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시멜로 이야기
호아킴 데 포사다.엘런 싱어 지음, 이민희 옮김 / 딥앤와이드(Deep&WIde)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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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대학 신입생 시절, 나는 《마시멜로 이야기》를 손에 들고 꽤 진지한 얼굴을 했던 것 같다. 당시 그 얇은 책은 자기계발서 코너에서 꽤 눈에 띄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표지의 통통한 마시멜로 그림은 마치 '이것만 참으면 성공한다'는 약속처럼 보였다. 읽고 나서 잠시 흥분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 눈앞의 욕구를 참을 수 있는 사람이 더 나은 미래를 얻는다는 이야기. 그것은 단순하고, 명쾌하고, 무엇보다 내가 노력만 하면 될 것 같은 기분을 주었다. 현재 유행하고 있는 뇌과학의 언어로 '왜 어떤 사람은 기다릴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한가'를 설명해 주었던 책이었다.

인간의 뇌에는 즉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뜨거운' 충동 체계와, 미래를 내다보며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차가운' 인지 체계가 있다. 마시멜로 하나를 먹지 않고 기다려야 두 개를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성공적으로 기다리는 아이들은 차가운 체계를 활성화하는 전략을 쓴다. 눈앞의 마시멜로를 '실재하지 않는 그림'처럼 여기거나, 아예 다른 생각으로 주의를 돌린다. 이것을 확장하면 인생의 성공 공식이 된다. 지금의 편안함을 참고, 미래의 보상을 위해 현재를 유보하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런데 잠깐, 무언가 이상하다. '성공'은 누가 정의하는가? 높은 시험 점수, 안정적인 직업, 사회적 인정. 이것들은 누구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목록인가?

대학 시절, 나는 꽤 오랫동안 이 자기통제의 논리를 열심히 실천했다. 하고 싶은 말을 참고, 먹고 싶은 것을 참고, 쉬고 싶을 때 참았다. 그것이 미래를 위한 합리적인 투자라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무언가가 비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욕구를 '차갑게' 재구성하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정작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르게 됐다. 참는 것이 너무 자동화되어서, 처음엔 의지였던 것이 나중엔 반사가 되어버렸다. 자제력이 자동화될수록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 같다. 이제 중년이 되어 버린 시기에 이 이야기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았다. 첢은 시절의 우리 인생에서 마실멜로를 먹지 않는 것이 최선일까? 마시멜로를 먹지 않는 능력이 결국 마시멜로를 두려워하는 것으로 귀결된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거식증 환자는 마시멜로 실험의 가장 완벽한 '성공자'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통제의 승리라 부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학때 배웠던 심리학 이론에서 불안정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만족 지연 능력이 낮다는 사실을 배웠던 것 같다. 두 번째 마시멜로가 정말 올지 확신할 수 없는 환경에서 지금 눈앞의 것을 먹는 것은 오히려 합리적인 선택이다. 구조적으로 불안정한 환경에 놓인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환경의 변화인지, 아니면 그 환경을 참고 버티는 내면의 힘인지. 물론 자기조절 능력이 아이들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가르치는 일이 구조적 불평등에 대한 더 근본적인 질문을 비켜가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충동적인' 행동을 억누르고 '원시적인' 욕구를 통제하라는 메시지가 어떤 계층의 아이들에게 주로 향하는지를 살펴보면, 그 메시지는 순수한 도움이 아니라 순응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 같다.

책은 마시멜로처럼 달콤하다. '뇌는 바뀔 수 있고, 당신도 바뀔 수 있고, 노력하면 된다'는 메시지는 현대인이 가장 먹고 싶어 하는 종류의 이야기다. 나 역시 대학 때 그 이야기를 맛있게 먹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내가 그토록 그 이야기에 끌렸던 것은 어쩌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참으면 된다'는 공식은 불안을 달래주는 주문이었다. 시월이 지난 지금, 그 의미를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 과도한 자제력도 문제다. 너무 통제된 삶은 너무 통제되지 않은 삶만큼이나 공허할 수 있다.

나는 이제 마시멜로를 보면 예전처럼 참아야 한다는 생각보다, 먹고 싶은지 아닌지를 먼저 묻게 됐다. 욕구를 프레임 밖으로 밀어내기 전에, 그 욕구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들어보려 한다. 물론 그렇다고 눈앞의 모든 충동을 따르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제력이라는 이름 아래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마시멜로를 그림으로 만들어버리기 전에, 그것이 진짜 마시멜로임을 먼저 인정하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책을 다시 읽고 나서 남긴 가장 작은, 그러나 가장 실질적인 메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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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추세추종전략인가 - 월스트리트 최고의 수익률, 최적의 투자전략
마이클 코벨 지음, 박준형 옮김 / 이레미디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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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종종 미래를 알고 싶어 한다. 특히 돈이 걸린 문제에서는 더욱 그렇다. 주식시장에 뛰어든 사람들 대부분은 '다음 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를 맞히려 애쓴다. 뉴스를 분석하고,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기업의 재무제표를 뒤지며, 경제 지표를 연구한다. 하지만 추세 추종자들은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진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 차이는 사소해 보이지만 많은 것을 이야기 한다. 예측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행위다. 우리는 자신이 옳다고 믿고 싶어 하고, 그 믿음을 확증하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수용한다. 반면 가격은 냉정하고 객관적인 현실이다. 가격은 모든 시장 참여자 들의 집단적 판단을 반영하며, 그 자체로 완전한 정보다. 추세 추종의 핵심은 시장의 움직임에 맞서 싸우지 않고,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금융 시장에는 너무나 많은 소음이 존재한다. 매일 쏟아지는 경제 뉴스, 애널리스트들의 상반된 전망, 정치적 사건들, 중앙은행의 성명, 기업 실적 발표... 이 모든 정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추세 추종자들의 답은 명쾌하다. 무시하라. 가격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누군가가 어떤 주식을 산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그 가격에 그 주식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는 의미다. 누군가가 판다면, 그 반대다. 수백만 명의 시장 참여자들이 각자의 정보와 판단을 가지고 매 순간 거래하고, 그 결과가 가격으로 나타난다. 당신이 읽은 뉴스 기사, 당신이 생각하는 기업의 전망, 당신의 경제 분석... 이 모든 것은 이미 가격에 반영되어 있다. 이런 관점은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우리는 똑똑하고 싶어 하고, 우리의 분석과 통찰이 가치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시장은 개인의 자존심을 신경 쓰지 않는다. 시장은 항상 옳고, 가격은 그 옳음의 표현이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거래는 훨씬 단순해진다.

인간의 감정은 거래의 가장 큰 적이다. 우리는 이익을 볼 때 너무 일찍 매도하고 싶어하고, 손실을 볼 때는 회복을 기대하며 너무 오래 붙잡고 있다. 우리는 연속으로 손실을 보면 두려워지고, 연속으로 이익을 보면 과신하게 된다. 우리는 패턴 을 찾고 싶어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하며,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싶어 한다. 체계적인 거래 시스템은 이 모든 감정적 함정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언제 진입할지, 얼마나 투자할지, 언제 손절할지, 언제 이익을 실현할지... 이 모든 결정이 미리 정해진 규칙에 따라 이루어진다. 규칙이 신호를 보내면 실행한다. 규칙이 멈추라고 하면 멈춘다. 여기에 해석의 여지는 없다. 이것은 로봇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약점을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도구를 사용하라는 것이다. 뛰어난 의사들이 체크리스트를 사용하는 것처럼, 훌륭한 파일럿들이 매뉴얼을 따르는 것처럼, 성공적 인 트레이더들은 시스템을 신뢰한다. 창의성과 직관이 필요한 영역이 있지만, 실시간 거래 결정은 그런 영역이 아니다.


투자의 세계에서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격언이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다각화다. 추세 추종자들은 단일 시장이나 단일 자산군에 얽매이지 않는다. 주식, 채권, 통화, 원자재... 가격 데이터가 있는 모든 시장이 그들의 놀이터 다. 이 접근법의 아름다움은 기회의 확대에 있다. 주식 시장이 횡보하고 있을 때 원자재 시장에서 강한 추세가 나타날 수 있다. 달러가 약세일 때 금이 강세를 보일 수 있다. 특정 국가의 경제가 침체일 때 다른 나라는 호황일 수 있다. 모든 시장을 거래함으로써, 추세 추종자들은 항상 어딘가에서 형성되고 있는 파도를 찾을 수 있다. 동일한 규칙을 모든 시장에 적용한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것은 시장의 본질적 특성보다 가격 움직임의 보편적 패턴을 믿는다는 의미다. 밀 선물이든 영국 파운드든 테슬라 주식이든, 추세는 추세다. 이런 보편성은 전략을 단순하게 만들고, 확장 가능하게 만든다.

화려한 수익률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하지만 진정한 성공의 비밀은 손실 관리에 있다. 추세 추종의 현실은 이렇다: 대부분의 거래는 작은 손실로 끝난다. 어쩌면 60~70%의 거래가 손실일 수 있다. 하지만 나머지 30~40%의 승리가 전체 손실을 메우고도 남을 만큼 크다. 이 통계는 역설적으로 들린다. 어떻게 대부분을 틀리면서도 돈을 벌 수 있을까? 열쇠는 비대핑성에 있다. 작게 잃고 크게 따는 것. 각 거래에서 위험한 금액을 제한하고, 추세가 발전할 때는 포지션을 유지하며 이익이 커지도록 놔두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본능과 정반대다. 우리는 이기는 것을 좋아하고, 옳다는 느낌을 즐긴다. 70% 를 틀린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견디기 힘들다. 하지만 시장은 정확성에 보상하지 않는다. 시장은 수익성에 보상한다. 열 번 옳아서 소소한 이익을 얻는 것보다, 아홉 번 틀리고 한 번 크게 맞추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손실을 빠르게 인정하고 다음 으로 넘어가는 능력이 핵심이다. 평균값을 낮추려고 추가 매수하지 않는다. 반등을 기다리며 희망을 품지 않는다. 시장이 당신이 틀렸다고 말하면, 귀 기울이고 나온다. 자존심은 비싸다. 때로는 인정하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다.


시장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사람들은 무리를 짓는다. 공포와 탐욕의 싸이클이 반복되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같은 타이밍에 같은 실수를 한다. 그들은 시장이 한참 올랐을 때 뛰어들고, 바닥에서 공포에 질려 팔아치운다. 추세 추종자들은 이 군중심리를 이용한다. 하지만 단순한 역발상주의자는 아니다. 그들은 무조건 군중의 반대로 가지 않는다. 오히려 군중 이 만들어낸 모멘텀을 활용한다. 시장이 상승 추세에 있을 때, 그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사고 있다는 의미다. 추세 추종자 는 이 흐름에 합류하되, 언제 빠져나올지를 미리 계획한다. 진정한 독립적 사고는 컨센서스를 의식하지 않는 데 있다. 전문가들이 뭐라고 하든, 언론이 무슨 헤드라인을 뽑든, 가격이 하는 이야기만 듣는다. 이것은 오만이 아니라 겸손이다. 자신이 시장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겸손, 시장의 집단적 지혜를 인정하는 겸손이다.


추세 추종은 빠른 부자가 되는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꾸준히, 체계적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부를 축적하는 방법이다. 어떤 해에는 큰 수익을 낼 것이고, 어떤 해에는 횡보하거나 손실을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여러 시장 사이클을 거치며, 시스템 을 고수한 사람들은 복리의 마법을 경험한다. 이것은 신념의 문제이기도 하다. 연속된 손실 기간 동안 시스템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돈을 벌 때 당신은 잃고 있다면, 바꾸고 싶은 유혹이 클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 진정한 테스트다. 가장 어두운 순간에 시스템을 믿을 수 있는가? 역사는 이 인내가 보상받았음을 보여준다. 수십 년간 추세 추종으로 성공한 트레이더들은 시스템을 바꾸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시장의 본질 즉,비효율성, 모멘텀, 군중심리 등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했다. 도구는 진화할 수 있지만, 원칙은 영원하다. 추세 추종은 거래 전략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불확실성을 다루는 철학이며, 겸손과 규율의 실천이고, 장기적 사고의 구현이다. 시장의 진실은 단순하다. 가격은 움직이고, 추세는 형성되며, 그 파도를 탈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 기회는 항상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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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견하는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 법
챠오쟈 지음, 이에스더 옮김 / 알토북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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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부터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오늘을 나로 살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 것인가. 이 질문은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우리의 하루는 이 작은 선택들의 연속이다. 출근길에 만난 동료의 무심한 한마디, 회의 시간에 무시당한 것 같은 느낌, SNS에서 본 누군가의 화려한 일상.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흔든다. 문제는 우리가 그 흔들림 앞에서 너무 쉽게 무너진다는 것이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을까'라는 설렘보다 '오늘은 또 무슨 말을 들을까'라는 불안이 먼저 찾아온다면, 우리는 이미 우리 삶의 주인이 아닌 것인지도 모른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보이지 않는 저울 위에 매일 아침 자신을 올려놓고, 그 눈금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질문은 우리는 왜 이렇게 쉽게 흔들리는가?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흔들리지 않는 삶이란 강철 같은 마음을 가지고 모든 감정을 차단하며 사는 것일까, 아니면 흔들림을 인정하면서도 그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일까. 이 글은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완벽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도 나를 잃지 않고 살아 가는 방법을 함께 모색하는 시간이다.


우리가 쉽게 흔들리는 이유는 감정을 다루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강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한다. 슬퍼하지 말고, 화내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성숙의 증거라고 착각한다. 눈물을 삼키고, 분노를 감추고, 외로움을 부정하는 것이 어른이 되는 길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억눌린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수면 아래 가라앉은 얼음덩어리처럼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침전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터져 나온다. 사소한 일에 과도하게 반응하거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엉뚱하게 화를 내거나, 아무 이유 없이 무기력에 빠지는 순간들. 이 모든 것은 억눌린 감정이 보내는 신호다. 진짜 문제는 감정 자체가 아니라, 감정을 '틀렸다'고 판단하는 우리의 태도다. '나만 이상한 건가,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이 정도 가지고 왜 이러지'라는 자책은 감정을 더 깊은 곳으로 밀어 넣을 뿐이다. 감정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존재할 뿐이다.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한 첫걸음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흔들림을 인정하는 것이다. '지금 나는 화가 났구나, '나는 외로움을 느끼고 있어, '나는 인정받고 싶었던 거야'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것. 그 순간, 감정은 나를 압도하는 폭풍이 아니라 내가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감정과 나 사이에 작은 공간이 생기고, 그 공간 속에서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얻게 된다. 감정을 다룬다는 것은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파도를 피할 수 없다면, 파도를 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서핑을 하는 사람들은 파도와 싸우지 않는다. 파도의 리듬을 읽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기되, 중심은 잃지 않는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사랑을 '하나가 되는 것'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진정한 친밀함은 역설적이게도 '너와 나'를 분명히 구분하는 데서 시작된다. 누군가와 가까워질수록 경계가 흐려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문제는 그 흐려짐이 나 자신을 지우는 것으로 이어 질 때다. '이 사람을 잃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공포일 수 있다. '이 사람 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보다 우선한다면, 관계는 이미 균형을 잃은 것이다. 상대의 감정이 곧 나의 책임이 되고, 상대의 기분이 곧 나의 가치가 되는 순간, 우리는 관계 속에서 자신을 잃기 시작한다. 건강한 관계는 두 개의 온전한 개인이 만나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다. 내가 나로서 온전할 때, 비로소 상대에게도 온전한 사랑을 줄 수 있다. 자신을 잃고 주는 사랑은 언젠가 원망으로 변한다. '나는 이렇게까지 했는데'라는 말 속에는 이미 균열이 시작되어 있다. 그리고 때로는 관계를 끝낼 용기도 필요하다. 나를 자주 불행하게 만드는 관계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가? 우리는 관계가 끝 나는 것을 실패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때로는 관계를 끝내는 것이 나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일 수 있다. 상대가 나쁜 사람 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우리가 서로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관계를 끝낸다는 것은 상대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로서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선택하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포장한다. SNS에 올리는 사진, 직장에서 보여주는 모습, 가족 앞에서의 태도. 각 상황에 맞는 '나'를 연기한다. 이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 콘셉트를 진짜 나라고 착각하는 순간이다. '나는 항상 긍정적인 사람이야', '나는 강한 사람이야, '나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라는 자기규정은 때로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된다. 그런 이미지에 맞지 않는 감정이나 생각이 들 때, 우리는 그것을 부정하거나 억압한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의 이미 지로 규정될 수 없다. 우리 안에는 선함과 이기심이, 용기와 두려움이, 사랑과 증오가 공존한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면을 인정하는 일이다. 때로 약한 모습을 보여도 괜찮고, 때로 이기적일 수도 있으며, 때로 혼란스러워도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 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는 첫걸음이다. 진짜 나를 찾는다는 것은 완벽한 자아상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고 모순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나가 다를 수 있고, 그것이 잘못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 진짜 나는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선택하고 경험하면서 만들어지는 과정 그 자체다. 완성된 자아를 찾으려 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고 생각하고 원하는 것에 솔직해지는 것. 그 솔직함이 쌓여 비로소 나다운 삶의 윤곽이 드러난다.

우리는 결과로 평가받는 세상에 산다. 몇 등을 했는지, 얼마를 버는지, 어떤 직함을 가졌는지. 이런 외적 지표들이 그 사람 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불안하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강박, 뒤처지면 안 된다는 조급함이다. 하지만 삶은 정직하지 않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가 많고,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할 때도 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결과만으로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다. 부정한 방법을 쓰지 않았는지, 누군가를 짓밟지 않았는지, 내 원칙을 지켰는지. 세상은 끊임없 이 비교를 부추긴다. 누구는 벌써 승진했고, 누구는 결혼했고, 누구는 집을 샀다. 하지만 각자의 인생은 서로 다른 출발선 에서 다른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여정이다. 누군가의 성공이 나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으며, 내가 선택한 길이 틀렸다는 증거 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선택한 길을 어떤 태도로 걸어왔는지다. 남의 기준에 맞춰 억지로 달려온 길인지, 아니면 내 가 진정으로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속도가 느려도, 때로 멈춰 서기도 했지만, 그것이 내 선택이었다면 그것만 으로 충분하다. 참견하는 세상에서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외부의 소리를 차단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소리들을 들으면서도, 무엇이 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조언이고 무엇이 그저 잡음인지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내 안에 명확한 기준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외부의 목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필요한 것만 선택할 수 있다. 그 기준은 하루아침에 세워지지 않는다. 수많은 실패와 후회, 상처와 회복의 과정을 통해 천천히 만들어진다. 누군가의 조언을 따랐다 가 후회하기도 하고, 내 고집을 부렸다가 낭패를 보기도 하면서, 우리는 조금씩 '나다움'의 윤곽을 그려나간다. 그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그것만이 진짜 나를 찾는 유일한 방법이다.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목표를 향한 열망이다. 우리는 살아있는 한 흔들릴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말에, 예상치 못한 사건에, 내 안의 감정에. 그 흔들림은 약함이 아니라 살아있다는 증거다. 진짜 목표는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는 것이다. 감정의 파도가 밀려왔다가 빠져나갈 때까지 버티는 법을 배우 는 것이다. 그것은 감정을 억압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거기에 완전히 삼켜지지 않는 균형감이다. 완벽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오히려 흔들릴 때마다 자신을 관찰하고, 왜 흔들렸는지 이해하고, 그 속에서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흔들렸다고 해서 실패한 것이 아니다. 흔들림을 느끼고, 그것을 인정하고, 다시 중심을 찾아가는 그 과정 자체가 성장이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좀 더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흔들릴 때마다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때로 실수해도 괜찮으며, 가끔 무너져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그것도 빨리 일어설 필요는 없다. 넘어진 자리에서 잠시 쉬었다가, 숨을 고르고, 준비가 되었을 때 천천히 일어서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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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어떻게 인간을 바꾸는가 - 뇌를 설계하고 사고를 확장하는 다중언어의 놀라운 힘
비오리카 마리안 지음, 신견식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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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최근 몇 년간 다중언어 사용에 대한 논쟁이 격화되고 있다. 신경과학 연구와 인지 연구들은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인간의 뇌를 변화시킨다고 주장하며 이 논쟁에 불을 지폈다. 비오리카마리안은 과학적 증거를 통해 다중언어 구사자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포괄적인 시도를 보여준다. 그녀는 다중언어 구사자들이 향상된 인지 능력, 지연된 치매 발병, 그리고 우 수한 실행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중언어를 기반으로 한 논지가 흥미롭다.

마리안의 핵심 논지는 그녀가 "병렬 활성화"라고 부르는 것에 기반한다. 이는 다중언어 뇌가 알고 있는 모든 언어에 대한 동시적 접근을 유지하며, 끊임없이 작동하는 인지 시스템을 만들어 전체적인 정신 기능을 향상시킨다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언어 전환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에 도전하며, 다중언어 뇌가 "병렬 처리 초유기체"로 작동한다고 제안한다. 만약 여러 언어가 영구적으로 활성화되어 있다면, 뇌는 경쟁하는 언어 정보를 관리하기 위한 우수한 메커니즘을 발달시켜야 하 며, 이론적으로 향상된 실행 기능, 창의성, 그리고 인지적 유연성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언어와 사고 사이의 관계는 마리안이 제안하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지만, 여전히 매혹적이고 탐구할 가치가 있는 것 같다. 그녀가 제공하는 예시들, 예를 들어 스페인어가 안쪽 모퉁이(rincon)와 바깥쪽 모퉁이(esquina)를 구별하는 별개의 단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 흥미롭다.. 언어들은 현실을 다르게 분할하며, 잠재적으로 화자들이 특정 구별에 주목하고 기억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는 것이다.

언어가 사고를 형성한다고 제안하는 사피어-워프 가설은 수십 년간 논쟁되어 왔으며, 미묘한 결론들이 나타나고 있다. 언어는 인지와 지각의 특정 측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그것들을 완전히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중 언어를 사용하는 개인들은 여러 범주적 틀에 접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것이 자동적으로 보편적 인지적 우월성으로 전환되지는 않는다. 여러 언어 시스템을 넘나들 때, 필연적으로 다른 문화적 틀, 관용적 표현, 그리고 경험을 조직하는 방식과 관여한다. 이러한 노출은 일종의 정신적 민첩성을 배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중언어 뇌가 구조적으로 우월해서가 아니라, 언어 세계 사이를 항해하는 실천이 특정 적응 기술을 개발하기 때문이다. 제2언어로 더 합리적인 결정을 내린다는 다중언어의 효과는 언어와 감정 사이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주제인 것 같다. 학습된 언어의 감소된 정서적 공명은 심리적 거리를 만들 수 있으며, 잠재적으로 의사결정에 대한 즉각적인 감정적 반응의 영향을 줄일 수 있다. 이 현상은 언어 선택이 도덕적 추론, 재정적 결정, 그리고 위험 평가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이해하는 데 실질적인 의미를 전달해 준다.

개인적 인지를 넘어서 언어는 강력한 사회적·정치적 도구로 기능한다. 정부와 공인들이 인식을 형성하기 위해 언어를 조작하는 방식에 대해 마리안은 본질적인 진실을 강조한다. 언어에 대한 통제는 사고에 대한 통제다. 절대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프레이밍, 강조, 그리고 아이디어의 접근성 측면에서. 단어의 제거가 특정 사고를 표현 불가능하게 만드는 오웰의 Newspeak 개념은 정치적 담론, 광고, 그리고 미디어에서 끊임없이 발생한다. 언어는 정체성과 깊이 얽혀 있으며, 여러 언어 공동체를 항해하는 개인들은 종종 단일 언어 사용자들이 겪지 않을 수도 있는 일종의 심리적 복잡성을 경험한다. 이것은 유리하지도 불리하지도 않다. 또한 다중언어 사용에 관한 교육 정책은 사회적 가치와 권력 구조를 드러낸다.

어떤 언어가 가치 있게 여겨지고, 어떤 언어가 주변화되며, 누가 다중언어 교육에 접근할 수 있는가는 중립적인 질문이 아니라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힘의 반영이다. 미국 국무부의 언어 난이도 분류(스페인어를 카테고리 I, 아랍어를 카테고리 IV 로)는 본질적인 언어적 복잡성이 아니라 영어 구조로부터의 거리를 반영하고 있다. 영어를 참조점으로 중심화하고 암묵적으로 영어권 관점을 정상화하는 틀인 것이다. 언어의 힘은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에게 측정 가능한 우월성을 부여하는 데 있지 않고, 경험을 형성하고,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며, 다양한 인간 공동체를 가로질러 의미를 구축하는 능력에 있다. 마리안은 다중언어 사용의 인지적,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 주목함으로써 새로운 접근 방법을 보여준다. 각 언어는 경험에 대한 특정한 렌즈를 제공하며, 여러 렌즈에 접근할 수 있을 만큼 운이 좋은 사람들은 우월성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을 얻는다. 언어의 힘은 그것이 우리를 무엇으로 만드는가에 있지 않고, 그것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게 하는가에 있다. 다른 사람들과 연결하고, 우리 자신을 표현하며, 복잡한 세계에서 의미를 만드는 것. 그 힘은 과학적 검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언어적 경계를 가로지르는 모 든 대화, 번역을 거부하는 모든 시, 그리고 가정과 학교의 다양한 언어 사이를 항해하는 모든 아이에게서 명백하다. 다중 언어의 다름을 경험하고, 그 차이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가치있는 일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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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시작하면 잠들 수 없는 클래식 - 24명의 대표 작곡가와 함께 떠나는 유쾌한 클래식 여행
음플릭스 지음 / 빅피시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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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새벽 세 시, 잠이 오지 않아 무심코 켠 음악 앱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이 흘러나왔다. 귀가 들리지 않는 노작곡가가 관객석을 등진 채 서 있던 1824년의 그 밤이, 200년의 시간을 건너 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누군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겨 돌려세우기 전까지 그는 몰랐을 것이다. 자신이 만든 소리가 극장을 얼마나 뜨겁게 달구고 있는지를. 들을 수 없는 세계에 서 들려주기 위해 써 내려간 음표들. 그 역설 앞에서 나는 이어폰을 벗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이 만든 음악을 온전히 듣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경건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는 건 한 인간의 삶을 엿보는 일이고, 그가 살았던 시대의 공기를 들이마시는 일이며, 때로는 그가 견뎌낸 고통과 환희를 함께 경험하는 일이다. 하이든의 머리가 145년 동안 유랑했다는 기괴한 일화는 그저 웃고 넘길 이야기가 아니다. 천재의 뇌를 해부하고 싶어 했던 19세기 골상 학의 광기, 예술가를 신격화하면서도 동시에 그를 표본으로 소유하려 했던 당대의 모순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생상스가 자신의 가장 유명한 곡 '동물의 사육제'를 생전에 공개하지 말라고 유언처럼 남긴 이야기를 읽으며 웃음이 났다. 진지한 대작곡가로 기억되고 싶었던 그는 자신이 농담으로 쓴 경쾌한 음악이 자신의 명성을 갉아먹을까 두려워했다. 하지만 역사는 잔인할 만큼 정직해서, 사람들은 그의 장엄한 교향곡보다 백조의 우아한 선율을 더 사랑했다. 예술가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작품이 세상에 나간 뒤의 운명일 것이다. 바그너처럼 반역자이자 도망자, 심지어 빚쟁이였던 인물이 음악사의 거장으로 기억된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우리는 종종 위대한 예술은 고결한 인격에서 나온다고 착각하지만, 역사는 그 환상을 가차 없이 깨뜨린다. 모차르트는 편지에 똥 이야기를 즐겨 썼고, 비발디는 미사를 소홀히 하며 바이올린에 빠져 살았으며, 베토벤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도 누군가를 숨겨둔 채 사랑했다. 그들의 삶은 완벽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 탄생한 음악은 시간을 초월한 완벽함을 지녔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굶주림에 지친 연주자들이 쓰러지면서도 악기를 놓지 않았던 그 초연의 현장, 정부는 그것을 체제의 승리로 포장했지만, 작곡가 본인은 그 곡이 나치뿐 아니라 모든 독재와 억압을 향한 진혼곡이었다고 고백했다. 음악은 때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대신 말해주고, 침묵으로만 전달될 수 있는 진실을 소리로 번역한다. 스탈린의 공포정치 아래서 쇼스타코비치가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저항은 음표 사이에 숨겨놓은 암호 같은 것이었 을지도 모른다.


중세의 귀도 다레초가'도레미'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음악의 민주화를 의미한다. 그 이전까지 음악은 소수의 전유물이었다. 기보법이 없던 시대, 음악은 오직 기억과 구전으로만 전승됐고, 그것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도레미파솔라시도'라는 체계가 만들어지면서 음악은 비로소 기록될 수 있었고, 기록된 것은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르네상스가 인간을 노래하기 시작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음악이 신의 것에서 인간의 것으로 내려온 순간이었다. 우리는 시각예술의 거장들은 기억하면서도 청각예술의 선구자들은 쉽게 잊는다. 하지만 그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눈으로 본 것만이 아니라 귀로 들었던 것도 함께 복원해야 한다. 다빈치가 붓을 들 때 배 경에 흐르던 음악,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을 그릴 때 들렸을 미사곡, 팔레스트리나가 교황청의 음악 금지령을 무릅쓰고 지켜낸 교회음악의 전통. 그것들은 단지 장식이 아니라 시대정신 그 자체였다.


바로크 시대가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음악이 '감정을 흔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 이전의 음악이 신을 찬양하고 질서를 구현하는 데 집중했다면, 바로크는 인간의 내면을 요동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헨델이 죽음의 문턱에서 완성한 ‘메시아'는 그 자체로 부활의 은유였고, 바흐가 남긴 방대한 작품들은 고기 포장지로 쓰일 뻔한 운명을 겨우 피해 우리에게 전해졌다. 지금은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그가 죽은 직후 그의 음악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치부됐다. 위대함은 때로 한참 뒤에야 발견된다. 고전주의 시대로 접어들며 음악은 이성과 감성의 균형을 찾기 시작했다. 하이든의 교향곡들 은 정교한 건축물처럼 치밀했고, 모차르트는 천재적 감각으로 형식과 자유를 완벽히 결합시켰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음악만큼 조화롭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편지에 천박한 농담을 쓰며 웃었고, 하이든의 머리는 도둑맞아 유럽을 떠돌았다. 예술가의 작품과 삶 사이의 괴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완벽한 균형을 작품 안에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의 삶이 그만큼 불균형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슈베르트가 짧은 생애 동안 600곡이 넘는 가곡을 썼다는 건 하나의 강박에 가깝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쇼팽이 폴란드의 영혼을 피아노로 속삭였고, 리스트가 클래식 역사상 최초의 ‘아이돌'이 되어 유럽을 휘저었으며, 슈만이 사랑을 위해 스승을 고소하는 극단적 선택을 했던 시대. 낭만주의는 말 그대로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았던 예술가들의 시대였다. 브람스가 스승의 아내를 40년간 짝사랑했다는 이야기는 애틋함을 넘어 숭고하게까지 느껴진다.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그 감정이 그의 음악에 어떤 깊이를 더했는지 누가 알겠는가. 생상스는 모차르트에 버금가는 신동으로 불렸지만 평생 진지함의 가면을 쓰고 살았고, 결국 가장 사랑받는 곡은 그가 숨기고 싶어 했던 '농담'이 되었다. 예술가가 의도한 것과 세상이 받아들이는 것 사이의 간극은 때로 아이러 니하다.


새벽 다섯 시, 스트라빈스키의 불협화음이 방안을 채운다. 아름답지 않지만 강렬하다. 편안하지 않지만 깨어 있게 만든다. 클래식은 때로 자장가처럼 우리를 재우지만, 때로는 알람처럼 우리를 깨운다. 중세에서 현대까지 이어진 이 긴 여정은 결국 인간이 소리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신을 찬양하던 목소리가 인간을 노래하게 되고, 감정을 흔들고, 민족을 품고, 결국 모든 규칙을 해체하며 다시 시작하는 과정이다. 클래식을 듣는다는 것은 결국 인간을 듣는 일이다. 완벽하지 않았던, 때로 추악하기까지 했던, 하지만 그 모든 불완전함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창조해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다. 그래서 클래식은 박물관에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 쉬는 현재다. 베토벤이 듣지 못했던 박수 소리가 200년이 지난 지금도 울려 퍼지는 것처럼, 생상스가 숨기려 했던 농담이 지금도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것처럼, 쇼스타코비치가 침묵으로 전한 진실이 지금도 누군가의 가슴을 울리는 것처럼. 클래식이라는 시간여행에는 종착역이 없다. 다만 각자의 속도로 걸으며, 때로 멈춰서서 귀 기울이는 순간들이 있을 뿐이다. 저자는 클래식이라는 목적지를 향해가는 나에게 옆에서 재미있는 스토리와 함께 이야기해 준다. 클래식 매니아로 가는 길을 상세히 안내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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