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0분 걷듯이 달렸을 뿐인데
다나카 히로아키 지음, 나지윤 옮김 / 향기책방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오랫동안 달리기를 두려워했다. 정확히는 ' 달려야 한다 '는 생각 자체를 회피해 왔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운동이라면 으레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무릎이 욱신거리고, 다음 날 온몸이 굳어버리는 그 불쾌한 기억과 함께 떠올랐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체육 시간의 오래달리기는 고문에 가까웠고, 헬스 러닝머신 위에서 몇 분을 버티다 내려온 기억은 부끄러 움과 함께 남아 있다. 그래서 달리기는 언제나 '나와는 거리가 먼 것’ 이었다. 그런 내가 슬로조깅(Slow Jogging)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말하면 반신반의했다. 천천히 달리면 무슨 운동이 되겠어. 그것은 그저 걷는 것을 달리 기처럼 포장한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이었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의심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슬로조깅의 핵심 개념은 단순하다. '니코니코 페이스', 즉 웃으면서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속도로 달리는 것이다. 숨이 차지 않는 속도, 힘들지 않은 속도. 이것이 스로조깅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제창한 사람은 후쿠오카대학교 스포츠과학부의 다나카 히로아키 교수다. 그는 스스로의 몸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 스로조깅의 효과를 증명해 왔다. 37세에 처음 풀 마라톤에 출전해 4시간 11분을 기록했던 그는, 9년 후 '니코니코 페이스'만으로 훈련해 3시간 30분으로 단축했다. 더 나아가 식이요절과 하루 5~7km의 슬로조깅을 병행해 3개월 만에 10kg을 감량하고, 마침내 50세에 2시간 38분이라는 놀라운 자기 최고 기록을 세웠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이력이다. 그는 대학 시절 심장에 구멍이 있다는 오진을 받고 격렬한 운동을 포기해야 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 시절 그가 만난 것이 '가벼운 강도의 훈련'이라는 개념이었고, 그것이 평생의 연구 과제가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포기에서 출발한 연구가 오히려 수많은 사람들에게 달리는 기쁨을 선물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흔히 운동은 '힘들수록 효과적'이라고 믿는다. 땀을 흘리고, 근육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견뎌야만 비로소 몸이 변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슬로조깅은 그 상식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빠른 달리기나 격렬한 무산소 운동은 속근을 주로 사용한다. 속근은 순발력은 뛰어나지만 피로해지기 쉽고, 젖산을 생성해 근육을 산성으로 만들며 몸을 탈진 상태로 몰아간다. 반면, 스로조깅에서 주로 사용하는 것은 지근이다. 지근은 천천히, 오래 수축할 수 있는 근육 섬유로, 젖산이 쌓이지 않아 피로감이 훨씬 적다. 그래서 슬로조깅을 시작한 사람들이 매일 달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몸이 지치지 않으니 달리는 것이 괴롭지 않고, 괴롭지 않으니 계속하게 된다. 실제 참가자들의 체험이 이를 뒷받침한다. 단 3주간의 슬로조깅 체험 이후 체중이 3~4kg 감소했고, 공복혈당이 151mg/dl에서 109mg/이로 내려간 사례가 있었다. 유방암과 당뇨를 동시에 앓던 한 참가자는 당화혈색소가 7%에서 6.3%로 떨어지며 눈물을 흘렸다. 수치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격이 그 안에 있었을 것이다. 또한 슬로조싱 꾸준히 실천하면 3개월에 약 3kg 감량이 가능하고, 식이 조절을 병행하면 5~6kg 이상도 어렵지 않다. 특히 현대인의 만병 근원이라 불리는 내장지방 감소에 탁월하다는 점은, 40대 이후의 건강 관리에 특히 주목할 만한 효과다.


무릎이 아파서 달리지 못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스로조깅은 충격이 적고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관절에 무리가 훨씬 덜하다. 실제로 3km만 달려도 무릎을 부여잡던 한 참가자가, 스로조깅3개월 후에 는 한 달에 200km 이상을 달리게 되었다는 사례는 과학적 원리의 결과다. 처음부터 계속 달리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걷뛰뛰 방식도 있다. 1분 스로조깅 후 30초 빠른 걷기를 반복하며 시작해, 점차 달리는 시간을 늘려 가는 것이다. 1분이라는 짧은 시간이라면 노인도, 운동 초보자도 충분히 달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팔을 억지로 크게 흔들지 않는 것이다. 팔을 세게 흔들면 자연스럽게 속도가 빨라지고, 그러면 니코니코 페이스를 잃어버리게 된다. 지면의 반발력을 이용해 자연스럽게 나아가는 것, 팔은 그저 흔들리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 스로조깅은 몸의 자연스러운 리듬을 존중하는 달리기다. 다나카 교수는 말했다. "인간은 달리도록 진화해 왔다." 수렵 시대의 인류는 먹이를 쫓아 긴 거리를 자연스럽게 달렸다.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생존이었고, 삶의 방식이었다. 현대인은 달리기를 '힘든 것', ‘해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하지만, 어쩌면 그 인식 자체가 왜곡된 것일지도 모른다. 스로조깅은 달리기를 원래의 자리, 즉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행위로 되돌리려는 시도다. 웃으면서, 대화하면서, 억지로가 아니라 즐겁게. 메타볼릭 증후군을 진단받고 지팡이에 의지하던 50대 여성이 60대에 호놀룰루 마라톤을 완주하고, 70대가 된 지금도 달리며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느리게 달리는 것이 삶의 속도를 바꿀 수 있다는 증거다.


슬로조깅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달리기 기술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속 가능한 속도' 에 대한 새로운 철학이었다. 빠르게 달리다 지쳐 쓰러지는 것보다, 느리더라도 멈추지 않고 달리는 것. 한 번의 격렬한 노력보다, 매일의 작은 움직임이 몸과 삶을 바꾼다는 것. 어쩌면 이것은 달리기를 넘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도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오늘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웃으면서,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슬로조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든 이야기는 숲에서 시작되었다 - 90세 과학자의 가슴 뛰는 자연 관찰기
베른트 하인리히 지음, 강유리 옮김 / 윌북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을 멈추고, 밖으로 나가 진짜 숲으로, 진짜 강으로, 진짜 바람 속으로 들어오라는 초대장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차이나 반도체 라이징 - 중국 첨단 지능화의 허와 실, 그리고 한국의 대응 전략
권석준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2023년 화웨이가 출시한 메이트 60 프로는 중국 반도체 굴기의 상징이 되었다. 자국 팹리스 하이실리콘이 설계하고, 자국 파운드리 SMIC가 생산한 7나노급 기린 9000s 칩을 탑재한 이 스마트폰은 미국의 강력한 기술 제재 속에서도 중국이 첨단 반도체 영역에 도달했음을 전 세계에 선언한 것이었다. 한편, 같은 해 딥시크(DeepSeek)는 저비용 고효율 AI 모델로 오픈AI와 구글이 주도하던 인공지능 생태계에 균열을 냈다. 화웨이 캠퍼스에서 수천 명의 박사급 연구원이 첨단 기술을 개발하고, 중국 명문대 이공계 석박사생들이 앞다투어 반도체·AI 기업 취업을 꿈꾸는 지금의 모습은, 불과 10여 년 전 중국을 저급 칩의 위탁 생산 기지로 바라보던 시각을 완전히 뒤집는다. 그러나 이 화려한 외양 이면에는 구조적 취약성이 공존한다. 중국 반도체 산업의 급성장은 10년 넘게 쏟아부은 천문학적 규모의 공적 자금 위에 세워진 것이다. 회계의 불투명성, 중복 투자, 수익성 부재, 인민해방군과의 복잡한 연계, 그리고 미국의 기술 제재가 만들어 내는 단절의 위협이 그 취약성의 면면을 이룬다. 책은 중국 반도체 굴기의 실체를 투자 구조, 기술적 현실, 지정학적 맥락이라는 세 축에서 냉정하게 짚어보고, 그것이 한국에 던지는 함의를 모색한다.


중국 반도체 투자의 핵심 엔진은 국가 대기금, 일명 '빅 펀드(Big Fund)'다. 2014년 1기로 출발한 빅 펀드는 2024년 현재 3기에 접어들었으며, 3기 규모만 3,440억 위안(약 74조 원)에 이른다. 여기에 중국 제조 2025 계획 자금, 지방정부 펀드를 합산하면 중국이 반도체 산업에 투입한 직간접적 지원 총액은 3,500억 달러(약 515조 원)에 육박한다는 추산이 나온다. 미국 반도체 및 과학법(CHIPS Act)의 연간 투자액에 맞먹는 규모를 중국은 매년 집행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 방대한 투자에는 치명적인 맹점이 있다. 첫째, 중복 투자 문제다. 중국 메모리 반도체 업체 CXMT는 중앙 빅 펀드와 허페이 시 지방정부 펀드를 동시에 수혜하고 있으며, 공정 장비 업체 사이캐리어 역시 선전 시, 빅 펀드, 화웨이 클러스터 펀드에서 중복으로 자금을 받는다. 이런 구조에서는 지식재산권 분쟁, 부채 정리, 과잉 생산에 따른 수익성 저하 문제가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둘째, 기술 내실화의 지체다. CXMT는 글로벌 4위 DRAM 업체로 부상했지만, 양산 수율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보다 25~30%포인트 낮은 수준에 머문다. 고대역폭 메모리(HBM) 분야에서도 3세대 HBM2 양산과 4세대 시험 생산 수준에 그치는 반면, 글로벌 상위 3사는 이미 6~7세대 HBM 양산을 준비 중이다. 장비 분야의 사이캐리어 역시 동세대 ASML 장비 대비 노광 성능이 40% 이하에 불과하다. 화려한 외형과 달리 기술 격차는 여전히 크다. 셋째, 빅 펀드의 기수별 오버랩 문제다. 1기·2기·3기가 각각 10년씩 투자-회수-연장을 거치며 겹치는 구조는, 이전 기수의 부실이 다음 기수로 이월되는 '좀비 투자'의 온상이 될 수 있다. 2기 빅 펀드 책임자가 부패 혐의로 낙마한 사건은 수익성 악화의 책임을 특정 인물에게 전가하는 공산당식 문제 해결의 전형을 보여 준다. 이러한 구조적 불투명성이 지속되는 한, 빅 펀드의 장기 지속 가능성은 2044년 최종 만기까지 불안 요소를 내포할 수밖에 없다.


중국 반도체·AI 굴기의 아이러니는 그 토대를 미국이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애플은 20년간 중국에서 사실상 IT 제조 생태계를 육성했다. 폭스콘에서 럭스쉐어로, 삼성·LG디스플레이 기술이 BOE로 흘러가는 과정에서 제조 노하우가 이전되었고, 애플 i클라우드 서버의 운영권이 중국 국유 기업(GCBD)에 넘어가며 데이터 주권까지 양도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 리서치 아시아(MSRA)는 중국 최고의 IT 인재 산실로 기능했고, 그 졸업생들은 화웨이·바이두·바이트댄스의 핵심 인력이 되었다. 자본의 역설도 심각하다. 미 의회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주요 벤처캐피털(VC) 16곳이 중국 공산당 연계 기업, 나아가 인민해방군과 협력하는 반도체·AI 기업에 최소 31억~45억 달러를 투자했다. 월든 인터내셔널은 SMIC 이사회에 20년 가까이 참여하며 기술·경영 멘토링을 제공했고, IBM은 2007년 SMIC에 45나노 공정 라이선스를 이전하여 중국 파운드리 기술의 도약에 기여했다. 오픈소스 AI 프레임워크인 텐서플로와 파이토치는 중국이 미국과의 AI 기술 격차를 빠르게 좁히는 발판이 되었다. 미국은 의도치 않게, 그러나 상당 기간 체계적으로 자신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를 키웠다.


미중 기술 패권 전쟁의 심화는 중국 반도체 굴기의 방향을 결정짓는 가장 강력한 외생 변수다. 현재 가장 현실적으로 예상되는 시나리오는 두 가지다. 하나는 AI 반도체·생태계 중심 리디렉션 시나리오로, 중국이 반도체 자급화의 한계를 인식하고 AI 응용 생태계에서 돌파구를 찾는 것이다. 화웨이, 텐센트, 알리바바 같은 대기업이 산업 플랫폼을 주도하는 이 경로는 중국 내수 시장을 기반으로 한 '소버린 AI' 생태계를 구축할 가능성을 품는다. 다만 글로벌 생태계와의 호환성 부재라는 '갈라파고스' 위험도 함께 안는다. 다른 하나는 디커플링 시나리오다. 미중 무역 전쟁이 전면적으로 심화되면, 중국은 강제적 내재화에 박차를 가하고 글로벌 공급망은 미국 클러스터와 중국 클러스터로 분리된다. 이 경우 공급망 분기에 따른 기술 표준 분열, 비용 중복 발생, 수급 혼란이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을 강타한다. 한국·일본·대만·네덜란드는 미국 주도 클러스터에 편입될 가능성이 높지만, 대중 수출 채널의 상당 부분이 차단되고 중국 내 사업을 영위하는 기업들도 생산 차질을 피할 수 없다. 이 두 시나리오 모두에서 주목할 점은 인공지능 산업 자체의 수익성 문제다. MIT 난다 이니셔티브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상반기 기준 AI에 투자한 기업의 95%는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거대한 투자가 집중되고 있으나, 그에 상응하는 수익 기반이 아직 정착되지 않은 것은 중국만의 문제가 아닌 전 세계적 과제다. 반도체 산업의 지속 가능성이 불안한 상태에서 AI 산업의 수익 구조마저 불확실하다면, 중국은 '반도체+AI'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치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직면할 수 있다.


중국 반도체 굴기는 과소평가할 수도, 과대평가할 수도 없는 복잡한 현상이다. 국가 자본주의의 압도적 자금력을 등에 업고 분명히 실력을 키워 왔지만, 그 성장의 토대가 얼마나 견고한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일본이 1980~90년대 정부 주도 반도체 산업 육성에서 결국 구조 조정의 쓴맛을 본 것처럼, 중국의 빅 펀드도 회계 투명성과 수익성 검증이라는 시험을 결국 피할 수 없다. 한국에게 이 상황은 위기이자 기회다. 중국은 한국이 글로벌 경쟁력을 지켜온 반도체·AI 분야에 가장 강력한 도전자로 등장했다. 그러나 중국이 취약한 영역, 즉 첨단 패키징, HBM 같은 맞춤형 메모리 파운드리, 극자외선 이후 패터닝 기술 탐색, 투명하고 예측 가능한 기업 거버넌스는 한국이 차별화를 추구할 공간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속도다. 중국 반도체 굴기의 모래성이 무너지기 전에, 한국은 더 깊은 기술적 해자를 파두어야 한다. 복합 특이점의 시대, 경쟁의 프레임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 GDP를 대체할 국내 총지능(GDI)의 시대에 한국은 규모로 싸우기보다 정밀도로 승부해야 한다. 민주주의 체제의 신뢰 가능성, 반세기에 걸쳐 축적된 제조업 경험, 글로벌 공급망에서의 핵심 위치를 지렛대 삼아, 아직 누구도 걷지 않은 기술의 미개척 지대로 과감하게 발을 내딛는 것이 한국 반도체 산업의 생존 전략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대문 안 인구 30만 프로젝트 - 건축가 황두진이 그리는 지속 가능한 도시적 삶
황두진 지음 / 해냄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심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미래의 실험실이다. 그 실험실을 다시 사람으로 채우는 일, 이제 시작할 때가 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대문 안 인구 30만 프로젝트 - 건축가 황두진이 그리는 지속 가능한 도시적 삶
황두진 지음 / 해냄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주말 아침, 서울 한복판을 걷다 보면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광화문 앞 세종대로, 종로 일대, 청계천 변이 텅 비어 있다. 카페 몇 곳에 불빛이 켜져 있을 뿐, 이 나라 최고의 업무 지구가 마치 유령 도시처럼 고요하다. 평일 낮이라면 사람이 넘쳐날 거리가, 유동 인구가 사라진 시간대에는 그 공백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서울이 잘못 설계된 도시라는 증거다. 아니, 더 정확히는, 오래도록 잘못된 방향으로 정책이 운용되어온 결과다.

<사대문 안 인구 30만 프로젝트>는 그 잘못된 흐름을 되돌리자는 제안이다. 현재 사대문 안 상주인구는 약 10만 명. 조선 후기 수준에서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1980년대 정점을 찍은 이후 40여 년간 꾸준히 줄어들었다. 서울 인구 전체는 팽창했지만 그 무게 중심은 강남, 수도권 외곽으로 옮겨갔고, 도심은 비어갔다. 30만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인구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이 도시가 진짜 도시답게 기능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직주 근접(職住近接). 일하는 곳과 사는 곳이 가까운 것. 당연한 이치처럼 들리지만, 지금 대한민국의 대다수 직장인에게 이것은 사치에 가깝다. 광화문에서 일하면서 일산에서 자고, 판교에 출근하면서 수원에서 아침을 먹는다. 왕복 두세 시간의 통근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이 되었다. 사대문 안은 원래 직주 근접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던 공간이었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시장은 종로변에, 관청은 궁궐 앞에, 주거는 그 사이사이에 얽혀 있었다. 걸어서 삶의 대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도시였다. 내사산이 만들어낸 분지 안, 약 16.5제곱킬로미터의 공간은 지형적으로도 걷기에 이상적이다. 청계천 상류 광화문에서 동대문까지의 평균 경사가 0.3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이 공간이 얼마나 보행 친화적인지를 말해준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이점을 스스로 지워버렸다. 1970년대부터 학교를 강남으로 이전시키고, 주거 기능을 도심에서 밀어냈다. 기업과 관공서는 남았지만 사람이 떠났다. 낮에는 붐비고 밤에는 텅 비는 비정상적 구조가 수십 년에 걸쳐 고착되었다. 편의점 하나 찾기 어려운 도심, 자전거 수리점을 찾아 마포 공덕동까지 가야 하는 서촌의 현실은 그 결과다. 상주인구가 줄면 생활 인프라가 사라지고, 인프라가 사라지면 상주인구가 더 줄어드는 악순환. 이것이 사대문 안이 지금 걸린 병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도시 문명 자체를 흔들 것처럼 보였다. 재택근무가 일반화되고, 교외로의 이주가 유행처럼 번졌다. 도시는 끝났다는 선언이 쏟아졌다. 그러나 3년여 만에 그 '뉴 노멀' 담론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밀도를 혐오하던 사람들도 결국 도시의 편의와 자극 앞에 돌아왔다. 오히려 팬데믹은 도시에 대한 성찰을 더 정교하게 만들었다. 파리의 '15분 도시' 개념이 주목받은 것도 이 시기였다. 핵심은 단순하다. 도보나 자전거로 15분 안에 직장, 학교, 병원, 시장, 공원을 모두 닿을 수 있는 도시를 만들자는 것이다. 기능별로 지역을 분리하는 근대적 조닝(zoning)의 실패를 인정하고, 복합 도시로 돌아가자는 선언이다. 이것은 실은 전혀 새로운 아이디어가 아니다. 조선의 한양이 그랬고, 뉴욕 맨해튼의 그리니치빌리지가 그랬다. 밀도에 대한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거부감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전쟁과 고도 성장기를 거치며 한국인은 과밀의 고통을 몸으로 겪었다. 한 반에 60명, 2부제 수업, 출퇴근 지하철의 지옥도. 그 기억이 밀도 혐오를 낳았고, 도시 정책은 낮은 용적률을 미덕으로 삼았다. 그러나 역설이 있다. 용적률을 낮추면 도시는 수평으로 팽창하고, 팽창할수록 이동 거리는 늘어나며, 체감 밀도는 오히려 높아진다. 강남역 사거리의 법정 용적률 800퍼센트 이하라는 숫자가 세계적 대도시 기준으로 얼마나 낮은지를 생각하면, 우리가 얼마나 비효율적인 도시를 만들어왔는지 가늠된다.


그렇다면 사대문 안에 어떤 건축을 담아야 할까. 이 글은 단지형 아파트를 명확히 거부한다. 단지형 아파트는 도로를 막고, 담을 치고, 도시를 조각냈다. 용적률은 높아 보이지만 건폐율이 낮아 실제 밀도 효과는 제한적이다. 경희궁자이가 들어선 뒤 오히려 주변 인구가 줄었다는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게다가 사대문 안에는 그런 대규모 부지 자체가 없다.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이 '무지개떡 건축'이다. 저층부엔 상점과 카페, 중층부엔 사무실과 학원, 상층부엔 주거와 옥상 마당. 상업, 업무, 주거가 한 필지에 수직으로 중첩된 이 방식은 1960~70년대 한국의 상가 아파트에서 이미 실험된 바 있다. 낙원상가, 세운상가, 서소문아파트. 당시에는 기술적 한계와 법적 규제의 부재로 문제도 많았지만, 그 개념 자체는 탁월했다. 도시의 밀도와 복합성을 동시에 실현하는 방식이었으니까.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전통 한옥의 원리와도 닿아 있다는 점이다. 한옥은 비정형 자연석 기단, 직선 목구조, 3차원 곡면 지붕이라는 전혀 다른 세 가지 기하학을 하나의 건축 안에 중첩시킨다. 무지개떡 건축도 마찬가지다. 층마다 다른 기하학적 질서, 다른 재료, 다른 공간 경험. 이것이 도시를 살아있게 만드는 다양성이다. 뉴욕 소호의 건물들이 개별적으로 보면 단조롭지만 거리 풍경이 생동감 있는 이유도 저층부의 상점들, 그 위의 주거, 그리고 각각의 층이 만드는 도시적 접촉성 때문이다.


직주 근접은 편의의 문제만이 아니다. 탄소 배출의 문제이기도 하다. 운정에서 서울역까지 GTX로 출퇴근한다면 편도 탄소 배출량만 약 1,545그램이다. 여기에 역까지 이동하는 탄소까지 더하면 수치는 더 올라간다. 대구시 온실가스 배출의 41퍼센트가 도로 교통에서 나온다는 통계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직시하게 한다. 반면 걷거나 자전거로 사대문 안에서 출퇴근하는 사람의 탄소 배출량은 0이다. 기존 건물의 리모델링도 같은 맥락에서 중요하다. 서울연구원에 따르면 기존 건물을 리모델링해 사용하는 것은 같은 규모를 새로 짓는 것보다 에너지를 평균 55퍼센트 이상 절약한다. 아무리 친환경 자재로 신축해도 철거와 건설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 지역사회의 맥락 단절이라는 비용을 상쇄하기 어렵다. 도시의 지속 가능성은 새로운 건물을 얼마나 잘 짓느냐가 아니라, 이미 있는 도시를 얼마나 잘 쓰느냐에 달려 있다. ESG가 평가의 무게 중심을 거기로 옮겨야 하는 이유다.


사대문 안을 다시 사람이 사는 곳으로 만들자는 이 제안은, 낭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전체 인구가 줄어드는 시대에, 넓게 퍼진 도시 구조를 유지하는 비용은 점점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수도권 광역 인프라를 계속 확장하는 것은 해법이 아니다. 이미 있는 자원, 이미 잘 갖춰진 공간을 더 잘 쓰는 것이 지속 가능한 방향이다. 사대문 안은 그 조건을 갖추고 있다. 수많은 일터, 역사적 투자가 축적된 인프라, 산으로 둘러싸인 자연환경, 걷기 좋은 평탄한 지형, 그리고 600년이 넘는 이야기. 이 공간이 밤이면 텅 빈 채로 방치되는 것은 낭비이자 실패다. 여기에 사람이 다시 살게 하는 것, 그것이 서울이 진짜 세계적인 도시로 성숙해지는 길이다.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맨해튼을 '인류가 만든 가장 친환경적인 도시'라 불렀다. 역설처럼 들리지만, 직주 근접이 실현된 고밀도 도시야말로 가장 적은 탄소로 가장 많은 삶을 담는다는 뜻이다. 사대문 안 인구 30만 명 프로젝트는 그 역설을 서울에서 실현하려는 시도다. 새로운 건축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동기 부여, 오래된 지혜의 현대적 재해석. 도심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미래의 실험실이다. 그 실험실을 다시 사람으로 채우는 일, 이제 시작할 때가 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