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불안을 잠재우는 노자의 말 - 2500년을 건너온 인생 수업
노무라 소이치다로 지음, 류휘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오늘도 남의 삶을 훔쳐봤다. 스크롤을 내리는 손가락은 멈출 줄 몰랐고, 피드 속 누군가의 여행 사진, 누군가의 승진 소식, 누군가의 반짝이는 일상이 내 화면을 채웠다. 보지 않으면 그만인 것을, 나는 기어이 보고야 만다. 그리고 어김없이, 조용 한 패배감 하나를 가슴 어딘가에 슬쩍 집어넣는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분명 어제와 똑같은 나인데, 타인의 삶을 한 번 들 여다봤을 뿐인데, 갑자기 내 삶이 초라해진다. 당근 하나로 이 기묘한 심리를 꿰뚫어 본 노자의 통찰이 새삼 날카롭게 다 가오는 이유가 여기 있다. "당근은 길다"고 하면 그냥 넘어간다. 그런데 "당근은 감자보다 길다"고 하는 순간, 우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비교가 있어야 비로소 개념이 선명해진다. 길고 짧음도, 좋고 나쁨도, 성공과 실패도 모두 비교라는 렌즈를 끼는 순간 생겨나는 환상이다. 렌즈를 벗으면? 당근은 그냥 당근이다. 나는 그냥 나다. 하루에도 수십 번 그 렌즈를 자발적으로 끼운다. SNS를 열 때마다, 동창 모임에서 근황을 나눌 때마다, 부모님의 전화 한 통에 "그 집 아이는 벌써 결혼 했다더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비교는 이제 선택이 아니라 디폴트값이 되어버렸다. 비교를 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비교를 안 하려고 애써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열심히 사는 것을 미덕으로 배웠다. 쉬는 것은 나태한 일이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암묵적인 공식 속에 서 자랐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오후가 찾아오면, 이상하게 불안했다.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초조함. 유튜브를 보 면서도 '이게 맞나' 싶은 죄책감이 든다. 그런데 돌아보면, 그 초조함이 나를 더 지치게 만들었다. 쉬면서도 쉬지 못하는 상 태, 그것이 진짜 소진이었다. <화장실 사고>..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도, 화장실은 내가 직접 가야 한다. 대신 가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내 몸을 쉬게 해줄 수 있는 사람도, 결국 나밖에 없다. 누군가가 쉬라고 허락해줄 때까지 기다릴 필 요 없다. 사회가 인정해주는 종류의 피로가 쌓여야만 쉬어도 된다는 법도 없다. 오랫동안 '쉬어도 된다는 허가'를 외부에서 찾아왔다. 아프거나, 너무 지치거나, 주변이 먼저 걱정해줄 때에야 비로소 쉬는 것이 정당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노자는 말한다. 그 허가는 처음부터 내 안에 있었다.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속도에 억지로 나 를 끼워 맞추지 않는 것이다. '나팔바지 사고'가 일깨워주듯, 지금 유행하는 기준도 10년 후면 촌스러운 것이 될지 모른다. 그 기준에 나를 맞추기 위해 스스로를 갈아넣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약하다는 것의 용기, 자기혐오는 조용히 찾아온다.

노자에게 물은 최고의 덕이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막히면 돌아가며, 다투지 않고,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을 적시고 바위마저 뚫는다. 이 물의 이미지가 나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아도 된다. 돌아가도 된 다. 낮은 곳에 있어도 된다. 우리는 항상 위로 올라가려 한다. 더 높은 곳, 더 빠른 길, 더 인정받는 자리. 그런데 물은 늘 낮은 곳을 찾아 흐른다. 그리고 그 낮은 곳에서, 가장 넓고 깊은 바다가 된다. 요즘 조금씩 연습하고 있다. 스크롤을 멈추는 연습. 비교하는 습관을 알아채는 연습.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하루도, 그 자체로 충분했다고 말해주는 연습이다. 노자의 말처럼, 지금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바람개비는 목표가 없다. 그저 바람이 부는 대로 돌아갈 뿐 이다. 그런데 그 돌아가는 것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도덕경>... 2,500년 전의 언어가 지금도 살아있는 이유는, 그것이 시대의 유행을 쫓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자는 빠름을 설파하지 않았다. 더 많이 가지라고 하지 않았다. 이겨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 그저 말했다. 자연스럽게 있으라고. 흐름을 거스르지 말라고. 비워야 채워진다고. 이 처방이 수천 년을 건너 지금 나에게 닿는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위안이 된다. 세 상이 이렇게 복잡하게 변해도, 인간이 느끼는 불안의 뿌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 뿌리에 닿는 지혜 역시 시대를 초월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성과와 속도의 언어에 둘러싸인 나날들 속에서, 노자의 말은 한 박자 느리고, 한 온도 낮다. 그래서 오히려 오래 담는다. 읽고 나서도 며칠째 마음 한켠에서 가만히 울리는 문장들처럼 가슴 속에 살아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싫어하는 사람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
호리 모토코 지음, 이은혜 옮김 / 딥앤와이드(Deep&WIde)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요한 것은, 그 ‘싫음‘ 이라는 감정을 안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지배당하지 않는 자신으로 있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싫어하는 사람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
호리 모토코 지음, 이은혜 옮김 / 딥앤와이드(Deep&WIde)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스마트폰을 열면 누군가를 향한 비난이 흘러내린다. SNS에는 혐오 발언이 소용돌이치고, 직장에서는 교묘한 괴롭힘이 만연하며, 지역 공동체에서는 보이지 않는 파벌이 서로 충돌한다. 우리는 지금, 타인을 향한 '혐오'가 공기처럼 어디에나 가득 찬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어떻게 보면 현대 시대는 대형오의 시대인 것 같다. 과거에 혐오는 개인의 가슴속에서 조용히 타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확산되고, 증폭되고, 공명하고, 불길처럼 번진다. 혐오는 사회 현상이 되었다. 저자는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하나의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 싫어하는 사람을 바꾸려 하기 전에, 왜 내가 그 사람을 싫어하게 되었는지 되물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 현대의 인간관계를 본질적 으로 리셋하는 길로 이어진다고, 생각해 본다.

누군가를 싫어하게 될 때,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그 '이유'를 오로지 상대방 쪽에서 만 찾으려 한다. 저 사람이 나쁜 거야", 저 사람이 이상한 거야", "저 사람만 없으면" 이런 사고방식은 언뜻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자기 자신의 감정 구조를 놓치고 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혐오 감정은 종종 '자신 안에 있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의 투영' 이거나, '과거의 트라우마나 가치관의 충돌' 에서 비롯된다. 즉, 타인을 향한 혐오는 깊이 파고 들면 자기 내면의 문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자극'과 '반응' 사이에 아주 작은 '선택의 여백'을 가지고 있다. 그 여백을 알아차릴 수 있느냐 없느냐가, 인간관계를 소모로 끝낼 것인가 성장의 양분으로 삼을 것인가의 분기점이 된다. 물론, 감정에 옳고 그름은 없다. 누군가를 싫어하게 되는 것 자체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작용이다. 문제는 그 감정에 '점령' 당 하는 것이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현대 사회 자체가 '혐오'를 증폭시키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SNS의 알고리즘은 '분노'나 '혐오'를 담은 콘텐츠를 우선적으로 확산시킨다. 분노의 감정이 참여율을 높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혐오를 소비하고 혐오에 소비되는 악순환에 갇혀 있다. 게다가 다양성이 강조되는 현대에서, 가치관의 차이는 이전보다 훨씬 가시화되고 첨예해졌다. 과거에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구나' 하고 막연하게 느끼는 데 그쳤지만, 이제는 상대방의 사상, 정치관, 라이프스타일을 세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정보가 많아질수록 마찰이 늘어나고, 혐오가 생겨나기 쉬워진다. 여기에 더해, 재택근무와 개인화의 진전으로 인간관계의 '도피처'가 줄어들었다. 예전이라면 직장의 불 편한 상사를 친한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털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화면 속에 갇혀, 도망칠 곳 없는 인간관계 안에서 스트레스가 침전물처럼 켜켜이 쌓여간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싫어하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라" 고 말하는 것은, 지 나치게 현실을 무시한 정신론이다. 호리 씨가 "상대를 바꾸려 하는 것이 아니라" 고 거듭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현실을 직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싫어하는 사람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내 마음의 리셋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단순히 ‘잊어버리 것’이나 '신경 쓰지 않는 척하는 것'이 아니다. 세 가지 선택지가 있을 것이다. "상대가 변해 주길 바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내가 변한다" 이중에서 가장 실효성이 높은 것은 세 번째일 것이다. "내가 변한다"는 것은 "참는 것을 쌓아가는 것" 이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의 해상도를 높이는 것" 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깊은 호흡, 충분한 수 면, 감정을 종이에 써 내려가는 작업 등 이것들은 언뜻 너무나 평범해 보인다. 그러나 뇌과학의 관점에서, 이러한 행동들 이 편도체의 과잉 반응을 억제하고 전두전야의 냉정한 판단을 되찾는 데 효과적임이 밝혀져 있다. 어려운 것보다 쉬운 것 을 지속하는 것에 효과가 있다는 저자의 말은, 과학적 근거를 갖춘 실천적 지혜다. 또한 싫은 것을 종이에 쓴다"는 것은, 인지치료에서 말하는 외재화(externalization) 기법에 해당한다. 감정을 자신의 내면에 가두어 두지 않고, 한 번 밖으로 꺼내어 객체화 함으로써, 그 감정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리셋이란 제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다. 혐오가 생 겨나는 과정을 이해하고, 그 감정의 파도에 올라타기 전에, 자신의 중심을 되찾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를 용서하는 것" 도, "상대를 좋아하게 되는 것" 도 아닌, "상대에게 마음의 공간을 내어주지 않는다" 는 조용하고 강인한 자기 방어다.

"싫어하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라" 고는 말하지 않는다. 감정에 거짓말을 칠 필요는 없다. 싫어하는 사람을 억지로 좋아하 려 하는 것은,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한 폭력이다. 중요한 것은, 그 '싫음' 이라는 감정을 안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지배당하지 않는 자신으로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혐오를 증폭시키고 소비시키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흐름에 계속 올라탈 필요는 없다. 싫어하는 사람은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람 때문에 내 인생의 색깔이 바뀔 필요는 없다. 마음의 리셋이란 대단한 혁명이 아니다. 깊은 호흡 한 번, 종이에 써 내려가는 한 마디, 푹 자는 하룻밤 그러한 작은 축적이, 어느덧 "저 사람이, 신경 쓰이지 않게 되었다" 는 조용한 기적을 만들어 낼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처음 만나는 지경학 - 지리와 경제로 읽는 세계사
안민호.이용훈 지음 / 날(도서출판)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인류는 늘 땅 위에서 먹고 싸우고 거래했다. 역사책을 펼치면 전쟁과 조약, 왕조의 흥망이 가득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결국 경제적 이해관계와 지리적 조건이 맞물린 이야기가 반복된다. 어떤 나라가 강해졌는가, 어떤 문명이 오래 번성했는가, 어떤 전쟁이 왜 일어났는가. 이 물음들의 답은 군주의 결단이나 영웅의 용기보다 훨씬 오래된 곳, 즉 '어디에 있는가'와 '무엇을 가졌는가'에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책은 이 오래된 진실을 '지경학'이라는 새로운 렌즈로 조명한다. 지경학이란 국가가 정치적·전략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경제적 수단을 동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칼과 포탄이 무기였다면, 오늘날에는 관세와 반도체 수출 규제, 공급망 통제가 무기가 된다. 하지만 책이 설득력 있게 보여 주듯, 지경학은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인류는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지리와 경제를 한 쌍으로 묶어 세계를 움직여 왔다.


가장 오래된 지경학적 사례 중 하나는 실크로드다. 유라시아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이 교역로는 단순한 길이 아니었다. 한나라가 꾸준히 관리하고 지원한 덕분에 안전한 교역망이 구축되었고, 그 주변에는 상인들이 쉬고 먹고 거래하는 상업도시가 자연스럽게 들어섰다. 비단과 향신료 같은 고부가가치 품목이 오가며 막대한 이윤이 창출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이윤의 상당 부분이 결국 유럽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점이다. 지리적으로 교역로를 장악한 세력이 곧 경제적 패권을 쥔다는 원칙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이슬람 제국의 번영도 같은 논리로 이해할 수 있다. 이슬람 세계는 7세기 이후 수백 년간 유라시아의 중계 무역을 장악하며 거대한 상업 제국으로 성장했다. 이것은 종교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자리한 지리적 위치를 최대한 활용한 결과였다. 어디에 위치하느냐가 곧 어떤 경제적 기회를 얻느냐를 결정했던 셈이다. 그런데 이처럼 순수하게 지리와 교역의 논리로 출발한 역사는 종종 탐욕과 폭력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십자군 전쟁이 대표적이다. 처음에는 성지 탈환이라는 종교적 명분으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권력과 이익, 돈과 명분, 땅과 후추를 둘러싼 탐욕의 전쟁으로 변해 갔다. 교황은 권력을 위해, 왕과 귀족은 땅을 위해, 상인들은 무역로 확보를 위해 전쟁을 이용했다. 명분과 신앙이 걷혀지고 나면 그 아래에는 언제나 지경학적 계산이 자리하고 있었다. 수많은 민중이 그 계산의 도구로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에서 지리와 경제의 논리가 얼마나 냉혹하게 작동하는지를 보여 준다.


근대로 넘어오면 지경학의 작동 방식은 더 정교해진다.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를 자신들에게 필요한 원료를 공급하는 기지로 철저히 재편했다. 코트디부아르와 가나는 카카오, 에티오피아는 커피, 잠비아는 구리를 집중적으로 생산하는 '모노컬처 경제'로 굳어졌다. 드넓은 땅에 돈이 되는 작물 하나만 가득 재배하는 기형적인 경관. 이것은 자연스러운 발전의 결과가 아니라, 외부 세력이 오랜 시간에 걸쳐 의도적으로 설계한 구조였다. 식민지가 끝난 뒤에도 이 구조는 쉽게 바뀌지 않았고, 특정 자원 하나의 가격이 오르내릴 때마다 국가 경제 전체가 휘청이는 취약함이 남았다. 지리와 경제가 외부의 의지에 의해 왜곡될 때 그 상처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를 아프리카의 역사는 생생하게 보여 준다. 대서양 삼각 무역 역시 이 맥락에서 읽힌다. 경제학에서 생산의 세 요소는 노동력, 토지, 자본이다. 유럽은 이 세 가지를 각각 아프리카, 아메리카, 그리고 자신들의 시장에서 조달하는 방식으로 근대 자본주의의 기초를 닦았다. 노예무역이라는 반인륜적 행위조차 지경학적 논리, 즉 어떤 자원을 어디서 조달해 어디서 이익을 실현할 것인가라는 차가운 계산의 산물이었다. 인간의 존엄이 지리와 경제의 논리 앞에서 어떻게 짓밟힐 수 있는지를, 이 역사는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증언한다.


오늘날의 세계는 표면적으로 훨씬 세련되어 보이지만, 작동하는 논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패권 경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촉발된 에너지 공급망의 재편, 관세 전쟁과 희토류 수출 제한 같은 사건들은 모두 경제적 수단이 안보 무기로 전환된 지경학의 현재형이다. 무역 관세, 수출 통제, 금융 제재, 핵심 광물 공급망 통제 등 이 모든 것이 과거의 칼과 포탄을 대체하는 새로운 무기다. 특히 반도체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실크로드 시대의 교역로 장악 경쟁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미국은 반도체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기 위해 설계는 미국, 소재·부품·장비는 일본, 시스템 반도체 생산은 대만, 메모리 반도체는 한국이 담당하는 이른바 '칩4 동맹'을 구성했다. '마당은 좁게, 울타리는 높게'라는 전략으로 중국을 이 공급망에서 배제하려 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봉쇄 전략은 중국이 독자적인 기술 생태계를 구축할 동기와 명분을 동시에 제공했다. 과거 무역로를 봉쇄당한 세력이 우회로를 개척했던 것처럼, 기술 봉쇄는 새로운 기술 개발의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한국의 위치도 이 맥락에서 새롭게 읽힌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임에도 한국은 세계 항공유 수출 1위, 석유 비축량 6위의 지위를 갖고 있다. 높은 기술력으로 지경학적 전략의 우위를 선점한 결과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리적 환경과 뛰어난 정제 기술이 결합되어, 자원 자체가 없어도 자원 산업에서 핵심 거점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다. 주어진 지리적 조건과 후천적으로 축적한 기술력이 만날 때, 자원 빈국도 지경학적 강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강하게 남은 생각은,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그 구조는 반복된다는 것이다. 실크로드를 장악한 자가 부를 쥐었고, 무역로를 통제한 자가 권력을 쥐었으며, 오늘날 공급망과 기술 표준을 장악한 자가 패권을 쥔다. 무기의 형태가 칼에서 관세로, 함선에서 반도체로 바뀌었을 뿐, 지리와 경제가 권력을 만들어 낸다는 원리 자체는 수천 년을 관통한다. 흥미로운 주제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인비인 - 성해나 기담집
성해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처음 혼모노를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책장을 덮고도 무언가가 손끝에 남아 있는 느낌, 마치 방금 만진 것이 날카롭고 차가운 금속이었는데, 손을 거두고 나서야 비로소 그 온도를 실감하는 것처럼. 성해나라는 이름 석 자가 내 독서 목록에 조용히 각인된 것은 그날이었다. 신작 인비인. 차갑고, 예리하고, 그러면서도 묘하게 아름다운 책이다. 인비인는 '인간 아닌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 스스로 해설에서 밝히듯, 그것은 괴수일 수도, AI일 수도, 귀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남는 질문은 정작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당신이 인간이라고 믿어온 것들은 과연 인간이었냐고.

표제작 인비인에서 노인이 건네는 두툼한 서류봉투 속에는, 하얼빈에서 벌어진 생체실험의 기억이 담겨 있다. '가타마리' 덩어리라는 이름이 붙은 존재. 인간의 몸에서 태어났으나 인간의 형상을 갖추지 못한 그것을. 나는 처음에 이 소설이 역사적 공포를 소재로 한 고발 서사일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성해나는 그보다 훨씬 더 불편한 곳을 찌른다. 정작 소름 돋는 것은 가타마리가 아니었다. 고문 틀에 매달린 사람을 보고 '등골이 오싹해졌다'고 쓰면서도, 결국 그 자리를 지켰던 청년 노인. 세월이 지나 자신의 죄를 '영화화해 달라'며 찾아오는 그의 모습. 진정한 반성이나 뉘우침 없이 오직 기록을 남기고 싶다는 욕망으로 뭉쳐진 그 존재가...어쩌면 가장 기이한 인비인이 아닐까. 인간의 탈을 쓰고,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짓을 하고, 그럼에도 스스로를 인간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책상 밑판에 새겨진 문장, 어린 마사히로가 읽지 못한 그 문장.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에서 '역사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일 테지. 흠은 파내고 구실은 잘 덮으며...

윤회(당한)자들의 주인공은 나와 닮아 있었다. 한때 잘나갔던, 지금은 아무것도 찍지 못하는 감독. 그는 처음에 그 이상한 모임을 비웃는다. 속으로 냉소하면서,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확히 어느 순간인지 집어낼 수 없는 그 어딘가에서, 그는 모임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감정선의 이행이 처음에는 너무 빠르다고 느꼈다. 세뇌가 이렇게 허술하게 이루어지나? 그러나 책장을 덮고 생각해 보니, 소설의 핵심이었다. 우리가 무언가에 세뇌당할 때, 우리는 그 순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리울지도 모르잖아요'라는 로봇의 속삭임처럼, 세뇌는 언제나 다정한 목소리로 온다. '괜찮아요, 샤오잉'이라는 위로처럼, 나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 같은 존재의 형태로 온다. 마지막에 단검을 꽂으며 미소 짓는 장면에서, 나는 그제야 처음 페이지의 잔상과 마지막 장면이 하나로 겹치는 것을 느꼈다. 소름이 돋았다. 저자는 미리 말해주지 않는다. 발견의 쾌감과 공포를 동시에 선물한다.

<아미고>는 이 단편집에서 가장 현재에 가까운 이야기다. AI 로봇 야키마 H1이 도입된 촬영 현장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스턴트맨은 서서히 자신이 누구인지 잃어간다. 처음에는 로봇이 형편없었다. 스파링에서 나가떨어지는 야키마 H1을 일으켜 세웠을 때, 로봇이 속삭인다. '저 얼굴들을 잘 기억해둬요. 그리울지도 모르잖아요.' 예언처럼 실현되는 과정이 이 소설의 뼈대다. 인간들은 점점 차갑고 이기적으로 변해가고, 오히려 인간을 학습한 로봇이 따뜻해진다. 주객이 전도된 이 역설이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주인공이 욕조 속에서 중얼거리는 한 마디... “정말 괜찮을까“는 로봇에게 묻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그 모호함이 오래 남았다.

책은 언제나 경계선 위에 있다. 인간과 비인간, 믿음과 세뇌, 욕망과 죄악의 경계. 혼모노에서도 그랬지만 인비인에서 그 경계는 더욱 흐릿하고, 그렇기에 더욱 무섭다. 가타마리를 바라보며 '저것이 인간인가' 묻는 동시에, 그 질문을 던지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세뇌당하는 주인공을 비웃다가, 나 역시 언젠가 '괜찮아요'라는 다정한 말에 스며들지 않았던가 돌아보게 된다. 비 오는 날 아주 옅은 조명 아래서 읽은 것 같은 느낌이다. 읽는 동안 나는 그 세계 안에 있고, 덮고 나서도 그 세계는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시원한 무엇인가가 생각날 때, 읽으면 좋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