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세계는 표면적으로 훨씬 세련되어 보이지만, 작동하는 논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패권 경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촉발된 에너지 공급망의 재편, 관세 전쟁과 희토류 수출 제한 같은 사건들은 모두 경제적 수단이 안보 무기로 전환된 지경학의 현재형이다. 무역 관세, 수출 통제, 금융 제재, 핵심 광물 공급망 통제 등 이 모든 것이 과거의 칼과 포탄을 대체하는 새로운 무기다. 특히 반도체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실크로드 시대의 교역로 장악 경쟁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미국은 반도체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기 위해 설계는 미국, 소재·부품·장비는 일본, 시스템 반도체 생산은 대만, 메모리 반도체는 한국이 담당하는 이른바 '칩4 동맹'을 구성했다. '마당은 좁게, 울타리는 높게'라는 전략으로 중국을 이 공급망에서 배제하려 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봉쇄 전략은 중국이 독자적인 기술 생태계를 구축할 동기와 명분을 동시에 제공했다. 과거 무역로를 봉쇄당한 세력이 우회로를 개척했던 것처럼, 기술 봉쇄는 새로운 기술 개발의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한국의 위치도 이 맥락에서 새롭게 읽힌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임에도 한국은 세계 항공유 수출 1위, 석유 비축량 6위의 지위를 갖고 있다. 높은 기술력으로 지경학적 전략의 우위를 선점한 결과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리적 환경과 뛰어난 정제 기술이 결합되어, 자원 자체가 없어도 자원 산업에서 핵심 거점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다. 주어진 지리적 조건과 후천적으로 축적한 기술력이 만날 때, 자원 빈국도 지경학적 강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