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날에 니체를 읽는다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상현 엮음 / 필름(Feelm)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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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오늘 아침, 나는 AI에게 물었다. "요즘 왜 이렇게 공허하지?" 몇 초도 채 되지 않아 답이 돌아왔다. 유려하고, 따뜻하고, 논리적이었다. 현대인의 정서적 피로에 대한 설명, 회복을 위한 다섯 가지 방법, 그리고 마지막엔 어김없이 이런 문장이 따라붙었다. "지금 이 순간의 당신도 충분히 괜찮습니다." 잠시 멈췄다. 위로가 되었냐고? 솔직히 말하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차갑게 식은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은 것처럼, 따뜻하긴 한데 어딘 가 본래의 온도가 아닌 것 같은 그 느낌. 그 감각이 무엇인지 설명할 언어를 찾지 못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불안한 날에 니체를 읽는다>를 손에 들게 되었다. 그리고 첫 페이지부터 깨달았다. 내가 이상하게 여겼던 그 감각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생성형 AI는 경이로운 존재다. 방대한 인류의 지식을 학습하고,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며, 질문에 막힘 없이 답한다. 무엇보다 24시간 지치지 않고 나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새벽 세 시에 잠 못들고 뒤척이다가 쏟아내는 넋두리에도, AI는 한결 같은 어조로 응답한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함정이 있다. AI는 구조적으로 사용자를 불편하게 만들 수 없다. 정확히는, 불편하게 만들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AI는 내가 원하는 것을 예측하고,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방향으로 언어를 조합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걸러지는 것들이 있다. 날카로운 지적, 불편한 역질문, 그리고 그건 틀렸다"는 단호한 부정이다.

니체는 이것을 무엇이라고 불렀을까. 아마 무리 본능(herd instinct)에 봉사하는 도구라고 했을 것이다. 가장 많은 사람이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방향으로 수렴하는 존재. 최대 다수의 최대 위안을 위해 최적화된 기계다. 문제는 그 위안이 때로 성장을 멈추게 한다는 것이다. 내가 새벽에 Al에게 공허함을 털어놓았을 때, AI는 나를 위로했다. 하지만 니체라면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그 공허함은 어디서 왔는가? 당신은 정말 지금의 삶을 선택했는가? 아니면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는가?" 그 질문은 듣기 싫다. 불편하다. 하지만 바로 그 불편함이 진짜 위로의 시작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AI는 패턴을 학습한다. 수십억 개의 문장을 읽고, 어떤 단어 다음에 어떤 단어가 오는지, 어떤 질문에 어떤 답이 자연스러운지를 익힌다. 그래서 AI는 인류가 지금까지 생각해온 것들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재현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AI가 학습한 것은 결국 과거의 인류가 이미 생각한 것들의 총합이다. 거기엔 어제까지의 지혜가 있지만, 내일을 향한 창조는 없다. 지금까지 기록된 언어들의 평균값은 있지만, 그 평균을 깨뜨리는 이단의 목소리는 희석된다. 니체가 가장 경멸했던 것 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최후의 인간" 을 이야기했다. 안락함을 발명하고, 위험을 피하며, 자신을 돌볼 줄 알고, 오래오래 살지만, 결코 별 하나를 낳지 못하는 존재. 니체의 언어로 말하자면, 생성형 AI는 인류의 지식을 집대성했지만, 동시에 인류를 '최후의 인간'으로 이끄는 가장 효율적인 통로가 될 위험을 품고 있다. 검색 한 번에 답을 얻고, 고민 한 번에 해결 책을 받고, 감정 한 번에 위로를 소비하는 삶. 그 편리함에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스스로 질문을 만드는 능력을 잃어간다. 가장 중요한 질문들, 즉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를 AI에게 외주로 맡기게 된다. 그런데 그 질문들만큼은, 대신 답해줄 수 있는 존재가 이 세상에 없다. AI도, 니체도, 그 누구도.

니체는 파괴를 말했다. 나를 병들게 하는 가치관, 타인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성공의 공식, 스스로를 속이는 변명들. 그것 들을 먼저 부수지 않으면 새로운 삶은 시작되지 않는다고. AI 시대에 그 말은 더 절박하게 들린다. 왜냐하면 지금의 환경은 우리가 망치를 들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생각하기 전에 AI가 먼저 답을 내놓고, 선택하기 전에 알고리즘이 먼저 추천을 한다. 불안함을 느끼기도 전에 콘텐츠가 그 틈을 채운다. 이 환경 속에서 인간은 점점 자신의 내면 과 조용히 마주 앉는 시간을 잃어간다. 하지만 바로 그 고독의 시간이, 니체가 말한 창조의 토양이다. 루살로메에게 거절 당하고 극심한 고통 속에 홀로 남겨진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썼다는 사실은 그래서 단순한 일화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 작품은 위로받은 자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는 절대 고독 속에서 탄생했다. AI가 잘하는 것이 있다면, 아마 우리의 '현재'를 더 편안하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니체가 말하는 성장은 편안함에 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불편함을 똑바로 직시하고, 그 불편함을 껴안고 걸어가는 데서 온다.

"아모르 파티(Amor Fat). 운명을 사랑하라." 니체의 이 말이 AI 시대에 가장 필요한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이 시대가 운명을 사랑하기 가장 어려운 시대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빠르게 희석되고, 실패는 곧바로 다른 자극으로 대체되며, 불안은 클릭 한 번으로 잠시 잊힌다. 그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깊이 응시하고, 고통까지 포함한 삶의 전체를 긍정하는 일은 이전 보다 훨씬 더 의식적인 노력을 요구한다. 책을 덮고 나서 다시 AI 앞에 앉았다. 그리고 이번엔 다른 방식으로 물어봤다. "내가 지금 공허하다고 느끼는 건, 어쩌면 내가 원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일까?" AI는 이번에도 성실하게 답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엔 그 답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잠시 화면을 닫고 혼자 그 질문과 마주 앉았다. 그것이 니체가 가르쳐준 것이었다. 답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과 함께 버티는 것. 불안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불안이 가리키는 방향을 직시하는 것이다. 니체는 AI가 없던 시대를 살았다. 하지만 그가 던진 질문들은 오히려 AI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더 선명하게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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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에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박상미 지음 / 저녁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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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눈 속에서도 가장 먼저 고개를 내미는 수선화처럼, 나는 늘 관계 속에서 누구보다 먼저 상처를 입었다. 누군가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 한마디가 오래도록 가슴에 박혀 있었고,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못 한 채 집에 돌아와 이불 속에서 혼자 되새기는 밤이 적지 않았다. 왜 나는 이렇게 약한가. 왜 나는 이렇게 쉽게 흔들리는가. 책을 읽으며 비로소 깨달았다. 문제는 내 가 약해서가 아니었다. 뿌리가 아직 충분히 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크고 단단해 보이는 나무도 뿌리가 얕으면 거 센 바람 한 번에 쓰러진다. 나의 뿌리는 바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 즉 자존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오랫동안 나 자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내성적이고, 말주변도 없고, 늘 눈치를 보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어 하는 쓸데없는 욕심까지 있었다. 그 욕심이 충족되지 않을 때마다 스스로를 탓했고, 그 자책은 다시 상처가 되어 나를 깎아내렸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 있었던 것이다. 타인의 평가 하나하나에 온 마음이 출렁이는 것은 어쩌 면 당연한 결과였다. 자존감이라는 뿌리가 깊어야 비로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이기심이 아니라 건강한 관계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책은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말해주었다.

관계에서 받은 상처보다 더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그 상처를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되재생하는 나 자신이었다. 누군가에 게 상처 되는 말을 들으면 며칠이고 그 장면을 반복해서 떠올렸고, 왜 그랬을까, 내가 뭘 잘못했을까, 그 사람은 나를 어떻 게 보는 걸까, 하는 생각의 늪에 빠져들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화살" 이었다. 처음 화살은 타인이 쏜 것이지만, 두 번째 화살은 내가 나에게 스스로 쏘는 것이다. 이미 아픈 자리에 다시 상처를 입히는 행위. 생각해보면 나는 타인에게 입은 상 처보다 스스로에게 가한 두 번째 화살로 훨씬 더 오래, 더 깊이 앓아왔던 것 같다. 상처의 크기는 처음 맞은 순간이 아니라 그것을 얼마나 오래 붙잡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 가슴을 찌르듯 와닿았다. 나는 그동안 스스로 상처를 키우고 있었 던 것이다. 반추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같은 고통을 머릿속에서 재생하는 동안 정작 나의 감정 상태만 더 나빠질 뿐이다. 자기연민, 즉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는 것이 자존감을 높이는 것보다 오히려 더 중요하다는 말이 이 지점에서 새롭게 다가왔다. 실수했을 때 가혹하게 자책하는 대신, 친한 친구를 위로하듯 나 자신을 다독이는 것. 스스로에게 엄격한 만 큼 타인에게도 엄격해지고, 나의 부족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타인의 부족함도 품을 수 있다는 이치가 비로소 이해되 었다. 두 번째 화살을 내려놓는 것, 그것이 관계 연습의 첫걸음이었다.

빅터 프랭클의 말은 강렬한 메시지였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는 자신의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이 있다.“ 나는 왜 그토록 타인의 말에 쉽게 흔들렸을까. 이제 그 이유를 안다. 나에게는 그 공간이 없었다. 누군 가 무심코 던진 말이 나에게 닿는 순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상처가 되고, 분노가 되고, 자책이 되었다. 자극이 들어오면 반응이 자동으로 터져 나왔다. 그 사이에 내가 개입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 공간을 만드는 연습, 그것이 관계 연습의 핵 심이라는 것을 이 책은 알려주었다. 나를 향한 말이 비난처럼 들릴 때, 그 말 속에 담긴 상대의 감정과 소망을 읽으려는 노력.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한 박자 멈추고, 상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해석하며 듣는 것. 이것이 바로 공감대화의 출발점이다. '생각을 말하지 말고 소망을 말하라.' 이 단순한 원칙 하나가 사실 얼마나 많은 연습을 필요로 하는지, 가까운 사람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실감했다. 가장 편한 사람에게 가장 날 것의 말을 내뱉고, 그것이 상처가 되어 관 계를 멀어지게 만든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마"가 아니라 "나는 네가 이렇게 해주면 참 좋겠어"로 말하는 것. 말 한마디의 차이가 관계의 온도를 바꾼다. 그리고 듣는 것의 힘. 내 목소리가 많이 들릴수록 실패한 대화라는 말이 뼈를 건드렸다. 나는 얼마나 많은 대화에서 상대의 말을 충분히 듣지 못하고, 내 생각과 판단을 쏟아내는 데 급급했 는가. 경청은 단순히 조용히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감정과 그 안에 담긴 바람을 해석하며 듣는 적극적인 행위였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달라진 생각이 있다면, 관계는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오랫동안 '좋은 관계'란 어느 순간 도달하는 완성된 상태라고 막연히 생각해왔다. 그래서 관계가 어긋날 때마다 '나는 역시 안돼' 하고 포기하거나, 관계 를 통째로 끊어버리는 방식으로 도망쳐왔다. 그러나 관계는 끝없이 배워가는 과정이다. 수선화가 매년 봄마다 다시 땅을 뚫고 올라오듯, 관계도 매번 다시 시작하고 다시 배우는 것이다. 상처도 관계 속에서 받지만, 행복도 관계 속에서 만들어 진다. 호모 사피엔스가 홀로가 아닌 함께 사회를 이루어 살아남았듯, 인간은 연결 속에서 비로소 완전해진다. 나를 사랑하는 연습이 쌓여야 관계를 사랑하는 힘도 깊어진다. 내 마음이 충만해야 타인에게도 나눠줄 수 있다. 이제 나는 타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보다, 나를 어떻게 돌볼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려 한다.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원인을 알았고, 방향을 알았다. 자극과 반응 사이 그 작은 공간에 자유와 힘을 조금씩 채워가는 것,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관계의 연습이다. 매일 조금씩,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며, 나는 오늘도 그 연습을 계속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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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지능 - 골드만삭스의 정점을 이끈 CEO가 증명한 압도적 자본 전략
로이드 블랭크파인 지음, 박선영 옮김 / 필름(Feelm)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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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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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yd Blankfein의 회고록 생존 지능(Streetwise)는 아이러니한 책이다. 브루클린 공공주택 프로젝트에서 자란 소년이 하버드를 거쳐 월스트리트 최정상에 오른 이야기는, 그 자체로 이미 인간 생존 능력의 극적인 증거다. 무엇이 어떤 사람들 로 하여금 절망적인 환경을 돌파하게 만드는가? 생존지능(SurviVal Intelligence). 이것은 살아남는 능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위기의 한복판에서 방향을 잃지 않고, 불확실성을 자원으로 전환하며, 인간적 연결을 무기로 삼는 복합적 역 량이다. Streetwise가 말하지 않은 것을, 그리고 말하려 했으나 결국 말하지 못한 것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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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지능은 지능 지수 또는 EO(감성지능)와는 구별된다. 지능지수는 문제를 분석하는 능력을 측정하고, 감성지능은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다루는 능력을 다루지만, 생존지능은 예측 불가능한 혼돈 속에서 작동하는 실천적 판단력이다. 이것은 교실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삶의 압력 속에서 단련되는 것이다. Blankfein의 삶은 그 단련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가 자란 East New York의 공공주택은 1970년대 뉴욕시 재정 위기와 맞물린 도시 붕괴의 진원지였다. 그러나 그는 그 환경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그 환경에서 체득한 감각들 즉, 위험 신호를 읽는 법, 자원이 제한된 상황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법, 공동체 안에서 신뢰를 구축하는 법을 고스란히 월스트리트에 이식했다


생존지능의 핵심 요소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상황 독해 능력(Situational Reading)이다. 이것은 현재 벌어 지는 일을 단편적 사실이 아니라 패턴과 흐름으로 읽어내는 능력이다. Blankfein이 강조한 "리스크 관리는 예측이 아니라 시나리오 계획"이라는 원칙이 여기에 해당한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지만, 충분히 넓은 범위의 가능성을 준비 해 두면, 사건이 터졌을 때 마치 예견한 것처럼 반응할 수 있다. 이것은 직관이 아니라 훈련된 상상력이다. 둘째, 심리적 유연성(Psychological Flexibility)이다. 위기는 반드시 사람을 무너뜨리려 한다. Blankfein이 최악의 순간에 수영 레인을 반복하고 "선택이 없으면 문제도 없다(No choice, no problem)"는 만트라를 되뇌인 것은 자기 관리 기법만이 아니다. 공황과 이성 사이에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하는 의식적 실천이라 할 것이다. Steve Jobs가 Apple에서 해고된 후 NexT와 Pixar를 거쳐 다시 Apple로 돌아온 것, Jamie Dimon이 Citigroup에서 퇴출된 후 JPMorgan을 재건한 것, 이 사례들이 Streetwise에서 언급되는 이유는, 위기 이후의 반등이 우연이 아니라 심리적 유연성이라는 역량의 산물 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셋째, 관계 자본(Relational Capital)의 축적이다. 생존지능은 결코 개인의 고독한 역량이 아니 다. Blankfein이 새로 파트너로 승진한 사람 한 명 한 명에게 직접 전화를 걸고, 그 사람의 개인적 사정까지 언급한 것, 퇴사자들을 경쟁사로 보내면서도 우호적으로 처우한 것, 동문 네트워크를 대학처럼 관리한 것, 이 모든 행동은 위기의 순간 에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한 장기적 투자였다. 인간은 고립 속에서 무너지고, 연결 속에서 재건된다.


2008년 금융위기는 생존지능의 극한 시험장이었다. Lehman Brothers가 붕괴하기 직전의 금요일 저녁, 뉴욕 연방준비 은행의 창문 없는 회의실에 집결한 월스트리트 최고 경영자들의 장면을 Streetwise는 묘사한다. 위기가 생존지능을 시험하는 방식을 생각해 본다. 1단계는 충격과 정지다. 예상치 못한 규모의 사건은 일차적으로 인지 마비를 일으킨다. 여기서 생존지능이 낮은 사람은 공황에 빠지거나 반대로 현실을 부정한다. 생존지능이 높은 사람은 이 정지 상태를 인식하고, 의도적으로 짧게 유지한 후 행동으로 전환한다. Blankfein의 만트라 "No choice, no problem " 이다. 2단계는 정보 과부하와 판단의 문제다. 위기 상황에서는 불완전하고 모순된 정보가 동시에 쏟아진다. 생존지능은 이때 모든 정보를 처리하려 하지 않고, 결정적 변수를 가려내는 능력이다. Blankfein이 포트폴리오 매니저와 리스크 매니저가 충돌할 때 일 관되게 리스크 매니저의 편을 들었다는 것은 이 원칙이다. 정보가 아니라 프레임이 판단을 지배한다. 3단계는 위기 이후의 역설이다. Blankfein은 위기가 지나간 직후가 리스크를 취하기에 최적의 시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정반대 방향으로 작용한다. 생존지능의 성숙도는 바로 이 역설적 상황에서 드러난다. 공포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반대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는 것, 그것이 생존지능의 완성형이다.


Streetwise의 흥미로운 주장 중 하나는 문화가 궁극적 경쟁 우위라는 것이다. Goldman Sachs의 우리(we) 문화 즉, 부서 P&L의 일정 비율로 보상하지 않는 구조, 이사가 회사 전체 이익에 맞지 않으면 거래를 포기할 수 있는 권한, 거시경제 약화 시 뱅커를 제재하지 않는 원칙 등 이 모두는 개인의 생존지능을 집단적 생존지능으로 전환하는 메커니즘이다. 생존 지능은 결국 개인의 속성이면서 동시에 집단의 설계 문제다. 최고의 개인을 모아도 구조가 잘못되면 집단은 무너진다. 반대로 구조가 올바르게 설계되면, 평균적인 개인들이 모여 탁월한 집단 판단을 만들어낼 수 있다. Goldman이 2008년 위기에서 살아남은 것은 Blankfein 한 사람의 천재성 때문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구축한 집단 생존지능의 산물이었다. 책은 이 통찰을 원리로 제시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Blankfein 개인의 삶(브루클린 공공주택의 경험, 가족, 실패, 인간적 두려움)과 연결되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 연결이 빠진 자리에 "냉담하고 건조한 사실의 나열"이 채워진 것은 조금 아쉽다.


Streetwise는 생존지능에 대해 여러가지 사례를 들려준다. 생존지능은 사건의 목록이 아니라,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의미 연결에서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역사를 읽으라는 Blankfein의 조언이 가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거의 사건들이 어떤 패턴을 이루는지, 그 패턴이 현재와 어떻게 공명하는지를 읽는 능력이 곧 생존지능의 인지적 기반이기 때문이다. "암 진단이 우선순위를 날카롭게 만들었다"는 고백, 그리고 "따뜻한 손으로 줄 수 있을 때 주라"는 동료의 경구는 책 전체를 압도하는 생존지능의 정수가 담겨 있다. 유한한 존재임을 아는 자만이 진정으로 오늘을 살아낸다. 생존지능은 결국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그것을 위해 불확실한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능력. 그것은 브루클린 프로젝트에서 시작해 월스트리 트 정상까지 이어진 한 인간의 궤적 속에 분명히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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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유인원 - 폭력적인 침팬지와 다정한 보노보로 바라본 인간 본성의 기원
프란스 드 발 지음, 이충호 옮김 / 빌리버튼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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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결국 자기 인식의 확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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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유인원 - 폭력적인 침팬지와 다정한 보노보로 바라본 인간 본성의 기원
프란스 드 발 지음, 이충호 옮김 / 빌리버튼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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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라고 믿어왔다. 이성과 도덕, 언어와 문명을 갖춘 인간은 여타 동물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자부심이 인류의 역사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철학자들은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 정의했고, 종교는 인간에게 신의 형상을 부여했으며, 근대 과학조차 오랫동안 인간을 진화의 정점으로 묘사해왔다. 그러나 영장류학자 프란스드 발(Frans de Waal)은 그의 저서 <내 안의 유인원(Our Inner Ape)>에서 이러한 자기 인식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드발은 침팬지와 보노보, 이 두 종의 유인원이 우리 인간과 얼마나 닮아 있는지를 30년에 가까운 현장 연구를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의 논지는 인간도 동물이다"라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그는 권력, 섹스, 폭력, 친절이라는 네 가지 핵심 주제를 통해, 우리가 가장 인간적이라고 여기는 특성들이 사실은 유인원과 공유하는 진화적 유산임을 설득 력 있게 논증한다.

드 발의 논의에서 가장 흥미로운 출발점은 침팬지와 보노보의 극명한 대조다. 두 종은 유전적으로 인간과 약 98.7%의 DNA를 공유하며, 서로 간에도 그 이상을 공유한다. 그러나 이 두 종의 사회 구조와 행동 양식은 놀라울 만큼 다르다. 침팬지는 철저한 수컷 위계 사회를 형성한다. 알파 수컷을 정점으로 하는 권력 구조 속에서 개체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견제하고, 때로는 잔인한 폭력도 불사한다. 드 발이 암스테르담 아른 동물원에서 목격한 루이트(Luit)의 죽음은 이를 상징적으 로 보여준다. 루이트는 빠르게 알파 자리에 오른 침팬지였는데, 경쟁자인 여룬(Yeroen)과 니키(Nikkie)가 동맹을 맺어 그를 공격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드 발은 이 사건을 "정치적 살인"이라고 표현하며, 침팬지의 권력 정치가 인간의 그것과 얼마나 유사한지를 강조한다. 마키아벨리적 전략, 배신, 동맹 구축, 이것들이 비단 인간 정치의 전유물이 아님을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실감하게 된다. 반면, 보노보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보노보 사회는 암컷 중심의 평화로운 공동체로, 구성원들 사이의 긴장은 종종 성적 접촉을 통해 해소된다. 보노보는 낯선 개체와도 음식을 나누고, 공감과 친절 을 자연스럽게 표현한다. 드 발은 보노보의 성(sexuality)이 단순한 생식의 수단이 아니라 사회적 유대와 갈등 해소의 도 구로 기능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는 인간의 성적 행동이 가진 복잡한 사회적 맥락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이 두 유인원은 말하자면 인간성의 두 극단을 상징하는 거울이다. 한쪽에는 경쟁과 지배, 폭력의 충동이 있고, 다른 쪽에는 협력과 공감, 평화의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인간은 이 두 거울을 동시에 마주하고 있는 존재다.

드 발은 인간 본성에 대한 오랜 이분법적 시각에 도전한다. 서구 사상의 전통에서 인간 본성은 종종 선과 악, 이성과 본능, 문명과 야만의 대립으로 설명되어왔다. 홉스(Thomas Hobbes)는 자연 상태의 인간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속에 놓인 존재로 보았고,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반대로 인간의 본성적 선함을 주장했다. 이 오랜 논쟁에 드 발 은 제3의 답을 제시한다. 드 발에 따르면, 인간은 침팬지처럼 경쟁적이고 공격적인 동시에, 보노보처럼 평화롭고 친절할 수 있는 "양극단적 유인원(bipolar ape)"이다. 이 두 가지 충동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진화적 역사에서 비 롯된 보완적인 성향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도덕성은 우리의 경쟁적이고 공격적인 면모를 형성한 동일한 선택과정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이타심과 공감 능력은 사회적• 종교적 훈련을 통해 인위적으로 주입된 것이 아니라, 유인원으로서의 생물학적 역사 속에 이미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폭력성을 문명 이전의 '동물적 잔재'만 보거나, 반대로 인간의 친절함을 '문화적 산물'로만 해석하는 것은 모두 불완전한 시각이다. 우리 안의 침팬지와 보노보는 공존한 다. 암스테르담 동물원의 침팬지들이 권력을 두고 죽음의 싸움을 벌이는 동안, 다른 무리의 침팬지는 다친 연구자에게 다 가가 위로의 포옹을 건넨다. 이 두 장면은 모두 '인간적'이며, 동시에 모두 '유인원적'이다. 또한 드 발은 권력에 대한 인간 의 욕구를 부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침팬지 사회에서 알파 수컷은 단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 내 갈등을 중재 하고 약자를 보호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권력은 착취의 도구인 동시에 질서와 안정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인간 사회의 리 더십과 정치 구조를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면, 우리가 왜 본능적으로 강하고 공정한 지도자를 원하는지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에게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결국 자기 인식의 확장이다. 우리 안에는 루이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침팬지의 냉 혹한 정치적 본능도 있고, 낯선 이와 기꺼이 음식을 나누는 보노보의 따뜻한 공감 능력도 있다. 이 두 중동은 우리를 불편 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동시에 우리를 있는 그대로 설명해 준다. 내 안의 유인원을 인정한다는 것은, 인간의 어두운 면을 정당화하거나 체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자신을 더 정직하게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우리가 왜 권력을 탐 하는지, 왜 때로 잔인해지는지, 그러면서도 왜 낯선 이의 고통에 눈물짓는지를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진화는 우리에게 운명을 부과하지 않는다. 다만 가능성의 범위를 알려줄 뿐이다. 침팬지와 보노보 모두를 품은 양극단적 유인원"으로서, 우리는 어느 방향으로든 나아갈 수 있다. 드 발이 말했듯, 수백만 년의 시간 이 그 답을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긴 여정의 매 순간,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그리고 그 선택을 현명하게 하기 위한 첫 걸음은, 거울 속에서 유인원의 얼굴을 발견하고, 그것을 두려움 없이 마주하는 용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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