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하기 전에 읽는 심리학 - 이대로 살긴 싫은데 바꾸자니 두려운 어른들에게
김혜령 지음 / 메이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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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모두 불안을 안고 산다. 직업의 안정성도, 인간관계도, 미래도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는 세상에서 불안은 공기처럼 우리 곁에 머문다. 그런데 심리상담가로 17년을 일해 온 저자는 묻는다.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불안이, 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쁜 것일까? 저자 자신도 한때 불안에 짓눌려 살았다. 대학원 시절 부모님의 경제적 어려움을 알게 된 이후, 그는 오직 '안정'만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전공과 무관한 직장에 취업해서 잘리지 않을 만큼만 일하고,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삶. 그렇게 3년이 지나자 안정이 아니라 정체가 남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작은 자극에도 쉽게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때 그는 '역동적 평형'이라는 개념을 만났다. 변화와 도전을 받아들이면서 유연하게 대처하고, 내적 자원을 활용해 균형을 되찾아 가는 과정. 진정한 안정이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나아가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흔들리는 존재다. 흔들리지 않으려 바위처럼 굳어 있겠다는 건, 어쩌면 죽은 듯이 살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자 탈 벤 샤하르는 안전지대와 위험지대 사이의 '건강한 중간 지대'를 발견하기 위해 모험을 시도하라고 했다. 저자는 그 말을 몸으로 증명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심리상담가의 길을 걸으며 수입이 전혀 없는 시기도 견뎌 냈다. 서른이 넘어 통장 잔고가 바닥을 칠 때의 불안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시간을 위기가 아니라 성장의 과정으로 받아들였을 때, 전에 없던 새로운 경험들이 쌓였다. 마흔이 넘은 지금, 저자가 20년 전과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불안을 더 이상 제거해야 할 결함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안해도 결국 해냈던 경험, 흔들리면서 무너지지 않았던 시간들이 쌓이면서, 불안은 그를 끌고 다니는 주인이 아니라 삶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흔들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기보다 기꺼이 흔들리는 자신을 허용해 보자. 불균형과 균형 사이의 시소 타기는 위기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가장 자기다운 성장의 과정이다.

요즘 사람들은 '나답게 살고 싶다'는 말을 참 자주 한다. 직업의 안정성도, 성공의 공식도 믿을 수 없는 시대에서 사람들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닻으로 자기 자신을 선택한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추구하는 '나다움'이 진짜 나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이 시대가 원하는 '자기다움'을 흉내 낸 것인지. 영국의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캇은 타인의 기대에 맞춰 방어적으로 만들어진 자기를 '거짓 자기'라고 불렀다. SNS에서 나다운 스타일, 말투, 행동을 전시하며 그것을 진짜 자신이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이미 또 다른 거짓 자기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모순되고 변해 가는 다양한 나를 통합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남에게 보여 주기 싫고 나조차 외면하고 싶은 초라한 모습까지 포함해서. 그러나 더 본질적인 문제는, 나에 대한 생각이 지나칠수록 오히려 삶에 몰입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청소년기 내내 삶을 증오하고 자살 충동을 안고 살았다. 그가 삶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을 줄이고, 세상의 일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을 때였다. 나만 존재하는 좁은 세계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숨통이 트인다.


저자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일이든, 사람이든, 예술이든 무언가를 온 마음으로 사랑할 때 우리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몰두하게 된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사라지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크게 확장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몰입을 두려워한다. 최선을 다했다가 기대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할까 봐, 깊이 사랑했다가 상처만 남을까 봐. 그래서 차라리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을 지키는 쪽을 선택한다. 그러나 무언가에 몰두해 본 경험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삶의 자산이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감각이다. 어디까지 해봤는지,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지, 어느 지점에서 포기하고 싶어지는지, 그럼에도 다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이런 감각들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두려움에 '나'만 붙들고 살지 말기를. 삶에, 사람에, 일에, 사랑에 한 번쯤은 온 힘을 다해 미쳐 보기를 생각해 본다.

사회심리학자 앤드루 힐과 토머스 커런이 27년간 4만 명 이상의 대학생을 분석한 결과, 완벽주의의 세 가지 유형 중 '사회 부과적 완벽주의' (타인이나 사회가 자신에게 높은 기준을 기대한다고 느끼는 경향)의 증가 속도가 가장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 요즘 젊은 세대는 점점 더 자기 자신을 타인의 기대 속에서 정의한다는 것이다. 외모, 성격, 직업, 재테크, 육아까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육각형 인간'을 좇으려 하니 사람들은 스스로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못한다. 하지만 완벽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부지런함이나 성실함이 아니라, 게으름과 회피, 끝없는 자기 비난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강박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키워 사람을 더 주저하게 만든다. 사르트르는 타인의 시선이 나의 존재를 객체화한다고 말했다. 그의 유명한 말 '타인은 지옥이다'의 본래 의미는, 타인의 시선 속에 갇힌 나의 모습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에 있다. 그 시선에 나를 모두 내맡기느냐, 아니면 중심을 잘 잡고 그 시선을 하나의 의견으로 여기느냐는 엄연히 다른 문제다. 저자는 대안으로 '완주'를 제안한다. 누구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대단해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정한 방향이기에 할 수 있다면 계속하는 것. 학창 시절 공부를 후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보면, 대부분 1등을 못 해서가 아니라 그 시절에 충실하지 않아서 후회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련과 후회는 결과 그 자체보다 그 순간에 충실하지 못했을 때 남는 것이다. 완벽함이 아니라 꾸준함. 그것이 결국 재밌었던 삶을 만드는 힘이다.


두려움을 이해하는 것은 나라는 사람을 깊이 이해하는 좋은 통로가 된다. 저자는 한때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가졌다. 그러나 그것이 함정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두려움은 삶의 장애물이 아니라 위험으로부터 인간을 지켜 주는 자연스러운 신체 반응이기 때문이다. 통제되지 않는 두려움은 대개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저자가 상담한 20대 여성 승주 씨는 타인의 어두운 표정만 마주쳐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들여다보니, 감정 기복이 심했던 아버지와의 어린 시절 경험이 있었다. 뇌가 그 패턴을 위협으로 기억해, 어른이 된 지금도 비슷한 상황에서 과거의 공포를 재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몸에 새겨진 두려움은 생각을 바꾼다고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자신의 두려움이 어디서 왔는지 살펴보고, 최초의 두려움을 겪었던 과거의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이해의 단계를 통해 '나는 더 이상 무력한 아이가 아니라 나를 지켜 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긴다. 그것이 진짜 용기다.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용감한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함께 한 발짝 내딛는 것이 진정한 용기다. 저자의 바람은 이렇게 바뀌었다.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에서 '두려움과 함께 더 자유롭게'로. 두려움을 이해할수록 더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진다. 우리 모두의 두려움이, 결국 그럭저럭 살 만한 날들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상담을 요청하는 사람들의 고민은 겉으로는 제각각이다. 이직을 해야 할지, 이 사람과 결혼해도 될지, 이 친구와 관계를 끊어야 할지. 저자는 오랜 시간 이런 사연들을 마주하며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그 답을 타인에게 요청할 수밖에 없는 마음 이면에 있는 두려움이었다. 틀린 길을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잘못된 선택으로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저자도 오래 그랬다. 심리학을 공부하고, 종교에 기대고, 별자리 운세까지 찾으며 삶의 해결사를 구해 헤맸다. 그러나 돌고 돌아 얻은 깨달음은 단순했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나를 구원해 줄 수 없다는 것. 살아가는 한 나라는 존재의 운전대는 다른 누구에게도 넘길 수 없다. 심리학적 지식이나 심리치료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그저 나와 타인을 이해하고, 자아를 건강하게 키워 가도록 돕는 안내자일 뿐이다. 변화와 성장을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은 결국 그 자신이기에.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내가 나를 믿어 주는 것,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힘. 이 세 가지가 어려움을 풀어 가는 유일한 비법이다. 약함을 인정할 때 가장 강한 모습이 드러난다. 힘들다고 말을 꺼내는 것, 도움을 요청하는 것, 막막하다고 토로하는 것, 그 모든 행동이 바로 당신이 가진 힘이다. 삶이 멈춘 듯 느껴질 때, 나 자신에게 말을 걸어 보자. 나에게는 내 삶을 잘 꾸려 갈 힘이 있다. 내가 나를 이해하고 믿어 주는 만큼, 사랑하는 만큼 강해진다. 아니, 강해지지 않고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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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성 물질 이야기 - 한 끗 차이로 독과 약을 오가는 기묘한 독성 물질의 세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목정민 지음 / 주니어태학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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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1817년, 독일의 한 병원에서 상한 소시지를 먹고 쓰러진 환자들을 바라보던 의사 유스티누스 케르너는 그 알 수 없는 독소가 신경을 끊어버린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훗날 '보툴리눔'이라 불리게 될 이 독소는, 무려 밥 한 숟가락만으로도 수백만 명의 생명을 앗아갈 만큼 강력한 물질이었다. 그러나 150여 년이 흐른 뒤, 바로 그 독소는 주름을 펴는 미용 시술 '보톡스'로 변신해 수많은 사람의 얼굴에 닿게 되었다. 독이 약이 되고, 약이 독이 되는 이 역설적인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본질을 압축하고 있다. 독(毒)은 '위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가 만들었는지, 어떤 방식으로 몸에 들어오는지에 따라 이름표를 바꾸는 복잡한 존재다. 독사나 전갈이 침이나 이빨로 주입하는 '베놈', 복어나 독버섯처럼 먹거나 닿아야 작용하는 '포이즌', 그리고 세균과 곰팡이가 만들어내는 '톡신'. 이 세 가지는 서로 경계를 넘나들며, 단 하나의 공통점으로 연결된다. 충분한 양이 몸에 들어오면 생명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19세기 산업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인류가 두려워하던 독은 자연에서 왔다. 그런데 공장 굴뚝이 하늘을 가리고 화학 산업이 꽃을 피우기 시작하면서, 독의 출처는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오늘날 미국 화학협회 산하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화학물질은 2억 9000만 종이 넘는다. 하루에 하나씩 살펴봐도 80만 년이 걸리는 양이다. 인류의 역사보다 훨씬 긴 시간이다. 이 수많은 화학물질 중에는 삶을 풍요롭게 한 것들도 있지만, 우리 몸과 생태계를 조용히 잠식하는 것들도 있다. 특히 물에 녹지 않고 기름에 녹는 '지용성 화학물질'은 혈액을 타고 돌아다니다 지방층, 신경, 골수에 쌓인다. 한번 쌓이면 수년에서 수십 년이 지나도 빠져나가지 않는다. 대표적인 것이 잔류성 유기오염물질(POPs)과 환경 호르몬이다. 이들은 호르몬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생식 기능을 떨어뜨리며, 면역계를 서서히 망가뜨린다. 세면대에 물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부으면 넘쳐흐르듯, 우리 몸의 해독 능력이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독은 조용히 쌓이기 시작한다.

인류가 스스로 만들어낸 독 중에서도 플라스틱은 가장 극적인 사례다. 1860년대 당구공 재료를 구하다 탄생한 셀룰로이드를 시작으로, 20세기 중반에는 플라스틱이 '기적의 소재'로 칭송받았다. 가볍고, 저렴하며, 어떤 형태로도 변신이 가능했다. 사람들은 유리와 금속 대신 플라스틱을 선택했고, 그것은 소비 문화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그런데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플라스틱은 분자 사슬이 워낙 촘촘하고 안정적이어서 자연에서도, 바다에서도 수백 년을 버텼다. 오늘날 전 세계 바다에는 하루에 트럭 2000대 분량의 플라스틱이 흘러들어 가고, 북태평양에는 남한 면적의 7배에 달하는 '플라스틱 쓰레기 섬'이 떠 있다. 더욱 소름 돋는 것은, 파도와 햇빛에 잘게 부서진 미세 플라스틱이 이미 우리 몸속 깊이 자리 잡았다는 사실이다. 네덜란드 연구진에 따르면 18세 청소년의 몸속에 약 8300개, 70세 노인에게는 5만 개가 넘는 미세 플라스틱이 쌓일 수 있다. 미세 플라스틱은 세포 조직에 박혀 염증을 일으키고, 호르몬 체계를 교란하며, 심지어 혈액뇌장벽을 뚫고 뇌까지 침투한다. 코스타리카 앞바다에서 발견된 바다거북의 콧속에 박힌 10센티미터짜리 빨대처럼, 우리가 무심코 버린 쓰레기는 결국 먹이사슬을 타고 우리 식탁으로 돌아온다. 편리함과 맞바꾼 대가치고는 너무 크다.

독은 멀리 있지 않다. 2011년 한국 사회를 뒤흔든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일상 속 화학물질이 결코 당연히 안전하지 않다'는 교훈을 너무도 참혹한 방식으로 남겼다. 공업용 세정제 성분이 첨가제로 허가를 받아 가습기 속에 들어갔고, 그 성분을 매일 밤 들이마신 아이들의 폐는 서서히 굳어갔다. 총 5925명의 피해자와 1370명의 사망자.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계절마다 아이 얼굴에 가습기를 가져다 댔던 부모들의 죄책감은, 그들이 저지른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평생을 짓눌렀다. 폐에 독성 물질이 들어오면 폐는 염증으로 맞서 싸운다. 그러나 싸움이 길어지면 폐는 지쳐 포기하고 상처를 섬유질로 덮어버린다. 숨이 드나들어야 할 공간이 굳은살처럼 딱딱해지는 '폐섬유증'. 손가락에 굳은살이 생기면 다시는 부드러워지지 않듯, 한번 굳어버린 폐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이 참사는 이후 생활화학제품 규제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고, 소비자들이 성분표를 들여다보는 습관을 갖게 만들었다.

그러나 모든 화학물질이 적이는 아니다. 14세기 흑사병이 유럽 인구 3분의 1을 쓸어갔을 때,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된 치료제가 없었다. 버드나무 껍질의 성분을 정제해 아스피린을 만들고, 푸른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뽑아내고, 화학합성법으로 인슐린을 대량 생산하게 되면서 인류의 수명은 극적으로 늘어났다. 화학물질은 인류를 죽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살리기도 했다. 보툴리눔 독소가 보톡스로 변신한 것처럼, 독과 약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중요한 것은 그 물질의 성질을 얼마나 정확히 이해하느냐다. 케르너가 1820년대에 소시지 독이 언젠가 치료제가 될 것이라 썼을 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150년 뒤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과학은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실수를 인정하고 나아간다.

독은 우리 곁에 있다. 그것은 자연 속에도, 우리 손으로 만든 편리함 속에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우리 몸속에도 조금씩 쌓이고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전혀 다른 미래를 만든다. 알기 때문에 조심할 수 있고, 조심하기 때문에 덜 다칠 수 있다. 케르너가 촛불 아래에서 환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메모지를 꺼내 든 것처럼, 우리도 지금 이 순간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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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나쁜 무리
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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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예소연의 소설을 읽고 나면 한동안 손을 들여다보게 된다. 누군가의 차가운 뺨에 갖다 댄 뒤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것 같은, 그런 손. 소설 속 인물들은 서로에게 특별히 헌신하지 않는다. 대단한 사랑을 고백하지도 않는다. 그저 곁에 있다가, 어느 순간 뺨과 뺨을 맞대고, 차가운 것이 조금 덜 차가워지는 경험을 함께 한다. 예소연이 건네는 온기는 바로 그 정도의 것이다. 크지 않고, 오래 지속되지도 않으며, 심지어 다음 날이면 기억조차 흐릿해질 수 있는.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분명히 실재했던 것 같다.

우리는 종종 위로를 너무 거창하게 상상한다. 누군가 나의 사정을 깊이 이해해주고, 적절한 말을 건네며, 내가 옳다고 말해주는 장면. 하지만 예소연의 소설 안에서 위로는 그런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선이는 기문에게, 기문의 엄마가 나의 엄마를 정말 좋아했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얘기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하고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두 사람은 서로의 엄마가 얽혀 있는 복잡한 채무 관계를 사이에 두고 있으면서도, 결국 낯선 저택의 거실에서 바닥을 함께 닦는다. 기문이 마임으로 보여주는 것, 그러니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잔에서 흘러내리는 무언가를 닦는 행위에 선이도 무릎을 꿇고 동참한다. 그게 전부다.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금두꺼비는 있었는지조차 모른다. 엄마는 여전히 엄마다. 그런데도 무언가가 달라진다. 그 장면이 오래 마음에 남는 이유는, 그것이 위로의 가장 솔직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대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 고통이 진짜인지 아닌지조차 확인할 수 없을 때가 많다. 하지만 그 사람이 지금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닦아내려 한다는 것을 믿어주는 일. 무릎을 꿇고 함께 바닥을 닦는 일. 예소연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희지는 두부 할머니에게 매일 혈압을 재주고, 설거지를 하고, 두부를 먹는다. 그 관계를 수영 씨는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라고 잘라 말한다. 그 말은 틀리지 않다. 돈을 받고 일하는 관계다. 계약이 끝나면 남이 된다. 하지만 희지가 두부 할머니의 연락처 목록에서 자신의 이름이 그냥 '희지'로 저장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확인된다. 유희지도 아니고, 아줌마도 아닌, 그냥 희지. 백지처럼 담백한 이름. 그 이름 안에는 어떤 역할도, 어떤 기능도 덧씌워져 있지 않다. 그냥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부르는 가장 단순한 방식이다. 예소연은 이 소설집 전체를 통해 관계의 명칭이나 형식이 아니라, 그 관계 안에서 오가는 실제적인 것들에 집중한다. 피를 나눈 가족이라도 서로를 이용하고 배신할 수 있다. 반면 어린 시절 잠깐 같은 아파트에 살았던 사람도 25년 만에 나타나 차가운 뺨에 손을 갖다 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관계의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금 이 순간 어디에 있느냐다. 나와 같은 바닥을 닦고 있느냐. 같은 언덕을 오르고 있느냐.

유선과 여사의 관계는 이 소설집에서 가장 복잡하고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관계다. 여사는 어린 유선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너무 많이 했고, 보여서는 안 될 것을 너무 많이 보여주었다. 유선은 결국 성인이 되자마자 그 집을 떠났다. 하지만 5년이 지난 뒤 청주고속버스터미널에서 여사를 기다린다. 여사가 자신의 뺨을 후려칠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실제로 뺨을 맞는다. 그런데 그 장면이 이상하게 따뜻하다. 왜일까. 뺨을 맞는 것이 따뜻할 리 없다. 하지만 그 행위 안에는 여사가 유선에게 5년간 하지 못한 모든 말이 담겨 있다. 네가 떠나서 나는 이렇게나 아팠다는 것. 네가 돌아와서 나는 이렇게나 기쁘다는 것. 여사는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법을 모른다. 오직 몸으로만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유선은 그것을 안다. 그래서 맞는다. 그 맞음 안에서 두 사람은 다시 한패가 된다. 예소연의 소설에서 온기는 늘 이런 식으로 전달된다. 부드럽지 않고, 때로는 아프고,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몸이 먼저 안다. 선이가 기문의 뺨에 자기 뺨을 갖다 댈 때, 희지가 두부 할머니의 손을 꾹꾹 누르며 마사지를 할 때, 유선이 여사의 등을 따라 그 낡은 모닝에 올라탈 때. 몸과 몸이 닿는 그 순간들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뜨겁다.

우리는 지금 관계의 효율을 따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 관계가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이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가. 피로하고 소진되는 관계라면 과감히 정리하라고 조언하는 목소리들이 넘쳐난다. 그 조언들이 틀린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자신을 지킬 권리가 있다. 하지만 예소연은 그 조언이 닿지 않는 자리를 비춘다. 정리해야 마땅한 관계인데 정리가 안 되는 사람들. 아무 사이가 아닌데 아무 사이가 아닐 수 없는 사람들. 선이에게 기문이 그렇고, 희지에게 두부 할머니가 그렇고, 유선에게 여사가 그렇다. 이 인물들이 비합리적이거나 미숙해서가 아니다. 삶이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느 순간 불가피하게 타인에게 엮인다. 그리고 그 엮임 안에서, 아주 작고 의도치 않은 방식으로, 서로를 살아남게 한다.

마임에 대한 기문의 설명이 계속 떠오른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함께 볼 수 있는 것, 내가 그것을 보고 있다는 믿음을 통해서. 그것이 예소연이 소설에서 하고 싶었던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각자의 삶에서 혼자 보고 있는 것들, 말로 설명하기 어렵고 누가 봐도 허공에 손을 휘젓는 것처럼 보이는 그 고통과 간절함과 외로움을.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독자 앞에 내밀고, 당신도 이것을 볼 수 있지 않느냐고 묻는 것. 그리고 독자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두 사람은 함께 바닥을 닦는 사이가 된다. 그것이 예소연이 건네는 온기의 정체다. 거창하지 않고, 완전하지 않고, 때로는 뺨을 때리는 방식으로 전달되기도 하는. 하지만 차가운 것이 조금 덜 차가워지는, 그 정도의 온도. 그리고 생각해보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그 정도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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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 이일하 교수의 아주 특별한 식물학 에세이 지식벽돌
이일하 지음 / 초봄책방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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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봄날 오후, 창가에 놓인 화분을 들여다본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잎은 어제와 같은 자리에 있고, 줄기는 어제와 같은 각도로 서 있다. 그런데 일주일 전 사진을 꺼내 비교해 보면 무언가 달라져 있다. 잎이 하나 더 생겼고, 줄기가 창 쪽으로 조금 더 기울었다. 우리가 보지 못한 사이, 식물은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의 시간이 아닌, 식물의 시간 속에서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시간을 기준으로 세계를 이해해 왔다. 빠른 것은 살아 있고, 느린 것은 멈춰 있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식물을 배경으로 대한다. 무대의 막처럼, 도시의 조경처럼, 식탁 위의 재료처럼. 식물은 늘 거기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주인공으로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지구 생태계 전체 생물량의 80퍼센트 이상이 식물이다. 우리가 배경이라 부르는 것이, 사실은 이 행성 생명계의 압도적 본문이다. 이 역설은 하나의 질문을 불러온다. 우리는 왜 식물의 시간을 읽지 못하는가?


식물의 시간이 느리다는 것은, 단순히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방식이 다르다는 뜻이다. 동물은 자극에 즉각 반응한다. 포식자가 나타나면 도망치고, 배가 고프면 움직인다. 그 반응의 단위는 초 혹은 분이다. 반면 식물은 환경의 변화에 생장으로 응답한다. 빛이 오른쪽에서 들어오면, 그 방향으로 자란다. 가뭄이 오면 뿌리를 더 깊이 내린다. 곤충에 뜯기면 방어 물질을 합성한다. 이 반응의 단위는 시간, 날, 때로는 계절이다. 식물학에서는 이것을 생장 가소성이라고 부른다. 같은 유전자를 가진 씨앗이라도, 빛이 있는 곳에서 발아하면 초록 떡잎을 펼치고, 어둠 속에서 발아하면 노란 하배축을 길게 뻗는다. 환경이 유전자의 표현을 다시 쓰는 것이다. 동물이 태어날 때 몸의 기관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과 달리, 식물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형태를 계속 만들어 간다. 식물은 영원히 배아 상태로 사는 생명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이 가소성은 느림의 산물이다. 빠르게 도망칠 수 없기에, 식물은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의 형태로 자신을 재설계한다. 불리한 환경을 피하는 대신, 그 환경을 이롭게 쓰는 방법을 몸으로 익힌다. 약한 빛에서는 잎을 넓고 길게 펼쳐 광합성 면적을 늘리고, 강한 빛에서는 잎을 둥글고 작게 만들어 자외선 피해를 줄인다. 이 정교한 적응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형태를 바꾸며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식물의 지혜는 빠른 판단이 아니라 느린 조율에서 나온다.


느림의 반대편에는 영속성이 있다. 식물은 느리기 때문에, 오래 산다. 식물의 줄기 끝과 뿌리 끝에는 정단분열조직이라 불리는 작은 세포 집단이 있다. 이 조직에서는 세포 분열이 쉬지 않고 일어나며, 새로운 잎과 줄기와 뿌리가 끝없이 만들어진다. 동물의 배아줄기세포처럼, 거의 모든 조직으로 분화할 수 있는 잠재력의 집합소다. 덕분에 식물은 이론적으로 영원히 살 수 있다. 외부의 병이나 재해가 없는 한, 정단분열조직의 활동이 멈추지 않는 한, 식물의 삶은 계속 이어진다. 뉴턴의 사과나무를 생각해 보자. 1816년 폭풍에 뿌리째 뽑혀 쓰러진 그 나무는 4년 뒤 그루터기에서 새싹을 틔웠다.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식물은 죽지 않았다. 오늘날 그 나무의 클론은 영국을 넘어 전 세계 과학관 마당에서 자라고 있다. 2500년 전 부처가 그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보리수나무의 가지를 잘라 스리랑카에 심은 나무의 후손이, 지금 서울 조계사 앞에 서 있다. 식물은 가지 하나를 잘라 새로운 땅에 심는 것만으로 개체를 이어 간다. 죽음을 넘어 생명을 이어가는 방법을 식물은 진화의 오랜 시간 속에서 스스로 발명했다. 이 영속성은 단지 생물학적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대하는 하나의 태도다. 인간의 시간은 직선이다. 태어나고 늙고 죽는다. 우리는 언제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다. 그래서 빠름을 숭배한다. 빨리 배우고, 빨리 성취하고, 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는 압박이 삶을 가득 채운다. 그러나 식물의 시간은 순환한다. 낙엽은 썩어 흙이 되고, 그 흙에서 새 뿌리가 자란다. 개체는 사라지지만 생명의 리듬은 끊어지지 않는다. 식물의 느림은 그 순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곤충이 잎을 갉아 먹으면, 공격받은 잎 주변에서 단백질 분해효소 억제인자가 만들어진다. 놀라운 것은 공격받은 잎만이 아니라 같은 식물의 다른 가지, 심지어 이웃한 다른 식물까지 같은 방어 반응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시스테민이라는 펩타이드 신호가 식물체 안을 이동하고, 헥시놀 같은 휘발성 물질이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 이웃 개체에게 경보를 전한다. 에틸렌이라는 기체 호르몬은 한 나무의 낙엽 소식을 이웃 나무에게 알린다. 가을 숲에서 같은 종의 두 나무가 나란히 잎을 떨어뜨리는 것은, 보이지 않는 화학의 언어로 나누는 대화의 결과다. 이 소통은 전화선도 신경도 없이 이루어진다. 화학 물질이 공기와 토양과 뿌리를 타고 천천히 퍼져나가며 정보를 전달한다. 느리지만, 식물은 이 방식으로 개체를 넘는 공동의 반응을 이끌어 낸다. 2020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연구에서 밝혀진 것처럼, 질소가 부족한 토양으로 뻗은 뿌리는 줄기를 통해 질소가 풍부한 쪽의 뿌리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뿌리 한쪽이 얻은 정보를 줄기가 통합해 다른 뿌리의 생장을 조절하는 것이다. 다윈이 140년 전에 직관적으로 포착했던 것, 식물의 뿌리는 단순한 흡수 기관이 아니라 생장 전체를 조율하는 중추라는 통찰이, 오늘날 분자 수준에서 증명되고 있다. 식물은 뇌가 없지만 판단한다. 신경이 없지만 소통한다. 형태가 아닌 기능으로 존재하는 식물의 지성은, 빠른 회로가 아니라 느린 화학의 흐름 속에서 작동한다.

우리는 왜 이 느림을 보지 못했을까. 아마도 우리 자신이 너무 빠르게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타임랩스로 촬영한 덩굴식물의 영상을 처음 본 사람은 놀란다. 바위를 향해 뻗어 가고, 장애물을 넘고, 지지대를 찾아 줄기를 감는 그 움직임이,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것은 의지는 아니지만, 환경을 읽고 반응하는 정교한 생물학적 과정이다. 다만 우리의 시간 감각에는 그것이 정지로 보일 뿐이다. 식물의 눈으로 보면, 인간이야말로 부산하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식물이 느린 것이 아니다. 우리가 빠른 것이다. 정확히는, 우리가 너무 빠른 채널에 맞춰져 있어서 식물의 주파수를 듣지 못하는 것이다. 식물학자들이 쌓아온 지식은, 그 주파수에 귀를 맞추는 법을 알려준다. 광합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루비스코가 얼마나 느리고 비효율적이면서도 지구 전체 생명의 토대가 되는지, 파이토크롬이 어떻게 빛의 파장을 읽어 개화의 타이밍을 결정하는지, ABC 모델이 어떻게 꽃잎과 수술과 암술의 배치를 유전자의 조합으로 설명하는지. 이 지식들은 단순한 사실의 목록이 아니다. 식물이 세계를 감각하고, 판단하고, 응답하는 방식에 대한 기록이다. 알면 더 잘 보인다는 말은 여기서 진실이 된다.


루비스코는 지구상에서 가장 느리고 가장 많은 효소다. 초당 두세 번밖에 반응하지 못하는 이 효소를 보완하기 위해 식물은 잎 전체 단백질의 20퍼센트 이상을 루비스코로 채운다. 느림을 풍요로 메우는 것이다. 지구 전체에서 루비스코는 가장 많은 단백질이다. 그 느리고 비효율적인 분자가, 지구 생명계의 에너지 순환을 떠받치고 있다. 이것이 식물의 시간이 가르쳐 주는 역설이다. 빠른 것이 반드시 강한 것은 아니다. 느리더라도, 충분히 많고 충분히 오래 지속되면, 그것이 세계를 움직인다. 개화를 결정하는 것은 낮의 길이가 아니라 밤의 길이라는 발견처럼, 우리가 주목하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 진짜 원인이 있을 때가 많다. 식물의 시간은 그렇게 우리의 시선을 비튼다. 창가에 놓인 화분으로 다시 돌아간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정단분열조직의 세포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분열하고 있다는 것을. 뿌리털이 토양의 수분을 감지하고 있다는 것을. 잎의 기공이 빛의 양에 따라 열리고 닫히며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눈에는 정지로 보이는 시간 속에서, 식물 자신의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 멈추면 비로소 보이고, 알면 더 잘 보인다. 식물의 시간에 잠시 속도를 맞추어 보는 일. 그것이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생명의 언어를 읽는 첫 번째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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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을 위한 의학사 강의 - 과학의학이 담지 못한 동아시아 의학사
차웅석.김동율 지음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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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의 역사는 그 질문에 아직 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이 역사를 계속 읽어야 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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