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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 All Loving - 한국인은 이렇게 사랑했다. Once there was a love in Korea.
이광수 지음, 김정호 편역 / K-Classics Press / 2025년 11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품이 역사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밀려날 때,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 오래전 누군가의 가슴을 뒤흔들었던 문장들이 세월의 먼지에 묻혀 더 이상 닿을 수 없는 곳에 놓여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묘한 쓸쓸함이 먼저 떠오른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절실한 사랑의 고백이 들리지 않는 언어로 적혀 있는 듯한 고요함이다. ‘유정’이라는 작품이 나에게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한때는 사람들이 서로 빌려 읽고, 신문에 연재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이야기. 그러나 시대의 상흔과 작가의 정치적 오해, 그리고 급변하는 문학의 취향이라는 파도에 밀려, 점차 책장 뒤편으로 사라져갔던 너른 감정의 서사다. 하지만 잊힌 이야기는 끝내 스스로를 되살릴 방법을 찾는다. 우리의 언어를 사랑하는 누군가, 한국 문학의 숨은 보석을 다시 불러내려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유정’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재출간’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의 원형을 다시 우리 앞에 펼쳐 놓으려는 깊은 의도의 귀환이었다.
이광수의 <유정>은 처음 읽었을 때보다 다시 읽을 때 마음을 더 오래 붙잡아두는 작품이다. 제목처럼, 이 소설의 중심에는 ‘정(情)’이 있다. 애정이나 집착이 아니라, 상대를 이해하려 애쓰는 마음, 고통조차 받아들이며 서로를 향하려는 인간의 근원적 충동이다. ‘무정’이라는 작품 뒤에 ‘유정’을 쓴 이유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이것이 작가의 선언처럼 느껴졌다. 사랑이란 결국 ‘정이 있는 존재’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뜨겁고 가장 위험한 모험이라는 선언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사랑을 말할 때 너무 빠르게 소모한다. 짧은 메시지 안에서 관계를 시작하고, 조금의 불편함만 있어도 쉽게 포기한다. 사랑이 ‘체험’의 한 품목처럼 소비되기 쉬운 시대다. 그런 시절에, 한 세기 전의 연애소설이 도리어 더 선명하게 말한다. 사랑이란, 잊히지 않는 감정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감정이다. 그래서 기록되고, 그래서 다시 읽혀야 한다. ‘유정’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곧, 사랑의 무게와 아름다움을 다시 손끝으로 만져보는 일과도 같다.
그러나 오래된 문장은 그 자체로 벽이 되기도 한다. 한 세기 전의 표현, 당시의 정서와 사회적 규범, 그리고 지금과는 다른 감정의 온도는 현대 독자에게는 낯설고 때로는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그렇기에 ‘편작(編作)’이라는 작업은 문장의 치환만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번역자이자 다리의 역할에 가깝다. 과거의 문장을 그대로 전달하면 원형의 아름다움은 남지만 독자는 멀어진다. 오늘의 언어로 바꾸면 읽기는 쉬워지지만 원작의 영혼이 희미해질 수 있다. 그 긴장된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분명히 어렵다. 그러나 이 편작본은 그 고비를 조심스레 넘어서며, 원작의 감정을 보존하는 데 성공했다. 특정 구절의 표현을 부드럽게 풀어 현대적 감각을 살리고, 문맥을 고려해 다소 고전적이던 단어들을 오늘의 감정과 맞닿게 재배열한 편집자의 작업은, 단순히 ‘읽기 쉬운’ 책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잊힌 사랑을 현재의 공기로 다시 숨 쉬게 한 것이다. 그것은 문학적 복원이며 동시에 감정의 구원이다.
이번 편집본에서 나를 가장 오래 머물게 했던 것은 양쪽 페이지를 채운 두 언어의 병렬 구성이었다. 한국어 원문과 영어 번역문의 ‘줄맞춤’은 그저 친절한 참고 기능이 아니라, 두 언어가 서로에게 빛을 비추는 놀라운 장면이었다. 문학은 본질적으로 번역될 수 없는 언어의 결이다. 그러나 번역은 또한 언어의 한계를 넘어 타인의 세계와 손을 맞잡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기도 하다. 한글 문장은 감정의 곡선을 가지고 있다. 정적인 듯 부드럽고, 직선과 원이 함께 흐르는 느낌이다. 반면 영어 문장은 명확한 구조와 리듬을 가졌다. 감정보다는 의미가 먼저 도드라진다. 이 두 언어가 나란히 놓였을 때, 언어 사이에 생기는 미세한 틈에서 새로운 감정의 울림을 듣게 된다. 단어 하나가 가진 뉘앙스의 차이, 문장의 숨결, 보이지 않는 감정의 음영까지도 서로를 비추며 더 진하게 드러난다. K-컬처로 한국 문학을 세계 독자에게 초대하기 위한 초대장이며, 영어 학습자와 한국어 학습자가 서로의 언어를 탐색하는 발견의 지도다. 한 문학 작품이 두 언어를 통해 서로 다른 하나의 감정을 만들어 내는 경험은, 국제적이기 전에 본질적으로 인간적이다.
‘유정’의 가치가 다시 조명되는 일은 단지 한 권의 소설을 재발견하는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의 문학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태도의 변화다. 한국 문학은 오랜 기간 동안 ‘세계 문학’의 변두리에 놓여 있었다. 한글의 과학성, 한국 문화의 독창성, 서사의 깊이는 인정받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이제 한국어는 더 이상 지역적 언어가 아니다. K-팝을 통해 세계가 들었고, K-드라마를 통해 감정을 공유했으며, 한국 문학의 힘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유정’의 부활은 하나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세계에 내놓을 만한 서사를 이미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고, 그 가치를 이제서야 제자리로 돌려놓기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책장을 덮는 순간, 나는 이상한 떨림을 느꼈다. 과거의 문장이 현재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현대적 감수성과 새로운 언어로 확장시킨 편집자의 의도인 것 같다. 문학이란 결국 인간의 외로움을 견디게 하는 예술이다. 사랑과 상실, 갈망과 이별, 기대와 포기가 반복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서로의 마음에 조용히 기대어 산다. ‘유정’은 바로 그 본질을 담은 작품인 것 같다. 그리고 이번 편작과 번역을 통해, 이 오래된 사랑은 다시 한 번 현재형으로 되살아나는 것 같다. 책이 단지 고전의 복원이 아니라, 한국 문학이 세계와 다시 연결되는 새로운 관문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가 말하길 바래본다, “이 사랑의 이야기, 한 세기 전 조선에서도, 한 세기 뒤 지구 반대편에서도 똑같이 가슴을 울렸다.” 그날이 온다면, ‘유정’이 다시 깨어난 의미는 충분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