자세이다. 빌라델비아 교인들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주님의 말씀에 대한 복종으로 입증된다. 충성심이 강했던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주님을 배반하지 않았으며 인내하는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한 빌라델비아 교인들처럼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도 올바른 신앙관을 확립하여 주님께 칭찬받는 사람들로 바로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님이 무엇을 원하실지를 생각한다면 오류를 범하지 않고 신앙을 지킬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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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입는 시간 - 영혼을 위한 7가지 절대 습관
켄 시게마츠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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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위한 절대 습관을 알려주는 책, 예수를 입는 시간을 통해 고갈된 삶의 에너지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희망을 얻을 수 있는 책을 만났습니다. 동기나 과정보다는 결과를 보고 달려가는 현대인들에게 이 책은 쉼 없이 달리느라 지친 삶을 쉬게 해줄 쉼표를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앞만 보고 달려야만 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쁜 삶을 살아왔습니다. 성과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위기를 만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쩌다 보면 내가 과연 누구의 것인지 나는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 것인지를 종종 잊을 때가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조바심을 내는 일도 부지기수입니다. 이 책 「예수를 입는 시간」의 저자인 켄 시마게츠는 예수님을 바로 알 수 있는 경건한 습관을 일컬어 '입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왜 하필 많은 표현 중에서 '입다'라는 단어를 선택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습관은 우리가 입는 것이다. 습관은 하루를 입는 '방식'이다. 매일 똑같은 리듬을 꾸준히 유지해야 우리 영혼이 벌거숭이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매일 같은 영혼의 리듬을 꾸준히 유지하면 우리 영혼의 옷을 영광스럽게 다시 짜 주시는 분께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
-16쪽

무언가에 내몰려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렸던 날들을 돌이켜보니 그땐 주님을 잊고 세상을 입고 살았던 시간들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열심히 노력한 수고만큼 대가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살았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늘 쫓기듯 살며 조바심을 내는 삶이 얼마나 피곤하고 고단한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쫓기는 듯한 삶에서 휴식을 찾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지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책 「예수를 입는 시간」에 소개되는 영혼을 위한 절대 습관을 한 가지씩 알아보고 삶에 적용해보고 싶어집니다. 내 삶의 주인 되신 주님을 온전히 입는 습관이야말로 우리를 쉼에 가까이 이끌어주는 지름길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큰일을 해냈을 때 분비되는 도파민을 갈구하며 이일 저 일로 바삐 뛰어다니는 삶에 익숙하다. 우리는 이와 다른 삶의 길이 있음을 자주 잊어버린다. 영적 훈련은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스티커 메모지 역할을 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에 조율시킨다. ... 우리는 이미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다. 우리는 이미하나님의 임재 안에 살고 움직이고 존재한다.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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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그리스도인 - 교만과 위선으로 똘똘 뭉친 나를 고발합니다
문성 지음 / 두란노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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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제너럴셔어먼호를 타고 조선을 찾아왔던 27세의 젊은 선교사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 선교사가 있었다. 복음을 전하려고 조선에 왔지만 단 한 번도 복음을 전해보지 못하고 조선 병사들에게 붙잡혔고 순교를 하였다고 한다. 선교사가 가지고 왔던 한문 성경이 버려져 어느 집의 벽을 도배하기에 이르렀고 그 집이 널다리골 교회가 되었다가 성도가 많아짐에 따라 그 집을 헐고 다시 세워진 교회가 바로 평양 장대현 교회라고 한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을 일으킨 바로 그 장대현 교회 말이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1907년에 불었던 성령의 바람이 우리 땅에도 뜨겁게 역사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각 교회마다 선교활동을 감당하고 있다. 이 책 벌거벗은 그리스도인에 소개된 문성 선교사는 25년 전 세계적인 부족 선교단체인 NTM에서 4년간 신학공부후 부족 선교사 훈련을 마친 후 부족 교회를 설립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부족 선교다. 말이 통하지 않는 문명과 먼 곳, 불모의 땅에서 원시림의 부족을 복음화하기 위해 헌신한 문성 · 이민아 선교사의 사역을 소개하는 책 벌거벗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라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과 달리 안일하게 살고 있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욥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문화와 전통 속에 가두었던 거룩한 하나님을 이제는 알게 되었고, 체험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관념 속에 가둔 말씀으로는 욥의 고백을 경험할 수 없다. 거듭난 성도에게만 허락하신 체험적 신앙이다. 죄인 된 우리는 긍휼로 주신 지정의(知情意)를 자신의 만족과 유익만을 위하여 사용하는 존재다. 고난의 삶 그 자체에는 은혜가 없다. 선교사의 고난의 삶, 그 속에도 은혜가 없다. 그 고난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진정한 은혜(grace)를 안다.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루시는 선은 우리의 인격을 성숙하게 만든다. 타락한 우리는 선한 감각을 잃어버렸지만 성화될수록 죄의 고통을 크게 느낀다. 십자가의 능력이며 축복이다.

-p. 32~33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찾으신다고 했다. 교회 안에서 직분을 감당하면서 혹시 본질을 흐릴 수 있는 마음가짐이나 자세가 없는지 스스로를 성찰하게 하는 계기를 허락하는 책, 벌거벗은 그리스도인이다. 질병으로 수차례의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더욱 겸손해지고 주님을 전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선교사 부부의 겸손한 성품을 본다. 주님께서 자신들을 철저하게 낮아지게 하셔서 주님 당신이 하시는 일을 증거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선교 여정을 소개하는 모습이 책 곳곳에 잘 나타나있다.

 

한 번은 부족 전쟁으로 두 명의 청년이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그러자 청년의 가족들이 얼마 전 상대 마을을 다녀온 세데오(Sedeo) 노인이 상대편 부족에게 청년의 물품을 전해 주어 그것으로 적들이 주술을 걸었다면서 노인을 죽이려 했다. 다행히 노인이 사전에 이 계획을 알아차리고 코라 마을로 도망쳐 와 10년을 피하여 살았다. 어려서부터 친한 친구 집을 다녀오곤 하던 세데오 노인이 졸지에 주술사로 지목되어 마을을 떠나 살아야 했던 것이다. 노인은 우리와 함께 지내며 복음을 듣고 구원받았고 죽기 전에 자기 마을로 가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가늠할 수 없다.

-p. 207~208

선교사역에 비전을 가지고 있는 일꾼들에게 좋은 모델을 소개하는 책, 이 책 벌거벗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침이 되고 귀감이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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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성숙인가 - 나를 바꾸는 예수의 가르침
조정민 지음 / 두란노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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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삶이 이원화가 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수없이 반복해서 스스로를 성찰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면서 하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면서 삶의 모습은 하나님이 목표가 되고 목적이 아닌 하나님을 삶의 수단으로 여기는 경우를 보며 씁쓸함을 느낍니다. 성경 말씀 그대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렇지만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는 것은 결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여길 따름이지요. 우연한 계기에 알게 된 분이 있는데 기독교인임을 알게 되었고 반가운 마음으로 인사를 건넸을 때, 그분이 그럽니다. 저보고 종교인 말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냐는 말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책 무엇이 성숙인가저자인 조정민 목사님의 표현처럼 '하나님과 상관없는 종교행위를 하면서 마치 신앙인이라 착각하는 사람'을 구분하는 의미의 말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믿음과 삶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믿음의 걸음과 삶의 현실을 어떻게 하면 하나로 연합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믿는 바대로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도인으로 간다는 것은 힘에 겨운 일입니다. 절대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믿음과 삶의 일치를 보여 주셨고 제자들도 그 일치를 따르도록 요구하십니다.

-121

 

정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면서 자꾸만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두고 맹세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으로 인해 시달리면서 자숙(自肅) 했던 요 며칠이었습니다. 상대방과 제가 믿는 하나님이 다른 것일까요? 도대체 어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인지 의아할 따름이었지요. 때문에 제가 처한 환경을 되돌아보며 만약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생각에 잠겨 무엇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인지 찾아보았습니다. 몇 주 전 설교 본문이었던 시편 73편을 읽으며 악인의 형통에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종국에 보여주실 하나님의 뜻을 기대하며 더욱 열심히 기도하자는 결단을 하고 가까스로 힘든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믿는 사람들에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하며 하나님의 눈이 항상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향한다는 말씀에 힘을 얻게 됩니다.

 

'어떻게 어른스러워집니까?

예수님의 첫 설교 자리로 돌아가

온몸이 귀가 되어 듣고 또 들으십시오.'

 

이전보다 더 성숙한 신앙인이 되고 싶다면 나를 바꾸는 예수의 가르침인 성경 말씀을 듣고 또 들으며 말씀이 내 안에서 역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에 입각하여 그동안 깊게 생각하지 못했을 수 있는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찬양이란 무엇인지.... 차근차근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에 이끌어주는 책, 바로 이 책 무엇이 성숙인가이 이끌어주리라고 생각합니다. 시끄러운 세상에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기 위해서 고민하는 제자들과 자녀들을 위해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라고.(엡 5:18)

 

 

외부의 어떤 충격이 가해져도 무너지지 않는 집이란 어떤 집입니까? 우리 인격의 집입니다. 우리 성품의 집입니다. 주님을 만난 뒤 성품이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는 집을 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소꿉장난하는 것입니다.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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