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지브리 - 지브리를 통해 만나는 불교의 지혜
스즈키 도시오 지음, 민경욱 옮김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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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늘 빠른 사람이고 싶었다. 빠르게 이해하고, 빠르게 결론을 내리고, 빠르게 다음으로 넘어가는 사람. 모호함 앞에서 멈추지 않는 사람. 그게 능력 있고 효율적인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선과 지브리>를 읽으면서 처음으로 그 믿음이 흔들 렸다. 스즈키 토시오는 이 책에서 선을 종교적 교의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모름과 함께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이 선이라고. 답을 찾지 않고 물음 곁에 계속 앉아 있는 것.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림을 그리고, 부수고, 다시 그리는 것처럼. 완성이 보이지 않아도 손을 멈추지 않는 것처럼. 그 말이 내 어딘가를 조용히, 그러나 깊이 건드렸다.

돌이켜보면, 오랫동안 '이해'를 수집해왔다. 어떤 영화를 보면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감독의 의도를 찾아보았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이 사람은 어떤 유형이다'라고 정리하려 했다. 어떤 경험을 하면, 그것이 내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바로 이름 붙이고 싶어했다. 그렇게 하면 세상이 더 안전하게 느껴졌다. 정리된 것은 불안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내가 이해하려는 속도만큼, 나는 무언가를 놓쳐왔다는 것을. 아직 다 피지 않은 감정을 서둘러 닫아버렸 다는 것을. 이름 붙이기 전의 그 짧은 순간, 그 여백 안에 오히려 진짜가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저자는 지브리 작품이 많은 것을 설명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세상은 원래 복잡하고,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고. 감정에는 정답이 없고, 행동에는 명확한 이유가 없을 때가 많다고. 그것을 억지로 정리하는 것은 진실을 왜곡하는 일이라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업 방식은 유명하다. 계획 없이 시작하고, 그리면서 이야기를 발견하고, 완성이 보이지 않아도 계속 손을 움직인다. 완성된 스토리보드 없이 제작에 들어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이것은 분명히 비효율이다. 그런데 스즈키 도시오는 그것을 비효율이라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 미야자키는 미아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길을 잃는 것 자체가 새로운 길을 발견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잠시 책을 덮고 생각해 본다. 나는 얼마나 '미아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는가. 방향이 보이지 않으면 멈추고, 계획을 세우고, 리스크를 계산하고, 확실해진 다음에야 움직이려 했다. 불확실함 속에서 일단 손을 움직이는 것을 나는 '무모함'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어쩌면 그게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걸으면서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계획하는 동안에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우연이 있다. 미야자키의 비효율은 혼돈이 아니라, 불확실함을 창작의 연료로 쓰는 방식이었다. 선에서 말하는 '좌선'처럼, 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 니라 물음 곁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행위였다. 그 용기를 한 번이라도 가져본 적 있었나, 자문해 본다.

책에서 또 하나 마음에 걸린 부분이 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내면에 있는 모순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전쟁에 반대하면 서도, 어린 시절 전투기와 병기에 매혹되었다. 아이들이 밖에서 뛰어놀기를 바라면서도, 아이들이 집 안에서 반복해서 볼 수밖에 없는 작품을 만들었다. 그 아이러니를 그 자신도 잘 알고 있다. 보통은 이런 모순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긴다. 일관 성이 없다고, 말과 행동이 다르다고,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모순을 숨기거나, 한쪽을 억누르며 산다. 그런데 책에서 소 개되는 일본의 사유 방식, 양행(I(5)은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대립하는 두 가지를 모두 살려두면, 거기서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는 생각. '빨리 가라'와 '돌아가라'가 동시에 진실일 수 있다는 것. 모순은 해소해야 할 오류가 아니라, 오히려 창 조의 씨앗이라는 것. 모순들을 떠올렸다. 사람이 그립지만 혼자 있고 싶은 것. 인정받고 싶지만 주목받는 것이 불편한 것이다. 변화를 원하면서도 익숙한 것에 매달리는 것. 오랫동안 나는 그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느 쪽이 '진짜 나'인 지를 결정해야 한다고. 그런데 어쩌면, 그 양쪽이 모두 진짜 나일 수도 있다. 그 긴장 안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방식일 수도 있다.

"이 세상, 버릴 것 없다" 지브리의 기본 자세라고 스즈키 도시오는 말한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직면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그 자체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낙관주의와는 다르다고 느꼈다. 낙관주의는 '잘 될것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문장은 그런 확신이 없다. 잘 될지 안 될지 모른다. 세상이 좋아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 있는 이 세계를 통째로 버리지 않겠다는 태도. 이것은 용기에 가깝다. 어쩌면 선이 말하는 것도 이것과 같지 않을까 생각했다. 답이 없어도 좋다. 길을 잃어도 좋다. 모순을 안고 있어도 좋다. 그래도 지금 이 자리에서, 손을 움직이고, 생각 하고, 살아보는 것일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책을 읽고 나서 나는 무언가를 '알게' 된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확신이 조금씩 느슨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느슨함이 불안하지 않았다. 흔들려도 괜찮다는 것. 모르는 채로 걸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지금 이 자리의 혼란이 곧 실패가 아니라는 것. 지브리의 인물들은 완벽하지 않다. 미야자키 하야오도 모순투성이다. 스즈 키 토시오도 답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만들고, 계속 물어보고, 계속 살아간다. 나도 그렇게 살아보려 한다. 빠르게 이해하는 것보다, 먼저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정리하는 것보다, 여백을 남기는 사람으로. 그리고 흔들리는 것을 숨기는 것보다, 흔들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으로. 이 세상, 버릴 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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