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소국의 제2차 세계 대전사
권성욱 지음 / 열린책들 / 202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는 주로 승전국의 시각에서 서술되어 왔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미드웨이 해전 같은 대규 모 전투들이 역사책의 중심을 차지한다. 그러나 이 거대한 서사의 그늘 아래에는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던 약소국들의 이야기가 있다. 생각해 보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강대국 이외의 야소국들, 예를 들어 벨기에, 핀란드, 불가리아 같은 나라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팽창의 야욕도, 세계 지배의 꿈도 없었다. 단지 평화롭게 살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강대국들의 욕망은 이들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중립이냐 동맹이냐, 저항이냐 항복이냐의 기로에서 이들이 내린 선택과 그 결과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훈을 전달해 준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서방 사이에서, 타이완은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한국은 미중 갈등의 한복판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약소국들의 제2차 세계대전 경험은 이러한 현대의 문제들을 이해하는 열쇠가 될 것 같다. 저자는 2차 세계대전 중, 약소국들의 대응과 그 결과에 대해서 여러 측면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책의 두께 만큼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 빠른 시간에 읽기는 어려웠다. 책 내용중, 작년에 유럽 여름 휴가를 다녀왔던 벨기에와 핀란드 그리고 불가리아에 대해 궁금증이 커서 먼저 상세히 읽어 보았다.


벨기에의 역사는 지정학적 저주의 전형이다.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위치한 이 나라는 두 강대국이 충돌할 때마다 전쟁터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국토의 95%가 독일군 수중에 넘어갔고, 4년간 4만여 명이 전사했다. 이러한 참혹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벨기에는 교훈을 배우지 못했다. 1920년 프랑스와 맺은 군사협정은 상호 불신으로 오래가지 못했다. 1925년 로카르노 조약으로 영국, 프랑스, 독일이 벨기에의 영토를 보장하자, 벨기에는 19세기의 평화가 돌아왔다고 믿었다. 그러나 1936년 라인란트 위기에서 프랑스가 히틀러 앞에 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본 벨기에는 실망했다. 레오폴드3세는 1936년 중립을 선언하고 1937년에는 독일과 중립조약까지 맺었다. 자신들이 독일을 자극하지 않으면 독일도 넘보지 않을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이었다. 더 큰 문제는 방어 태세였다. 벨기에는 동부 국경에 '작은 마지노'로 불린 에방 에말 요새를 건설했지만, 독일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로 군비 증강은 최소화했다. 전차는 ’공격용 무기'라는 이유로 거의 확보하지 않았다. 1940년 개전 당시 제대로 된 전차는 10대에 불과했고, 공군의 주력은 1920년대 복엽기였다.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아르덴 방어였다. 프랑스군 총사령은 ’천연 방벽'이라며 독일군이 통과할 리 없다고 단언했다. 벨기에도 이에 동조하여 22개 사단 중 단 2개만 배치했다. 프랑스와 벨기에는 누가 아르덴을 방어할지 제대로 협의조차 하지 않았다. 결과는 무방비 상태였다.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이 침공하자 에방에말 요새는 85명의 공수부대에게 하루 만에 함락 되었다. 구데리안의 기갑부대는 각성제 페르비틴에 의존하며 57시간 만에 아르덴을 돌파했다. 누구도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일이었다. 벨기에는 18일 만에 항복했고, 이후 52개월간 나치 점령 아래 신음했다. 중립도, 조약도, 요새 벨기에를 지켜주지 못했다.


핀란드의 상황은 벨기에보다 훨씬 절망적이었다. 1939년 스탈린이 카렐리아 지협을 요구하자 핀란드가 거부했고, 11월 30일 소련 군 45만 명과 전차 2,500대가 침공했다. 핀란드군은 18만 명에 전차는 사실상 없었다. 보유한 르노 FT-17은 제1차 세계대전 유물이었고, 빅커스 6T는 돈을 아끼려고 차체만 구입해 주포와 무전기가 없는 빈 껍데기였다. 그러나 핀란드는 놀라운 저항을 보여주었다. 시모 해위해는 105일간 542명을 저격하여 '하얀 사신'으로 불렸다. 스키 부대는 삼림과 추위를 이용해 소련군을 각개격파했다. 몰로 토프 칵테일로 소련 전차를 불태웠다. 소련군은 20만 명의 전사자를 냈다. 핀란드는 1940년 3월 국토의 11%를 잃었지만 독립은 지켰고, 소련군에게서 T-26 100여 대, BT 60여 대를 노획해 오히려 전력이 강화되었다.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핀란드는 신중하게 대응했다. 소련이 먼저 폭격하자 '계속전쟁'을 선언하고 빼앗긴 땅을 되찾았지만, 만네르하임은 여기서 멈췄다. 히틀러가 레닌그라드 공격을 압박했지만 거부했다. 미국·영국의 반발을 우려했고, 거대 도시 공격은 핀란드의 능력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핀란드는 형식적으로 추축국이었지만 소련에 선전포고하지 않았고, 국내 반공 활동도 금지했다. 이러한 신중함은 전후 처리에서 빛을 발했다. 다른 추축국들과 달리 핀란드는 소련의 위성국이 되지 않고 독립을 유지했다. 핀란드의 교훈은 명확하다. 약소국이라도 강한 의지와 현 명한 전략이 있으면 생존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한계를 알고, 불필요한 모험을 피하며, 강대국 사이에서 실리를 챙기는 것이다.


불가리아는 또 다른 유형이었다. 한때 발칸의 강자였지만 연이은 패전으로 영토를 잃고 군비를 제한당했다. 국왕 보리스 3세는 실리주의자였다. 1941년 3월 추축에 가입하여 루마니아로부터 남부 도브루자를 되찾았고, 독일의 발칸 침공 때 길을 빌려주고 유고슬라 비아와 그리스 영토를 받았다. 하지만 보리스 3세는 히틀러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독소전쟁 참전을 거부했고, 유대인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는 것도 거부했다. 1943년 8월 히틀러와 회담 후 급사하여 암살설이 돌았다. 1944년 9월 소련이 선전포고하자 불가리아는 재빨리 편을 바꿔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불가리아는 도덕적으로는 비난받을 수 있지만, 생존의 관점에서는 나름 합리적인 전략으로 최악의 결과를 피했다.

이들 국가들의 2차 세계 대전사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중립은 그 자체로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벨기에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두 차례 세계대전 모두에서 전쟁터가 되었다. 중립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스위스가 중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선언 때문이 아니라 산악 지형과 철저한 국방 준비 덕분이었다. 또한 강대국의 약속은 믿을 수 없다. 1914년 런던조약은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했지만 독일은 ' 종이조각 '이라며 무시했다. 1940년에도 마찬가지였다. 국제 조약과 동맹은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자국을 지키는 것은 자신의 힘이다. 소통과 협력의 실패는 재앙을 부른다. 벨기에와 프랑스는 서로 불신했고, 아르덴 방어에 대해 제대로 된 협의조차 하지 않았다. 벨기에는 프랑스가 알아서 할 것이라 여겼고, 프랑스 는 벨기에가 맡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과는 무방비 상태였다. 안일함과 희망적 사고는 치명적이다. 가물랭은 독일군이 아르덴을 통과 하려면 최소 일주일은 걸릴 것이며, 그 사이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57시간 만에 돌파했다. 준비되지 않은 낙관은 재앙의 지름길이다.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강대국들의 각축장이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청일전쟁, 러일전쟁, 그리고 한국전쟁까지, 우리는 늘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경험을 했다. 21세기 들어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거인 사이에서 우리는 여전히 선택을 강요받는다. 벨기에의 실패는 우리에게 경고한다. '균형 외교'라는 이름으로 이쪽도 저쪽도 자극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정작 위기가 왔을 때 아무도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동시에 핀란드의 지혜도 필요하다.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실리를 챙기되, 결코 우리의 생존권을 담보로 내놓아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체 국방력이다. 벨기에는 전차를 '공격용 무기'라며 제대로 확보하지 않았다. 핀란드는 돈을 아끼려다 주포도 없는 전차를 샀다가 전쟁에서 쓰지도 못했다. 이런 우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역설을 받아들여야 한다. 역사는 약자에게 가혹하다. 하지만 현명한 약자는 살아남는다. 벨기에와 핀란드의 상반된 운명은,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우리 역시 지금 이 순간에도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