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간 과학자 - 삶과 죽음 사이에서 만난 과학의 발견들
김병민 지음 / 현암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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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몸이 불투명하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피부라는 경계 안에 담긴 내밀한 세계는 오직 나만의 것이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나는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경계가 투명해진다면, 뼈와 혈관과 세포의 반란이 타인의 눈앞에 펼쳐진다면, 우리는 어떤 기분을 느낄까. 한 세기 전 뢴트겐의 아내가 자신의 손뼈를 보며 "죽음을 보았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놀라움이상 이었을 것이다. 살아 있으면서 자신의 해골을 마주한다는 것. 그것은 미래와 현재가 중첩되는 기묘한 순간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이 뼈만 남을 것을 알지만, 그 지식은 추상적이고 멀리 있다. 하지만 X선 사진 속에서 그것은 지금, 여기, 이미 존재한다. 병을 진단받는다는 것도 비슷한 경험이 아닐까. 어제까지 멀쩡하다고 믿었던 몸 안에 이미 오래전부터 자라고 있던 무언가를 발견하는 순간. 그것은 미래의 죽음이 이미 현재 속에 도착해 있었다는 깨달음이다. 우리는 투명해지고, 취약해지고, 유한해진다. 그리고 그 투명함 속에서 역설적으로 더 많은 것을 보기 시작한다.

원자 하나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작다. 그런데 그 안에 담긴 에너지는 도시를 파괴할 수도, 생명을 구할 수도 있다. 이 모순 같은 사실이 나는 늘 신비롭다. 가장 작은 것이 가장 강력하다니. 가장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본질적이라니... 병원 침대에 누워 방사선 치료를 받는 사람은 무엇을 느낄까.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빛이 몸을 관통한다. 그 빛은 우주의 먼 곳에서 폭발한 별의 잔해에서 왔고, 지구에 떨어진 운석 속에 잠들어 있다가, 인간의 손을 거쳐 지금 이 순간 누군가의 암세포를 겨냥하고 있다. 138억 년의 시간이 이 한 순간 속에 응축되어 있다. 우리는 별의 자손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하지만 그것을 머리로만 이해할 때와, 자신의 몸을 치료하는 물질이 실제로 초신성 폭발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될 때는 전혀 다른 느낌일 것이다. 죽어가는 별이 뿌린 씨앗이 지금 죽어가는 나를 살리고 있다. 우주는 이렇게 순환한다. 죽음은 다른 생명의 재료가 되고, 파괴는 창조의 원천이 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모든 물질 은 이 우주적 순환의 산물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산다. 병원이라는 장소는, 그리고 질병이라는 경험은 어쩌면 우리를 다시 그 근원적인 연결로 돌려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우주와 분리된 개인이 아니라, 우주가 잠시 이 형태를 빌려 자신을 경험하는 방식이다.


숨을 쉰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서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하지만 들이마시는 산소가 우리를 살리는 동시에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호흡이라는 행위는 전혀 다른 의미를 띤다. 산소는 우리 세포에 에너지를 공급하지만, 동시에 그 과정에서 활성산소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세포를 공격하고, DNA를 손상시키고, 노화를 촉진한다. 우리는 살기 위해 우리를 파괴하는 것을 받아들인다. 이보다 더 완벽한 역설이 있을까. 이것은 단지 생물학적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본질에 대한 은유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동시에 우리를 죽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도, 열정을 쏟는 일도, 심지어 행복조차도 우리를 소진시킨다. 살아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태우는 일이고, 그 연소의 끝에는 재만 남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숨쉬기를 멈출 수는 없다. 산소의 독성을 알면서도 우리는 계속 호흡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완벽함이 아니라 역설 속에 존재한다. 안전하지 않고, 영원하지 않고,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 해롭기까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된다. 어쩌면 병이란 것도 이런 역설의 일부가 아닐까. 우리 몸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모순. 세포가 분열하고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은 생명의 증거인데, 그 과정이 때로 통제를 벗어나 암이 된다. 그것은 잘못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복잡한 생명이 되기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다.

인간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이름을 붙인다. 정상과 비정상, 건강과 질병, 나와 남. 그 경계선은 명확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흐릿하다. 암세포는 외부의 침입자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세포가 변형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나인가, 아닌가? 나의 몸이지만 나를 위협하는 존재. 자기이면서 동시에 타자. 이 모호함 앞에서 우리의 언어는 무력해진다. 병원에서 받는 진단명들 (1기, 2기, 양성, 악성)은 의학이 세상을 분류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치료를 위해 필요하고 유용하다. 하지만 그 분류가 자연의 실체를 완벽하게 담아낼 수는 없다. 자연은 우리의 범주보다 훨씬 복잡하고 유동적이다. 암을 '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쟁의 언어다. 그것은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으로 질병을 규정한다. 하지만 만약 암을 생태계의 일부로, 우리 몸이라는 복잡한 시스템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으로 본다면 어떨까. 그것은 여전히 다루어야 할 문제지만, 적어도 내 몸이 나를 배신했다는 느낌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 이런 관점의 전환이 실제 치료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병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태도는 달라질 것 같다. 나는 전쟁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거대한 흐름 속에 있다. 그 흐름은 때로 격렬하고 고통스럽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연의 섭리에 속해 있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한다. 하지만 때로 아는 것은 두려움이다. 자신의 몸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아는 것이 위안이 될까, 아니면 더 큰 불안을 가져올까. 한 과학자는 자신의 병을 마주하며 과학이라는 언어로 그것을 해석하기로 했다. 그것은 도피가 아니라 직면이다. 막연한 공포를 구체적인 지식으로 바꾸는 작업. 보이지 않는 적을 보이게 만드는 과정이다. X선 사진을 보는 것은 미래를 보는 것과 비슷하다. 지금은 증상이 없어도, 그 이미지는 이미 진행 중인 무언가를 보여준다. 그것을 보고 나면 우리는 더 이상 이전의 무지로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그 지식은 우리에게 선택권을 준다.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과학은 세상을 객관적으로 설명한다고 하지만, 결국 그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주관적인 인간이다. 같은 진단을 받아도 어떤 이는 절망하고 어떤 이는 싸우기로 결심한다. 지식 자체는 중립적이지만, 그것이 삶에 미치는 영향은 각자가 부여하는 의미에 달려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나는 과학자처럼 냉정하게 내 병을 분석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두려움에 휩싸일까.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복잡하다. 우리는 동시에 관찰자이면서 당사자이고, 이성적이면서 감정적이다.

병원의 기계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X선, CT, MRI)은 모두 다른 종류의 빛으로 우리 몸을 들여다본 결과다. 가시광선 너머의 스펙트럼에서 인간은 투명해진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기계가 보고, 그것을 다시 우리가 볼 수 있는 형태로 번역한다. 인간이 직접 볼 수 있는 빛은 전체 전자기파 스펙트럼의 0.0035%에 불과하다고 한다. 나머지 99% 이상의 세계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존재한다. 자외선도, 적외선도, X선도, 전파도 모두 실재하는 빛이다. 우리가 보지 못할 뿐. 이 사실을 깨달으면 겸손해진다. 우리가 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 우리의 감각이 포착하는 현실은 전체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 - 건강, 질병, 삶, 죽음 - 도 실은 우리가 볼 수 있는 좁은 범위 안에서의 해석일 뿐인지도 모른다. 현대 의학은 그 보이지 않는 영역을 조금씩 밝혀왔다. 뢴트겐이 처음 X선을 발견했을 때, 사람들은 경악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일상이 되었다. 우리는 놀라운 것에 너무 빨리 익숙해진다. 병원에 가서 CT를 찍고 MRI를 찍는 것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잊고 산다. 하지만 그 기계 안에 누워 자신의 몸이 스캔되는 순간을 상상해보면, 그것은 여전히 경이롭다. 보이지 않는 빛이 나를 통과하고, 그 반응을 측정하고, 데이터를 조합해 나의 내부를 재구성한다. 나는 그 과정에서 정보가 되고, 이미지가 되고, 해석의 대상이 된다.


우주의 원소들은 끊임없이 순환한다. 별에서 만들어진 탄소가 지구로 왔고, 식물이 되고, 동물이 되고, 인간이 되고,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들은 수십억 년의 여정을 거쳐 지금 여기 모였다가, 곧 흩어져 다른 곳으로 갈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끝이 아니라 변화다. 나라는 형태가 해체되어 다른 형태가 되는 것. 슬프지만 동시에 위안이 되는 생각이다. 나는 사라지지만 나를 이루던 것들은 계속된다. 어쩌면 수백 년 후 어떤 나무의 일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고, 수천 년 후 어떤 생명의 일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과학은 이런 순환을 정확하게 추적한다. 탄소 순환, 질소 순환, 물의 순환. 하지만 그것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당신을 이루는 원자는 영원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확실하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이 광대한 우주적 순환의 일부고, 우리 앞에 수없이 많은 존재들이 같은 길을 걸어갔고, 우리 뒤에도 수없이 많은 존재들이 걸어갈 것이다. 그 연결감 속에서 우리는 조금은 더 편안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명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그것은 필연적인 소멸을 알면서도 잠시 동안 빛나는 용기라고 한 과학자는 썼다. 이 문장이 오래 머물렀다. 우리는 처음부터 결말을 안다. 태어나는 순간 죽음도 함께 예정되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산다. 계획을 세우고, 사랑하고, 창조하고, 의미를 찾는다. 그것이 결국 무로 돌아갈 것을 알면서도. 이것은 비극일 수도 있고 영웅담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느냐는 관점의 문제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는 이 용기를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병원 침대에 누운 과학자가 자신의 병을 과학의 언어로 번역하려 한 것도 이런 용기의 한 형태가 아닐까.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알고자 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수동적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마주하려는 시도. 우리는 결국 모두 같은 운명을 향해 간다. 하지만 그 길을 가는 방식은 각자 다르다. 어떤 이는 눈을 감고 가고, 어떤 이는 눈을 뜨고 간다. 어떤 이는 저항하고, 어떤 이는 받아들인다. 어떤 것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옳고 그른 것은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나도 언젠가 그 경계에 설 때,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두려움 속에서도 호기심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고통 속에서도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을까. 끝을 앞두고도 계속 질문할 수 있을까. 답은 모르겠다. 아마도 그 순간이 와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과학이라는 렌즈로 세상을 보는 것이, 질병이라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견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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