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왜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가 - 트럼프와 1조 달러 전쟁 기계의 야망
윌리엄 D. 하텅.벤 프리먼 지음, 백우진 옮김 / 부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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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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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방부 예산이 사상 최초로 1조 달러를 돌파했다. 이 숫자는 단순한 회계상의 이정표가 아니다. 윌리엄 하텅이 지적 하듯, 이는 미국이라는 국가가 전쟁 산업을 중심축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으로 완전히 재편되었음을 의미한다. 9/11 이후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쏟아부은 돈만 8조 달러에 달한다. 이 돈이면 미국 전체의 전력망을 탄소 제로로 전환하고, 모든 학자금 대출을 탕감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그 돈은 사막과 산악 지대에서 증발했고, 수십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으며, 참전 군인들에게는 치유되지 않는 정신적 상처만 남겼다. 그런데도 전쟁은 계속된다. 왜일까? 하의 답은 명확하다. " 미국의 정책은 이윤에 기반한다. " 록히드 마틴, RTX(구 레이시온), 보잉, 제너럴 다이내믹스, 노스럽그루먼 등 이른바 ' 빅 파이브' 방산업체들은 9/11 이후 2조 1천억 달러 이상의 국방 계약을 따냈다. 현재 미국 국방 예산의 절반 이상이 민간 계약업체로 흘러간다. 이들에게 전쟁은 사업이고, 평화는 손실이다. 베네수엘라 인근 해상에서 무고한 민 간인들이 " 마약 운반선"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혐의로 미 해군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는 동안, 워싱턴의 방산업체 주가는 상승했다. 이 시스템에서 전쟁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다. 무기는 안보를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윤을 위해 생산된다. 국방부조차 필요 없다고 판단한 M1 에이브럼스 탱크가 계속 생산된 이유는 국방 계약업체들이 후원하는 싱크 탱크들이 압력을 넣었기 때문이다. 해군이 전투에 부적합하다고 경고한 연안 전투함(LCS, 일명 '형편없는 작은 배)이 계 속 건조된 것도 정치적 압력 때문이다. 전략이 아니라 로비가 무기 체계를 결정한다.


945명의 로비스트들이 국방 계약업체들을 위해 일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외국 정부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리인으로도 등록되어 있다. 전직 국회의원, 국방부 관료, 심지어 국가 최고 지도자의 비서실장들이 퇴임 후 무기를 팔기 위해 문을 회전하듯 드나든다. 이들은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같은 권위주의 정권에 무기를 판매하고, 그 대가로 수백만 달러의 보수를 받는다. 저널리스트 자말카슈끄지가 살해되었을 때, 미 의회는 잠시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무기 수출을 차단하려 했다. 그러나 로비스트들이 무대 뒤에서 움직였고, 같은 주에 의원들의 선거 캠페인에 기부금을 전달했다. 이 모든 것이 뇌물처럼 보이지만, 완벽히 합법이다. 왜냐하면 군산복합체는 워싱턴의 법적, 규제적, 문화적 DNA 속에 짜여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화요일의 일상이다. 이 기계는 미디어도, 학계도, 심지어 할리우드도 포획했다. 국방부는 영화 제작자 들에게 군사 장비 사용을 허가해주는 대가로 대본을 수정하게 한다. 방산업체가 후원하는 싱크탱크들은 더 많은 무기 구매를 권고하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TV 네트워크는 전쟁 기획자들을 전문가로 출연시킨다. 존스 홉킨스 대학은 탄도 미사일 연구를 위해 연간 10억 달러를 받지만, 캠퍼스의 평범한 학생은 이 사실을 모른다. 연구소가 6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이다. 버클리는 핵무기 연구소 운영을 돕지만, 학생들은 역시 모른다. 많은 언론사들은 이제 국방부 전담 기자조차 두지 않는다. 그저 국방부 보도자료를 베껴 쓰고, 마지막 32번째 문단에 하텅 같은 비판자의 짧은 인용을 넣어 균형을 맞췄다고 생각한다. 전체 프레임 자체가 친군사적이다. 세계 어딘가에서무언가가 일어나면, 군사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군사적으로 개입할 때마다 재앙이 벌어지는데도 말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2024년 선거 캠페인에서 "끝없는 전쟁을 종식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이라크 전쟁을 지지한 젭 부 시와 힐러리 클린턴을 비난하며 정치적 자본을 쌓았다. 하지만 이것은 전술일 뿐이다. 트럼프는 필요할 때마다 이 도구를 꺼내 든다. 전쟁과 기업 복지에 지친 유권자층에게 보내는 신호다. 일부는 그가 덜 개입주의적일 것이라 믿고 투표했다. 그러나 현실은? 베네수엘라 앞바다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폭격하고, 가자지구에서 집단학살을 돕는 무기 지원을 계속하 며, 방산업체들에게 "돈을 주고 규제하지 않을 테니 원하는 대로 하라"고 선언했다. 국방부 장관 피트 헤그세스는 연설에서 무기 생산 속도를 높이고, 독립적인 무기 실험도 생략하겠다고 말했다. 하텅은 경고한다. " 무기에 있어서, 속도는 죽음을 초래한다." 트럼프의 첫 임기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반복됐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와 가까워지며 기록적인 양의 무기를 판매했고, 사우디를 "미국의 일자리 창출자"라고 칭송했다. 실제로 방산업체들은 그를 정치적 동맹으로 본다. 그는 가끔 "핵무기가 너무 많다"고 말하지만, 정책적으로는 핵무기 지출을 늘리고 있다. 그의 발언은 일관성이 없지만, 목적은 명확하다. 전쟁에 회의적인 지지층을 붙잡아두는 것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실리콘밸리 군산복합체의 부상이다. 팔머러키 같은 인물들은 "2년 안에 중국과 전쟁이 날 것"이라며 더 많은 탄약을 외친다. 이들은 자신들이 외교정책을 주도하는 양 행동하며, 스스로를 새로운 기술 메시아로 여긴다. 팔란티르는 가자 전쟁 중 이스라엘에서 이사회를 열었고, 폭격을 가속화하는 소프트웨어를 제공했다. 전쟁으로 이익을 얻는 다른 기업들에게 이스라엘 지지를 더 목소리 높여 표현하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부통령 JD 밴스는 실리콘밸리에서 성장했고, 피터 틸에게 정치 경력을 빚지고 있다. 그가 부통령으로 지명되자 실리콘밸리에서는 샴페인 코르크가 터졌고, 막대한 자금이 트럼프에게 몰려들었다. 이들은 록히드 마틴 같은 거대 기업들을 대체하려 한다. 정부는 양쪽 모두에게 돈을 지불할 것이다. 록히드 마틴의 하드웨어, 안두의 소프트웨어. 1조 달러는 곧 뒷거울에 비칠 숫자가 될 것이다.


해외에서 작동하는 논리는 국내로도 스며든다. 6,500개가 넘는 미국 경찰서가 '1033 프로그램'을 통해 70억 달러 상당의 국방부 잉여 장비를 받았다. 시위대는 이제 군용 소총, 장갑차, 음향 무기, 대반란 작전용으로 개발된 최루탄에 직면한다. 하텅과 프리먼은 "이것은 경찰이 아니라 준군사 조직"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제국의 부메랑'이다. 미국이 전 세계에서 자행한 억압과 테러가 이제 미국 공동체로 돌아왔다. 더 충격적인 것은 경제적 정당성마저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군사 지출은 미국 경제에서 가장 비효율적인 일자리 창출 방식이 되었다. 의료, 교육, 기후 회복력, 청정 에너지에 대한 투자가 훨씬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든다. 록히드 마틴 같은 기업들은 노조 일자리를 역사적인 속도로 없애고 있으며, 혁신보다는 자사주 매입에 수십억 달러를 쓴다. 자동화는 곧 더 많은 일자리를 없앨 것이다. 군사주의와 고용을 연결하던 경제적 거래는 해체되고 있다. 하지만 하텅과프리먼은 절망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 기계는 무너뜨릴 수 있다. 역사는 내부자들이 저항하고, 내부고발자들이 책임을 강제하며, 활동가들이 해로운 프로그램을 중단시킨 순간들로 가득하다. 여론은 압도적 으로 새로운 핵무기, 끝없는 전쟁, 억압적 동맹국에 대한 백지수표 원조를 반대한다. 그들은 '새로운 평화 네트워크'를 제 안한다. 빈곤, 인종적 불의, 감시, 기후 파괴, 권위주의 뒤에 군사주의가 통합적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운동들의 연대다. 마틴 루터 킹의 비전에 기반한 '가난한 사람들의 캠페인'은 참전 용사, 노동자, 소외된 공동체를 경제적 착취와 전쟁에 맞선 공동 투쟁으로 끌어들인다. 이를 위해서는 구체적 행동이 필요하다. 돈과 군사주의의 연결고리를 끊는 선거 자금 개혁, 싱크탱크의 이해 충돌을 폭로하는 투명성 법안, 부패에 맞서는 내부자를 보호하는 내부고발자 보호법, 끝없는 전쟁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를 중심에 두는 연방 지출 우선순위 재설정, 그리고 무엇보다 진정한 방어를 중심으로 외교정 책을 재구상하는 것이다. 전쟁 기계는 어디에나 있다. 예산, 로비, 대학, 영화, 경찰서, 정치 캠페인, 스포츠 경기, 그리고 우리가 정치, 사회, 문화, 삶을 논할 때 사용하는 언어 속에. 하지만 괴물은 길들여질 수 있다. 방해받고, 재정 지원이 끊기고, 정당성을 잃고, 대체될 수 있다.


미국이 이번 세기에 단 한번도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8조 달러를 쓰고, 수십만 명에게 정신적 상처를 입히고, 전 세계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지만, 안보는 나아지지 않았다. 이제는 질문을 바꿀 때다. "우리는 왜 전쟁을 계속하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전쟁을 멈출 것인가?" 정보를 얻고, 대표자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내부고 발자를 지지하고, 진정으로 독립적인 미디어를 따르고 강화하며, 군사주의에 맞서는 운동을 만들고 참여하고, 끝없는 전쟁이 삶과 자유와 시민권의 대가라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 전쟁 기계를 멈출 권한과 힘, 그리고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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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끝에서 만난 수업 - 죽음이 가르쳐준 후회 없는 삶
에리카 하야사키 지음, 이은주 옮김 / 북모먼트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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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3년을 기다려야 들을 수 있는 강의가 있다. 뉴저지의 한 대학에서 노마 보우 교수가 가르치는 <죽음에 대한 관점>이라는 수업이다. 죽음이라는 주제가 이토록 인기 있는 강좌가 될 수 있다니, 처음엔 아이러니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에리카 하야사키의 책을 따라가다 보면, 이 역설이 사실은 가장 자연스러운 귀결임을 깨닫게 된다. 젊음의 한가운데 서 있는 학생들이야 말로 죽음에 대해 가장 절실한 질문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노마 교수는 학생들을 호스피스로, 교도소 로, 영안실로, 묘지로 데려간다. 때로는 묘비 사이에서 수업을 진행한다. 그녀가 보기에 묘지는 역사책이 담지 못한 이야기들이 숨 쉬는 곳이었다. 우리 발밑에 놓인, 간과되고 활용되지 않은 교실이었다. 나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배움의 공간을 외면하며 살아가는지 생각했다. 우리는 죽음을 삶의 변두리로 밀어내고, 애도를 사적인 영역으로 격리시키며, 상실을 빨리 극복해야 할 장애물쯤으로 여긴다. 하지만 노마의 교실은 정반대의 철학 위에 세워져 있다. 죽음을 중심에 두고, 애도를 공유하며, 상실을 통해 배운다. 간호사였던 노마는 죽음을 임상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죽음이 다가올 때 나타나는 신체의 징후들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놀랍게도 학생들은 이 이야기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으로 가득 차 있다.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어쩌면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진지한 물음들을 던진다. 어떤 학생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슬픔을 안고 수업에 온다. 또 어떤 학생은 가족의 자살 시도, 약물 중독, 폭력의 경험을 이해하려 애쓴다.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이미 이토록 무거운 짐을 진 채 살아가는 젊은이들. 그들에게 죽음에 대한 수업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의 기술이다.

에리카 하야사키는 2007년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을 취재한 저널리스트다. 그녀는 그 이후로 수년간 죽음의 무자 비함과 의미를 파악하려 애썼지만 실패했다고 고백한다. 노마를 인터뷰한 후, 그녀는 연구 목적으로 교수를 따라다닐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노마는 한 가지 조건을 단다. 저자는 반드시 수업에 온전히 참여해야 한다는 것. 관찰자가 아니라 학생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 이 조건이 책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하야사키는 학생들과 함께 묘지를 걸었 고, 자신의 추도사를 썼고, 작별 편지를 썼다. 각 장 사이에 삽입된 과제들 예를 들어, " 잃어버린 누군가에게 작별 편지를 쓰세요 ", “당신 자신의 추도사를 작성하세요 " 은 때로는 학생들의 답변으로, 때로는 하야사키 자신의 답변으로 채워진다. 기자와 취재 대상 사이의 경계가 부드럽게 허물어지는 순간들이다. 노마 보우라는 사람 자체가 하나의 수수께끼 같다.

마약 중독자인 어머니와 마피아와 연루된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결국 할머니 손에 자란 여자. 보통 사람들은 흔돈과 역기능에서 도망치지만, 노마는 오히려 그쪽으로 달려갔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때마다 말이다. 학생들은 그녀에게서 무언가를 감지한다.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위로와 연민의 오아시스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삶 자체가 이미 하나의 교재다. 버려졌지만 생존했고, 상처받았지만 치유자가 되었으며, 죽음을 수없이 목격했지만 삶을 가 르치는 사람. 노마의 만트라는 간결하다. 다른 사람을 도우라. 그리고 그녀는 말한 대로 산다. 학생들이 고민을 안고 찾아 오면, 그녀는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내어 상담하고 돕는다. 그녀의 학생들도 그 본을 따른다. '변화가 되자(Be the Change)'라는 지역사회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며, 협력하고 함께 일하며 변화를 만들어내는 법을 배운다.

책에 등장하는 학생들의 이야기는 읽기 편하지 않다. 약물 남용, 자살 시도, 정신 질환, 폭력에 대해 읽고 싶지 않다면 더욱 그렇다. 케이틀린과 그녀의 남자친구 조나단, 조나단의 형제 조시의 이야기는 정신 질환, 중독, 살인, 자살을 포함한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희망적인 선율을 울린다. 나는 이 불편함이 책의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에 대한 책이 추상적이고 철학적이기만 하다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회피일 것이다. 하야사키는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선택했다. 한 특정한 시간의 한 특정한 교실 이야기. 보편적인 죽음의 탐구라기보다는, 매우 특수하고 구체적인 경험의 기록. 나는 이것이 정직함이라고 본다. 죽음과 삶에 대한 '정답'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있는 것은 각자의 씨름, 각자의 질문, 각자의 의미 만들기뿐이다. 하야사키는 자신이 그 정답을 찾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는 한 학기 동안, 그리고 그 후 3년 반 동안 노마와 학생들을 따라다니며 목격한 것을 보여준다. 소설처럼 읽히는 서사 구조, 각 장마다 초점을 바꾸며 여러 이야기 선을 엮어가는 방식은 책에 중독성있게 한다.

'The Death Class'를 읽으며 나는 계속 질문하게 되었다. 나는 내 추도사에 무엇이 쓰이기를 바라는가? 내가 작별을 고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인가? 되돌리기 버튼이 있다면 나는 무엇을 바꿀 것인가? 이 질문들은 불편하지만, 동시에 해방적이다. 죽음을 직시하는 것이 결국 더 온전하게 사는 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노마가 가르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죽음을 관점에 두고(in perspective) 삶을 바라보는 법. 끝이 있기에 지금이 소중하다는 것. 상실을 피할 수 없기에 연결이 의미 있다는 것. 우리 모두 죽는다는 사실이 공포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평등하게 하고 인간답게 만드는 진실이라는 것이다. 책은 한 학기의 수업에 대한 기록이지만, 동시에 훨씬 더 큰 것에 대한 질문이다. 어떻게 고통을 의미로 전환할 것인가? 어떻게 상실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것인가? 어떻게 죽음을 배우며 삶을 더 깊이 살 것인가? 하야 사키는 정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그녀는 함께 걷는다. 묘지를 거닐고, 과제를 쓰고, 학생들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그리고 우리를 초대한다. 이 불편하지만 필수적인 여정에 동참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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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날이면 그림 속으로 숨는다
허나영 지음 / 비에이블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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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도 날씨가 있다는 걸, 어떤 날은 몸으로 먼저 안다. 잠에서 깨어나 커튼을 걷기도 전에, 이미 가슴속 어딘가가 무겁다. 이유를 찾으려 해도 뚜렷한 까닭이 없다. 그냥, 오늘은 흐린 날이다. 안개가 낀 날이거나, 바람이 쏴하게 부는 날이거나, 폭풍이 치는 날이다. 하나영님의 에세이 <바람 부는 날이면 그림 속으로 숨는다>는 바로 그런 날들을 위해 쓰인 책이다. 저자는 공황장애를 겪으며, 육아와 일 사이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며, 남들과 비교하며 작아지는 순간들을 통과했다. 그 시간 속에서 그가 찾아간 곳은 미술관이었다. 말없이 걸려 있는 그림들 앞에서, 저자는 위로를 받았다. 치유의 처방전을 들고 간 것도, 해답을 구하러 간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누군가가 자신의 고통을 물감으로 눌러 담은 캔버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조용히 숨을 쉴 수 있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기억이 있다. 화면 속 인물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창밖을 바라보거나, 커피잔을 앞에 두고 멍하니 앉아 있거나, 혼자 텅 빈 공간 속에 놓여 있다. 그들은 관객을 쳐다보지 않는다. 어떤 이야기도 건네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고독한 화면 앞에 서면 무언가가 가슴 속에서 조용히 울린다. 마치 오랫동안 혼자였지만 비로소 누군가가 내 곁에 앉아준 것 같은 기분이랄까. 저자는 호퍼의 그림이 스마트폰으로 거리를 무심히 찍을 때의 구도와 닮았다고 말한다. 의도 없이 포착된 한 순간처럼, 그림 속 풍경은 그들만의 시간 속에 존재한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게 된다고.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힘들었던 날들에 나 역시 호퍼의 그림처럼 살았던 것 같다. 누군가를 바라보지도, 말을 건네지도 않고, 그저 나만의 무거운 시간 속에 갇혀 있었다. 피카소의 '청색 시기'를 소개하는 대목도 깊이 남는다. 친구의 죽음 이후, 그는 세상을 파란 색조로만 바라보았다. 그 시절의 그림들은 후대의 입체주의만큼 혁명적이진 않을지 모르지만, 훨씬 더 인간적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그 시기가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가장 세게 흔드는 이유는, 거기에 완성된 천재가 아닌 슬픔을 견디고 있는 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화려한 성취보다 고통의 흔적이 때로 더 진한 울림을 남긴다.


이 책에 등장하는 화가들의 삶은 하나같이 순탄하지 않다. 프리다 칼로는 버스 사고로 평생 몸의 고통을 안고 살았고,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다. 렘브란트는 빛나는 정점 이후 파산과 상실을 겪었고, 이중섭은 가족과 떨어져 가난과 그리움 속에서 마흔을 넘기지 못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고통이 예술가들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시련이 아님을 새삼 깨닫는다. 고통은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내린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견디느냐가 다를 뿐이다. 젠틸레스키의 이야기는 특히 강렬하게 남는다. 그가 그린 유디트는 수동적인 영웅이 아니다. 두 손으로 단호하게 칼을 쥔 여인은 무언가를 단죄하고 있다. 저자는 그 그림 속 홀로페르네스가 실제 가해자의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현실에서 징벌할 수 없었던 것을 캔버스 위에서 완성했다는 해석. 그것이 예술이 가진 힘이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을 형태로 만들어내는 힘. 저자 역시 자신의 아픔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과정에서 글쓰기를 선택했다. 칼로가 그림으로 고통을 풀어냈듯, 그는 문장으로 묵은 감정을 비워낸다. 베르트 모리조의 챕터를 읽으며 나는 오래된 분노 같은 것을 느꼈다. 재능이 있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벽에 부딪혔던 그의 삶이, 먼 옛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가 그어놓은 선 안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모리조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지지해주는 사람 곁에서 예술을 이어갔다. 저자는 그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그 자체로 존중하고 지지하는 관계의 소중함을 조용히 이야기한다.


앙리 루소의 이야기는 이 책에서 가장 따뜻한 챕터처럼 느껴진다. 세관원으로 일하며 주말에만 그림을 그렸던 사람. 마흔이 넘어 미술관 모사 허가증을 받고, 마흔아홉에 은퇴하고서야 전업 작가가 된 사람. 그는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았고, 어떤 단체도 결성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속도로 그림을 그렸다. 루소의 그림은 투박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그 투박함 속에 진정성이 있었다. 남들의 시선에 기죽지 않고 자신이 보는 세계를 그대로 그려낸 용기가 있었다. 저자 역시 마흔을 이야기하며 묘한 안도감을 고백한다. 이제는 요절이라는 단어를 붙일 나이도 아니고, 뭔가를 이루기에 놀라울 만큼 이른 나이도 아닌 마흔.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조금 천천히 가도 된다는 위로가 된다고. 그 고백이 웃음과 함께 가슴에 닿았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나만 뒤처진 것 같다'는 불안을 느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아니라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느냐일지도 모른다. 마네가 주류의 인정을 갈망하면서도 끝내 자신의 시선을 포기하지 않았듯, 우리도 세상의 속도에 끌려가지 않고 자신만의 방향을 찾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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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다른 미술 에세이들과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저자가 그림 앞에서 해설자가 아닌 동행자로 서 있기 때문이다. 지식을 전달하기보다 자신의 내밀한 아픔을 먼저 꺼내놓고, 그 옆에 화가의 이야기를 나란히 세운다. 그래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타인의 고통이 낯설지 않고, 오히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샤갈의 태양이 떠오르는 그림 이야기는 오래 마음에 남는다. 모든 트라우마가 시간이 흐른다고 흐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언젠가 나의 삶에도 밝은 빛이 비추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것. 작은 새싹 하나, 작은 불씨 하나를 마음에 품고 살다 보면, 아픈 기억도 언젠가 지나간 이야기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 저자는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대신, 그 고통과 나란히 앉아 있는 법을 이야기한다. 그것이 이 책이 주는 가장 진실한 위로다. 조선 왕실의 십장생도 병풍 이야기로 끝을 향해 나아가는 마지막 장에는 오래 살기를, 편안하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가득 담겨 있다. 학, 사슴, 소나무, 대나무, 복숭아. 그 소박하고도 애틋한 소망들 앞에서, 나 역시 비슷한 것을 원하고 있음을 느낀다. 특별하거나 화려한 삶이 아니라, 그저 하루하루를 안녕하게 보내고 싶다는 것이다.


책은 '따뜻한 커피 한 잔'에 비유한다. 카페인을 채우기 위해 급히 들이키는 것이 아니라, 향을 음미하고 온기를 느끼며 식기를 기다릴 수 있는 여유. 책을 덮고 나서도 그 온기가 손바닥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미술 지식이 없어도 괜찮다. 그림을 잘 몰라도 상관없다. 그냥 오늘 마음이 흐리다면, 이 책을 들고 조용한 곳에 앉으면 된다. 거기에 나과 비슷한 날씨를 통과했던 사람들이, 그림 속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바람이 불어도 괜찮다. 비가 와도 괜찮다. 폭풍이 몰아쳐도 언젠가는 그친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잠시 숨을 수 있는 그림 속이 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 속 주름진 눈빛 앞에서, 칼로의 자화상이 품은 꽃과 상처 앞에서, 루소가 주말마다 혼자 그려낸 정글 앞에서, 우리는 잠시 멈출 수 있다. 그리고 그 멈춤 속에서, 조금씩 다시 시작할 힘을 얻는다. 촛불처럼 흔들렸던 저자가 자신에게 건네는 편지처럼 시작된 이 책은, 결국 흔들리는 모든 사람에게 보내는 가장 조용한 위로의 말이 된다. 예술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이 되어준다. 그 거울 앞에서 우리는 울어도 되고, 웃어도 되고, 그냥 멍하니 서 있어도 된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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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과 돈의 역사 - 폭력이 펼쳐지는 시대마다 누가 숨은 이득을 챙기는가
던컨 웰던 지음, 윤종은 옮김 / 윌북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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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오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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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언제나 두 곳에서 동시에 벌어진다. 하나는 포연이 자욱한 전장이고, 다른 하나는 수치와 서류가 가득한 회계실이다. 역사는 대개 전자만 기억한다. 영웅의 이름과 결전의 날짜, 깃발이 꽂힌 언덕의 이름을 기록한다. 그러나 진정한 승패를 결정한 것은 종종 후자였다. 군량미가 얼마나 남았는지, 국채를 누가 사주는지, 세금을 얼마나 걷을 수 있는지가 전쟁의 운명을 갈랐다. 경제학자이자 역사가인 던컨 웰던은 그의 저작에서 이 오래된 진실을 정면으로 다룬다. 그는 돈의 흐름을 따라가면 전쟁의 뿌리가 보인다고 주장한다. 역사 속의 전쟁은 가시적인 총칼의 싸움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더 깊은 흔적을 남긴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이기도 했다. 돈을 둘러싼 그 보이지 않는 전쟁의 역사를 이야기 한다.


역사속의 바이킹의 습격. 우리는 뿔 달린 투구와 용머리 뱃머리를 떠올리지만, 그 약탈은 냉정하게 보면 경제적 행위였다. 9세기 유럽은 생산성이 낮았고, 잉여를 축적하는 방법은 제한적이었다.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 직접 생산하는 것보다 효율적인 경우가 많았다. 폭력은 일종의 사업 모델이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그 이후다. 약탈로 시작한 세력들이 일정 규모에 이르면, 계속 약탈하는 것보다 정착하여 세금을 걷는 편이 더 이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농민을 죽이면 그 해의 곡식을 빼앗을 수 있지만, 살려두고 보호해주면 매년 세금을 걷을 수 있다. 이렇게 약탈자가 보호자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국가라는 제도가 탄생했다. 사회학자 찰스 틸리의 명제인 '국가가 전쟁을 만들고 전쟁이 국가를 만든다'는 이 역설적 진실을 담고 있다. 전쟁 자금 조달의 필요성은 국가 제도 전반을 혁신했다. 잉글랜드 은행이 대표적인 사례다. 1694년 설립된 이 기관의 창립 목적은 물가 안정이나 금융 시스템 감독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하나, 프랑스와의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전쟁이 중앙은행을 낳았고, 중앙은행은 근대 금융 시스템을 낳았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국채, 지폐, 복식부기 등 근대 금융의 핵심 도구들은 상당 부분 전쟁의 필요에서 발명되거나 정교화되었다. 죽음을 위한 회계가 삶을 위한 경제의 토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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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 이후 전쟁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19세기 이전의 전쟁에서 국민총생산의 10~15%를 군비에 쏟아붓는 것은 대단한 노력이었다. 그러나 20세기의 두 차례 세계대전은 그 비율을 50%까지 끌어올렸다. 경제의 절반이 전쟁을 위해 돌아가는, 이른바 총력전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새로운 전쟁에서는 공장이 전장만큼 중요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가 무너진 것은 전선의 패배 이전에 경제의 붕괴였다. 농촌 인구의 85%를 차지하던 러시아는 전쟁이 길어지자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다. 군수품 생산을 위해 공장들이 소비재 생산을 중단하자, 농민들은 팔 물건이 없어진 도시에 식량을 팔 이유가 없어졌다. 경제적 교환의 사슬이 끊어지며 도시는 굶주렸고, 평화와 빵을 외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았다. 전선에서 진 것이 아니라, 돈의 흐름이 막혀 무너진 것이다. 반면 영국은 역설적이게도 식량을 대부분 수입에 의존했음에도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견뎌냈다. 그 비결은 유연성에 있었다. 식량을 스스로 기르지 않는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농업 인구가 적다는 뜻이었다. 영국은 그 인력을 공장과 군대로 신속하게 재배치할 수 있었다. 해상 수송로만 지킨다면, 세계의 자원이 곧 영국의 자원이었다. 자급자족이 강점이 아니라 개방과 연결이 강점이 되는, 경제적 전쟁의 역설이었다.


20세기의 두 세계대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전선을 열었다. 바로 경제 봉쇄와 자원 차단의 전쟁이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을 향한 해상 봉쇄를 실시하며 흥미로운 무기를 동원했다. 회계사들이었다. 네덜란드처럼 중립국을 통한 우회 수입을 차단하기 위해, 영국은 해당 국가의 전전 수입 통계를 분석하여 그 이상의 물자가 들어오면 독일로 흘러간다고 간주하고 차단했다. 장부와 통계표가 무기가 된 것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는 전략 폭격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했다. 미군은 독일의 합성 연료 공장, 볼베어링 공장 등 전쟁 경제의 목줄을 끊으면 전쟁이 빠르게 끝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 기대를 배반했다. 현대 경제는 한 고리가 끊어지면 전체가 붕괴하는 사슬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많은 연결로 얽힌 그물망이었다. 독일은 대체재를 찾고, 생산 공정을 바꾸고, 비축분을 소진하며 버텼다. 경제는 폭격보다 질겼다. 이 교훈은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오늘날의 경제 제재는 그 논리적 계승자다. 러시아를 향한 서방의 제재가 전쟁을 빠르게 끝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현대 경제의 그 질긴 그물망 때문이기도 하다. 그물망을 완전히 잘라내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사람들은 죽는다.


전쟁이 경제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의 또 다른 얼굴은, 전쟁이 경제적 오판에 의해 시작된다는 것이다. 1909년 저널리스트 노먼 앤젤은 '거대한 환상'에서 국가들이 서로 너무나 긴밀하게 경제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에 전쟁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그 분석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5년 후 세계는 4년간의 대학살을 경험했다. 역사는 경제적 이익이 전쟁을 막지 못한다는 것을 거듭 증명해왔다.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은 처음에는 황금을 향한 욕망으로 시작되었지만, 거대한 은 유입이 오히려 본국의 인플레이션을 불러오고 산업을 피폐화시키는 역설을 낳았다. 부를 위한 전쟁이 부를 갉아먹었다. 냉전이 끝난 후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 학자들도 비슷한 실수를 반복했다. 자유무역과 민주주의의 확산이 전쟁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었지만, 21세기에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군비 분야에서도 경제적 유인이 분석을 왜곡하는 현상은 주목할 만하다. 냉전 시절 미국의 각 군은 소련의 위협을 자신들의 관할 영역에서 가장 크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적이 강해야 예산을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에도 서방 군사 전문가들이 러시아군을 과대평가했던 것 역시, 수십 년간 러시아를 강한 적으로 규정해온 제도적 유인과 무관하지 않다. 전쟁에 대한 분석 자체가 경제적 이해관계에 의해 오염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은 결국 돈의 문제인가? 웰던 자신도 인정하듯, 7점짜리 대답이 가장 정직하다. 경제는 전쟁의 결정적 요소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경제적 논리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완전하다. 물론 에너지 자원, 공업 지대, 흑해 접근권 같은 경제적 요소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푸틴의 행동에는 구소련 제국의 영광 회복이라는 역사적 강박과, 슬라브 민족의 통합이라는 문명적 집착이 깔려 있다. 그것은 경제학 교과서가 아니라 역사 신화에서 나온 것이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없었다면 20세기는 어떻게 달랐을까? 이 가정적 질문은 개인과 광기와 이념이 경제적 구조만큼이나 역사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경제는 전쟁의 토양이지만, 씨앗을 뿌리는 것은 사람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 돈의 전쟁은 오늘도 계속된다. 환율 조작과 관세 전쟁, 기술 수출 통제와 공급망 재편, 에너지 가격 무기화와 금융 제재. 총성은 없지만 그 피해는 실제적이다. 그리고 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 언제, 어떻게 가시적인 폭력으로 전환되는지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다. 역사를 돌아보면, 그 전환점에는 언제나 경제적 논리와 인간적 감정이 뒤엉킨 복잡한 방정식이 있었다. 그 방정식을 읽어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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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의 탄생 - 실리콘밸리식 팀장 수업, 개정증보판
줄리 주오 지음, 김고명 옮김 / 더퀘스트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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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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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의 제목을 접했을 때, 나는 잠시 멈칫했다. '팀장'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팀장이라는 역할은 늘 내게 딱딱하고 권위적인 이미지로 다가왔다. 명령을 내리고, 성과를 평가하며, 조직의 톱니바퀴를 관리하는 사람. 그것이 내가 막연히 그려온 관리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페이스북에서 25세에 팀장이 된 저자 줄리 주오의 이야기는 내가 가진 편견을 조용히, 하지만 확실하게 허물어뜨렸다. 주우는 책의 첫 장부터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녀 역시 처음에는 두려웠다고. 준비되지 않은 채 리더의 자리에 앉았고, 매일 '내가 정말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인가'라는 의심과 싸웠다고. 그 솔직함이 책의 첫 번째 선물이었다. 완벽한 영웅의 무용담이 아니라, 나처럼 평범하게 넘어지고 배운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안도감. 그것이 나를 페이지로 끌어들였다.


주오가 제시하는 가장 근본적인 통찰은 단순하지만 강렬하다. 관리자라는 직함이 곧 리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 직책은 부여받는 것이지만, 리더십은 증명하는 것이다.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권위에만 기대는 관리자는 오히려 팀의 동력을 잃게 된다. 이 말은 내 과거의 어떤 경험을 떠올리게 했다. 예전에 한 프로젝트에서 직함상 리더였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회의 때마다 결정을 내리는 대신 승인만을 기다렸다. 팀원들은 점점 그에게 문제를 가져오지 않게 되었고, 결국 비공식적인 리더가 따로 형성되었다. 저우의 언어로 설명하자면, 그는 관리자였지만 리더는 아니었다. 팀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으로 동일시하지 못했고, 사람들이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주지 못했다. 진정한 리더십은 정렬(alignment)에서 시작된다. 팀원 각자가 가진 개인의 목표와 조직의 목표가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될 때, 비로소 팀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관리자의 역할은 그 방향을 제시하고, 각 사람이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도록 돕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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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오는 훌륭한 관리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대신, 왜 해야 하는지를 말한다고 강조한다. 이 구분은 얼핏 사소해 보이지만, 팀의 분위기와 성과에 미치는 영향은 극적으로 다르다. 지시를 받은 사람은 그 일이 끝나면 멈춘다. 하지만 이유를 이해한 사람은 그 너머를 보기 시작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예상치 못한 문제에도 유연하게 대처하며, 단순한 실행자가 아닌 공동 창조자가 된다. 저우가 페이스북에서 팀원들과 진행했다는 '비평 회의(critique meeting)'가 인상적이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아이디어를 발표하고, 솔직한 피드백을 교환하는 문화 속에서 사람들은 단순히 시킨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물을 함께 만들어가는 주체가 된다. 학교나 직장에서 우리는 종종 아이디어를 감춘다. 빼앗길까봐, 무시당할까봐. 그러나 저우는 그 반대의 문화를 제안한다. 아이디어를 공개하고, 불완전한 상태에서도 피드백을 받으며 발전시켜 나가는 것. 그것이 신뢰의 토양이 되고, 결국 더 나은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녀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책에서 내가 가장 오래 머문 대목은 관리자가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다는 부분이었다. 관리자의 임무는 방 안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똑똑해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라는 저우의 말은 그 자체로 하나의 해방감이었다. 나는 늘 리더는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르는 것을 인정하면 권위가 흔들린다고 여겼다. 그러나 저우는 그 두려움이 오히려 팀을 약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리더 앞에서, 팀원들은 비로소 자신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그 안에서 진짜 학습이 시작된다. 신뢰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일관성, 솔직함,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시간이 쌓여야 한다. 저우가 일대일 면담에서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그 시간은 관리자가 업무를 확인하는 자리가 아니라, 팀원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관리자가 귀를 기울이는 자리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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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오는 피드백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한다. 그것이 관리자가 가진 가장 강력한 도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드백은 잘못 전달될 경우 오히려 동기를 꺾고 관계를 손상시킨다. 그녀가 강조하는 것은 피드백의 적시성과 구체성이다. 연간 평가에서 처음으로 문제를 듣게 되는 팀원은 배신감을 느낀다. 그 자리는 성장의 기회가 아니라 심판의 자리가 된다. 반면 업무 직후에, 구체적인 행동을 기반으로 전달되는 피드백은 사람을 성장시킨다. '보고서가 별로였어'가 아니라, '이 섹션에서 독자의 관점이 빠져 있어서, 다음에는 이런 방식을 시도해보면 어떨까?'라는 식의 언어가 필요하다. 긍정적 피드백도 마찬가지다. 잘했다는 한 마디가 사람을 얼마나 오래 붙들어두는지, 나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인정받는다는 느낌은 단순한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일에 대한 태도와 헌신의 깊이를 바꾼다. 저우의 책을 읽으며, 나는 내가 그동안 얼마나 자주 그 선물을 건네는 것을 잊고 살았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관리자가 되고 나서 가장 흔하게 빠지는 함정 중 하나는 '내가 하면 더 빠르다'는 생각이다. 자신이 그 분야의 전문가일수록 이 유혹은 커진다. 하지만 주오는 단호하게 말한다. 관리자의 역할은 직접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잘 처리될 수 있는 시스템과 문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위임은 단순히 일을 나누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신뢰의 표현이고, 팀원의 성장 기회를 만드는 투자다. 내가 모든 것을 쥐고 있는 한, 팀은 나 없이는 기능하지 못하는 구조가 된다. 그것은 지속 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진정한 리더십의 목표와도 어긋난다. 주오가 말하는 '승수 효과(multiplier effect)'가 바로 여기서 등장한다. 내가 천 잔의 레모네이드를 팔 수 있다면, 그 방법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서 함께 이천 잔을 파는 것. 리더십의 본질은 나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팀 전체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데 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은 문장은 이것이었다. "훌륭한 관리자는 리더이기 이전에, 리더를 길러내는 사람이다." 이것은 단순한 명제처럼 들리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자신의 빛을 팀원에게 양보하는 것, 성과의 공을 나누는 것, 그리고 자신이 없어도 잘 돌아가는 팀을 만드는 것. 이 모든 것은 자기 자신보다 팀의 성장을 우선시하는 마음 없이는 불가능하다. 줄리 주오의 책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어떤 기술이나 방법론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태도였다. 리더십은 완벽한 사람이 되려는 노력이 아니라, 팀이 더 나아질 수 있도록 자신을 계속해서 다듬어가는 과정이라는 것. 실수를 인정하고, 배우고, 타인의 성장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진정한 리더가 된다. 리더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그것은 저우의 말이기도 하지만, 이 책을 읽은 후 나 자신에게 건네는 다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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