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균열내기 - 뒤라스, 카뮈, 에르노를 지나 다만 내가 되기 위해
신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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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대개 무언가를 채우려 한다.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비어 있는 자리를 메우기 위해. 신유진님의 말을 빌리자면, 완전해지고 싶어서, 공백과 균열 없이 가득 찬 상태에 닿고 싶어서. 그 욕망은 순수하다. 아니, 정확히는 순진하다. 책을 읽을수록, 채울수록 오히려 더 많은 모름이 보인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다. 언젠가 책을 읽으면 세계가 해명될 것이라고 믿었다. 위대한 작가들의 문장을 충분히 흡수하면, 언젠가는 삶이라는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고. 그러나 뒤라스를 읽고, 카뮈를 읽고, 크리스토프를 읽을수록 퍼즐은 완성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전까지 보이지 않던 빈칸들이 하나씩 드러났다. 읽기란 채움이 아니라 발굴이었다. 그리고 발굴된 빈칸들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

신유진님은 '균열'을 파괴로 읽지 않는다. 균열은 H라는 알파벳이 내리찍혀 갈라지는 순간, 터져 나오는 비명이다. 쩍, 쨍그랑, 우지끈. 그런데 그 소리는 공허하지 않다. 무언가가 깨진다는 것은 무언가가 거기 있었다는 뜻이다. 껍질이 깨지는 것은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균열은 실패가 아니라 증거다. 뫼르소가 해변에서 방아쇠를 당긴 것도,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낯선 언어의 불완전함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쓴 것도, 그들이 더 이상 온전하기를 포기한 순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을 짓누르는 것들을 정면으로 감당하려 했던 몸짓이었다. 태양을 쏘고 싶었던 뫼르소의 총구는 엉뚱한 곳을 향했지만, 그 행위 안에는 거대하고 무심한 존재에 맞서려는 처절한 의지가 있었다. 크리스토프의 짧고 건조한 문장들은 언어라는 적에게 내어주지 않으려는 마지막 영토였다. 그렇다면 균열은 자신을 잃는 일이 아니다. 자신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그 속을 처음으로 보게 되는 일이다. 껍질은 우리를 보호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가두기도 한다.

뒤라스가 말한 글쓰기는 '발현'이 아니라 '해독'이다. 이미 있는 것을 읽어내는 일. 간조의 해변에 남겨진 발자국과 해초와 깨진 조개들처럼, 우리 안에도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채 쌓여 있는 것들이 있다. 읽기란 그것들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것에 비로소 형태를 부여하는 일이다. 나는 이 생각이 위안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언가를 이해하지 못했을 때, 채우지 못했을 때, 나는 그것을 결핍으로 읽었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은 결핍이 아니라 미해독의 상태였다. 이미 내 안에 있지만, 아직 읽히지 않은 것들. 간조가 되어야만 드러나는 해변처럼, 어떤 것들은 시간과 고독과 실패를 거쳐야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균열을 받아들이는 것은 실패를 용납하는 것과 다르다. 신유진이 다루는 작가들, 그리고 그들의 인물들은 계속해서 실패한다. 하지만 그 실패는 포기가 아니다. 끝을 유예하는 일이다. 불이 꺼질 테지만 무대에 남아 있는 것. 생을 조금 더 살아보는 것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끝내 프랑스어를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그 불완전함을 감추지 않고 글 속에 드러냈다. 그의 짧고 파편적인 문장들 사이의 행간에서 오히려 더 크고 더 진실한 무언가를 만난다.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틈이 생기고, 그 틈으로 들어온다. 몰리나르가 그 고통스러운 글쓰기를 고집한 이유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균열의 역설이다. 깨지는 것은 나를 잃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이다. 우리가 온전히 채워진 척할 때, 우리는 오히려 자신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페렉은 사물의 목록이 길어질수록 존재가 선명해지는지, 아니면 그 속에 파묻혀 지워지는지 물었다. 나는 이 질문을 읽기와 쓰기에 대입해 보고 싶다. 읽은 책이 쌓일수록 나는 더 선명해지는가, 아니면 더 흐려지는가. 신유진의 대답은 어떻게 읽느냐에 달려 있다. 나의 세계를 안전하게 확인하는 읽기는 나를 가두지만, 존재의 밑바닥을 흔들고 절대적인 낯섦을 보게 하는 읽기는 나를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 균열을 두려워하지 않는 읽기다. H가 내리찍히는 소리. 그것이 무엇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소리가 났다는 것은, 아직 살아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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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언트 브레인
박주원 지음 / 모티브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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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고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오랫동안 Al라는 문 앞에서 서성였다. 손잡이를 잡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등을 돌리지도 못한 채. 화면 너머에서 화려하게 답변을 쏟아내는 AI를 바라보며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했다. 저건 나와 다른 세계의 이야기다. 기술에 능숙한 사람들, 젊고 손가락이 민첩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 스스로 선을 그었다. 그 선은 누가 그어준 것이 아니었다. 내가 스스로, 조용히, 그리고 아주 단단하게 그어둔 선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내가 두려워한 것은 AI 그 자체가 아니 라, AI 앞에서 무능해질지도 모르는 '나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생성형 Al, 즉 LLM(Large Language Model)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먼저 뒤집어야 할 편견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Al를 '정답을 가진 존재'로 여긴다. 그래서 우리는 AI에게 묻는다. 짧게, 단순하게, 마치 검색창에 키워드를 던지듯이. 그리고 AI가 기대에 못 미치는 답을 내놓으면 실망하며 말한다. "AI가 별거 없네." 하지만 그것은 거울 앞에 서서 흐릿하게 보인다고 거울을 탓하는 것과 같다. AI는 내가 던진 질문의 수준만큼 답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AI는 내 사고의 깊이를 그대로 반영해 보여주는 존재다. 그러므로 AI 시대에 가장 핵심적인 역량은 '얼마나 많이 아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정교하게 질문할 수 있는가'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2500년 전에 이미 질문이 지혜의 시작임을 보여주었다. 훌륭한 의사는 환자에게 "어디가 아프세요?"라고만 묻지 않는다. "언제부터, 어떤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강도로 아픈지"를 세심하게 물으며 문제의 핵심에 다가간다. AI도 마찬가지다. 나의 상황, 나의 목적, 나의 맥락을 구체적으로 담은 질문일수록 AI는 비로소 진짜 '생각하는 파트너'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더 나아가, AI는 단지 내 질문에 답하는 존재에 머물지 않는다. 내가 막막하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를 때, AI에게 역할을 역전시킬 수 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파악하기 위해 당신이 먼저 질문해 달라고. 이 발상의 전환이 의외로 강력하다. AI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각도에서 질문을 던지고, 그 과정에서 나는 내 문제를 훨씬 선명하게 바라보게 된다. AI는 때로 거울이 되고, 때로 나침반이 된다. 결국 좋은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는 평소의 사고 훈련이 필요하다. 일상에서 현상을 피상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왜?""어떻게?", "만약 이렇다면?"이라는 질문 습관을 몸에 익히는 것. 그것이 AI 시대의 진짜 공부다.

한때 세상은 '타고난 재능'의 논리로 굴러갔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 글을 유려하게 쓰는 사람, 음악적 감각이 탁월한 사람. 그들이 콘텐츠를 만들고, 브랜드를 세우고, 시장을 선점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감탄하며 소비하는 역할에 머물렀다. 그런데 생성형 AI의 등장은 이 구도를 조용히, 그러나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다. 이제는 전문적인 디자인 훈련 없이도 이미 지를 만들 수 있고, 악기를 다루지 못해도 음악을 구성할 수 있으며, 유려한 문장력이 없어도 설득력 있는 글을 완성할 수 있다. AI가 기술적 실행의 장벽을 허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AI 시대는 '인간다움'의 가치를 더욱 높이는 시대다. AI가 실행을 대신할 수 있게 된 만큼, 이제 진짜 경쟁의 무대는 무엇을 만들 것인가, 왜 이것이어야 하는가,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할 것인가의 영역으로 이동했다. 다시 말해, 아이디어와 관점과 개성이 핵심 경쟁력이 된 것이다. 이것은 사실 반가운 소식이다. 선천적 재능은 노력으로 쉽게 따라잡기 어렵다. 하지만 아이디어는 다르다. 아이디어는 경험에서 나오고, 관찰에서 자라며, 깊이 생각하는 사람에게 찾아온다.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삶의 경험, 수많은 실패와 성찰 속에서 길러진 통찰, 그것이야말로 Al라는 강력한 도구를 가장 지혜롭게 움직일 수 있는 연료가 된다. 18세기 산업혁명 당시 방직기계의 등장에 공포를 느낀 직공들이 기계를 파괴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기계는 멈추지 않았고, 결국 기계를 이해하고 활용한 사람들이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이 되었다. Al 앞에서 우리는 지금 같은 기로에 서 있다. 파도를 막으려 할 것인가, 아니면 파도 위에 올라탈 것인가. 그 선택 은 기술력의 차이가 아니라 태도의 차이에서 갈린다.

AI는 지금 우리 앞에 서 있는 거인이다. 그 어깨 위에 올라서는 것, 그것이 두려움의 반대편에 있는 가능성이다. 나이가 든 다는 것은 세상을 향해 열어둔 창문을 하나씩 닫아가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경험과 지혜로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되는 과정이다. 그 지혜가 AI라는 도구를 만날 때,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두려움을 내려놓는 것, 완벽하지 않아도 일단 시작하는 것, 그리고 AI와 함께 질문하고 탐구하고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내가 AI 시대를 살아가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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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바라미 돈 관리의 기술 - AI 주식투자부터 저축 대출 연금까지 10년 차 은행원이 알려주는 현실 재테크
썬바라미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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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통장 잔액은 늘 내 기대를 배신했다. 월급은 꼬박꼬박 들어왔고, 딱히 사치를 부린 기억도 없었다. 그런데도 연말이 되면 손에 쥐어진 것은 희미해진 계획과 텅 빈 저축 통장뿐이었다. 처음에는 '월급이 적어서'라고 생각했다. 그다음에는 물가가 올라서 라고 위안을 삼았다. 하지만 솔직히 들여다보면, 나는 돈을 관리한 것이 아니라 그저 돈이 지나가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그 이유를 명확히 마주했다. 문제는 수입의 크기가 아니었다. 순서였다. 저자는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축도 제대로 하기 전에 투자부터 시작한다고. 아기가 걷기도 전에 뛰려 하는 것처럼, 기초 없이 수익률부터 쫓는 재테크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 말이 날카롭게 가슴에 박혔다. 나는 정확히 그 실패의 루트를 걸어왔기 때문이다.

책을 읽기 전, 나에게 재테크란 곧 주식이었다. 유튜브에서 흘러나오는 종목 추천 영상을 보며 소액을 넣었다가 빼기를 반복했고, 어느 날은 친구가 했다는 코인 투자 이야기에 솔깃해 무작정 따라 했다. 그렇게 몇 번의 손실을 겪고 나서야 나는 재테크를 완전히 포기했다. 아니, 정확히는 '나는 재테크와 맞지 않는 사람' 이라는 결론을 내려버렸다. 하지만 이 책은 그 것이 내 성격이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순서의 문제였음을 알려주었다. 저자가 제시하는 올바른 순서는 간명하다. [돈 관리 + 저축 +투자] 이 세 단계는 단순해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놀랍도록 많은 사람들이 역순으로 움직인다. 투자부터 시작하고, 실패하고, 그제야 저축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자기 돈의 흐름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는 채 허덕인 다. 나 역시 그 흐름의 한복판에 있었다. 저자는 재무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모든 재테크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한다. 건강검진 없이 건강을 논하지 않듯이, 수입과 지출의 구조를 냉정하게 파악하지 않고 투자를 논하는 것은 지도 없이 낯선 도시를 헤매는 것과 같다. 가계부를 쓰고, 비상금을 마련하고, 고금리 부채부터 상환하는 것. 이 당연해 보이는 과정들이 실은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특히 비상금에 대한 조언이 인상적이었다. 평소 월 생활비의 6개월치를 모아두라는 것. 단순한 수치이지만, 그것이 없을 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를 생각하면 무게가 달라진다. 비상금이 없는 사람은 예상치 못한 지출이 생기면 신용카드 할부나 카드론에 손을 댈 수밖에 없고, 그 순간부터 재무 구조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결국 비상금은 재무 설계 전체를 보호하는 방어막인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대출을 금기어처럼 여겼다. 대출을 받는다는 것은 곧 경제적으로 실패했다는 신호처럼 느껴졌고, 빛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주변에서도 "빚은 없을수록 좋다", 대출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라는 말 을 자주 들었다. 그러나 이 책은 그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뒤집는다. 대출은 나쁜 것이 아니라, 잘못 쓰는 것이 나쁜 것이다. 저자는 적절한 대출이 자산 성장의 촉매제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무분별한 차입을 권정하는 것이 아니다. 금리 구 조를 이해하고, 자신의 소득 수준에 맞는 상환 계획을 세우며, 금리 변동 상황에 대한 스트레스 테스트를 스스로 해보는 것. 그것이 대출을 두려움이 아닌 전략으로 다루는 방식이다. 특히 내 집 마련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시각 전환은 결정적이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의 주택 가격이 수억 원을 훌쩍 넘는 현실에서 대출 없이 내 집을 마련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문제는 '대출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얼마를, 어떻게, 어떤 조건으로 받을 것인 가가 되어야 한다. 대출을 피하려다 정작 적절한 시기에 주택을 구입하지 못하고, 더 오른 집값 앞에서 좌절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숱하게 보아왔다. 그 안타까움이 이제야 다른 맥락에서 이해된다. 물론 이 책이 대출을 무조건 권장하는 것은 아 니다. 핵심은 '적절함'이다. 자신의 가처분 소득, 상환 여력, 금리 시나리오를 따져보고, 그 범위 안에서 레버리지를 활용하 는 것. 그것이 책에서 말하는 '제대로 빌리기'의 본질이다.

종합주가지수는 최고치를 경신하지만, 공포지수 또한 높은 것이 현재 우리나라의 수식시장이다. 초보자의 대부분이 떨어 졌을 때 겁에 질려 매도하고, 오르면 추격매수한다. 등이 서늘해졌다. 그것이 정확히 내가 해온 일이었기 때문이다. 시장이 떨어지면 더 떨어질까봐 팔았고, 오르면 뒤늦게 올라타다가 꼭지에서 물렸다. 논리도 없었고 원칙도 없었다. 오직 감정만 있었다. 행동재무학에서 말하는 현재 편향, 손실 회피, 과신 편향은 그저 학문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의 투자 결 정 속에서 살아 숨쉬는 심리적 함정이다. 우리는 이성적으로 '장기 투자가 맞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가가 5% 떨어지는 순간 손가락이 매도 버튼을 향한다. 뇌는 알고, 손은 모른다. 이 괴리를 줄이기 위해 저자가 제안하는 것이 바로 '도깨비 포트 폴리오'와 같은 자동화•구조화된 투자 시스템이다. 하락 시 자동 매수, 상승 시 자동 일부 수익 실현, 그리고 평소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이 단순한 구조가 오히려 감정의 개입을 막고 장기 복리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것은, 어쩌면 투자에서 가장 어려운 역설이다. 가장 좋은 투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투자라는 사실. 이것을 받아들이기까지 나는 꽤 많은 수업료를 냈다. ISA를 통한 절세 장기 투자, 퇴직연금의 구조적 활용, 적정 보험료의 비율 설정까지.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내용은 더욱 구체적이고 실용적이 된다. 20대에 읽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이라도 읽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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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PT 토탈 솔루션
장우혁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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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기억 속에는 골목이 있었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 사이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넘치고, 담벼락 너머로 이웃집 된 장찌개 냄새가 흘러들어오던 그 시절. 그러나 어느 순간 그 골목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반듯하게 줄 세워진 콘크리트 탑들이 들어섰다. 우리는 그것을 ' 아파트'라고 부른다. 1982년, 윤수일은 아파트를 '그리움의 공간'으로 노래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창가에서 바라보는 아파트의 불빛은, 당시 급속도로 진행되던 도시화 속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한 사람들의 설렘과 외로움을 동시에 담아냈다. 수십 년이 지난 오늘, 로제의 <아파트>는 전 세계를 강타하며 K-POP의 언어로 아파트를 다시 소환했다. 같은 단어이지만, 그 무게와 질감은 세대마다, 시대마다 다르게 울린다. 그렇다면 아파트란 과연 무엇인가? 단순한 주거 형태를 넘어, 한국인의 정체성과 욕망, 그리고 공동체의 변화를 응축한 살아있는 사회학적 텍스트가 아닐까.


아파트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는 오래전부터 '함께 살되 분리되는' 방식을 끊임없이 고민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고대 로마의 인술라(Insula)는 5~7층 규모의 집합 주거 건물로, 주로 빈민층이 거주하던 공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가장 낮은 계층의 주거 형태였던 고층 집합주택이 오늘날 한국에서는 가장 선호되는 주거 유형이 되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중세의 롱하우스는 3대가 함께 거주하며 공동체적 삶을 실현하는 공간이었다. 혈연을 중심으로 모든 구성원이 하나의 지붕 아래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방식. 이는 분명 따뜻하고 견고한 공동체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아파트는 그 방향을 정반대로 틀었다. 같은 건물, 같은 층에 살면서도 옆집 이웃의 얼굴조차 모르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세상. 문을 닫으면 완벽하게 분리되는 개인의 왕국. 우리는 이것을 '진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면 '상실'이라고 불 러야 할까. 한국의 아파트 역사는 일제강점기의 흔적을 딛고 시작되어, 1970~80년대 압축적 경제 성장과 함께 폭발적으 로 확산되었다. 마포아파트, 반포주공아파트, 그리고 강남 개발과 함께 솟아오른 수많은 단지들. 아파트는 '중산층의 표상'이자 '성공의 증거'가 되었다. 집 한 채를 장만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고, 어느 아파트에 사느냐가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가늠하는 기준이 된 사회. 이것이 바로 K-APT가 품고 있는 복잡한 민낯이다.


아파트를 구성하는 물리적 구조그 안에는 시대가 요구하는 삶의 방식과 가치관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판상형 아파트는 한국의 주거 문화를 대표하는 형태다. 남향을 향해 일렬로 늘어선 동들, 최대한의 채광과 통풍을 확보하려는 실용적 설계. 이는 한옥의 남향 배치 원리를 현대 건축으로 이식한 것이기도 하다. 타워형이 도시의 랜드마크를 자처하며 조망권을 강조한다면, 판상형은 여전히 '햇빛이 잘 드는 집'을 최고로 여기는 한국인의 뿌리 깊은 정서를 반영한다. 발코니의 변화는 더욱 흥미롭다. 한때 화분을 가꾸고 빨래를 널던 반외부적 공간이었던 발코니는, 확장이 허용되면서 실내 면적을 넓히는 수단으로 변모했다. 실용성의 승리이자, 동시에 무언가를 잃어버린 변화이기도 하다. 발코니에서 이웃과 나누던 짧은 인사,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느끼던 그 경험들이 점점 실내의 창유리 너머로 밀려나고 있다. 무량판 구조와 철근콘크리트 공법, 외단열 시스템과 고성능 창호. 건축 기술의 진보는 분명 우리의 삶을 쾌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기술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다. 바로 '층간 소음'이다. 아무리 두꺼운 슬래브를 깔고 차음재를 설치해도, 위층 아이의 발소리는 아래층 주민의 천장을 뚫고 내려온다. 이것은 서로를 배려하지 않는 공동체 의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콘크리트 벽이 아무리 두꺼워도, 인간 사이의 감수성을 대신할 수는 없다.


현대 아파트는 피트니스센터, 작은 도서관, 스카이라운지, 심지어 실내 수영장과 시어터까지 갖추며 '자급자족 도시'를 표 방한다. 단지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모든 것이 해결되는 완결된 세계. 이것은 편의의 극대화인가,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고립인가.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시설들이 '커뮤니티'를 표방하면서도 실제 공동체 형성에는 크게 기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같은 피트니스센터를 이용하면서도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같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면서도 대화 를 나누지 않는다. 공간은 공유하되, 삶은 분리된다. 이것이 바로 현대 K-APT가 안고 있는 역설이다. 살고 싶은 집과 살 수밖에 없는 집의 간극은 이 맥락에서 더욱 날카롭게 다가온다. 교통 편의성, 학군, 녹지 공간, 최신 커뮤니티 시설을 갖춘 ’살고 싶은 집‘은 끝없이 오르는 가격표를 달고 있고, 그 가격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살 수밖에 없는 집'으로 밀려난다. 주거의 질이 경제력으로 결정되는 사회에서, 아파트는 평등한 주거의 꿈이 아니라 불평등을 공고히 하는 구조물이 되 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파트에는 여전히 희망의 씨앗이 있다. 어린이집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노인 커뮤니티 센터 에서 바둑을 두는 어르신들, 다함께돌봄센터에서 서로의 아이를 돌봐주는 부모들. 설계된 공동체이지만, 그 안에서 자연 스럽게 피어나는 연대의 감정들. 아파트 커뮤니티가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시설의 양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질이 핵심이다.


IOT와 AI 기반의 스마트홈 시스템, 로봇 기반 유지보수, 헬스케어 연동 주거 환경. 미래의 아파트는 기술적으로 더욱 정교해질 것이다. 스마트폰 하나로 아파트의 가치를 분석하고, VR로 동호수를 미리 체험하는 시대. 편리함은 계속해서 진화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짜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더 좋은 입지, 더 높은 브랜드 가치, 더 많은 커뮤니티 시설을 갖춘 아파트로의 끝없는 이동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우리는 콘크리트 벽 너머의 이웃과 진짜 눈을 마주치는 삶을 원하는가? K-APT가 세계 주거 문화의 새로운 기준이 될 잠재력을 지닌 것은 사실이다.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공동체적 삶을 동시에 구현하려는 한국 아파트의 시도는, 전 세계적인 도시 과밀화 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해법이 진정으로 의미 있으려면, 숫자로 환산되는 가치를 넘어 사람이 중심에 서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진짜 살고 싶은 집은, 어쩌면 특정 아파트 단지가 아니라 그 안에서 나눌 수 있는 관계와 온기인지도 모른다. 콘크리트가 아무리 단단해도, 결국 집을 집답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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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스윙의 정석
김민준 지음 / 모티브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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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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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골프채를 잡았던 날을 기억한다. 연습장 한편에 서서 어색하게 클럽을 휘두르며, 나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연습만 많이 하면 되겠지.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잘 치겠지.' 그렇게 수십만 원짜리 레슨을 끊고, 유튜브 영상을 새벽까지 찾아보 고, 주말마다 연습장을 찾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연습장에서는 분명히 잘 맞는데, 필드에 나가면 처음 보는 사람처럼 무너졌다. 어제는 분명히 됐던 스윙이 오늘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이유를 나는 오랫동안 '재능의 부 족'이나 '노력의 부족'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골프 스윙의 정석>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문제는 나의 재능이 아 니라, 내가 골프를 바라보는 방식 그 자체였다.


저자 김민준님은 말한다. 우리는 지나치게 ' 좋은 스윙 '을 만드는 데 집착한다고. 흔들림 없이, 제자리에서, 안정적으로 공을 치는 스윙. 그 이미지가 골프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너무 깊이 자리 잡혀 있다고. 그 말이 가슴에 박혔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그랬다. 레슨을 받을 때마다 거울을 보며 내 팔의 각도를 확인하고, 스윙 궤도가 예쁜지 다른 사람의 눈으로 내 동작을 평가하려 했다. 공이 어디에 맞았는가보다, 내가 어떻게 생겼는가에 더 신경 썼던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스윙은 공을 맞히기 위한 수단일 뿐,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공이 클럽 페이스의 정확한 스팟에 맞는 느낌, 그 감각을 익히는 것이 먼저다. 골프 스튜디오에 거울을 두지 않는다는 저자의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처음엔 의아했다. 거울이 없으면 내 자세를 어떻게 확인하지? 하지만 그 의도를 이해하고 나니, 오히려 그 선택이 가장 용감한 교육 철학처럼 느 껴졌다. 자신의 스윙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공이 맞는 '느낌'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 눈이 아닌 몸으로 골프를 배우게 하는 것. 그것이 진짜 실력을 쌓는 방식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연습장에서 10번 치면 9번은 페어웨이 정중앙, 그런데 필드에 나가면 첫 홀부터 OB. 나는 이 간극을 오랫동안 설명할 수 없었다. 분명히 같은 내 몸이고, 같은 클럽인데. 왜 달라지는 걸까. 저자는 이것을 스포츠 심리학적 관점에서 명쾌하게 설명한다. '방어적 근 긴장.' 필드라는 낯선 환경, 동반자의 시선, 스코어에 대한 압박이 몸을 긴장시키고, 그 긴장이 스윙 리듬을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력 부족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너무나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했다. 묘하게 마 음이 가벼워졌다. 필드에서 무너지는 내 모습을 보며 스스로를 탓하고 실망했던 그 모든 순간들이, 사실은 내가 나쁜 골퍼라서가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 몸은 위협적인 환경에서 본능적으로 수축한다. 그것을 탓할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그 안에 서 어떻게 나만의 리듬을 찾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저자가 힘을 주고 하는 연습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과정을 거쳐야 자연스럽고 효율적인 스윙으로 진화할 수 있다고 했을 때, 나는 지금까지의 연습 방식을 통째로 다시 보게 되었다.


"보기를 사랑하라. 그러면 스코어는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처음엔 이해되지 않았다. 스코어를 줄이고 싶은데, 보기를 사 랑하라니. 하지만 이 말의 의미를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이것이 골프의 본질을 꿰뚫는 말이라는 걸 알게 된다. 욕심을 내서 무리한 파 도전을 하다 더블보기, 트리플보기를 범하는 것보다. 안전하게 보기를 지켜내는 플레이가 실전에서 훨씬 강하다. '애매한 한 번보다 확실한 두 번.' 이 짧은 문장 하나가 내가 필드에서 저질렀던 수많은 실수의 원인을 설명해준다. 나는 항상 욕심을 냈다. 한 번의 기적 같은 샷으로 스코어를 만회하려 했다. 하지만 골프는 기적을 기다리는 스포츠가 아니라, 확률을 관리하는 스포츠다. 풀스윙보다 10미터를 빼고 치는 클럽 선택, 퍼팅이 모든 샷의 시작이자 끝이라는 인식. 이것이 스코어를 줄이는 진짜 전략이다.


골프 매너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처음엔 '이게 왜 스윙 책에 들어가 있지?' 싶었다. 하지만 읽어갈수록 이 챕터가 오히려 이 책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코어보다 먼저 기억되는 건 당신의 태도다." 골프는 4~5시간을 함께하는 스포츠다. 그 시간 동안 보여지는 사람의 태도, 매너, 배려가 그 사람 자체를 말해준다. 70타를 치는 사람보다, 100타를 쳐도 밝게 웃으며 동반자를 배려하는 사람이 함께 치고 싶은 파트너다. 컨시드에 대응하는 방식 하나에서도 그 사람의 성 품이 드러난다. 나는 골프를 시작한 이후, 스코어에 너무 많이 얽매여 있었다는 것을 이 챕터를 읽으며 새삼 깨달았다. 잘 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골프를 통해 어떤 사람으로 성장할 것인가가 진짜 목표여야 했다. 책은 스윙 교과서만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스윙보다 훨씬 더 깊은 것을 가르쳐주는 책이다. 골프를 바라보는 시선, 레슨을 대하는 태도, 필드 에서의 마음가짐, 그리고 함께 치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까지. 22년이라는 세월이 응축된 이 책은, 기술을 가르치는 척하면서 사실은 삶의 태도를 가르치고 있었다. 어떤 분야든 그냥 프로가 될 수는 없다. 뼛속까지 프로여야 한다. 골프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무언가를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결국 디테일에서 드러난다. 생각하는 방식, 연습하는 방식, 실패를 대하는 방식. 나는 이 책을 통해 골프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배우는 나의 태도 전반을 돌아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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