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 반도체 라이징 - 중국 첨단 지능화의 허와 실, 그리고 한국의 대응 전략
권석준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2023년 화웨이가 출시한 메이트 60 프로는 중국 반도체 굴기의 상징이 되었다. 자국 팹리스 하이실리콘이 설계하고, 자국 파운드리 SMIC가 생산한 7나노급 기린 9000s 칩을 탑재한 이 스마트폰은 미국의 강력한 기술 제재 속에서도 중국이 첨단 반도체 영역에 도달했음을 전 세계에 선언한 것이었다. 한편, 같은 해 딥시크(DeepSeek)는 저비용 고효율 AI 모델로 오픈AI와 구글이 주도하던 인공지능 생태계에 균열을 냈다. 화웨이 캠퍼스에서 수천 명의 박사급 연구원이 첨단 기술을 개발하고, 중국 명문대 이공계 석박사생들이 앞다투어 반도체·AI 기업 취업을 꿈꾸는 지금의 모습은, 불과 10여 년 전 중국을 저급 칩의 위탁 생산 기지로 바라보던 시각을 완전히 뒤집는다. 그러나 이 화려한 외양 이면에는 구조적 취약성이 공존한다. 중국 반도체 산업의 급성장은 10년 넘게 쏟아부은 천문학적 규모의 공적 자금 위에 세워진 것이다. 회계의 불투명성, 중복 투자, 수익성 부재, 인민해방군과의 복잡한 연계, 그리고 미국의 기술 제재가 만들어 내는 단절의 위협이 그 취약성의 면면을 이룬다. 책은 중국 반도체 굴기의 실체를 투자 구조, 기술적 현실, 지정학적 맥락이라는 세 축에서 냉정하게 짚어보고, 그것이 한국에 던지는 함의를 모색한다.


중국 반도체 투자의 핵심 엔진은 국가 대기금, 일명 '빅 펀드(Big Fund)'다. 2014년 1기로 출발한 빅 펀드는 2024년 현재 3기에 접어들었으며, 3기 규모만 3,440억 위안(약 74조 원)에 이른다. 여기에 중국 제조 2025 계획 자금, 지방정부 펀드를 합산하면 중국이 반도체 산업에 투입한 직간접적 지원 총액은 3,500억 달러(약 515조 원)에 육박한다는 추산이 나온다. 미국 반도체 및 과학법(CHIPS Act)의 연간 투자액에 맞먹는 규모를 중국은 매년 집행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 방대한 투자에는 치명적인 맹점이 있다. 첫째, 중복 투자 문제다. 중국 메모리 반도체 업체 CXMT는 중앙 빅 펀드와 허페이 시 지방정부 펀드를 동시에 수혜하고 있으며, 공정 장비 업체 사이캐리어 역시 선전 시, 빅 펀드, 화웨이 클러스터 펀드에서 중복으로 자금을 받는다. 이런 구조에서는 지식재산권 분쟁, 부채 정리, 과잉 생산에 따른 수익성 저하 문제가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둘째, 기술 내실화의 지체다. CXMT는 글로벌 4위 DRAM 업체로 부상했지만, 양산 수율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보다 25~30%포인트 낮은 수준에 머문다. 고대역폭 메모리(HBM) 분야에서도 3세대 HBM2 양산과 4세대 시험 생산 수준에 그치는 반면, 글로벌 상위 3사는 이미 6~7세대 HBM 양산을 준비 중이다. 장비 분야의 사이캐리어 역시 동세대 ASML 장비 대비 노광 성능이 40% 이하에 불과하다. 화려한 외형과 달리 기술 격차는 여전히 크다. 셋째, 빅 펀드의 기수별 오버랩 문제다. 1기·2기·3기가 각각 10년씩 투자-회수-연장을 거치며 겹치는 구조는, 이전 기수의 부실이 다음 기수로 이월되는 '좀비 투자'의 온상이 될 수 있다. 2기 빅 펀드 책임자가 부패 혐의로 낙마한 사건은 수익성 악화의 책임을 특정 인물에게 전가하는 공산당식 문제 해결의 전형을 보여 준다. 이러한 구조적 불투명성이 지속되는 한, 빅 펀드의 장기 지속 가능성은 2044년 최종 만기까지 불안 요소를 내포할 수밖에 없다.


중국 반도체·AI 굴기의 아이러니는 그 토대를 미국이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애플은 20년간 중국에서 사실상 IT 제조 생태계를 육성했다. 폭스콘에서 럭스쉐어로, 삼성·LG디스플레이 기술이 BOE로 흘러가는 과정에서 제조 노하우가 이전되었고, 애플 i클라우드 서버의 운영권이 중국 국유 기업(GCBD)에 넘어가며 데이터 주권까지 양도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 리서치 아시아(MSRA)는 중국 최고의 IT 인재 산실로 기능했고, 그 졸업생들은 화웨이·바이두·바이트댄스의 핵심 인력이 되었다. 자본의 역설도 심각하다. 미 의회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주요 벤처캐피털(VC) 16곳이 중국 공산당 연계 기업, 나아가 인민해방군과 협력하는 반도체·AI 기업에 최소 31억~45억 달러를 투자했다. 월든 인터내셔널은 SMIC 이사회에 20년 가까이 참여하며 기술·경영 멘토링을 제공했고, IBM은 2007년 SMIC에 45나노 공정 라이선스를 이전하여 중국 파운드리 기술의 도약에 기여했다. 오픈소스 AI 프레임워크인 텐서플로와 파이토치는 중국이 미국과의 AI 기술 격차를 빠르게 좁히는 발판이 되었다. 미국은 의도치 않게, 그러나 상당 기간 체계적으로 자신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를 키웠다.


미중 기술 패권 전쟁의 심화는 중국 반도체 굴기의 방향을 결정짓는 가장 강력한 외생 변수다. 현재 가장 현실적으로 예상되는 시나리오는 두 가지다. 하나는 AI 반도체·생태계 중심 리디렉션 시나리오로, 중국이 반도체 자급화의 한계를 인식하고 AI 응용 생태계에서 돌파구를 찾는 것이다. 화웨이, 텐센트, 알리바바 같은 대기업이 산업 플랫폼을 주도하는 이 경로는 중국 내수 시장을 기반으로 한 '소버린 AI' 생태계를 구축할 가능성을 품는다. 다만 글로벌 생태계와의 호환성 부재라는 '갈라파고스' 위험도 함께 안는다. 다른 하나는 디커플링 시나리오다. 미중 무역 전쟁이 전면적으로 심화되면, 중국은 강제적 내재화에 박차를 가하고 글로벌 공급망은 미국 클러스터와 중국 클러스터로 분리된다. 이 경우 공급망 분기에 따른 기술 표준 분열, 비용 중복 발생, 수급 혼란이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을 강타한다. 한국·일본·대만·네덜란드는 미국 주도 클러스터에 편입될 가능성이 높지만, 대중 수출 채널의 상당 부분이 차단되고 중국 내 사업을 영위하는 기업들도 생산 차질을 피할 수 없다. 이 두 시나리오 모두에서 주목할 점은 인공지능 산업 자체의 수익성 문제다. MIT 난다 이니셔티브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상반기 기준 AI에 투자한 기업의 95%는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거대한 투자가 집중되고 있으나, 그에 상응하는 수익 기반이 아직 정착되지 않은 것은 중국만의 문제가 아닌 전 세계적 과제다. 반도체 산업의 지속 가능성이 불안한 상태에서 AI 산업의 수익 구조마저 불확실하다면, 중국은 '반도체+AI'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치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직면할 수 있다.


중국 반도체 굴기는 과소평가할 수도, 과대평가할 수도 없는 복잡한 현상이다. 국가 자본주의의 압도적 자금력을 등에 업고 분명히 실력을 키워 왔지만, 그 성장의 토대가 얼마나 견고한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일본이 1980~90년대 정부 주도 반도체 산업 육성에서 결국 구조 조정의 쓴맛을 본 것처럼, 중국의 빅 펀드도 회계 투명성과 수익성 검증이라는 시험을 결국 피할 수 없다. 한국에게 이 상황은 위기이자 기회다. 중국은 한국이 글로벌 경쟁력을 지켜온 반도체·AI 분야에 가장 강력한 도전자로 등장했다. 그러나 중국이 취약한 영역, 즉 첨단 패키징, HBM 같은 맞춤형 메모리 파운드리, 극자외선 이후 패터닝 기술 탐색, 투명하고 예측 가능한 기업 거버넌스는 한국이 차별화를 추구할 공간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속도다. 중국 반도체 굴기의 모래성이 무너지기 전에, 한국은 더 깊은 기술적 해자를 파두어야 한다. 복합 특이점의 시대, 경쟁의 프레임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 GDP를 대체할 국내 총지능(GDI)의 시대에 한국은 규모로 싸우기보다 정밀도로 승부해야 한다. 민주주의 체제의 신뢰 가능성, 반세기에 걸쳐 축적된 제조업 경험, 글로벌 공급망에서의 핵심 위치를 지렛대 삼아, 아직 누구도 걷지 않은 기술의 미개척 지대로 과감하게 발을 내딛는 것이 한국 반도체 산업의 생존 전략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