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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스님 나의 음식 (백양사 고불매 리커버 양장 에디션)
정관 지음, 후남 셀만 글, 양혜영 옮김, 베로니크 회거 사진 / 윌북 / 2026년 3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설날 아침, 철학자의 요리 프로그램을 보면서 정관스님을 다시 보게되었다. 화려한 플레이팅도, 복잡한 소스도 없었다. 그저 제철 채소 몇 가지와 정성스레 담근 장으로 만든 소박한 한 그릇이었는데, 그 안에서 나는 정관스님의 손길을 보았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무언가 시간과 침묵, 그리고 기다림이 빚어낸 맛을 본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늘 빠른 것을 찾는다. 10분 만에 완성되는 요리, 30분이면 배달되는 음식, 즉석에서 끓여 먹는 국. 그런데 정관스님의 부엌에는 몇 년씩 묵은 장들이 용기 속에서 숨 쉬고 있다. 간장, 된장, 고추장, 그리고 온갖 청과 장아찌들. 그것들은 조미료가 아니라, 시간이 쌓인 기록이자 계절의 증언이다. 나는 요즘 자주 생각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건 단지 맛이 아니라 '기다릴 줄 아는 능력'이 아닐까 하고. 정관스님이 봄에 담근 참죽장아찌는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어서야 제 맛을 낸다. 김장 무를 소금에 절여 1년을 기다려야 비로소 속이 노랗게 익어간다. 이 과정은 요리라기보다는 수행에 가깝다. 재료를 다듬고, 소금을 뿌리고, 항아리에 담고, 그리고 기다린다. 그 기다림 속에서 무언가가 변화한다. 재료만이 아니라, 그것을 담근 사람도. 발효는 인내를 가르친다. 서두를 수 없고, 조작할 수 없으며, 오로지 자연의 시간표에 몸을 맡겨야 한다. 나는 그것이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배움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클릭 한 번으로 해결되는 시대에, 1년을 기다려야만 맛볼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 그것이 주는 위로와 깨달음이다.
정관스님은 말한다. "각각의 식물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언제 자라나고, 언제 꽃을 피우고, 언제 수확해야 하는지. 나는 부끄러웠다. 나는 마트에서 사계절 내내 똑같이 진열된 채소들 사이에서 '제철'의 의미를 잊고 살아왔다. 겨울에도 토마토를 사고, 여름에도 감자를 먹으며, 계절의 리듬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스님은 호박과 죽순, 연근을 잘라 단면을 보여주며 그것들이 얼마나 다르고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야기한다. 이것은 요리 재료를 고르는 법이 아니다. 세상을 보는 태도, 생명을 대하는 자세에 관한 이야기다. 각각의 채소가 지닌 고유한 리듬과 형태를 존중하고, 그것이 가장 빛나는 순간을 포착해낸다. 그래서 스님의 요리는 재료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드러 내는' 것에 가깝다. 내가 요즘 부엌에서 느끼는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이것이다. 무엇을 '넣을'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빼 낼' 것인가. 마늘도, 파도, 고춧가루도 넣지 않은 정관스님의 요리는 처음엔 너무 밋밋해 보였다. 하지만 그 단순함 속에서 버섯 본연의 향이, 호박 자체의 단맛이, 쌀이 지닌 구수함이 선명하게 살아난다. 우리는 너무 많이 더하는 데 익숙해져서, 덜어냄'의 미학을 잊어버렸다.
스님의 부엌에서 국수 요리를 '승소'라고 부른다는 대목이 특히 좋았다. '스님의 미소.' 누군가 "오늘 국수 먹을까요?" 하면 모두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분주해진다는 그 장면. 나는 그 풍경을 상상하며 오래 머물렀다. 음식이 사람들에게 미소를 선사한다는 것. 그것은 단지 맛있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함께 준비하는 과정, 누군가는 물을 끓이고 누군가는 반죽을 밀고 누군가는 텃밭으로 달려가는 그 협업의 즐거움. 그리고 그 모든 움직임의 중심에 서 있는 노스님의 조금 뽐내듯 하는 모 습.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한 그릇 국수가 된다. 요즘 우리는 혼자 먹는 데 너무 익숙해졌다. 혼밥, 혼술이 일상이 되었고, 배달 앱으로 주문한 음식을 혼자 방에서 먹는 일이 낯설지 않다. 효율적이고 편리하지만, 무언가 빠져 있다. 바로 '함께 만 들고 나누는 기쁨'이다. 정관스님의 부엌에서는 요리가 고립된 노동이 아니라 공동체의 행위다. 서로 돕고, 웃고, 기다리 고, 함께 먹는다. 그 안에서 음식은 영양 공급을 넘어 관계의 매개가 된다.
스님이 아버지를 위해 산에서 표고버섯 조청 조림을 만든 이야기는 가슴을 울렸다. 출가한 딸을 7년 만에 처음 찾아온 아버지. 그 어색함과 서운함, 그리고 그 사이를 메우는 한 그릇 음식. "고기보다 맛있다"고 말한 아버지의 그 한마디 속에 얼 마나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을까. 음식은 때로 말보다 웅변적이다. 표고버섯 조림이라는 단순한 요리 한 그릇이 7년간의 침묵을 녹였다. 그것은 화려한 설득이나 논리적인 설명이 아니라, 정성과 시간이 빚어낸 맛으로 마음을 움직였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우리가 잃어버린 또 다른 것을 떠올렸다. 음식으로 마음을 전하는 법. 말로 하기 어려운 사과, 감사, 사랑을 한 끼 식사에 담아내는 능력이다. 요즘은 선물도 배달시키고, 식사도 기프티콘으로 대신한다. 편리하지만, 그 안에 '손 길'이 없다. 정관스님이 직접 산에 올라 불을 지피고 버섯을 조리며 아버지를 위해 쏟은 그 시간과 정성.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선물이었다.
정관스님은 스스로를 "셰프가 아니라 수행자"라고 말한다. 수행자는 '행동과 습관을 바꾸려고 힘쓰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요리는 그에게 수행의 한 형태다. 재료를 다루는 손길 하나, 불을 조절하는 호흡 하나가 모두 수행이다. 나는 이 태도가 현대인에게 절실하다고 느낀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소비하고, 너무 빠르게 살며, 너무 복잡하게 생각한다. 스님의 부엌은 정반대다. 최소한의 재료, 최소한의 양념, 최대한의 정성. 그 안에서 오히려 풍요로움이 드러난다. 겨울 호박과 표고 버섯으로 만든 밥 한 그릇. 소금만으로 간한 호박 수프. 이런 음식들은 '부족함'이 아니라 '충분함'을 보여준다. 재료 본연의 맛이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 복잡하게 만들지 않아도 완전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음식뿐 아니라 삶 전체에 적용되는 지혜다. 정관스님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자꾸 멈칫거렸다. 책장을 넘기는 손이 느려졌고, 호흡이 깊어졌다. 이것은 시간을 대하는 태도, 자연과 관계 맺는 방식, 타인에게 마음을 전하는 법에 관한 책이었다. 우리는 빠른 시대를 살지만, 어떤 것들은 여전히 느려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