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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용기가 없지, 질문이 없냐
구정화 지음 / 해냄 / 2026년 4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역사에는 서로 닮은 듯 다른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기원전 아테네의 광장을 누비며 쉼 없이 물음을 던졌고, 그 때문에 독배를 들었다. 다른 한 사람은 20세기 유럽의 관료실에 앉아 단 한 번도 스스로에게 묻지 않았고, 그 때문에 교수대에 올랐다. 소크라테스와 아이히만. 한 사람은 너무 많이 물어서, 다른 한 사람은 전혀 묻지 않아서 생을 마감했다. 아이히만은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강제수용소로 이송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재판정에서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자신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며, 책임이 없다고.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그 모습에서 악의 본질을 읽어냈다. 괴물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 한 번도 자신의 행동이 옳은지 묻지 않았기에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의 공범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이를 '사유의 무능함'이라 불렀다. 질문하지 않는 삶이 어디까지 인간을 타락시킬 수 있는지를 아이히만은 온몸으로 증명했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묻는 행위 그 자체를 삶의 방식으로 삼았다. 그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깨달음에서 출발하여, 사람들이 스스로 지혜에 이르도록 질문으로 이끌었다. 그것은 단순한 교육 방법이 아니었다. 질문은 그에게 잠든 사회를 깨우는 유일한 도구였다. 권력자들이 그를 두려워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질문은 권력보다 강했다.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 기자에게 직접 질문 기회를 주었지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2021년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세계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한국의 기자들은 침묵했다. 이것은 개인의 용기 부족이 아니다. 사회 구조가 오랜 시간에 걸쳐 질문을 억압해 온 결과다. 한국의 학교에서 학생은 지식을 수용하는 존재로 길러졌다. 교사가 전달하고 학생이 받아 적는 구조에서, 질문은 수업의 흐름을 방해하는 행위이자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위험한 일이 된다. 초등학교 교실을 가득 채우던 손들이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하나둘 내려가는 것은 그 아이들이 변한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이 배운 것이 변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느 학교 나왔냐', '연봉이 얼마냐', '아이는 언제 낳을 거냐'는 질문들이 상처로 되돌아오는 경험이 쌓이면서, 우리는 아예 묻는 것 자체를 포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질문을 두려워한 나머지 질문이라는 행위 전체를 내팽개친 것과 같다. 나쁜 칼이 무서워 요리를 포기한 셈이다.이제 새로운 국면이 펼쳐지고 있다. 인공지능은 우리가 묻는 거의 모든 것에 답한다. 검색창에 무언가를 치면 수십만 건의 정보가 쏟아지고, AI 챗봇은 논문을 요약해 주고 코드를 짜주고 이메일 초안까지 작성해 준다. 이쯤 되면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이제 질문 능력이 더 중요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답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질문의 필요성이 줄어드는 것 아닐까. 그러나 정반대다. AI가 답을 내놓으려면 먼저 질문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질문이 얼마나 정교하고 깊은지에 따라 AI가 내놓는 답의 품질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기후변화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과 '기후변화가 한국 10대의 진로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라고 묻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AI 시대에 프롬프트 능력이 중요한 기술로 부상한 이유가 여기 있다. 결국 프롬프트는 질문이다. 더 나아가 AI는 인지적 공감은 흉내 낼 수 있어도 정서적 공감은 하지 못한다. 표정이 어두운 친구에게 '무슨 일 있어?'라고 묻는 것, 갈등하는 동료에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을까?'라고 묻는 것은 AI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행위다. 관계를 맺고 공동체를 이루는 모든 순간, 우리는 질문을 통해 서로에게 닿는다. 질문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온기로 작동한다.질문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질문이 무지한 사람이 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것처럼 질문은 대화를 이끄는 사람의 도구다. 질문하는 사람이 주도권을 쥔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은 사회가 안정적으로 변화할 때나 통하는 이야기다. 기술과 산업이 통째로 뒤집히는 전환의 시대에 침묵은 도태를 의미한다. 좋은 질문은 해결책을 불러온다. 어린 딸이 '왜 지금 바로 사진을 볼 수 없어요?'라고 물었을 때, 그 물음을 흘려듣지 않은 아버지는 즉석카메라를 발명했다. 수많은 발명과 제도의 시작에는 사소해 보이는 질문이 있었다. 그 질문들은 세상을 바꿨다. 질문은 또한 스스로를 알아가는 통로다. '나는 왜 이 상황이 불편한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내가 지금 선택한 행동은 나와 주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런 질문들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이다. 아이히만이 평생 한 번도 자신에게 이 질문들을 던지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바쁜 일상 속에서 자신에게 묻는 것을 잊고 살기 쉽다.그렇다면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거창할 필요는 없다. 처음에는 작은 것부터 묻는 연습을 해도 충분하다. 오늘 내가 한 선택 중 하나를 골라 '이 선택의 결과는 어떨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 친구가 힘들어 보일 때 '괜찮아?'라고 먼저 묻는 것. 수업 중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그냥 넘기지 않고 질문하는 것. 이 모든 소소한 행위들이 질문하는 삶의 시작이다. 질문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모른다는 것을 드러내야 하고, 때로는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가르쳐주었듯,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지혜의 출발점이다. 질문하지 않는 확신보다, 질문하는 의심이 우리를 더 멀리 데려간다. AI는 점점 더 많은 답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답을 구할 것인지, 왜 그 답이 필요한지, 그 답이 내 삶과 우리 공동체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결국 인간이 결정해야 한다. 그 결정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용기가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너무 오래 묻는 법을 잊고 살았을 뿐이다. 이제 다시 물을 차례다. 질문은 인간임을 증명하는 가장 용기 있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