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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엔 누룽지나 오차즈케로 -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함께했던 혀끝의 기억
후카자와 우시오 지음, 김현숙 옮김 / 공명 / 2025년 5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음식에는 국경이 없다고 말하지만, 때로는 한 그릇의 음식이 누군가에게는 견고한 벽이 되기도 한다. 재일교포 작가인 저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문득 내 기억 속 음식들을 떠올렸다. 그 음식들이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증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끓여주시던 된장찌개의 진한 냄새가 떠오른다. 그때는 그저 맛있는 음식이었을 뿐인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냄새 속에는 할머니의 사랑과 우리 가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할머니는 전쟁을 겪으신 분이었고, 그분이 만드는 음식에는 부족함 속에서도 가족을 지키려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된장찌개 한 그릇에도 그런 이야기가 숨어있었다는 것을, 나는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김치에 대한 작가의 복잡한 감정을 읽으며,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을 떠올렸다. 중학교 때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저녁을 얻어먹게 된 일이 있었다. 그 집 어머니께서 김치찌개를 끓여주셨는데, 나는 그때 처음으로 우리 집 김치와 다른 맛을 경험했다. 더 달고, 덜 짜고, 마늘 냄새도 약했다. 그때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같은 김치라도 집마다, 사람마다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 우리 집 김치는 어머니의 손맛이었고, 동시에 어머니가 살아온 시간의 흔적이었다. 시골에서 자란 어머니는 김치를 담글 때마다 외할머니의 손길을 떠올리신다고 하셨다. 젓갈의 양, 고춧가루의 색깔, 배추를 절이는 시간까지 모든 것이 외할머니로부터 전해받은 유산이었다. 나는 그런 김치를 먹으며 자랐고, 그것이 내 정체성의 일부가 되었다. 대학교에 진학해서 처음으로 혼자 살게 되었을 때, 나는 라면을 끓이면서 자주 울었다. 그 이유를 당시에는 명확히 알 수 없었다. 혼자라는 외로움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집의 맛을 그리워하는 마음이었다. 편의점에서 사온 라면 한 봉지에도 집에 대한 그리움과 독립에 대한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라면에 계란을 풀고 김치를 넣어 먹으면서 문득 위안을 얻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늦은 밤 공부하는 나에게 끓여주시던 야식과 비슷한 맛이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음식은 단순히 맛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과 감정의 문제라는 것을. 그리고 그 기억들이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스시에 대한 작가의 트라우마를 읽으며, 나는 내게도 비슷한 음식이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 먹었던 냉면이 그것이다. 할아버지는 평소 냉면을 좋아하셨는데, 그날도 "시원한 냉면 한 그릇 먹자"고 하시며 우리를 냉면집으로 데려가셨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평소와 달리 냉면을 다 드시지 못하셨다. 입맛이 없다고 하시며 반도 못 드시고 젓가락을 놓으셨다. 그 후 몇 개월 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한동안 냉면을 먹을 수 없었다. 냉면집 앞을 지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졌고, 냉면 냄새만 맡아도 눈물이 났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냉면에 대한 감정이 조금씩 변화하는 것을 느꼈다. 슬픔보다는 그리움이, 아픔보다는 따뜻한 추억이 앞서기 시작했다. 지금은 냉면을 먹을 때마다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더 이상 슬프지 않다. 오히려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소중한 시간들을 되새기게 된다. 아버지가 냉면을 드시며 즐거워하셨던 모습, 우리에게 냉면 먹는 법을 가르쳐주시던 모습들이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음식이 가진 치유의 힘을 경험한 순간이었다.
작가가 두 문화 사이에서 느꼈던 혼란을 읽으며, 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통과 현대, 한국 음식과 서구 음식, 집밥과 외식 사이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선택들이 모여 우리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치킨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웃음이 났다. 나에게도 치킨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중학교 때 시험을 잘 보면 어머니가 치킨을 시켜주셨는데, 그것은 우리 가족에게는 작은 축제였다. 평소에는 집에서 만든 음식만 먹던 우리에게 배달 치킨은 특별한 선물이었다. 치킨을 먹으며 가족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그 시간들이 지금도 그립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친구들과 치킨을 먹으며 밤을 새우기도 했다. 시험 기간에 함께 공부하다가 야식으로 시켜먹던 치킨, 축제 때 친구들과 나눠먹던 치킨, 실연의 아픔을 달래려고 혼자 먹던 치킨까지. 치킨은 내 청춘의 여러 순간들과 함께 있었다. 지금도 가끔 치킨을 먹으면서 그때의 기억들을 떠올린다. 음식이 관계와 감정을 매개하는 도구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치킨 한 조각에도 우정과 가족애, 위로와 기쁨이 녹아있다.
최근 K-푸드의 세계적 확산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많다. 김치, 불고기, 비빔밥 같은 한국 음식이 세계 곳곳에서 사랑받고 있다. 이는 분명 기쁜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음식의 진정한 가치는 인기나 유명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에 담긴 이야기와 감정에 있다는 것이다. 세계화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다양한 음식 문화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분명 축복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고유의 음식 문화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전통적인 조리법, 계절에 따른 음식 문화, 가족 간에 전해지는 비법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지켜나가야 한다. 음식은 결국 사람의 이야기다. 누가, 누구를 위해,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는지에 따라 같은 음식도 다른 의미를 갖는다. 어머니가 병든 자식을 위해 끓인 죽과 식당에서 파는 죽은 재료는 같을지 몰라도 의미는 전혀 다르다. 음식에는 만드는 사람의 마음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깨달았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김치와 스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음식들이 우리를 아프게 하기도, 치유하게 하기도 한다는 것을.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경험을 받아들이고, 음식을 통해 더 넓은 세상과 만나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결국, 우리 모두 따뜻한 한 그릇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