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단단해지는 하루 한 문장 일본어 필사
안은미 지음 / 센시오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땀에 흠뻑 젖어 축 처진 하루의 끝이 고단 한 시간이 아니라 오늘을 온전히 살아냈음을 선포하는 치열한 기록이라는 말. 그 문장을 쓰는 동안 나는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마음이 단단해지는 하루 한 문장 일본어 필사
안은미 지음 / 센시오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이 도착했다. 택배 상자를 열기도 전에 손끝에 느껴지는 묵직함이 심상치 않았다. 뜯어보니 생각보다 두툼하고, 표지는 수수했다. 그런데 펼치는 순간, 나는 그만 멈춰 버렸다. 페이지가 활짝, 그리고 완전히 펼쳐졌다. 억지로 누르지 않아도, 손 으로 잡아당기지 않아도, 책은 스스로 납작하게 누워 나를 기다렸다. 사철제본. 실로 꿰맨 방식이라고 했다. 작은 것 하나 가 하나가 마음을 건드렸다. 나는 아침형 인간이 아니다. 정확히는, 아침을 좋아하고 싶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사람이다. 알람은 여섯 시에 맞춰놓고 실제로 일어나는 건 일곱 시 반. 그 사이 세 번쯤 다시 눕고, 두 번쯤 자책하며, 한 번쯤 오늘은 달라질 거라고 중얼거린다. 그 중얼거림이 공기 중에 흩어지기 전에 뭔가를 붙잡고 싶었다. 말이 아니라 손으로, 머릿속이 아니라 종이 위에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일본어 필사를 시작했다.

처음엔 솔직히 일본어가 목적이었다. 히라가나는 일을 줄 알고, 가타카나는 가끔 헷갈리고, 한자는 더더욱 가물가물한 어 중간한 수준. 드라마를 볼 때 자막 없이 한 문장이라도 알아듣고 싶다는 가벼운 욕심. 그런데 막상 펜을 들고 앉으니, 이상 한 일이 벌어졌다. 문장을 옮겨 적는 동안 일본어가 아니라 나 자신이 보였다. 나쓰메 소세키의 문장.

​(무사태평해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 밑바닥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한 글자씩 눌러 쓰면서 자꾸 멈췄다. . 무사태평. 종종 남들이 이야기 한다. 별로 걱정 없어 보인다고, 어디서든 잘 적 응하는 것 같다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씩 웃고 넘겼지만, 사실 그 웃음 아래 고여 있는 것들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 다. 소세키의 문장이 조용하게 그러나 정확하게 그것을 건드렸다. 필사는 그런 것이었다. 타인의 언어가 나의 내면을 비 추는 거울이 되는 순간이다.

하루 루틴이 조금씩 바뀌었다. 일어나서 커피를 내리고, 아직 아무도 깨지 않은 고요한 부엌 식탁에 앉는다. 책을 펼친다. 사철제본이라 책은 언제나 순순히 펼쳐진다. 그 얌전함이 좋다. 억지로 눌러야 하는 것들이 이미 하루에 차고 넘치니까, 아침만큼은 저항 없이 열리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날의 문장을 먼저 눈으로 읽는다. 소리 내어 읽는다. 낯선 발음이 입 안에서 굴러다니다가 혀와 이 사이를 빠져나온다. 처음엔 어색하고, 두 번째엔 조금 익숙하고, 세 번째엔 비로소 내 목소 리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쓴다. 천천히, 한 씩. 손가락 마디가 뻐근해질 즈음이면, 문장이 완성된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순간 하루가 시작된 느낌이 든다. 알람 소리가 아니라, 내 손끝의 감각이 오늘을 열어주는 것이다.

봄의 하이쿠를필사하던 날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오늘까지의 날은 오늘 버리네, 첫 벚꽃 피니. 비우는 용기. 책은 그 말을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어제의 나를 기꺼이 비워내야만 오늘의 내가 들어설 자리가 생긴다고. 나는 그 문장을 세 번 썼 다. 한 번은 따라 쓰듯, 한 번은 되새기듯, 한 번은 다짐하듯. 버리는 것에 서툰 사람이다. 지난 실수, 오래된 후회, 이미 끝 난 관계에서 비롯된 감정들을 오래 붙들고 산다. 그런데 벚꽃 한 줄기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는 그 하이쿠의 결기 가, 다섯 글자 열두 글자 사이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짧아서 더 날카로웠다. 짧아서 더 오래 마음에 걸렸다. 필사를 마친 뒤 나는 노트 여백에 작게 적었다. 오늘은 어제의 나를 좀 내려놓기.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그냥 그 하루를 위한 작은 다짐 하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여름 파트에서는 고바야시잇사의하이쿠가 나를 웃겼다. 때리지 마라, 파리가 손 비비고 발 비비거늘. 파리 한 마리에게 연 민을 품은 시인. 우습고도 따뜻한 시선. 필사를 하며 나는 피식 웃었는데, 그 웃음이 어쩐지 가슴 깊은 곳에서 왔다. 뜨거운 계절을 살아내느라 전력을 다한다. 파리도, 나도, 이 여름을 버티고 있는 것이다. 땀에 흠뻑 젖어 축 처진 하루의 끝이 고단 한 시간이 아니라 오늘을 온전히 살아냈음을 선포하는 치열한 기록이라는 말. 그 문장을 쓰는 동안 나는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살아냈다, 오늘도. 필사를 시작하면서 변화를 눈치챘다. 일본어 실력이 늘었냐고? 그것도 조금. 하지만 그보다 먼저 달라진 건 아침이었다. 예전의 나는 아침을 잃어버린 채로 하루를 시작했다.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뉴스와 SNS와 누군가의 일상을 스크롤하다가 어느새 30분이 증발해 있었다. 그 30분 동안 나는 세상의 소음을 잔뜩 집어삼키고, 정작 나 자신의 목소리는 한 번도 듣지 못한 채 하루 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지금의 아침은 다르다. 가장 먼저 하는 일 이 필사가 되면서, 하루의 첫 목소리가 바뀌었다. 소세키의 문장이든, 잇사의 하이든, 오타니 쇼헤이의 말이든-그날의 문장이 하루의 첫 음표가 된다. 그 음표에 맞춰 하루가 시작되니, 뭔가 달라도 다르다. 언어는 변화무쌍하다고, 책은 말했다. 마치 사람의 인생처럼. 같은 문장도 쓰는 날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무기력한 아침에 읽는 행복과, 충만한 아침에 읽는 행복은 같은 두 글자인데 온도가 다르다. 그 온도의 차이가 나의 하루를 조율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선과 지브리 - 지브리를 통해 만나는 불교의 지혜
스즈키 도시오 지음, 민경욱 옮김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야자키 하야오도 모순투성이다. 스즈키 토시오도 답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만들고, 계속 물어보고, 계속 살아간다. 나도 그렇게 살아보려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선과 지브리 - 지브리를 통해 만나는 불교의 지혜
스즈키 도시오 지음, 민경욱 옮김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늘 빠른 사람이고 싶었다. 빠르게 이해하고, 빠르게 결론을 내리고, 빠르게 다음으로 넘어가는 사람. 모호함 앞에서 멈추지 않는 사람. 그게 능력 있고 효율적인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선과 지브리>를 읽으면서 처음으로 그 믿음이 흔들 렸다. 스즈키 토시오는 이 책에서 선을 종교적 교의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모름과 함께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이 선이라고. 답을 찾지 않고 물음 곁에 계속 앉아 있는 것.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림을 그리고, 부수고, 다시 그리는 것처럼. 완성이 보이지 않아도 손을 멈추지 않는 것처럼. 그 말이 내 어딘가를 조용히, 그러나 깊이 건드렸다.

돌이켜보면, 오랫동안 '이해'를 수집해왔다. 어떤 영화를 보면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감독의 의도를 찾아보았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이 사람은 어떤 유형이다'라고 정리하려 했다. 어떤 경험을 하면, 그것이 내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바로 이름 붙이고 싶어했다. 그렇게 하면 세상이 더 안전하게 느껴졌다. 정리된 것은 불안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내가 이해하려는 속도만큼, 나는 무언가를 놓쳐왔다는 것을. 아직 다 피지 않은 감정을 서둘러 닫아버렸 다는 것을. 이름 붙이기 전의 그 짧은 순간, 그 여백 안에 오히려 진짜가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저자는 지브리 작품이 많은 것을 설명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원래 복잡하고,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고. 감정에는 정답이 없고, 행동에는 명확한 이유가 없을 때가 많다고. 그것을 억지로 정리하는 것은 진실을 왜곡하는 일이라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업 방식은 유명하다. 계획 없이 시작하고, 그리면서 이야기를 발견하고, 완성이 보이지 않아도 계속 손을 움직인다. 완성된 스토리보드 없이 제작에 들어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이것은 분명히 비효율이다. 그런데 스즈키 도시오는 그것을 비효율이라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 미야자키는 미아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길을 잃는 것 자체가 새로운 길을 발견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잠시 책을 덮고 생각해 본다. 나는 얼마나 '미아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는가. 방향이 보이지 않으면 멈추고, 계획을 세우고, 리스크를 계산하고, 확실해진 다음에야 움직이려 했다. 불확실함 속에서 일단 손을 움직이는 것을 나는 '무모함'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어쩌면 그게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걸으면서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계획하는 동안에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우연이 있다. 미야자키의 비효율은 혼돈이 아니라, 불확실함을 창작의 연료로 쓰는 방식이었다. 선에서 말하는 '좌선'처럼, 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 니라 물음 곁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행위였다. 그 용기를 한 번이라도 가져본 적 있었나, 자문해 본다.

책에서 또 하나 마음에 걸린 부분이 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내면에 있는 모순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전쟁에 반대하면 서도, 어린 시절 전투기와 병기에 매혹되었다. 아이들이 밖에서 뛰어놀기를 바라면서도, 아이들이 집 안에서 반복해서 볼 수밖에 없는 작품을 만들었다. 그 아이러니를 그 자신도 잘 알고 있다. 보통은 이런 모순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긴다. 일관 성이 없다고, 말과 행동이 다르다고,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모순을 숨기거나, 한쪽을 억누르며 산다. 그런데 책에서 소 개되는 일본의 사유 방식, 양행(I(5)은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대립하는 두 가지를 모두 살려두면, 거기서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는 생각. '빨리 가라'와 '돌아가라'가 동시에 진실일 수 있다는 것. 모순은 해소해야 할 오류가 아니라, 오히려 창 조의 씨앗이라는 것. 모순들을 떠올렸다. 사람이 그립지만 혼자 있고 싶은 것. 인정받고 싶지만 주목받는 것이 불편한 것이다. 변화를 원하면서도 익숙한 것에 매달리는 것. 오랫동안 나는 그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느 쪽이 '진짜 나'인 지를 결정해야 한다고. 그런데 어쩌면, 그 양쪽이 모두 진짜 나일 수도 있다. 그 긴장 안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방식일 수도 있다.

"이 세상, 버릴 것 없다" 지브리의 기본 자세라고 스즈키 도시오는 말한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직면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그 자체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낙관주의와는 다르다고 느꼈다. 낙관주의는 '잘 될것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문장은 그런 확신이 없다. 잘 될지 안 될지 모른다. 세상이 좋아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 있는 이 세계를 통째로 버리지 않겠다는 태도. 이것은 용기에 가깝다. 어쩌면 선이 말하는 것도 이것과 같지 않을까 생각했다. 답이 없어도 좋다. 길을 잃어도 좋다. 모순을 안고 있어도 좋다. 그래도 지금 이 자리에서, 손을 움직이고, 생각 하고, 살아보는 것일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책을 읽고 나서 나는 무언가를 '알게' 된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확신이 조금씩 느슨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느슨함이 불안하지 않았다. 흔들려도 괜찮다는 것. 모르는 채로 걸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지금 이 자리의 혼란이 곧 실패가 아니라는 것. 지브리의 인물들은 완벽하지 않다. 미야자키 하야오도 모순투성이다. 스즈 키 토시오도 답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만들고, 계속 물어보고, 계속 살아간다. 나도 그렇게 살아보려 한다. 빠르게 이해하는 것보다, 먼저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정리하는 것보다, 여백을 남기는 사람으로. 그리고 흔들리는 것을 숨기는 것보다, 흔들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으로. 이 세상, 버릴 것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그림 그리는 과학자 - 우리 곁의 자연을 정확하고 아름답게 기록한 과학의 순간들
이동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연필 한 자루, 혹은 펜 한 자루를 들고 자연 앞에 선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화가이기 이전에 과학자였고, 과학자이기 이전에 무언가에 깊이 매료된 인간이었다. 마리아 시빌라메리안, 메리 애닝, 알렉산더 폰 훔볼트, 장 앙리 파브르, 존 제임스 오듀본. 이들의 이름을 나란히 놓고 바라보면, 공통된 하나의 장면이 떠오른다. 살아 움직이는 것을 붙잡으려는 손, 그리 고 그 손이 긋는 선이다. 글을 읽으며 내내 한 가지 질문을 놓지 못했다. 왜 하필 그림이었을까? 문자가 없던 시절, 인간은 동굴 벽에 손을 얹고 윤곽을 그렸다. 사냥한 들소, 뛰어오르는 말, 손바닥의 실루엣. 그것은 보았다는 증거였고, 존재했다는 기록이었다. 그 본능은 수만 년이 지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17세기의 메리안이 누에의 허물을 스케치하고, 19세기의 오듀본이 새를 실물 크기로 화폭에 옮길 때, 그들은 동굴 벽의 인간과 본질적으로 같은 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림은 시대와 언어를 초월한다. 라틴어로 쓰인 논문은 시간이 지나면 번역이 필요하고, 언어가 다르면 오해가 생긴다. 그러나 정확하게 그려진 딱정벌레 한 마리는 300년이 지나도 같은 딱정벌레다. 이것이 과학자들이 그림을 선택한 가장 원초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마리아 시빌라메리안의 이야기에서 나는 가장 먼저 '용기'를 읽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그저 흉내내고 예쁘게 보이도록 하기보다 본인이 보고 경험한 모든 것을 그대로 그림으로 옮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 이것은 혁명적인 태도였다. 당시의 박물화는 대상을 아름답게 구성하는 것, 즉 이상화된 자연을 보여주는 것에 더 가까웠다. 메리안은 달랐다. 알에서 깨어나는 애벌레, 탈피 후 남겨진 허물, 고치를 뚫고 나오는 나방. 그녀의 그림에는 삶의 불완전한 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것은 형태만이 아닌 시간의 기록이었다. 생명이 변해가는 과정, 즉 생태 그 자체를 그림으로 포착한 것이다. 여성이 곤충에 관심을 갖는 것이 "매우 이상하게 보이던" 시대에, 그녀는 수리남까지 건너갔다. 뇌졸중으로 몸이 마비된 후에도 붓을 놓지 않았다. 메리안의 그림 앞에서 나는 묻게 된다. 그녀를 그 자리까지 이끈 것은 예술적 열망이었을까, 아니면 과학적 집념이었을까. 아마도 그 둘은 그녀 안에서 처음부터 하나였을 것이다.

메리 애닝의 이야기는 다른 결의 이야기다. 그녀의 손이 찾아낸 익티오사우루스 두개골은 박물관에 전시되었지만, 그 표본을 발굴한 사람의 이름은 오랫동안 기록되지 않았다. 화석을 해석하고 복원한 공로는 학회에 앉은 남성들에게 돌아갔다. 그녀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엘리자베스 필폿이라는 존재에 주목했다. 메리의 재능을 알아보고 물심양면으로 도운 이 여성이 없었다면, “메리 애닝이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는 말. 이것은 과학의 역사 속에 숨겨진 수 많은 협력과 연대의 이야기를 대변한다. 빛나는 발견의 뒤에는 언제나 기록되지 않은 손들이 있었다. 동시에 이 이야기는 과학에서 기록의 윤리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림을 그리고, 화석을 찾고, 표본을 복원하는 행위. 그것이 누구의 것으로 남느냐는 순전히 권력과 제도의 문제였다. 지식은 발견되는 것이지만, 그 공로는 선택되는 것이었다.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650볼트 전기뱀장어의 전기 충격을 네 시간 동안 직접 받아가며 실험했다. 산소통도 없이 6천 미터 고산을 오르며 자신의 몸 상태를 기록했다. 장 앙리 파브르는 정원 한 켠을 실험실로 삼아 평생을 보냈다. 돈도, 장비도, 학계의 인정도 없이. 관찰이란 결국 헌신의 다른 이름임을 깨닫는다. 훔볼트의 기록이 30권의 책이 되고, 파브르의 관찰이 10권의 <곤충기>가 된 것은 단지 지적 호기심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알아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해 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사명감이었다. 파브르가 "나는 곤충을 연구하며 단 한 번도 돈을 생각한 적이 없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 말의 무게를 느꼈다. 가난 속에서 쓴 그 문장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것은 순수한 열정이 어디까지 인간을 이끌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머릿속에 빠르게 흘러가는 생각을 남기기 위해 필기구는 펜 하나만을 단촐히 사용한다. 유독 오래 마음에 남았다. 화가들 이 완성을 목표로 그림을 그린다면, 현장의 과학자는 사라지기 전에 붙잡는 것을 목표로 선을 긋는다. 근육을 그리고, 골격을 그리고, 동공의 움직임을 포착한다. 전체가 아닌 부분을. 완성이 아닌 순간을. 이 필드 노트의 미학은 불완전함 속에 있다. 미처 그리지 못한 부분을 메모로 채우고, 확인하지 못한 것은 물음표로 남긴다. 그 불완전한 기록들이 쌓여 하나의 과학이 된다. 나는 이 장면에서 과학이 사실 얼마나 인간적인 행위인지를 새삼 느꼈다.

오듀본이 새를 그린 방식은 독특했다. 그는 단순히 새의 외형을 묘사하지 않았다. 날고, 먹고, 싸우고, 쉬는 새의 순간을 포착하려 했다. 그의 그림이 전통적인 야생동물 그림을 초월한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생명을 그림 속에 가두지 않고, 생명이 그림 밖으로 튀어나오게 했다. 이것은 메리안이 변태의 과정을 기록하고, 파브르가 말벌의 외과적 침술 을 묘사한 것과 맥이 닿아 있다. 과학 그림의 목표는 대상의 복사가 아니라 대상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이다. 형태를 그리 는 것이 아니라 삶을 그리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이해는 인간에게 필요하다. 다른 이유는 없다. 우리가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림 그리는 과학자들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남긴 그림들은 인간이 자연 앞에 섰을 때 얼마나.겸손해질 수 있는지, 동시에 얼마나 집요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언이다. 메리안의 누에 허물, 메리 애닝의의티오사우루스 두개 골, 홈볼트의 고산 스케치, 파브르의 말벌 관찰, 오듀본의 살아있는 새들. 이 모든 선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그림 그리는 과학자가 되어야 하는 시대일지도 모른다. 소멸하는 것들 앞에서, 눈을 감지 않을 용기를 가진 채로 다가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