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쉰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서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하지만 들이마시는 산소가 우리를 살리는 동시에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호흡이라는 행위는 전혀 다른 의미를 띤다. 산소는 우리 세포에 에너지를 공급하지만, 동시에 그 과정에서 활성산소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세포를 공격하고, DNA를 손상시키고, 노화를 촉진한다. 우리는 살기 위해 우리를 파괴하는 것을 받아들인다. 이보다 더 완벽한 역설이 있을까. 이것은 단지 생물학적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본질에 대한 은유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동시에 우리를 죽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도, 열정을 쏟는 일도, 심지어 행복조차도 우리를 소진시킨다. 살아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태우는 일이고, 그 연소의 끝에는 재만 남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숨쉬기를 멈출 수는 없다. 산소의 독성을 알면서도 우리는 계속 호흡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완벽함이 아니라 역설 속에 존재한다. 안전하지 않고, 영원하지 않고,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 해롭기까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된다. 어쩌면 병이란 것도 이런 역설의 일부가 아닐까. 우리 몸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모순. 세포가 분열하고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은 생명의 증거인데, 그 과정이 때로 통제를 벗어나 암이 된다. 그것은 잘못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복잡한 생명이 되기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다.
인간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이름을 붙인다. 정상과 비정상, 건강과 질병, 나와 남. 그 경계선은 명확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흐릿하다. 암세포는 외부의 침입자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세포가 변형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나인가, 아닌가? 나의 몸이지만 나를 위협하는 존재. 자기이면서 동시에 타자. 이 모호함 앞에서 우리의 언어는 무력해진다. 병원에서 받는 진단명들 (1기, 2기, 양성, 악성)은 의학이 세상을 분류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치료를 위해 필요하고 유용하다. 하지만 그 분류가 자연의 실체를 완벽하게 담아낼 수는 없다. 자연은 우리의 범주보다 훨씬 복잡하고 유동적이다. 암을 '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쟁의 언어다. 그것은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으로 질병을 규정한다. 하지만 만약 암을 생태계의 일부로, 우리 몸이라는 복잡한 시스템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으로 본다면 어떨까. 그것은 여전히 다루어야 할 문제지만, 적어도 내 몸이 나를 배신했다는 느낌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 이런 관점의 전환이 실제 치료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병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태도는 달라질 것 같다. 나는 전쟁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거대한 흐름 속에 있다. 그 흐름은 때로 격렬하고 고통스럽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연의 섭리에 속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