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간 과학자 - 삶과 죽음 사이에서 만난 과학의 발견들
김병민 지음 / 현암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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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몸이 불투명하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피부라는 경계 안에 담긴 내밀한 세계는 오직 나만의 것이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나는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경계가 투명해진다면, 뼈와 혈관과 세포의 반란이 타인의 눈앞에 펼쳐진다면, 우리는 어떤 기분을 느낄까. 한 세기 전 뢴트겐의 아내가 자신의 손뼈를 보며 "죽음을 보았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놀라움이상 이었을 것이다. 살아 있으면서 자신의 해골을 마주한다는 것. 그것은 미래와 현재가 중첩되는 기묘한 순간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이 뼈만 남을 것을 알지만, 그 지식은 추상적이고 멀리 있다. 하지만 X선 사진 속에서 그것은 지금, 여기, 이미 존재한다. 병을 진단받는다는 것도 비슷한 경험이 아닐까. 어제까지 멀쩡하다고 믿었던 몸 안에 이미 오래전부터 자라고 있던 무언가를 발견하는 순간. 그것은 미래의 죽음이 이미 현재 속에 도착해 있었다는 깨달음이다. 우리는 투명해지고, 취약해지고, 유한해진다. 그리고 그 투명함 속에서 역설적으로 더 많은 것을 보기 시작한다.

원자 하나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작다. 그런데 그 안에 담긴 에너지는 도시를 파괴할 수도, 생명을 구할 수도 있다. 이 모순 같은 사실이 나는 늘 신비롭다. 가장 작은 것이 가장 강력하다니. 가장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본질적이라니... 병원 침대에 누워 방사선 치료를 받는 사람은 무엇을 느낄까.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빛이 몸을 관통한다. 그 빛은 우주의 먼 곳에서 폭발한 별의 잔해에서 왔고, 지구에 떨어진 운석 속에 잠들어 있다가, 인간의 손을 거쳐 지금 이 순간 누군가의 암세포를 겨냥하고 있다. 138억 년의 시간이 이 한 순간 속에 응축되어 있다. 우리는 별의 자손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하지만 그것을 머리로만 이해할 때와, 자신의 몸을 치료하는 물질이 실제로 초신성 폭발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될 때는 전혀 다른 느낌일 것이다. 죽어가는 별이 뿌린 씨앗이 지금 죽어가는 나를 살리고 있다. 우주는 이렇게 순환한다. 죽음은 다른 생명의 재료가 되고, 파괴는 창조의 원천이 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모든 물질 은 이 우주적 순환의 산물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산다. 병원이라는 장소는, 그리고 질병이라는 경험은 어쩌면 우리를 다시 그 근원적인 연결로 돌려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우주와 분리된 개인이 아니라, 우주가 잠시 이 형태를 빌려 자신을 경험하는 방식이다.


숨을 쉰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서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하지만 들이마시는 산소가 우리를 살리는 동시에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호흡이라는 행위는 전혀 다른 의미를 띤다. 산소는 우리 세포에 에너지를 공급하지만, 동시에 그 과정에서 활성산소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세포를 공격하고, DNA를 손상시키고, 노화를 촉진한다. 우리는 살기 위해 우리를 파괴하는 것을 받아들인다. 이보다 더 완벽한 역설이 있을까. 이것은 단지 생물학적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본질에 대한 은유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동시에 우리를 죽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도, 열정을 쏟는 일도, 심지어 행복조차도 우리를 소진시킨다. 살아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태우는 일이고, 그 연소의 끝에는 재만 남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숨쉬기를 멈출 수는 없다. 산소의 독성을 알면서도 우리는 계속 호흡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완벽함이 아니라 역설 속에 존재한다. 안전하지 않고, 영원하지 않고,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 해롭기까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된다. 어쩌면 병이란 것도 이런 역설의 일부가 아닐까. 우리 몸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모순. 세포가 분열하고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은 생명의 증거인데, 그 과정이 때로 통제를 벗어나 암이 된다. 그것은 잘못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복잡한 생명이 되기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다.

인간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이름을 붙인다. 정상과 비정상, 건강과 질병, 나와 남. 그 경계선은 명확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흐릿하다. 암세포는 외부의 침입자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세포가 변형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나인가, 아닌가? 나의 몸이지만 나를 위협하는 존재. 자기이면서 동시에 타자. 이 모호함 앞에서 우리의 언어는 무력해진다. 병원에서 받는 진단명들 (1기, 2기, 양성, 악성)은 의학이 세상을 분류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치료를 위해 필요하고 유용하다. 하지만 그 분류가 자연의 실체를 완벽하게 담아낼 수는 없다. 자연은 우리의 범주보다 훨씬 복잡하고 유동적이다. 암을 '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쟁의 언어다. 그것은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으로 질병을 규정한다. 하지만 만약 암을 생태계의 일부로, 우리 몸이라는 복잡한 시스템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으로 본다면 어떨까. 그것은 여전히 다루어야 할 문제지만, 적어도 내 몸이 나를 배신했다는 느낌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 이런 관점의 전환이 실제 치료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병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태도는 달라질 것 같다. 나는 전쟁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거대한 흐름 속에 있다. 그 흐름은 때로 격렬하고 고통스럽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연의 섭리에 속해 있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한다. 하지만 때로 아는 것은 두려움이다. 자신의 몸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아는 것이 위안이 될까, 아니면 더 큰 불안을 가져올까. 한 과학자는 자신의 병을 마주하며 과학이라는 언어로 그것을 해석하기로 했다. 그것은 도피가 아니라 직면이다. 막연한 공포를 구체적인 지식으로 바꾸는 작업. 보이지 않는 적을 보이게 만드는 과정이다. X선 사진을 보는 것은 미래를 보는 것과 비슷하다. 지금은 증상이 없어도, 그 이미지는 이미 진행 중인 무언가를 보여준다. 그것을 보고 나면 우리는 더 이상 이전의 무지로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그 지식은 우리에게 선택권을 준다.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과학은 세상을 객관적으로 설명한다고 하지만, 결국 그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주관적인 인간이다. 같은 진단을 받아도 어떤 이는 절망하고 어떤 이는 싸우기로 결심한다. 지식 자체는 중립적이지만, 그것이 삶에 미치는 영향은 각자가 부여하는 의미에 달려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나는 과학자처럼 냉정하게 내 병을 분석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두려움에 휩싸일까.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복잡하다. 우리는 동시에 관찰자이면서 당사자이고, 이성적이면서 감정적이다.

병원의 기계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X선, CT, MRI)은 모두 다른 종류의 빛으로 우리 몸을 들여다본 결과다. 가시광선 너머의 스펙트럼에서 인간은 투명해진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기계가 보고, 그것을 다시 우리가 볼 수 있는 형태로 번역한다. 인간이 직접 볼 수 있는 빛은 전체 전자기파 스펙트럼의 0.0035%에 불과하다고 한다. 나머지 99% 이상의 세계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존재한다. 자외선도, 적외선도, X선도, 전파도 모두 실재하는 빛이다. 우리가 보지 못할 뿐. 이 사실을 깨달으면 겸손해진다. 우리가 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 우리의 감각이 포착하는 현실은 전체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 - 건강, 질병, 삶, 죽음 - 도 실은 우리가 볼 수 있는 좁은 범위 안에서의 해석일 뿐인지도 모른다. 현대 의학은 그 보이지 않는 영역을 조금씩 밝혀왔다. 뢴트겐이 처음 X선을 발견했을 때, 사람들은 경악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일상이 되었다. 우리는 놀라운 것에 너무 빨리 익숙해진다. 병원에 가서 CT를 찍고 MRI를 찍는 것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잊고 산다. 하지만 그 기계 안에 누워 자신의 몸이 스캔되는 순간을 상상해보면, 그것은 여전히 경이롭다. 보이지 않는 빛이 나를 통과하고, 그 반응을 측정하고, 데이터를 조합해 나의 내부를 재구성한다. 나는 그 과정에서 정보가 되고, 이미지가 되고, 해석의 대상이 된다.


우주의 원소들은 끊임없이 순환한다. 별에서 만들어진 탄소가 지구로 왔고, 식물이 되고, 동물이 되고, 인간이 되고,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들은 수십억 년의 여정을 거쳐 지금 여기 모였다가, 곧 흩어져 다른 곳으로 갈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끝이 아니라 변화다. 나라는 형태가 해체되어 다른 형태가 되는 것. 슬프지만 동시에 위안이 되는 생각이다. 나는 사라지지만 나를 이루던 것들은 계속된다. 어쩌면 수백 년 후 어떤 나무의 일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고, 수천 년 후 어떤 생명의 일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과학은 이런 순환을 정확하게 추적한다. 탄소 순환, 질소 순환, 물의 순환. 하지만 그것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당신을 이루는 원자는 영원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확실하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이 광대한 우주적 순환의 일부고, 우리 앞에 수없이 많은 존재들이 같은 길을 걸어갔고, 우리 뒤에도 수없이 많은 존재들이 걸어갈 것이다. 그 연결감 속에서 우리는 조금은 더 편안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명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그것은 필연적인 소멸을 알면서도 잠시 동안 빛나는 용기라고 한 과학자는 썼다. 이 문장이 오래 머물렀다. 우리는 처음부터 결말을 안다. 태어나는 순간 죽음도 함께 예정되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산다. 계획을 세우고, 사랑하고, 창조하고, 의미를 찾는다. 그것이 결국 무로 돌아갈 것을 알면서도. 이것은 비극일 수도 있고 영웅담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느냐는 관점의 문제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는 이 용기를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병원 침대에 누운 과학자가 자신의 병을 과학의 언어로 번역하려 한 것도 이런 용기의 한 형태가 아닐까.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알고자 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수동적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마주하려는 시도. 우리는 결국 모두 같은 운명을 향해 간다. 하지만 그 길을 가는 방식은 각자 다르다. 어떤 이는 눈을 감고 가고, 어떤 이는 눈을 뜨고 간다. 어떤 이는 저항하고, 어떤 이는 받아들인다. 어떤 것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옳고 그른 것은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나도 언젠가 그 경계에 설 때,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두려움 속에서도 호기심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고통 속에서도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을까. 끝을 앞두고도 계속 질문할 수 있을까. 답은 모르겠다. 아마도 그 순간이 와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과학이라는 렌즈로 세상을 보는 것이, 질병이라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견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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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 All Loving - 한국인은 이렇게 사랑했다. Once there was a love in Korea.
이광수 지음, 김정호 편역 / K-Classics Press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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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품이 역사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밀려날 때,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 오래전 누군가의 가슴을 뒤흔들었던 문장들이 세월의 먼지에 묻혀 더 이상 닿을 수 없는 곳에 놓여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묘한 쓸쓸함이 먼저 떠오른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절실한 사랑의 고백이 들리지 않는 언어로 적혀 있는 듯한 고요함이다. ‘유정’이라는 작품이 나에게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한때는 사람들이 서로 빌려 읽고, 신문에 연재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이야기. 그러나 시대의 상흔과 작가의 정치적 오해, 그리고 급변하는 문학의 취향이라는 파도에 밀려, 점차 책장 뒤편으로 사라져갔던 너른 감정의 서사다. 하지만 잊힌 이야기는 끝내 스스로를 되살릴 방법을 찾는다. 우리의 언어를 사랑하는 누군가, 한국 문학의 숨은 보석을 다시 불러내려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유정’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재출간’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의 원형을 다시 우리 앞에 펼쳐 놓으려는 깊은 의도의 귀환이었다.

이광수의 <유정>은 처음 읽었을 때보다 다시 읽을 때 마음을 더 오래 붙잡아두는 작품이다. 제목처럼, 이 소설의 중심에는 ‘정(情)’이 있다. 애정이나 집착이 아니라, 상대를 이해하려 애쓰는 마음, 고통조차 받아들이며 서로를 향하려는 인간의 근원적 충동이다. ‘무정’이라는 작품 뒤에 ‘유정’을 쓴 이유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이것이 작가의 선언처럼 느껴졌다. 사랑이란 결국 ‘정이 있는 존재’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뜨겁고 가장 위험한 모험이라는 선언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사랑을 말할 때 너무 빠르게 소모한다. 짧은 메시지 안에서 관계를 시작하고, 조금의 불편함만 있어도 쉽게 포기한다. 사랑이 ‘체험’의 한 품목처럼 소비되기 쉬운 시대다. 그런 시절에, 한 세기 전의 연애소설이 도리어 더 선명하게 말한다. 사랑이란, 잊히지 않는 감정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감정이다. 그래서 기록되고, 그래서 다시 읽혀야 한다. ‘유정’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곧, 사랑의 무게와 아름다움을 다시 손끝으로 만져보는 일과도 같다.

그러나 오래된 문장은 그 자체로 벽이 되기도 한다. 한 세기 전의 표현, 당시의 정서와 사회적 규범, 그리고 지금과는 다른 감정의 온도는 현대 독자에게는 낯설고 때로는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그렇기에 ‘편작(編作)’이라는 작업은 문장의 치환만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번역자이자 다리의 역할에 가깝다. 과거의 문장을 그대로 전달하면 원형의 아름다움은 남지만 독자는 멀어진다. 오늘의 언어로 바꾸면 읽기는 쉬워지지만 원작의 영혼이 희미해질 수 있다. 그 긴장된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분명히 어렵다. 그러나 이 편작본은 그 고비를 조심스레 넘어서며, 원작의 감정을 보존하는 데 성공했다. 특정 구절의 표현을 부드럽게 풀어 현대적 감각을 살리고, 문맥을 고려해 다소 고전적이던 단어들을 오늘의 감정과 맞닿게 재배열한 편집자의 작업은, 단순히 ‘읽기 쉬운’ 책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잊힌 사랑을 현재의 공기로 다시 숨 쉬게 한 것이다. 그것은 문학적 복원이며 동시에 감정의 구원이다.

이번 편집본에서 나를 가장 오래 머물게 했던 것은 양쪽 페이지를 채운 두 언어의 병렬 구성이었다. 한국어 원문과 영어 번역문의 ‘줄맞춤’은 그저 친절한 참고 기능이 아니라, 두 언어가 서로에게 빛을 비추는 놀라운 장면이었다. 문학은 본질적으로 번역될 수 없는 언어의 결이다. 그러나 번역은 또한 언어의 한계를 넘어 타인의 세계와 손을 맞잡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기도 하다. 한글 문장은 감정의 곡선을 가지고 있다. 정적인 듯 부드럽고, 직선과 원이 함께 흐르는 느낌이다. 반면 영어 문장은 명확한 구조와 리듬을 가졌다. 감정보다는 의미가 먼저 도드라진다. 이 두 언어가 나란히 놓였을 때, 언어 사이에 생기는 미세한 틈에서 새로운 감정의 울림을 듣게 된다. 단어 하나가 가진 뉘앙스의 차이, 문장의 숨결, 보이지 않는 감정의 음영까지도 서로를 비추며 더 진하게 드러난다. K-컬처로 한국 문학을 세계 독자에게 초대하기 위한 초대장이며, 영어 학습자와 한국어 학습자가 서로의 언어를 탐색하는 발견의 지도다. 한 문학 작품이 두 언어를 통해 서로 다른 하나의 감정을 만들어 내는 경험은, 국제적이기 전에 본질적으로 인간적이다.

‘유정’의 가치가 다시 조명되는 일은 단지 한 권의 소설을 재발견하는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의 문학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태도의 변화다. 한국 문학은 오랜 기간 동안 ‘세계 문학’의 변두리에 놓여 있었다. 한글의 과학성, 한국 문화의 독창성, 서사의 깊이는 인정받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이제 한국어는 더 이상 지역적 언어가 아니다. K-팝을 통해 세계가 들었고, K-드라마를 통해 감정을 공유했으며, 한국 문학의 힘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유정’의 부활은 하나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세계에 내놓을 만한 서사를 이미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고, 그 가치를 이제서야 제자리로 돌려놓기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책장을 덮는 순간, 나는 이상한 떨림을 느꼈다. 과거의 문장이 현재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현대적 감수성과 새로운 언어로 확장시킨 편집자의 의도인 것 같다. 문학이란 결국 인간의 외로움을 견디게 하는 예술이다. 사랑과 상실, 갈망과 이별, 기대와 포기가 반복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서로의 마음에 조용히 기대어 산다. ‘유정’은 바로 그 본질을 담은 작품인 것 같다. 그리고 이번 편작과 번역을 통해, 이 오래된 사랑은 다시 한 번 현재형으로 되살아나는 것 같다. 책이 단지 고전의 복원이 아니라, 한국 문학이 세계와 다시 연결되는 새로운 관문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가 말하길 바래본다, “이 사랑의 이야기, 한 세기 전 조선에서도, 한 세기 뒤 지구 반대편에서도 똑같이 가슴을 울렸다.” 그날이 온다면, ‘유정’이 다시 깨어난 의미는 충분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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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는 카피가 안 된다 - AI시대, 당신만의 진짜 경쟁력
김을호 지음 / 힘찬북스(HCbooks)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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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복사와 붙여넣기가 일상이 된 시대를 살고 있다. 코드는 복제되고, 디자인은 모방되며, 전문 지식조차 클릭 몇 번이면 학습된다. 인공지능은 이제 변호사의 판례 분석을 대신하고, 의사의 진단을 보조하며, 작가의 문장까지 생성한다. 기술 발전의 속도 앞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숫자로 측정되지 않는 영역이다. 이력서에 적을 수 없고, 알고리즘으로 분석할 수 없으며,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할 수 없는 그 무언가. 그것은 바로 한 사람이 세상을 대하는 방식, 타인과 관계 맺는 태도, 어려움 앞에서 보이는 자세다. 흥미로운 점은,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오히려 이런 인간적 요소의 가치가 부각된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같은 도구를 쓰고, 비슷한 교육을 받으며, 유사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을 때, 결국 차이를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의 내면에서 나온다.


사람을 만날 때 우리는 순간적으로 판단한다. 악수하는 방식, 눈을 마주치는 태도, 인사말의 온도. 이 모든 것이 짧은 순간에 하나의 인상을 형성한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진짜 모습은 시간이 지나면서 층층이 드러난다. 처음엔 정중했던 사람이 권력을 얻자 오만해지기도 하고, 조용했던 사람이 위기 상황에서 가장 든든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 회의실에서 열정적으로 발표하던 사람이 뒤에서는 냉소적인 말을 내뱉을 수도 있고, 평범해 보이던 동료가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다. 결국 우리가 진정으로 평가받는 것은 화려한 첫인상이 아니라, 일상에서 반복되는 작은 선택들이다. 마감일을 지키는 습관, 약속을 대하는 태도, 실수를 인정하는 용기, 다른 의견을 경청하는 자세. 이런 것들은 연출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그것이 그 사람의 진짜 얼굴이 된다.

겉으로 보이는 행동과 그 행동을 만들어내는 내면은 다르다. 친절한 말투는 연습할 수 있지만, 진심 어린 배려는 연습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예의 바른 행동은 교육받을 수 있지만,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은 교육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나무가 땅 위로 뻗은 가지만으로는 설 수 없듯이, 사람도 표면적인 행동 패턴만으로는 지속될 수 없다. 폭풍이 올 때 나무를 지탱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뿌리다. 마찬가지로 위기 상황에서 사람을 지탱하는 것은 평소에 쌓아온 내면의 단단함이다. 이것을 흔히 인성이라고 부른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도 옳은 일을 하는 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원칙을 지키는 용기, 성공보다 성장을 우선시하는 가치관. 이런 것들은 순간의 결심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반복된 선택과 경험이 켜켜이 쌓여 형성된다. 표면적인 태도만 좋은 사람은 평상시엔 멋져 보이지만, 압박이 가해지면 금방 본색이 드러난다. 반면 깊은 뿌리를 가진 사람은 평소엔 평범해 보여도, 어려운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는 힘을 발휘한다.


한 사람의 태도는 그 사람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물에 던진 돌이 파동을 만들듯, 한 사람의 자세는 주변으로 퍼져나간다. 회의실에 들어온 한 사람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전체 분위기를 바꾸기도 하고, 한 사람의 부정적인 말투가 팀 전체를 우울하게 만들기도 한다. 특히 조직에서 이런 현상은 더욱 뚜렷하다. 리더의 태도는 조직 문화를 형성하고, 선배의 자세는 후배의 기준이 된다. 책임을 회피하는 문화가 만연한 조직이 있는가 하면, 서로 돕고 성장시키는 문화가 자리 잡은 조직도 있다. 이 차이는 규정이나 제도에서 나오지 않는다. 구성원 개개인의 태도가 모여 만들어진 결과다. 흥미로운 점은, 나쁜 태도는 빠르게 전염되지만 좋은 태도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한 사람이 솔선수범하면 다른 사람도 따라 하게 된다. 한 사람이 먼저 사과하면 대화의 물꼬가 트인다. 한 사람이 긍정적으로 접근하면 팀 전체가 활기를 띤다. 결국 우리는 각자가 작은 씨앗이다. 어떤 씨앗을 뿌리느냐에 따라 주변의 풍경이 달라진다. 불평의 씨앗을 뿌릴 것인가, 격려의 씨앗을 뿌릴 것인가. 의심의 씨앗을 뿌릴 것인가, 신뢰의 씨앗을 뿌릴 것인가. 이 선택은 매일, 매 순간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리더는 직함이 아니라 영향력이다. 팀장이라는 명함을 가졌다고 리더는 아니며, 직급이 낮다고 리더가 아닌 것도 아니다. 진짜 리더는 자신의 태도로 주변에 긍정적인 변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뛰어난 리더와 평범한 관리자의 차이는 실력이 아니라 자세에 있다. 실수했을 때 변명부터 찾는가, 해결책부터 찾는가. 팀원의 성과를 자기 것으로 돌리는가, 팀원의 성장을 자랑스러워하는가.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을 떠넘기는가, 책임을 먼저 지는가. 이런 태도는 말로 가르칠 수 없다. 매뉴얼에 적을 수도 없고, 워크숍으로 전수할 수도 없다. 오직 몸소 보여주는 것만이 전달된다. 리더가 밤늦게까지 일하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리더 자신이 묵묵히 일하는 모습을 보면 팀원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리더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백 번 말하는 것보다, 리더 자신이 실패를 인정하고 배우는 모습을 한 번 보여주는 것이 훨씬 강력하다. 조직은 결국 리더를 닮아간다. 리더가 신뢰를 중시하면 조직도 신뢰를 기반으로 움직이고, 리더가 성과만 강조하면 조직도 과정을 무시하게 된다. 리더가 배움에 열려 있으면 조직도 성장 지향적이 되고, 리더가 권위적이면 조직도 수직적으로 변한다.


과거에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중요했다. 학위, 자격증, 경력, 기술. 이런 것들이 채용의 기준이었고, 승진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기술은 빠르게 학습할 수 있고, 정보는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전문성도 곧 평준화된다. 이제 조직들이 묻는 질문이 바뀌었다. "이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은가?" 능력은 있지만 협업이 안 되는 사람과, 능력은 조금 부족하지만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사람. 많은 조직이 후자를 선택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능력은 가르칠 수 있지만, 태도는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무 현장에서도 이런 변화는 분명하다. 프로젝트가 성공하는 이유는 뛰어난 한 명 때문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보완하는 팀 때문이다. 혁신이 일어나는 순간은 천재의 번뜩임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이 안전하게 공유되는 환경에서다. 결국 능력은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능력이 문을 열어주지만, 태도가 그 안에 머물게 한다. 능력이 기회를 가져오지만, 태도가 신뢰를 쌓는다. 능력이 성과를 만들지만, 태도가 관계를 만든다.

인공지능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가치는 오히려 더 분명해진다. AI는 데이터를 분석하고, 패턴을 찾고, 최적의 답을 제시한다. 하지만 AI는 공감하지 못하고, 맥락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며, 윤리적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고객이 화났을 때 필요한 것은 정확한 답변이 아니라 진심 어린 사과다. 팀원이 힘들어할 때 필요한 것은 업무 재분배가 아니라 따뜻한 위로다. 갈등이 생겼을 때 필요한 것은 합리적 중재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이런 것들은 알고리즘으로 구현할 수 없다. 매뉴얼로 정리할 수도 없고, 프로그래밍할 수도 없다. 오직 인간만이, 그것도 성숙한 태도를 가진 인간만이 해낼 수 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인간다움의 가치는 올라간다. 모두가 같은 AI 도구를 사용할 때, 차별화는 그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아니라 왜 사용하느냐, 누구를 위해 사용하느냐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런 질문에 답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그 사람의 가치관과 태도다.


우리가 진정으로 누군가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은 그 사람의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에 의미를 더하는 것이다. 전문성은 언젠가 낡을 것이다. 쌓은 지식은 업데이트될 것이다. 가진 기술은 대체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보여준 진정성, 당신이 전한 따뜻함, 당신이 실천한 원칙은 결코 낡지 않는다. 결국 우리가 쌓아야 할 것은 이력서에 적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다. 승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을 받게 하는 것이다. 성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키워야 할 것은 변하지 않는 것, 복제할 수 없는 것, 숫자로 측정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세상을 대하는 자세, 타인을 대하는 마음, 일을 대하는 태도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매일의 작은 선택이 쌓여 만들어진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도 정직한 선택, 손해를 보더라도 원칙을 지키는 용기, 성공보다 성장을 우선하는 가치관. 이런 것들이 모여 한 사람을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은 기술이 대체할 수 없다. AI가 모방할 수 없다. 누구도 복제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당신만의 유일무이한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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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튜던트 - 배움의 재발견
마이클 S. 로스 지음, 윤종은 옮김 / 소소의책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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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배우기를 멈추고 시험을 보기 시작했을까.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어느 순간부터 호기심은 점수로 환산되었고, 탐구는 정답 찾기로 축소되었으며, 성장은 등수로 측정되었다. 교실은 지식의 향연이 펼쳐지는 공간이 아니라, 누가 더 빨리, 더 정확하게 주어진 문제를 푸는지를 겨루는 경기장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정작 가장 근본적인 물음을 잊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도대체 배움이란 무엇이며, 학생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고대의 현자들은 배움을 삶 그 자체로 여겼다. 그들에게 학생이란 단순히 지식을 전달받는 그릇이 아니었다. 스승의 곁을 따라다니며 함께 길을 걸었던 이들은 말과 행동을 관찰하고,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세상을 이해하는 법을 터득해갔다. 그 시대의 배움에는 교과서도, 시험지도, 성적표도 없었다. 오직 삶의 현장에서 펼쳐지는 생생한 경험과, 그것을 스스로 해석하고 내면화하려는 노력만이 있었을 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교육의 위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배움을 제도 안에 가두면서, 본질적으로 자유롭고 역동적이어야 할 지적 성장의 과정을 경직되고 획일적인 절차로 만들어버렸다. 학생은 더 이상 스스로 묻고 답을 찾아가는 탐구자가 아니라, 정해진 커리큘럼을 소화해내야 하는 소비자가 되었다.


역사를 살펴보면, 교육 제도의 발전은 분명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과거 소수의 특권층만 누리던 학습의 기회가 대중에게 열렸고, 체계적인 지식 전달이 가능해졌다. 중세 시대 장인과 도제 사이의 개인적 관계에 의존하던 기술 전승은, 학교라는 공간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에게 전파될 수 있었다. 근대 이후 공교육의 확산은 사회적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하며, 계층 간 격차를 줄이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제도화의 이면에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도사리고 있었다. 배움을 측정하고 평가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그것을 단순화하고 정량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복잡하고 다층적인 이해의 과정은 시험 점수라는 하나의 숫자로 압축되었고, 개인의 고유한 성장 궤적은 표준화된 척도 위에서 비교 가능한 데이터로 환원되었다. 이 과정에서 교육은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렸다.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성찰과 변화의 여정이었던 배움은, 더 높은 곳에 올라가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강화된 경쟁 중심의 교육 문화는 이러한 문제를 극대화했다. 능력주의라는 이름 아래, 학생들은 끊임없이 동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상대적 우위를 확보하려 애쓴다. 협력보다는 경쟁이, 공동체적 성장보다는 개인의 성취가 강조되는 환경에서, 학생들은 타인을 함께 나아갈 동반자가 아닌 이겨야 할 경쟁자로 인식하게 된다. 이는 배움의 본질적 즐거움을 앗아가고, 학습을 고통스러운 생존 게임으로 변질시킨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치열한 경쟁을 통과한 이들조차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는 점이다. 남들보다 앞서가는 데만 급급하다 보면, 정작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무엇에 의미를 느끼는지를 들여다볼 겨를이 없다. 그렇게 학생들은 타인이 정한 기준을 좇느라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역사는 학생이 단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19세기 미국 대학에서 학생들은 자신들의 삶을 통제하려는 권위에 맹렬히 저항했다. 그들이 원한 자유가 언제나 건설적인 방향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20세기 중반 전 세계를 휩쓴 학생 운동은 더욱 명확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고, 기존 체제의 위선을 폭로하며, 대안적 삶의 방식을 모색했던 젊은이들은 단순히 강의실에서 지식을 전달받는 존재를 넘어, 사회 변화의 주체로 나섰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학생이라는 정체성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와 맥락에 따라 끊임없이 재정의되어 왔음을 말해준다. 학생들은 주어진 역할에 순응하기만 하지 않았다. 때로는 저항하고, 때로는 협상하며, 자신들만의 의미를 만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교육 기관과 학생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했지만, 바로 그 긴장이야말로 교육이 살아 숨 쉬는 역동적인 과정임을 증명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학생들은 어떤가. 과거만큼 극적인 저항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 전통적인 학업 성취 외에 다양한 관심사를 탐색하고, 진로에 대한 고정관념에 도전하며, 기성세대가 당연시했던 가치들에 질문을 던진다. 문제는 이러한 시도들이 여전히 제도의 틀 안에서 '비정상'이나 '이탈'로 간주되기 쉽다는 점이다. 진정한 교육 혁신은 이런 다양한 배움의 방식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결국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은 배움을 특정 시기, 특정 장소에 한정된 활동으로 보는 협소한 관점이다. 학생이라는 정체성은 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삶 자체가 배움의 연속이며,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이해하고, 통합하는 과정을 거친다. 직장에서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것, 인간관계에서 타인을 이해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며 자신의 관점을 수정하는 것 모두가 배움이다. 이러한 평생학습의 관점에서 보면, 학교 교육은 전체 배움의 여정에서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다. 그것도 매우 중요한 단계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지식을 주입하는 곳이 아니라, 스스로 배우는 법을 배우도록 돕는 곳이어야 한다. 호기심을 유지하고, 질문하는 습관을 기르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시도하는 용기를 키우는 것. 이것이 학교가 학생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과도한 학습량, 지나친 경쟁, 획일화된 평가는 학생들의 내적 동기를 말살하고, 배움 자체에 대한 혐오를 키운다. 많은 이들이 학교를 벗어나면 책을 멀리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시도를 꺼린다. 십여 년간의 공식 교육이 오히려 평생학습자로서의 가능성을 차단해버린 셈이다. 이보다 더 큰 교육의 실패가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교육을 꿈꿔야 할까. 먼저 평가와 서열화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학생을 줄 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각자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현하도록 돕는 것이 교육의 본질이다. 이를 위해서는 획일적인 기준 대신 다양성을 인정하고, 정답을 암기하는 능력보다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 또한 배움을 개인의 고립된 활동이 아닌 공동체적 과정으로 재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명료화하고, 다른 관점을 접하며 사고의 지평을 넓히며,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협력의 가치를 배운다. 경쟁보다 협력을, 비교보다 연대를 강조하는 교육 문화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학생 스스로 자신의 배움을 주도하도록 하는 것이다. 무엇을 배울지, 어떻게 배울지, 왜 배우는지에 대한 결정에 학생이 참여할 때, 배움은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교사는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학생의 탐구를 안내하고 지원하는 촉진자가 되어야 한다. 이는 교사의 역할을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높은 수준의 전문성과 헌신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학생이라는 정체성을 학교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온라인 학습, 프로젝트 기반 학습, 지역사회와 연계된 배움 등 다양한 형태의 학습 경험을 인정하고 장려해야 한다. 학교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배움의 장소는 아니다. 세상 전체가 교실이 될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이 잠재적 스승이 될 수 있다.


배움이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성장이다. 학생으로 산다는 것은 나이나 직업과 무관하게,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고, 끊임없이 질문하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세를 잃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 교육의 미래는 더 많은 정보를 더 빨리 전달하는 기술에 있지 않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평생 학생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문화를 만드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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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 제172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스즈키 유이 지음, 이지수 옮김 / 리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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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홍차 티백에 매달린 작은 종이 한 조각, 그곳에서 시작된 질문 하나가 한 남자의 삶 전체를 흔들기 시작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괴테가 정말 이 말을 했을까요? 아니, 더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진짜 괴테의 것이어야만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도이치 교수는 평생을 괴테와 함께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의 서재에는 괴테의 모든 문장이 정리되어 있고, 그의 머릿속에는 괴테의 사유 체계가 완벽하게 구축되어 있습니다. 그런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문장을 마주했을 때, 그것은 자신의 학문적 정체성 전체에 대한 위협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며 전혀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어쩌면 이 출처 불명의 문장이야말로 괴테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아닐까요? 자신의 사상이 원문 그대로 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넘어 변주되고, 재해석되고, 누군가의 삶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 말입니다.

모든 번역은 배신입니다. 독일어로 쓰인 문장이 일본어를 거쳐 한국어가 될 때, 원래의 뉘앙스는 필연적으로 변형됩니다. 하나의 단어를 선택한다는 것은 동시에 수십 개의 다른 가능성을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번역가는 끊임없이 선택하고, 그 선택 속에서 원문은 조금씩 변질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배신일까요? 저는 오히려 이것이 언어가 살아 숨쉬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나비가 꽃가루를 옮기며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듯, 번역은 언어를 다른 토양에 옮겨 심어 새로운 꽃을 피우게 합니다. 괴테의 독일어가 21세기 한국의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것은 정확한 번역 때문이 아니라 부정확한 번역 덕분일지도 모릅니다. 소설 속에서 도이치 교수는 요약형, 전승형, 위작형 명언을 구분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대부분의 명언은 이 모든 것이 뒤섞인 혼종입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루터의 말이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30일 만에 이 소설을 완성했다는 2001년생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언어의 소유권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괴테의 문장은 괴테의 것일까요, 아니면 그것을 읽고 감동받은 모든 사람의 것일까요? 도이치 교수가 집착했던 것은 진위 여부였지만, 정작 그 문장이 그의 가족을 한자리에 모으고, 오랫동안 대화하지 못했던 아내와 딸과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게 만들었습니다. 학문적 진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 언어가 현실에서 발휘하는 힘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언어를 빌려 말합니다. 완전히 독창적인 문장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셰익스피어도, 괴테도, 보르헤스도 모두 선배들의 언어를 재배열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재배열 속에서 새로운 의미가 탄생했고, 그 의미는 다시 누군가에게 전달되어 또 다른 형태로 변주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는 역설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요? 괴테가 실제로 모든 것을 말한 게 아니라, 괴테의 언어가 무한히 확장되고 변형되면서 결과적으로 모든 것을 포괄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소설을 읽으며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저는 정말 사유하며 책을 읽고 있었을까요? 한 문장을 붙잡고 몇 시간이고 고민해본 적이 있었을까요? 저는 소비했을 뿐, 사유하지 않았습니다. 도이치 교수와 그의 동료들이 나누는 대화는 경이롭습니다. 단 한 문장을 두고 괴테의 전 생애를 관통하며 토론합니다. 파우스트를 인용하고, 색채론을 끌어오고, 니체와 보르헤스를 경유합니다. 하나의 문장이 우주가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소설은 매우 조용합니다. 큰 사건이 없습니다. 그저 한 가족이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고, 같은 방에서 잠을 자는 일상이 펼쳐질 뿐입니다. 그런데 이 고요함 속에서 진정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이 문장을 수백 번 되뇌이며, 저는 이것이 번역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혼동은 무질서입니다. 하지만 혼연일체는 조화입니다. 사랑은 서로 다른 것들을 뒤섞어 혼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고유함 을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전체를 이루게 합니다. 마치 좋은 번역이 원문의 정신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언어로 재탄생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도이치 교수의 가족이 그랬습니다.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삶을 살던 세 사람이, 한 문장을 매개로 다시 만났습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언어를 번역하는 일입니다. 완벽하게 번역할 수는 없지만, 그 불완전한 번 역 속에서도 사랑은 전달됩니다.

"그렇게 인용만 하지 말고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게 어때?" 우리는 모두 타인의 언어를 인용하며 살아갑니다. 명언을 필사하고, SNS에 공유하고, 대화 중에 인용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내 언어가 되었을까요? 아니면 그저 빌려온 옷을 입고 있는 것일까요? 자신의 언어를 찾는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문장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괴테도, 보르헤스도, 이 소설의 작가도 모두 선배들의 언어를 빌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빌린 언어를 자신의 삶 속에서 다시 태어나게 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신의 언어'입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고 제 서재를 둘러봤습니다. 수백 권의 책들, 수천 개의 문장들. 이 중에서 정말 제 안에서 재탄생한 언어는 몇 개나 될까요? 대부분은 그저 스쳐 지나갔을 뿐, 제 삶의 일부가 되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괴테의 문장을 자신의 방식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번역은, 비록 원문과 다르더라도, 누군가에게는 원문보다 더 진실한 위로가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출처도, 진위 여부도 아닙니다. 그 언어가 당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로 태어 나는가, 그것만이 진정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번역가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서, 사랑은 모 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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