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랭브릿지 옮김 / 리프레시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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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을 다시 읽으며 나는, 이 소설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책이 아님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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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랭브릿지 옮김 / 리프레시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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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대학교 1학년 교양 수업에서 이방인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뫼르소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이해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고, 그 다음 날 연인과 수영을 즐기며, 살인의 이유를 '태양이 눈부셨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인물. 교수님은 그를 실존주의와 부조리의 상징이라 설명했고, 나는 그 말을 열심히 받아 적었다. 시험에 나올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사회에 나온 지 몇 해가 지나, 다시 이 책을 펼쳤을 때 나는 예상치 못한 감각과 마주했다. 뫼르소가 낯선 인물이 아니라, 어딘가 익숙한 존재처럼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그가 느끼는 피로, 무료함, 그리고 세계가 자신에게 특정한 감정을 요구한다는 그 압박감. 나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카뮈는 서문에서 뫼르소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거짓말하기를 거부한다. 거짓말이란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아니 무엇보다도, 실제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일이며, 인간의 마음과 관련해서는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는 일이다."

​학생 때 이 구절을 읽었다면 나는 아마도 '그래, 진실을 말하는 용기 있는 인간'이라고 개념적으로 정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 문장이 가슴을 건드리는 이유는, 내가 매일 그 반대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부장님의 아재 개그에 웃고, 전혀 공감되지 않는 회식 자리에서 즐거운 척하며, 실은 대단히 피곤한 금요일 오후에도 '한 주도 수고하셨어요'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건넨다. 느끼지 않은 것을 느낀 척하는 일. 카뮈의 말을 빌리자면, 이것이야말로 거짓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 거짓말을 매일 연습하며 살아간다. 뫼르소는 그것을 거부했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것은 그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순간 자신이 실제로 느끼는 감정이 눈물의 형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애도를 모르는 인간이 아니다. 다만 그는 사회가 요청하는 형식의 애도를 수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은 그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사회에 나온다는 것은 수많은 형식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떤 자리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실망했을 때도 어떤 말로 포장해야 하는지, 분노가 치밀어도 어떤 온도로 말을 낮춰야 하는지. 나는 그것을 사회화라 부르며 자연스럽게 익혔다. 그러나 이따금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이 형식들이 나를 부드럽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내 안의 무언가를 조금씩 지우고 있는 것인지. 뫼르소의 재판은 그 의문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이야기다. 법정에서 심판받는 것은 그의 살인 행위가 아니다. 실제로 재판의 핵심은 그가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것, 장례 다음 날 여자를 만났다는 것, 커피를 마셨다는 것이다. 그는 감정의 형식을 위반한 죄로 죽음을 선고받는다. 그 논리는 소설 속에만 있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어떤 사람이 충분히 슬퍼 보이지 않으면 그 슬픔의 진실성을 의심하고, 충분히 후회하는 표정을 짓지 않으면 그 후회의 진정성을 박탈한다. 형식이 곧 진실이 되는 세계. 뫼르소는 그 세계 안에서 형식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진실을 지키려 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가혹했다.

카뮈는 뫼르소를 '가난하고 벌거벗은 인간'이라 부른다. 처음에는 이 표현이 잘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그것은 무언가를 덮지 않은 인간, 포장하지 않은 인간의 모습이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감정 위에 적절한 포장을 얹어 세상에 내놓는다. 그것이 예의이고, 때로는 배려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포장이 두꺼워질수록, 우리는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느끼는지 점점 모르게 된다. 뫼르소는 그 포장을 갖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추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되었고, 그 시선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한 채 심판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자신이 느끼는 것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인간이었다. 알제의 태양, 바다의 냄새, 마리의 웃음. 그는 그것들을 가감 없이 받아들였다. 때로 나는 내가 마지막으로 어떤 감정을 가감 없이 느꼈던 게 언제인지를 떠올려본다. 기쁠 때 충분히 기뻐했는지, 슬플 때 스스로의 슬픔을 허락했는지.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조금 멈추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뫼르소는 신부의 위로를 거부하며 폭발한다. 그 장면을 다시 읽으며 나는, 그것이 분노가 아니라 해방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는 오랫동안 세상이 그에게 씌우려 한 의미들을 거부한다. 신의 은총도, 회개의 서사도, 죽음 앞에서의 극적인 각성도. 그는 끝까지 자기 자신이었다. 그리고 죽음을 앞에 두고 그는 이렇게 느낀다. 밤 냄새와 흙 냄새, 소금 냄새가 관자놀이를 식혀주고, 잠든 여름의 경이로운 평화가 밀물처럼 밀려들어온다고. 그것은 패배의 장면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와, 그리고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장면이다. 대학 때 나는 그 장면을 허무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오히려 눈부시다. 형식을 걷어낸 자리에 남은 것, 냄새와 온도와 감각으로 이루어진 날것의 삶. 그것이 뫼르소가 끝끝내 놓지 않은 것이었다.

이방인을 다시 읽으며 나는, 이 소설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책이 아님을 알았다. 뫼르소처럼 모든 형식을 거부하며 살 수는 없고, 어쩌면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내게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나는 지금 내가 실제로 느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아니면 느껴야 한다고 배운 것만을 느끼고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잠시 멈춘다. 그리고 그 멈춤이, 이 책을 다시 읽은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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씽크 딥 - 가짜 생각에서 벗어나 진짜 생각이 시작되는 순간
유디트 베르너 지음, 배명자 옮김 / 페이지2(page2)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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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밤 열한 시, 나는 또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오늘 낮에 내가 한 말이 틀리지는 않았을까. 그 사람이 내 문자를 읽고도 답하지 않은 건 무 슨 의미일까. 내일 회의에서 상사가 내 보고서를 어떻게 볼지. 5년 후 나는 지금보다 나아져 있을까, 아니면 그때도 이렇게 같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멈추려 해도 멈춰지지 않는다. 숫자를 세어 보고, 음악을 틀어 보고,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 반복해 보지만 머릿속의 소용돌이는 잠잠해질 기미가 없다. 우리는 이것을 흔히 '생각이 많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생각이 많은 것이 아니라 생각이 제자리를 맴도는 것이다. 더 정확한 단어가 있다. 오버싱킹(Overthinking). 생각 과잉이다. 생각 과잉은 단순한 걱정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구조를 가진 사고의 패턴이다. 출발은 있으나 도착이 없고, 문제는 인식하나 해결에는 이르지 못하며, 에너지는 소진되지만 결과는 남지 않는 일종의 지적 공회전 상태. 엔진은 힘차게 돌아가는데 차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이 상태에서 보통 세상이 건네는 처방전은 대개 두 가지다. 그냥 하는 것. 생각을 멈추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그러나 이 두 가지 처방은 생각 과잉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조언들은 하 나같이 생각 자체를 문제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생각이 많은 것이 문제인가? 아니면 생각의 방향이 문제인가?

생각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가 실제로 필요한 것은 출구가 아니라 나침반이다. 오버싱킹과 딥싱킹(Deep Thinking)의 차이는 생각 의 양에 있지 않다. 방향과 구조에 있다. 오버싱킹이 같은 지점을 계속 맴도는 원운동이라면, 딥싱킹은 표면에서 시작해 점점 더 근본 적인 질문을 향해 내려가는 수직 운동이다. 오버싱킹이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를 반복한다면, 딥싱킹은 왜 나는 이것을 두려워하는가", "이 두려움은 어디서 왔는가", "내가 실제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 전환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불가능하지도 않다. 몇 가지 실마리를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생각에 이름을 붙인다. 소용돌이치는 생각들을 그대로 두면 덩어리가 되어 압도한다. 하지만 "지금 나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지금 나는 타인의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하고 있다"처럼 이름을 붙이는 순간, 생각은 감정의 덩어리에서 분리되어 관찰 가능한 대상이 된다. 이것이 딥싱킹의 첫 걸음이다. 생각에 잡아먹히지 않고, 생각을 바라보는 것이다.

'사실'과 '해석'을 분리해야 한다. 오버싱킹의 상당 부분은 사실이 아닌 해석에서 자란다. 상사가 오늘 내 인사를 짧게 받았다는 것은 사 실이다. 그러나 '나를 싫어한다, '해고될 것이다, '내가 뭔가 잘못한 것이다'는 모두 해석이다. 딥싱킹은 이 두 가지를 의식적으로 분리 하는 훈련이다. 사실의 층위에 머물 때, 우리의 생각은 훨씬 더 생산적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또한 혼자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우리의 생각은 혼자 완결되지 않는다.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각도를 발견하고, 내 생 각의 맹점을 인식하게 된다. 오버싱킹하는 사람들이 종종 타인과의 관계에서 더 많은 에너지를 소진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관계 속에서 생각을 완성할 수 있는 가능성도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에 '기한'을 두어야 한다. 이것은 생각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각을 존중하는 방식이다. "이 문제는 오늘 저녁 한 시간 동안 충분히 생각하겠다. 그 이후에는 내일로 미루겠다." 이 렇게 의식적으로 생각의 시간과 공간을 설정하면, 생각은 삶 전체를 잠식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무한정 열려 있는 생각의 문을 일부러 닫는 것, 이것이 생각을 더 잘 하는 방법이다.

왜 우리는 생각하는가? 생존을 위해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 물론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이다. 생각 없이 경험은 축적되지 않는다. 반성 없이 실수는 반복된다. 성찰 없이 우리는 타인의 언어와 논리 속에서 부유하게 된다. 오버싱킹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세상이 '생각을 멈추라'고 말할 때, 그 말의 이면에는 사실 이런 메시지가 숨어 있다. 그냥 순응하라. 지금 있는 자리에서 효율적으로 움직여라. 큰 그림은 네가 신경 쓸 일이 아 니다." 그러나 이에 저항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 바로 더 잘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가다듬는 것. 소음을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소음 속에서 내 목소리를 찾는 것. 불안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의 정체를 직시하는 것이다. 생각이 많다는 것은 결함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다만 그 의지가 제 방향을 찾지 못하고 내면에서 소진될 때, 우리는 지치고 무너진다. 오버싱킹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그러므로 생각을 버리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다만, 그 생각을 데리고 좀 더 깊은 곳으로 가는 것이다. 천장을 바라보며 같은 걱정을 되풀이하는 대신, 그 걱정의 뿌리를 향해 한 걸음씩 내려가 보는 것이다. 아마도 그 끝에는,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고요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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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용기가 없지, 질문이 없냐
구정화 지음 / 해냄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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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은 인간임을 증명하는 가장 용기 있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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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용기가 없지, 질문이 없냐
구정화 지음 / 해냄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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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역사에는 서로 닮은 듯 다른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기원전 아테네의 광장을 누비며 쉼 없이 물음을 던졌고, 그 때문에 독배를 들었다. 다른 한 사람은 20세기 유럽의 관료실에 앉아 단 한 번도 스스로에게 묻지 않았고, 그 때문에 교수대에 올랐다. 소크라테스와 아이히만. 한 사람은 너무 많이 물어서, 다른 한 사람은 전혀 묻지 않아서 생을 마감했다. 아이히만은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강제수용소로 이송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재판정에서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자신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며, 책임이 없다고.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그 모습에서 악의 본질을 읽어냈다. 괴물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 한 번도 자신의 행동이 옳은지 묻지 않았기에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의 공범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이를 '사유의 무능함'이라 불렀다. 질문하지 않는 삶이 어디까지 인간을 타락시킬 수 있는지를 아이히만은 온몸으로 증명했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묻는 행위 그 자체를 삶의 방식으로 삼았다. 그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깨달음에서 출발하여, 사람들이 스스로 지혜에 이르도록 질문으로 이끌었다. 그것은 단순한 교육 방법이 아니었다. 질문은 그에게 잠든 사회를 깨우는 유일한 도구였다. 권력자들이 그를 두려워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질문은 권력보다 강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 기자에게 직접 질문 기회를 주었지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2021년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세계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한국의 기자들은 침묵했다. 이것은 개인의 용기 부족이 아니다. 사회 구조가 오랜 시간에 걸쳐 질문을 억압해 온 결과다. 한국의 학교에서 학생은 지식을 수용하는 존재로 길러졌다. 교사가 전달하고 학생이 받아 적는 구조에서, 질문은 수업의 흐름을 방해하는 행위이자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위험한 일이 된다. 초등학교 교실을 가득 채우던 손들이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하나둘 내려가는 것은 그 아이들이 변한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이 배운 것이 변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느 학교 나왔냐', '연봉이 얼마냐', '아이는 언제 낳을 거냐'는 질문들이 상처로 되돌아오는 경험이 쌓이면서, 우리는 아예 묻는 것 자체를 포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질문을 두려워한 나머지 질문이라는 행위 전체를 내팽개친 것과 같다. 나쁜 칼이 무서워 요리를 포기한 셈이다.

이제 새로운 국면이 펼쳐지고 있다. 인공지능은 우리가 묻는 거의 모든 것에 답한다. 검색창에 무언가를 치면 수십만 건의 정보가 쏟아지고, AI 챗봇은 논문을 요약해 주고 코드를 짜주고 이메일 초안까지 작성해 준다. 이쯤 되면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이제 질문 능력이 더 중요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답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질문의 필요성이 줄어드는 것 아닐까. 그러나 정반대다. AI가 답을 내놓으려면 먼저 질문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질문이 얼마나 정교하고 깊은지에 따라 AI가 내놓는 답의 품질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기후변화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과 '기후변화가 한국 10대의 진로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라고 묻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AI 시대에 프롬프트 능력이 중요한 기술로 부상한 이유가 여기 있다. 결국 프롬프트는 질문이다. 더 나아가 AI는 인지적 공감은 흉내 낼 수 있어도 정서적 공감은 하지 못한다. 표정이 어두운 친구에게 '무슨 일 있어?'라고 묻는 것, 갈등하는 동료에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을까?'라고 묻는 것은 AI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행위다. 관계를 맺고 공동체를 이루는 모든 순간, 우리는 질문을 통해 서로에게 닿는다. 질문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온기로 작동한다.

질문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질문이 무지한 사람이 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것처럼 질문은 대화를 이끄는 사람의 도구다. 질문하는 사람이 주도권을 쥔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은 사회가 안정적으로 변화할 때나 통하는 이야기다. 기술과 산업이 통째로 뒤집히는 전환의 시대에 침묵은 도태를 의미한다. 좋은 질문은 해결책을 불러온다. 어린 딸이 '왜 지금 바로 사진을 볼 수 없어요?'라고 물었을 때, 그 물음을 흘려듣지 않은 아버지는 즉석카메라를 발명했다. 수많은 발명과 제도의 시작에는 사소해 보이는 질문이 있었다. 그 질문들은 세상을 바꿨다. 질문은 또한 스스로를 알아가는 통로다. '나는 왜 이 상황이 불편한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내가 지금 선택한 행동은 나와 주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런 질문들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이다. 아이히만이 평생 한 번도 자신에게 이 질문들을 던지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바쁜 일상 속에서 자신에게 묻는 것을 잊고 살기 쉽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거창할 필요는 없다. 처음에는 작은 것부터 묻는 연습을 해도 충분하다. 오늘 내가 한 선택 중 하나를 골라 '이 선택의 결과는 어떨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 친구가 힘들어 보일 때 '괜찮아?'라고 먼저 묻는 것. 수업 중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그냥 넘기지 않고 질문하는 것. 이 모든 소소한 행위들이 질문하는 삶의 시작이다. 질문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모른다는 것을 드러내야 하고, 때로는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가르쳐주었듯,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지혜의 출발점이다. 질문하지 않는 확신보다, 질문하는 의심이 우리를 더 멀리 데려간다. AI는 점점 더 많은 답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답을 구할 것인지, 왜 그 답이 필요한지, 그 답이 내 삶과 우리 공동체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결국 인간이 결정해야 한다. 그 결정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용기가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너무 오래 묻는 법을 잊고 살았을 뿐이다. 이제 다시 물을 차례다. 질문은 인간임을 증명하는 가장 용기 있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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