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둘리지 않는 법 - 삶의 주도권을 회복하는 해방의 심리 기술
대니얼 치디악 지음, 고현석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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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우리는 수십 개의 자극에 노출된다. 누군가의 차가운 한마디가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돌고, 읽지 않은 메시지 하나가 불안의 씨앗이 되며, SNS 속 타인의 삶이 자신의 초라함을 증명하는 증거처럼 느껴진다. 이 끊임없는 감정의 파도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왜 이렇게 쉽게 흔들리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내가 약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답이다. 감정에 휘둘리는 것은 성격적 결함이 아니라, 오랫동안 반복되어 굳어진 습관화된 반응 패턴이다. 습관이 학습되었다는 사실은 동시에 희망을 의미한다. 학습된 것은 다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의지력의 부족이 아니라, 우리가 내면의 작동 방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는 데 있다.


인구의 약 20%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섬세하게 세상을 감지하는 신경계를 가지고 태어난다. 이들은 타인의 감정 변화를 직관적으로 포착하고, 예술과 자연 앞에서 깊이 감동받으며, 작은 배려에도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안다. 이 예민함은 분명 아름다운 능력이다. 그러나 이 능력에는 어두운 이면이 따른다. 타인의 기분이 자신의 감정으로 스며들고, 지나간 대화 속 뉘앙스 하나가 며칠을 두고 반추되며, 작은 오해가 거대한 거절감으로 변환된 다. 특히 어린 시절, 자신의 감정이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세상을 '항상 경계해야 하는 곳'으로 학습하게 된다. 감정적 레이더가 쉬지 않고 돌아가는 삶, 그것이 만성적 소진과 과잉 분석의 근원이다. 중요한 것은 이 예민한 자체를 제거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감각을 닫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는 것이 진짜 과제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능력은 인간 연결의 토대다. 다만 그것이 의무가 아 닌 선택이 될 때, 비로소 공감은 소진이 아닌 성장의 원천이 된다.

불안한 마음은 끊임없이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에는 논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느껴진다. '이 상황을 충분히 분석하면 해결책이 나올 거야.' 그러나 이것은 뇌가 만들어낸 정교한 함정이다. 과잉사고는 통제감을 주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더 깊은 불안의 수렁으로 이끈다. 인간의 뇌는 진화적으로 위협을 감지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부정적 경험은 긍정적 경험보다 훨씬 강하게 기억에 새겨지며,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자동적으로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려낸다. 읽지 않은 메시지 하나가 관계의 균열로, 상사의 짧은 대답이 해고의 예고로 변환되는 것이다. 이 패턴이 반복될수록 뇌의 신경 회로는 더욱 깊이 파여, 걱정은 점점 더 자동적이고 자연스러운 반응이 된다.


나아가 과거의 상처는 현재의 반응을 왜곡한다. 어린 시절 반복된 거절의 경험, 예측 불가능한 관계 속에서 형성된 불신은 현재의 상황을 과거의 렌즈로 해석하게 만든다. 현재의 반응이 지나치게 강렬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현재의 사건 때문만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만이 아니라, 과거의 모든 유사한 순간들에 동시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이 곧 현실은 아니다. 뇌가 만들어낸 이야기는 공포와 불안에 기반한 해석일 뿐, 객관적 사실이 아니다. 이 인식, 즉 *내 생각이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깨달음이 자유의 첫 번째 문을 여는 열쇠다.

감정으로부터의 자유는 감정을 억압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 억압된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축적되어, 엉뚱한 순간에 더 큰 폭발로 돌아온다. 진정한 자유는 감정의 관찰자가 되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첫 번째 실천은 감정을 정확하게 명명하는 것이다. "나는 화가 났다"와 "나는 지금 분노가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는 언어적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뇌의 작동 방식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자신이 감정 그 자체가 되는 것이고, 후자는 감정을 바라보는 관찰자로 서는 것이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뇌의 이성적 영역인 전전두엽 피질을 활성화시켜, 감정의 격렬함을 실질적으로 완화시킨다. 두 번째는 현재 신체 감각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가슴이 조여드는 느낌, 어깨의 긴장감, 호흡의 얕음. 이 신체 신호들에 집중하면, 마음은 머릿속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의 실제 경험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문제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내적 공간을 만드는 과정이다. 세 번째는 역설적이지만 강력한 기술이다. 불안이 찾아올 때, 그것과 싸우는 대신 감사로 맞이하는 것이다. 저항하면 강해지고, 받아들이면 힘을 잃는다. 고마워, 이 느낌이 나를 보호하려 한다는 걸 알아"라고 말하는 순간, 불안은 더 이상 싸워야 할 적이 아닌, 이해해야 할 신호로 전환된다. 이 방법은 억지 긍정이 아니라, 내면 시스템 전체에 개입하는 정교한 심리적 전환이다.


우리가 작은 일에 크게 흔들리는 이유 중 하나는 통제감의 상실이다.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은 뇌에게 위협 신호를 보내고, 스트레스 반응을 촉발시킨다. 그러나 스트레스는 단순히 나쁜 일이 일어나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상황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스트레스의 진짜 원인이다. 통제의 초점을 외부에서 내부로 옮기는 것이다. 교통 체증은 바꿀 수 없다. 타인의 태도는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감정적 반응을 선택하며, 에너지를 어디에 쓸 것인지는 온전히 자신의 영역이다. 이 구분을 명확히 하는 것만으로도 불필요한 소모가 현저히 줄어든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뇌는 사회적 거절을 신체적 고통과 동일한 경로로 처리한다. 집단에서 배척당하는 것이 곧 생존의 위기였던 진화적 역사가 현재에도 작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거절당했을 때 그 감정을 만회하려는 강박에 빠진다. 상황을 이기거나, 상대의 인정을 받거나,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충동이 일어난다. 이 충동은 일시적인 도파민 분비로 이어지지만, 그것이 지나고 나면 더 깊은 공허함만 남는다. 핵심은 이것이다. 타인의 선택은 당신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미해결된 상처와 무의식적 패턴에 따라 반응할 뿐이다. 이 사실 을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감정적으로 내면화하는 것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그러나 반복적인 실천을 통해, 외부의 평가로부터 독립된 내적 가치감을 쌓아갈 수 있다.

깊이 공감하는 사람들이 가장 쉽게 빠지는 함정은 타인의 감정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상대가 상처받을까봐, 실망할까봐, 화를 낼까봐 자신의 필요를 끊임없이 뒤로 미룬다. 이것은 친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행위다. 타인의 감정 앞에서 자신을 지우는 습관은 오래 지속될수록 더 큰 대가를 치른다. 경계 없는 관계에서는 언제나 더 많이 주는 사람이 더 빨리 소진된다. 상대는 점점 더 많은 것을 기대하게 되고, 자신은 점점 더 지쳐가면서 원망이 쌓인다. 아이러니하게도, 경계를 세우지 않음으로써 관계를 지키려 했지만, 결국 그 관계는 내면의 분노와 피로 위에 서게 된다. 경계를 세우는 것은 거절이 아니라 방향의 제시다. 진정으로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은 경계에 분노하지 않는다. 경계를 설명해야 한다는 강박, 충분히 납득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장은 정당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당신의 한계는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한 이유다. 경계를 세울 때 경험하는 죄책감은 대개 조건화된 반응이다. "네 필요는 중요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받아온 사람은,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할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도록 학습되어 있다. 이 죄책감은 도덕적 나침반이 아니라, 오래된 프로그래밍의 잔재다. 느끼되, 그것에 이끌리지 않는 연습이 필요하다.


어떤 관계는 극적인 사건 없이 조용히 끝난다. 어느 순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임을 깨닫는 고요한 순간이 찾아온다. 그 깨달음은 드라마틱하지 않지만, 돌이킬 수 없이 선명하다. 가장 떠나기 어려운 관계는 나쁜 기억이 가득한 관계가 아니다. 그 사람의 가능성에 투자한 관계다. 실제의 그가 아니라, 그가 될 수 있었을 모습, 노력만 한다면 가능했을 버전에 묶여있는 것이다. 연구는 분명히 말한다. 진정한 변화는 외부의 기대가 아닌, 오직 내면의 동기에서만 일어난다. 아무리 사랑하고 기다려도, 그 사람의 변화를 대신 만들 수는 없다. 떠나는 것 은 배신이 아니다. 모든 관계에는 그 관계가 완성되는 시간이 있다. 억지로 연장시키는 것이 오히려 두 사람 모두에게 정직하지 못한 일이 될 수 있다.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그 관계를 내려놓을 수 있다. 과거의 아름 다움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더 이상 그 관계가 자신을 살아있게 하지 않음을 인정할 수 있다. 놓아주는 과정에는 반드시 슬픔이 따른다. 관계의 상실뿐 아니라, 자신이 믿어온 가능성의 상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슬픔은 온전히 겪어야 한다. 서둘러 극복하려 할수록 오히려 더 오래 붙들게 된다. 슬픔을 통과해야만, 그 너머에 있는 자유로운 공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

휘둘리지 않는 삶은 감정을 느끼지 않는 삶이 아니다. 거절에 무감각해지거나, 타인을 신경 쓰지 않게 되거나, 상처받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것을 더 충만하게 느끼면서도, 그 감정에 압도되지 않는 능력이다. 주도권을 되찾는다는 것은 거창한 변화가 아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 자신의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생각과 자신 사이에 작은 공간을 만들고, 바꿀 수 없는 것 대신 바꿀 수 있는 것에 에너지를 쏟는 선택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 선택들이 쌓여 신경 회로를 바꾸고, 습관을 바꾸고, 결국 삶의 방향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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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괜찮은 두통은 없다
조경하.차윤경 지음 / 군자출판사(교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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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우리는 이 말을 너무 쉽게 뱉는다. 힘든 하루를 보낸 날, 상사에게 야단을 맞은 날, 아이들이 유독 말을 듣지 않는 날, 그 말은 때로 진짜 고통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냥 일상의 넋두리처럼 흘러나오기도 한다. 그만큼 두통은 우리 삶에 깊숙이, 그리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나는 오랫동안 두통을 '참으면 되는 것'으로 여겼다. 서랍 속 진통제 한 알이면 해결되는 사소한 불편함. 누구나 다 겪는 것이니 굳이 병원까지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두통으로 하루를 망친 날이면 “오늘은 좀 피곤했나 보다"며 스스로를 달랬고, 다음 날 말끔하게 사라진 통증에 안도하며 그것으로 이야기를 끝냈다. 하지만 그 '사소한 불편함'이 일주일에 서너 번씩, 그리고 매달 빠짐없이 찾아오기 시작했을 때도 나는 여전히 진통제 한 알로 그 신호를 잠재웠 다. 책을 처음 마주했을 때, 솔직히 말하면 조금 과장된 표현이 아닐까 싶었다. 두통 하나를 두고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이야기해야 할까. 그런데 책장을 넘기다 보니, 그 과장처럼 보였던 제목이 사실은 가장 정직한 경고였다 는 것을 깨달았다. 두통을 ' 괜찮다 '고 여기는 순간, 우리는 몸이 보내는 절박한 신호를 외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외면이 쌓이고 쌓여, 어느 날 우리를 10년짜리 만성 환자로 만들어 버린다.

두통이 오면 우리가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무엇일까. 아마 대부분은 약국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진통제를 꺼내 들 것이다. 실제로 편의점에서도 살 수 있을 만큼 우리 삶에 가까이 있는 그것. 처음엔 한 알이면 됐다. 그다음엔 두 알이 필요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아침에 눈을 뜨기도 전에 손이 먼저 약통으로 향했다. 책이 가장 집요하게, 그리고 가장 애정 어리게 경고하는 것은 약물과 용두통. 두통을 없애기 위해 먹은 약이 오히려 더 큰 두 통을 만들어낸다는 역설이다. 뇌는 생각보다 훨씬 예민하고, 반복적인 진통제 자극에 점차 적응하면서 약 기운 이 사라지는 순간 더욱 거세게 통증으로 반응한다. 불을 끄려고 쏟아부은 물이 오히려 더 큰 불을 키우는 꼴이 다. 한동안 책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동안 해왔던 방식이 고스란히 그려졌기 때문이다. 통증이 오면 참고, 참다 못하면 약을 먹고, 약이 듣는 동안만 안도하고, 또 통증이 찾아오면 다시 약을 찾는 사이클. 나는 두 통을 다스리고 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두통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다. 주도권은 처음부터 내 손에 없었다. 물 론 진통제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임시 방편에 영구적인 역할을 맡긴 데 있다. 열이 날 때 해열제를 먹는 것은 맞는 처치지만, 왜 열이 나는지를 끝내 외면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해열제를 달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두통도 마찬가지다. 통증의 스위치를 찾지 않은 채 결과만 계속 억누르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두통과의 싸움에서 번번이 지는 이유다.

책이 내게 크게 다가온 부분은 두통의 '종류'를 설명하는 챕터였다. 솔직히 두통에도 이렇게 많은 얼굴이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편두통, 긴장형 두통, 군발두통, 후두신경통, 약물과용두통. 이름도 낯선 이 진단들은 수십 년을 두통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드디어 자신의 고통에 불일 수 있게 된 이름이기도 하다. "배가 아파요"라고 말하는 아이가 사실은 편두통을 앓고 있을 수 있다는 대목은 특히 인상 깊었다. 어른조차 자신의 두통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어려운데, 아이들은 오죽할까. 두통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의 두통을 배탈이나 꾀병으로 오해했던 수많은 부모들이 이 페이지에서 얼마나 많은 자책과 안도를 동시에 느꼈을지 상상이 간다. 병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지식의 습득만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 혼자 짊어져 왔던 고통에 공식적인 존재감을 부여하는 일이다. "나는 아픈 게 맞았어. 이건 내가 약해서가 아니었어." 그 인 정 하나가 때로는 치료의 절반이 된다. 책을 읽으며 비로소 내 두통의 패턴을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날씨가 흐린 날, 수면이 부족한 날, 끼니를 거른 날, 머리가 아파오는 타이밍에 분명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을 '그냥 내 체질'이라 여겼는데, 사실은 내 몸이 일관되게 보내온 신호였다. 두통 일기를 쓰라는 권유가 처음엔 번거롭게 느껴졌지만, 내 통증의 유발 요인을 스스로 파악하는 것이 치료의 시작이라는 말에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적을 알아야 이길 수 있다. 그것은 전쟁에서만이 아니라, 만성 통증과의 싸움에서도 통하는 진리다.

책의 저자들은 의사이기 전에, 수많은 환자들의 고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이다. 책 곳곳에서 그 경험의 무게가 느껴진다. 임상 데이터나 의학 논문의 인용에 그치지 않고, 진료실 문을 두드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던 실제 환자들의 이야기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10년 넘게 두통을 앓았다는 분들의 이야기는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좋다는 병원은 다 다녀봤지만 MRI에서 이상이 없다는 말만 들었고, 결국 '스트레스성'이라는 모호한 진단 하나를 껴안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던 날들. 아무도 내 고통을 제대로 보아주지 않는다는 그 외로움이, 어쩌면 두통 그 자체보다 더 사람을 지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음 메시지가 더욱 깊게 남는다." 세상에 괜찮은 두통은 없습니다. 그러나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 고통받아온 사람들이 치료를 통해 실제로 변화를 경험했다는 임상의 기록이자, 포기하지 말라는 진심 어린 당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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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쥬메, 셰프의 자격
심성철 지음 / 나비의활주로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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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오랫동안 '준비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 충분히 공부하고, 충분히 경험을 쌓고, 충분히 자신감이 생겼을 때 비로소 움직이는 사람. 그게 현명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실패하지 않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그 믿음이 조용히 흔들렸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그동안 '준비'라고 부르던 것이 사실은 '두려움'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심성철셰프는 스물여섯 살에 뉴욕으로 떠났다. 영어도 완벽하지 않았고, 통장 잔고도 넉넉하지 않았다. 고향에서 경기도로 대학을 가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만류를 들어야 했던 사람이, 태평양을 건너는 선택을 한 것이다. 무모하다고?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모함 속에 있던 것은 객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계산보다 먼저 움직인 심장이었다. 조건이 갖춰져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출발했기 때문에 길이 생긴 것이다. 책은 그 역설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기록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멈칫했다. 멈칫하게 만든 것은 화려한 성공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부모님께 생활비만큼은 손 벌리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죽을 만큼 가난한 시간을 버텼다는 대목. 스스로도 그걸 '패기'라고 부르기엔 부족하다며, 차라리 '마지막 오기'에 가까웠다고 고백하는 부분. 그 솔직함이 마음을 찔렀다. 우리는 흔히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들의 고난을 '결국 이겨냈기 때문에 의미있는 고난'으로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살아낸 사람에게 그것은 결말을 알고 견딘 시간이 아니었다. 오늘도 버텨야 하는지, 내일도 버틸 수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막막함 속에서 하루를 넘긴 것이다. 뉴욕 어딘가에서, 이 세상의 어딘가에서, 꿈을 위해 오늘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건네는 "조금 만 더 힘내라"는 말이 그래서 더 깊이 닿는다. 그 말은 고난을 극복한 사람의 여유가 아니라, 그 고난의 한가운데를 통과한 사람만이 건넬 수 있는 체온이 담긴 말이기 때문이다.

책에서 내가 가장 오래 붙들고 생각한 장면은, 뜻밖에도 요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면접 자리에서 셰프가 묻는 질문이 있다. "당신은 어떤 요리를 하고 싶습니까?" 기술을 묻는 것이 아니다. 수상 경력이나 근무 이력을 확인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질문이다. 요리로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지,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를 듣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오래 생각했다. 만약 누군가 내게 같은 질문을 직업의 자리에 놓고 던진다면 어떨까. "당신은 어떤 일을 하고 싶습니까?" 나는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을 까. 그저 안정적인 직장을 원한다거나, 남들이 인정하는 이력서를 갖고 싶다는 말이 먼저 튀어나오지는 않을까. 기술은 가르칠 수 있지만 태도는 가르칠 수 없다는 말, 주방은 실수를 허용하지만 게으름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 이것은 요리의 세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일이든, 그 일을 왜 하고 싶은지를 자기 언어로 말 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결국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생긴다.

셰프는 요리와 먹는 사람 사이에서 일종의 대화를 이어가는 사람이라고 책은 말한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있어야 대화가 되듯, 요리도 만드는 사람과 먹는 사람이 서로를 향해 열려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런데 그 대화는 언제나 오해와 불일치를 품고 있다. 만드는 사람의 의도가 먹는 사람에게 그대로 전달되지 않을 수 있고, 먹는 사람의 기대를 만드는 사람이 완벽하게 채울 수 없다. 그럼에도 좋은 요리, 좋은 대화는 계속된다. 그것은 상대를 완전히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해하려는 마음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장면에서 요리 가 음식만을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요리는 태도이고, 철학이고, 관계의 방식이다. 말하지 않아도 그 요리에 담긴 마음이 손끝에서부터 전해진다는 것. 급하게 만들었는지, 정성껏 기다렸는지, 보는 사 람을 생각했는지, 그 모든 것이 한 접시 위에 고스란히 남는다는 것. 그게 요리의 힘이라면, 그 힘은 어쩌면 우리가 매일 하는 모든 일에도 똑같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프렌치 요리의 정점에서 다시 한식으로 돌아오는 선택도 그랬다. 더 쉬운 길이 아니라 더 자신다운 길을 택한 것. 어머니의 손맛과 어린 시절의 기억, 몸에 새겨진 감각. 가장 익숙한 것이 가장 강력할 수 있다는 깨달음. 이 것은 퇴보가 아니라 귀환이다. 남들이 인정하는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 용기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자신이 가장 자신다운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훨씬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잘하는 것과 나다운 것이 늘 일치하길 바라지만, 그 둘이 어긋나는 순간이 오면 대부분은 잘하는 것을 선택한다. 남들의 눈에 더 그럴듯해 보이 는 쪽을. 하지만 이 책은 조용히 묻는다. 그게 정말 당신의 선택이었냐고.

책의 마지막을 덮고 나서 한동안 그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화려한 성공담을 기대하고 펼쳤다면 어쩌면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결과보다 과정에 훨씬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기 때문이다. 미쉐린 스타를 받는 순간보다, 그 별을 향해 나아가던 밤 12시의 메뉴 미팅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주방 한 귀퉁이에서 노트에 빼곡히 채워 넣었던 기록들이,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이다. 결국 남는 건 화려함이 아니라 본질이라는 것. 셰프의 자격은 별이 아니라 시간 속에 있다는 것. 나는 이 문장이 비단 요리의 세계에만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이 든, 어떤 꿈이든, 결국 그것을 만들어온 시간이 그 사람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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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10대를 위한 최소한의 미국사 요즘 10대를 위한 최소한의 시리즈
김봉중 지음 / 빅피시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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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처음에 이 책을 집어 든 것은 순전히 입시와 내신 때문이었다. 논술 준비에 미국 정치와 역사가 빠지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터라, 배경지식을 쌓겠다는 실용적인 목적이 전부였다. 그런데 읽다 보니 생각지 못한 곳에서 멈추게 되었다. 교과서에서 몇 줄로 처리되던 사건들이 살아있는 이야기로 펼쳐지면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시험 소재가 아니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 직결된 문제임을 깨달았다.

책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연방 정부와 주 정부 사이의 끝없는 충돌이었다. 트럼프 행정부가 불법 이민자 추방 명령을 내렸을 때 캘리포니아주가 이를 거부했다는 사례는 충격적이었다. 같은 나라 안에서 정부와 지방이 소송으로 맞붙는다는 것이 처음에는 혼란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이 갈등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버그가 아니라 설계 원리 자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다. 미국 헌법은 처음부터 누구도 지나치게 강력해지지 못하도록 권력을 쪼개놓았다. 입법·행정·사법의 삼권 분립만이 아니라, 연방과 주 사이의 권력 배분도 핵심 원칙이었다. 수정 헌법 제10조는 연방에 위임되지 않은 권한은 주와 국민에게 귀속된다고 못 박고 있다. 이 조항 하나가 지금도 살아 움직이며 대통령 행정 명령에 맞선 주 정부의 방어 논리로 쓰인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중앙 정부의 지시는 당연히 따라야 할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미국은 다르다. 연방법이 주법보다 우선하는 '선점 원칙'이 있지만, 주법이 주민에게 더 많은 권리를 보장할 때는 주법이 앞선다. 네바다주가 연방 금주법 시대에 도박을 합법화하고, 캘리포니아주가 총기 규제에서 연방보다 훨씬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그 예다. 갈등은 혼란처럼 보이지만, 실은 권력 남용을 막는 완충 장치라는 것을 이 책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월스트리트와 달러에 관한 장을 읽으면서 경제와 역사가 얼마나 긴밀하게 얽혀 있는지를 실감했다. 1609년 네덜란드인들이 모피 무역을 위해 맨해튼에 정착하면서 세운 담, 즉 '월'이 훗날 월스트리트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단순한 지명 유래가 아니다. 종교적 이상을 품고 신대륙에 온 청교도들과 달리, 뉴욕을 일군 사람들의 동기는 처음부터 통상과 이윤이었다. 그 상업적 DNA가 지금까지도 뉴욕을 세계 금융의 심장으로 유지시키고 있다는 통찰이 흥미로웠다. 달러가 기축 통화가 된 과정도 마찬가지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 동안 유럽은 전쟁 자금을 마련하느라 금 본위제를 포기했고, 그 결과 자국 화폐의 가치가 추락했다. 반면 미국은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거의 받지 않으면서 유럽에 물자를 팔고 금을 빨아들였다. 1944년 브레턴우즈 협정에서 달러가 세계 기준 통화로 자리 잡은 것은 미국의 외교적 능력만큼이나 운과 지리적 행운의 결과이기도 했다. 어떤 나라의 화폐가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가는 그 나라의 경제력만이 아니라 역사적 우연과 전략적 선택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임을 배웠다. 유대인과 금융에 관한 장은 특히 인상 깊었다. 중세 가톨릭교회가 기독교인에게 대부업을 금지하면서 유대인에게만 허용한 것이 오히려 유대인 금융업의 토대가 되었다는 역설적 사실이 그렇다. 배제와 차별이 특정 집단을 특정 분야로 밀어 넣었고, 그것이 오랜 세월을 거쳐 전문성으로 축적되었다. 유대인 음모론이 퍼지는 이유 역시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경제 위기 때마다 희생양이 필요했던 사람들의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사실은 지금도 SNS에 떠도는 각종 음모론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에 대한 기준을 제시해 준다.

총기 규제 장은 읽는 내내 불편했다. 어린 초등학생 열아홉 명이 학교 교실에서 목숨을 잃어도 총기법이 바뀌지 않는다는 현실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책은 그 현실의 구조적 이유를 차분하게 설명한다. 수정 헌법 제2조는 미국인에게 단순한 법 조항이 아니다. 건국 초기, 서부 개척 시대, 인종 갈등의 역사를 관통하며 총은 자기 자신과 가족을 지키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 경험이 수백 년에 걸쳐 문화로 굳어졌다. 전미총기협회(NRA)의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 역시 단순히 로비 단체의 힘이 아니다. 그 뒤에는 총기 소유를 자유와 동일시하는 수천만 명의 유권자가 있다. 공화당과 민주당이 총기 문제에서 첨예하게 갈리는 것은 단순한 이해관계 때문이 아니라, 자유와 안전을 어떻게 균형 잡을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가치관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정답이 하나인 문제가 아니다. 논술 시험에서 종종 '미국의 총기 규제'를 주제로 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단순히 찬반을 묻는 것이 아니라, 상충하는 가치들 사이에서 어떻게 논리를 구성할 것인가를 보는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미국이 하나의 완성된 나라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과 싸우는 나라라는 것이다. 연방과 주, 자유와 질서, 다수와 소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미국은 지금도 갈등하고 있다. 그 갈등이 때로는 폭동으로, 때로는 법정 소송으로, 때로는 선거로 표출된다. 헌법은 명확하지 않고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었지만, 바로 그 모호함이 어떤 특정 세력도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해왔다.논술과 내신을 위한 배경지식이라는 처음의 목적은 어느새 부수적인 것이 되었다. 미국 역사를 통해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자유와 평등이 왜 충돌하는지, 경제와 정치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 훨씬 풍부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입시는 결국 세상을 읽는 능력을 평가하는 과정이고, 이 책은 그 능력을 기르는 데 생각보다 훨씬 깊이 있는 도움을 주었다. 미국을 안다는 것은 세계 질서의 중심을 이해하는 일이고, 그것은 곧 지금 내가 살아가는 현실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 이해를 향한 좋은 첫 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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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일동맹이라는 거울 - 한미일 안보 체제의 한계와 가능성
지지와 야스아키 지음, 길윤형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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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만약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고, 이에 미국이 군사개입을 결정한다면 일본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재일미군이 대만으로 직접 출격하려 할 경우, 일본 정부는 미국과 사전협의를 거쳐 기지 사용을 승인해야 한다. 이때 적대 세력이 '일본이 미군에게 기지 사용을 허용한다면, 일본도 공격 대상으로 간주하겠다'고 위협해온다면, 일본은 과연 기지 사용을 거부함으로써 분쟁의 당사자가 되는 상황을 피할 수 있을까? 치지와 야스아키(千々和泰明)의 책은 바로 이 불편한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흥미로운 주제다.

저자는 방위성 방위연구소의 수석연구관으로, 내각관방 부장관보(안전보장·위기관리 담당)실에서 실무를 경험한 안보 전문가다. 이 책은 그러한 현장 경험과 학문적 분석을 결합하여, 전후 일본이 굳혀온 일미동맹 인식의 '사각지대'를 다섯 가지 주제 즉, 기지 사용, 부대 운용, 사태 대처, 출구전략, 확대억지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검토한다. 핵심 문제의식은 하나다. 일본이 자국의 국내 논리와 희망적 사고에 기반한 '일본적 시점'에만 갇혀 있으면, 안보 현실과의 간극이 커져 오히려 일본 자신의 안전을 위협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일본적 시점'이란, 전후 일본이 안보 논의에서 지속적으로 견지해 온 관점이다. 미국의 전쟁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것, 군사적 협력은 최소한에 그치겠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헌법 해석의 테두리 안에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태도가 그것이다. 이 시점은 국내 여론과 정치적 합의를 중시하는 일본 특유의 정치 환경에서 형성된 것으로, 그 자체로 비합리적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 시점이 상대방의 인식이나 지역 전체의 세력균형과는 무관하게 형성되어 있다는 데 있다.  예컨대 기지 사용 문제에서 일본은 사전협의 제도를 통해 재일미군의 직접 전투작전 행동에 제약을 가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적대 세력의 눈에 일미동맹은 일체화된 안보 시스템으로 비친다. 일본이 '노(No)'라고 답할 가능성을 고려해 주거나, '어쩔 수 없이 묵인하는 것이니 적국이 아니다'라고 이해해 줄 상대방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는 중요한 것은 기지 사용 허부(許否) 자체가 아니라, 그 허용 여부가 미국 중심의 동맹 네트워크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동하게 하여 지역 평화 질서를 유지하는가에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이 바로 저자가 제안하는 '제3자적 시점'이다. 이는 단순히 해외의 시각을 수입하는 것도, 일본의 관점이 틀렸다고 훈계하는 것도 아니다. 국가 간 상호작용과 세력균형이라는 지정학적 현실을 직시하는 관점으로, 일본적 시점을 이 넓은 맥락 안에서 상대화하려는 시도다.

책의 역사적 분석 축을 이루는 개념이 '극동 1905년 체제'다. 러일전쟁 이후 성립된 이 지역 질서는, 전통적 패권국 중국이 약화되거나 자제하는 상황을 전제로, 일본 및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한반도(적어도 남부)와 대만이 세력의 뒷받침 아래 같은 진영에 묶이는 구조를 가리킨다. 1905년에 미국, 영국, 그리고 러시아까지 승인한 포츠머스조약 체제에서 유래한 이 질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영유권 상실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일미동맹, 미한동맹, 대만관계법 등을 통해 사실상 계승하였다. 이 시각에서 보면, 일미동맹은 결코 독립적인 양국 간 조약이 아니다. 미한동맹과 사실상 맞물려 있는 '미일·미한 양동맹'이라는 광역 안보 시스템의 일부로 기능한다. 저자는 이것이 바로 '극동 조항'이나 '조선 밀약' 같은 제도적 장치들이 존재하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장치들은 미일동맹이 더 큰 지역 안보 체계의 일환으로 작동하기 위한 '경첩'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일본적 시점에서만 바라보면 이 구조는 좀처럼 보이지 않지만, 제3자적 시점으로 전환하는 순간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또한 저자는 한국과 대만에도 비전략핵이 배치되었던 냉전기의 사례를 들어, 미국이 핵 전력을 운용할 때에도 극동 전체를 하나의 전략 단위로 사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오키나와에 배치된 핵무기가 일본 유사사태보다 한반도 유사사태를 주로 상정했다는 사실은, 일미동맹이 지역적 연계 속에서만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저자가 제시하는 다섯 개의 사각지대 중 특히 인상적인 것은 밀약과 출구전략, 그리고 확대억지에 관한 논의다. 전후 일미 간의 각종 밀약(핵 탑재 함선의 기항, 조선 유사사태에서의 기지 사용, 오키나와 반환 협정)은 일본 국내 정치의 논리에서 보면 민주주의적 투명성의 결여로 비판받는다. 그러나 저자는 이를 지정학적 시각에서 재조명한다. 전략 문화가 상이한 두 나라가 동맹을 유지하려면, 국가 안보에 책임을 지는 외교 당국이 고도의 정치적 판단 아래 정책을 조정하는 것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밀약의 존재 자체가 억지력으로 작용하는 아이러니도 지적된다. 지휘권 문제에서도 일미동맹의 특수성이 드러난다. 미군 합동참모본부는 동맹 간 지휘권 조정 방식을 세 가지, 지휘권 통합형(미한동맹·나토), 일국주도형(이라크전쟁 연합군), 지휘권 병립형 으로 분류한다. 일미동맹은 이 중 지휘권 병립형에 해당한다. 이는 일본이 역사적·정치적 이유로 지역 다자동맹 참여에 소극적이었고, 주변국들 역시 일본의 가입을 꺼렸던 데서 비롯된 구조다. 이 구조가 실제 유사사태 시 어떤 조정 과제를 낳는지에 대해 저자는 냉철하게 분석한다.


출구전략 논의에서 저자는 태평양전쟁기 일본의 전쟁 종결 구상을 반면교사로 삼는다. 일본은 독일의 승리와 영국의 굴복을 전제로 미국과의 무승부를 노렸으나, 독일의 패망 이후 '일격평화론'으로 선회했다가 결국 소련의 힘에 기댔다. 이 일련의 과정은 국제정치의 현실보다 국내 합의 형성을 우선시한 결과였다. 저자는 이러한 '결단하지 못하는 헌법 체제'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유사사태를 어떻게 종결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제1차 걸프전쟁에서 다국적군이 사담 후세인 정권을 온존시킨 것이 결국 2003년 이라크전쟁의 씨앗이 된 사례처럼, '타협적 평화'와 '분쟁 원인의 근본적 해결' 사이의 선택은 단순한 군사 문제가 아니라 심층적인 전략 판단의 문제다.

2015년 안보법제 제정과 집단적 자위권의 한정적 행사 용인, 그리고 일미 확대억지 협의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일본의 안보 논의가 여전히 헌법 준수 여부에 지나치게 무게를 두고 있다고 진단한다. 물론 헌법의 규정과 해석에 따라 법률을 제정하는 것은 입헌주의의 기본이다. 그러나 세력균형론의 관점에서 일본의 생존 조건을 논하는 풍토가 아직 시민권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우려다.  비핵 3원칙과 미국의 확대억지 정책 간의 긴장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핵 탑재 함선의 일시 기항도 사전협의 대상이며, 미국이 이를 요청한 적이 없기 때문에 핵 탑재 함선이 일본에 기항한 사실이 없다는 '픽션'을 유지해왔다. 이 설명에 납득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저자도 인정한다. 문제는 이 픽션이 국내 정치적 필요에서 나온 것이기에, 실제 억지력 강화라는 관점에서 논의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데 있다.

최근 아시아·태평양에서는 허브 앤 스포크형 동맹망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조약상 동맹국이 아닌 국가들 사이의 안보 협력이 심화되고 있다. 한국과 대만, 쿼드(QUAD)를 구성하는 오스트레일리아와 인도, 영국, 필리핀 등과의 다국간 네트워크화가 현실적 과제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추세 속에서 우주·사이버·전자파 등 신영역을 포함한 정보 공유와 운용 조정이 중요해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극동 1905년 체제'의 현대적 재편 방향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책은 어느 한쪽의 이념이나 정치적 입장을 옹호하지 않는다. 저자는 일본의 관점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안보 현실의 전체 그림을 가리는 '사각지대'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차분하고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역사적 경위를 꼼꼼히 따라가면서도, 일반 독자가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직관에 반하는 논점들을 풀어내는 솜씨는 인상적이다. 저자가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엄혹한 안보 환경 속에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미동맹을 제3자적 시점에서 바라보는 전략적 논의 자체가 억지력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지정학적 시점을 포함한 깊이 있는 안보 논의가 활성화되는 것, 그것이 이 책이 궁극적으로 촉구하는 바다. 중국의 부상과 대만 문제, 북한의 핵 위협이 현실이 된 오늘날, 이 책이 제기하는 문제는 일본만의 것이 아니다. 한반도 및 인도태평양 지역 전체의 안보 질서를 고민하는 모든 이에게 유효한 사유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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