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천재 고려 - 최강대국에 맞선 작은 나라의 생존 전략
이익주 지음 / 김영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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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역사를 읽다 보면 때때로 놀라운 역설과 마주하게 됩니다. 중국 대륙에서는 송, 요, 금, 원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왕조의 교체가 있었습니다. 각 왕조는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동아시아를 지배했지만, 그 어떤 왕조도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격동의 세월 속에서 한반도의 고려는 500년이라는 긴 시간을 버텨냈습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고려가 가진 외교적 통찰의 결과였습니다. 고려의 외교 전략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가장 먼저 질문한 것은 누가 더 강한가"가 아니라 "이 체제는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당장의 군사력보다 중요한 것은 그 힘이 얼마나 오래 유지될 수 있는지, 그 구조가 얼마나 안정적인지였습니다. 송나라는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매력적인 국가였습니다. 하지만 고려는 송이 군사적으로 취약하다는 점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류는 유지하되, 모든 것을 거기에 걸지는 않았습니다. 요나 금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위협적이지만 적으로만 규정하지 않고, 관리해야 할 변수로 바라봤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려 외교의 핵심이었습니다. 지금 강한 자가 아니라, 오래 남을 구조를 읽어내는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종종 "명확한 선택"을 요구받습니다. 이쪽이냐 저쪽이냐, 흑이냐 백이냐 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지배적입니다. 하지만 고려의 외교를 보면, 그들은 오히려 명확한 편을 들지 않는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송과 금이 대립할 때도, 고려는 어느 한쪽과 결정적인 군사 동맹을 맺지 않았습니다. 사신은 보내되, 되돌릴 수 없는 약속은 남기지 않았습니다. 우유 부단함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는 상황을 끝까지 지켜보며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고도의 전 략이었습니다. 고려는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왕조는 언제든 바뀔 수 있지만, 고려는 이 땅에서 계속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귀주대첩 이후의 행보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고려는 거란군을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뒀습니다. 민족의 자긍심을 드높일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려는 그 이듬해 거란에 사신을 보내 다시 조공 관계를 청했습니다. 감정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입니다. 하지만 고려는 계산했습니다. 전쟁의 승리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안 정이었고, 승전의 기쁨보다 중요한 것은 다음 세대의 평화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체면이 아닌 존속을 선택한 외교였습니 다. 지금의 자존심보다 다음 세대의 국가를 우선시한 결정이었습니다.

서희의 담판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학교에서는 "말을 잘해서 영토를 얻었다"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이 것은 서희 담판의 본질을 놓친 설명입니다. 서희가 보여준 것은 언변이 아니라 국제 질서의 구조를 읽어내는 능력이었습니다. 서희는 거란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거란의 진짜 목표는 고려 정복이 아니라 송나라 견제였습니다. 서희는 이 지점을 정확히 짚어냈습니다.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국이다"라는 선언은 역사적 주장만이 아니 었습니다. 거란이 구축하려는 국제 질서 안에서 고려의 위치를 재설정하는 전략적 발언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서희는 국경 문제의 원인을 제3의 변수인 여진으로 돌렸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적이 아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당신이 원하는 질서 안정에 우리가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구조를 명확히 만든 뒤, 협상은 자연스럽게 고려에 게 유리하게 흘러갔습니다. 강동 6주는 말로 얻은 땅이 아니었습니다. 상대방의 필요를 정확히 읽고, 그 안에서 고려가 제공할 수 있는 가치를 제시한 결과였습니다. 협상의 본질은 설득이 아니라 구조의 재배치라는 것을 서희는 보여줬습니다.


고려 외교를 이야기할 때 가장 논쟁적인 부분은 아마도 원나라 시기일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시기를 고려 외교의 실패로 규정합니다. 실제로 굴욕적인 사건들이 많았고, 국가 자율성도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긴 호흡으로 바라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몽골제국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초강대국이었습니다.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제국 앞에서 고려만큼 버틴 나라가 얼마나 될까요? 30년 항쟁 끝에 고려는 결국 몽골의 영향권 안에 들어갔지만, 완전히 병합되지는 않았 습니다. 왕조를 유지했고, 언어와 문화를 지켰으며, 제도적 정체성을 보존했습니다. 충렬왕의 친조 외교는 이런 맥락에서 재평가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쿠빌라이와의 협상에서 원칙을 세웠습니다. 형식적 복속은 받아들이되, 내정 간섭은 최소화하는 선을 그었습니다. 몽골 공주와의 혼인도 굴욕이 아니라 왕권 보호의 전략으로 활용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친원 세력의 횡포, 기황후 일족의 전횡, 국가 질서의 혼란 등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외교 전략 자체의 실패라기보다, 국내 정치 역학의 실패로 봐야 합니다. 외교는 성공했지만, 그 성과를 국내적으로 관리하는 데 실패한 것입니다.

고려 외교가 진짜 실패한 순간은 언제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고려 말 친명반원 노선을 성급하게 선택했을 때였습니다. 원이 쇠퇴하고 명이 부상하는 과도기, 고려는 너무 빨리 명나라 편에 섰습니다. 중립을 포기하고 명확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결과는? 명은 오히려 고려를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려는 대항할 수단이 없었습니다. 원과의 관계를 너무 일찍 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강대국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은 약소국 외교의 정석입니다. 그런데 왜 고려는 이 원칙을 버렸을까요? 그 배경에는 신진 사대부의 명분론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실리보다 명분을 우선시했습니다. "오랑캐 원나라를 버리고 중화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이념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외교적으로는 재앙이었습니다. 명분에 갇힌 외교는 현실을 읽지 못합니다.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의 입장만을 고집하게 됩니다. 고려가 수백 년 동안 유지해온 실리 외교의 전통이 무너진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2026년 현재, 대한민국은 다시 한 번 강대국 사이에 서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은 구조화되었고, 국제 질서는 빠르게 재편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택을 요구받습니다.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동맹이냐 균형이냐. 이럴 때 고려의 외교 가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계산하고 있는가? 당장의 군사력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체제의 지속 가능성을 보고 있는가? 명확한 선택을 해야 한다는 압박에 굴복하고 있는가, 아니면 상황을 끝까지 지켜보며 리스 크를 관리하고 있는가? 고려 외교의 교훈은 간단합니다. 힘의 논리에 휘둘리지 말고, 구조의 논리를 읽어라. 감정적 반응보다 전략적 사고를 우선하라. 체면보다 존속을 선택하라. 명분에 갇히지 말고, 실리를 챙겨라. 물론 오늘날의 상황은 천 년 전과 다릅니다. 국제법의 발달, 민주주의 체제, 실시간 정보 유통 등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강대국은 여전히 힘의 논리로 움직이고, 약소국은 여전히 생존의 문제를 고민해야 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에 게는 고려라는 선례가 있다는 것입니다. 500년을 버텨낸 나라, 명분보다 실리를 택하고, 감정보다 전략을 우선시하며, 지금의 자존심보다 다음 세대의 미래를 선택한 나라의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 외교를 공부하다 보면 하나의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약소국의 품격은 강함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품격은 현실을 직시하는 용기에 있고, 감정을 절제하는 이성에 있으며,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에 있습니다. 서희가 거란 앞에서 보여준 것은 힘이 아니라 지혜였습니다. 귀주대첩 이후 다시 사신을 보낸 것은 굴욕이 아니라 성숙함이었습니다. 충렬왕이 몽골과 협상하며 지킨 선은 자존심이 아니라 실질적 자율성이었습니다. 반대로 고려 말 명분에 사로잡혀 성급하게 선택했을 때, 고려는 품격을 잃었습니다. 현실을 읽지 못하고, 감정에 휘둘리며, 미래를 계산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강함이 아니라 현명함, 목소리가 아니라 안목, 선택이 아니라 균형. 고려가 500년을 버틴 비결은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현명했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과거를 외우는 일이 아닙니다. 과거의 선택을 통해 오늘의 기준을 세우는 일입니다. 고려의 외교는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을 남깁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으로 판단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고려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을 제대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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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불행사회
홍선기 지음 / 모티브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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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2026년 새벽, 우리는 이미 도착한 미래 앞에 서 있다. 일본이 40년에 걸쳐 천천히 무너졌다면, 한국은 그 속도를 두 배로 압축하고 있다. 1989년 일본의 출산율 1.57이 충격이었다면, 2024년 한국의 0.75는 재앙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숫자가 아니다. 우리가 그 숫자를 보면서도 "아직은 괜찮아"라고 속삭이는 그 안일함이다. <최소불행사회>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는 왜 이미 펼쳐진 답안지를 보고도 같은 오답을 반복하는가? 일본의 프리터는 한국의 긱워커가 되었 고, 무연사회는 초솔로사회로 변주되었을 뿐, 본질은 동일하다. 마치 같은 악보를 다른 악기로 연주하는 것처럼, 우리는 일본이라는 거울 속에서 우리 자신을 목격하고 있다.

책이 추적하는 일본의 몰락 과정은 세 개의 파도로 요약된다. 첫 번째 파도는 경제 금융 시스템의 붕괴였다. 버블이 터지고 땅값이 폭락하면서 중산층의 자산이 증발했다. 두 번째 파도는 고용 시스템의 붕괴였다. 정규직 일자리는 사라지고 비정규직이 표준이 되었다. 세 번째 파도는 공공 시스템, 즉 국가에 대한 신뢰의 붕괴였다. 연금은 사라졌고, 안전망은 구멍 투성이가 되었다. 그리고 이 세 파도 사이에서 '잃어버린 세대'가 탄생했다. 취업 빙하기를 겪은 청년들은 중년이 되어서도 비정규직으로 남았고, 결혼과 출산을 포기했으며, 노후 준비는 애초에 불가능했다. 이들은 시스템에 배신당했지만, 그 배신을 자신의 무능으로 내면화했다. 사회는 이들에게 "노력이 부족하다"고 말했고, 이들은 침묵했다. 한국의 MZ세대 역시 같은 서사를 반복하고 있다. 취업난, 주거비 폭등, 연금 고갈에 대한 불안. 차이가 있다면 한국은 이 모든 과정이 더 빠르고, 더 극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이 30년에 걸쳐 천천히 가라앉았다면, 한국은 15년 만에 같은 깊이로 침 몰하고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9가지 금기된 해법은 불편하다. 폐교를 시니어 대학 타운으로 전환하자는 제안, 부동산 자산가에게 고령화 기금을 징수하자는 제안, 최저임금 차등제를 도입하자는 제안, 심지어 투표권 면허제까지. 이 모든 제안은 누군가의 표를 잃게 만들 것이고, 누군가의 기득권을 건드릴 것이며, 누군가의 분노를 살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질문들은 반드시 던져져야 한다. 정치는 인기 투표가 아니라 미래 설계여야 한다. 포퓰리즘과 책임 있는 정책의 차이는, 바로 지금 당장 불편한 질문을 던질 용기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일본이 실패한 이유는 경제 위기 자체가 아니라, 그 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구조 개혁을 계속 미뤘기 때문이다. 한국 역시 같은 함정에 빠져 있다. 연금 개혁은 선거 때마 다 미뤄지고, 부동산 정책은 표심에 따라 요동치며, 저출산 대책은 예산만 쏟아붓고 효과는 미미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행복한 사회"를 꿈꾸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이제는 목표를 바꿔야 할 때다. 행복을 극대화하는 사회가 아니라, 불행을 최소화하는 사회로.

"최소불행사회"라는 개념은 냉소적으로 들릴 수 있다. 행복을 추구하는 대신 불행을 줄이는 것이 목표라니, 얼마나 비관적인가. 그러나 이것은 냉소가 아니라 현실주의다.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는 없지만, 누구도 극단적인 불행에 빠지지 않게 만들 수는 있다. 무연고 사망, 간병 파산, 고독사, 청년 고립-이런 최악의 불행들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시스템의 실패다. 일본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방치된 불행이 어떻게 사회 전체를 잠식하는가 하는 점이다. 은둔형 외톨이가 100만 명을 넘어서고, 하류 노인이 표준이 되고, 무연사회가 당연시되는 순간, 그 사회는 이미 회복 불가능한 지점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불행은 전염되기 때문이다. 고립된 청년은 중년이 되어도 고립되고, 간병에 지친 가족은 무너지며, 그 무너짐은 다음 세대로 대물림된다. 한국은 아직 늦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미 늦었지만 그래도 손 쓸 수 있는 마지막 시간대에 있다. 일본이 40년간 보여준 실패 사례는 우리에게 일종의 '시뮬레이션' 결과다. 우리는 그 시뮬레이션을 보고도 같은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선택을 할 것인가.

시스템 개혁은 시간이 걸린다. 법이 바뀌고, 제도가 정착되고, 문화가 변화하기까지는 최소 10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개인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저자가 제시하는 11가지 생존 매뉴얼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1인 바비큐 레스토랑, 덕질 병원, 시니어 라이프스타일 잡지, 24시 무인 헬스장 등 모든 아이디어는 창업 아이템만이 아니다. 이것은 변화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 적응 전략 ' 이다. 혼자 사는 사람이 늘어나고, 돌봄 수요가 폭증하고, 세대 간 단절이 심화되는 사회에서, 어떻게 틈새를 발견하고 가치를 창출할 것인가? 중요한 것은 이 매뉴얼들이 모두 '관계'와 '연대'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다. 1인 바비큐는 고립된 개인을 위한 공간이지만, 동시에 그들이 안전하게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 접점이다. 시니어 잡지는 소외된 노년층에게 정보를 제공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존재를 가시화한다 즉, 생존 매뉴얼은 각자도생이 아니라 '연대적 생존'을 지향한다.

일본은 거울이다. 그 거울은 우리에게 미래를 보여준다. 그러나 거울은 운명이 아니다. 우리는 그 거울을 보고 같은 길을 걸을 수도 있고,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선택'이라는 행위 자체다. 지금 한국 사회는 기로에 서 있다. 출 산율 0.75, 청년 실업, 노인 빈곤, 돌봄 위기-모든 지표가 경고등을 켜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아직은 괜찮아", “일본처럼 되지는 않을 거야"라고 말한다. 이 안일함이야말로 가장 큰 위험이다. 저자는 희망을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더 나빠지지 않을 방법을 제시한다. 이 책의 가치는 '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 질문 '을 던지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원하는가? 행복을 추구하다 불행으로 추락하는 사회인가, 아니면 불행을 최소화하며 존엄을 지키는 사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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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을 바꾸는 왼손 필사 - 익숙한 손을 바꾸면, 마음의 잠금이 풀린다
서선행.이은정 지음 / 페이지2(page2)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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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빨라졌을까. 손가락 하나로 메시지를 보내고, 몇 번의 클릭으로 하루 일과를 정리하며,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것을 최적화한다. 오른손은 익숙한 궤도를 따라 자동으로 움직이고, 우리의 뇌는 그 편안함에 길들여져 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 모든 편리함 속에서 우리는 정말 행복해졌을까? 아니면 단지 바빠졌을 뿐일까? 왼손 필사는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다. 서툰 손으로 글자를 쓴다는 것은, 마치 일부러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는 것 과 같다. 비효율적이고, 느리고, 때로는 답답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바로 그 불편함 속에 우리가 잊고 있던 무언가가 숨어 있다. 그것은 과정을 음미하는 여유이며, 현재 순간에 온전히 머무는 집중이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자기 수용의 메시지다.

처음 왼손으로 펜을 쥐었을 때의 어색함을 떠올려본다. 펜은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미끄러지고, 획은 흔들리며, 글자는 어린아이의 것처럼 삐뚤삐뚤하다. 오른손으로는 무심코 쓸 수 있던 단순한 자음 하나조차 왼손에게는 도전이 된다. '7'자의 수직선 하나를 긋는 데도 온 신경이 손끝에 모인다. 종이 위에서 펜이 지나가는 감촉, 잉크가 번지는 속도, 손목의 미세한 떨림까지 모든 것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 낯선 감각이야말로 왼손 필사의 핵심이다. 익숙함은 우리를 자동 모드로 만들 지만, 낯섦은 우리를 깨어 있게 한다. 왼손으로 글을 쓰는 동안 우리는 멀티태스킹을 할 수 없다. 동시에 여러 생각을 하거나 다른 일을 처리할 여유가 없다. 오직 지금, 이 한 회에만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평소 머릿속을 어지럽히 던 수많은 잡념들이 조용히 물러난다. 복잡했던 고민, 해결되지 않는 문제,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잠시 멈춘다. 오직 펜과 종이, 그리고 천천히 형태를 갖춰가는 글자만이 존재하는 고요한 세계가 펼쳐진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완벽을 요구한다. 일은 효율적으로, 결과는 훌륭하게, 모든 것은 빠르고 정확해야 한다. 실수는 용납되지 않고, 느림은 무능으로 치부된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그런데 왼손 필사는 정반대의 철학을 제안한다. 엉성해도 괜찮고, 느려도 좋고, 실수해도 된다는 것이다. 왼손으로 쓴 글씨는 애 초에 아름다울 수 없다. 오른손으로 쓴 글씨와 비교하면 형편없고, SNS에 올릴 만큼 예쁘지도 않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왼손 필사의 치유력이다. 우리는 결과물의 완성도가 아니라 과정 그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삐뚤빼뚤한 글자를 보며 자책하는 대신, '이 정도면 됐어'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리고 그 작은 자기 수용이 일상의 다른 영역으로 퍼져나간다. 완벽하지 않은 나 자신, 부족한 점이 있는 내 삶을 조금 더 너그럽게 바라보게 된다. 또한 왼손 필사는 우리에게 인내를 가르친다.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 손을 참고 견디는 과정에서 우리는 감정 조절 능력을 키운다. 답답함과 짜증이 올라오지만 그 것을 억누르는 대신 관찰한다. '아, 지금 내가 조급해지고 있구나, '완벽주의가 발동하고 있네' 하고 알아차린다. 이런 메타인지적 태도는 일상의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큰 도움이 된다. 화가 날 때 즉각 반응하는 대신 한 템포 쉬어가며,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현명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된다.

명상이라고 하면 흔히 고요히 앉아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그런 전통적인 명상은 오히려 어렵다. 생각을 비우려 할수록 더 많은 잡념이 떠오르고, 가만히 있으려 할수록 몸이 근질거린다. 그런 사람 들에게 왼손 필사는 훌륭한 대안이 된다. 손을 움직이며 감각에 집중하는 '동적 명상'인 셈이다. 필사를 하는 동안 우리는 자연스럽게 마음챙김 상태에 들어간다. 펜이 종이에 닿는 압력, 잉크가 번지는 속도, 손목과 팔의 움직임, 글자가 완성되 어 가는 시각적 변화까지 모든 감각이 현재 순간에 고정된다. 과거의 후회나 미래의 걱정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의 경험에 온전히 머문다. 이것이 바로 명상의 본질이다. 특히 왼손이라는 낯선 도구를 사용하기 때문에 집중도는 더욱 높아진다. 오른손으로 쓸 때는 무의식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들도 왼손으로는 의식적으로 조절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뇌의 새로운 영역이 활성화되고, 고정된 사고 회로에 신선한 자극이 가해진다. 반복적인 일상에 지친 뇌에게 왼손 필사는 마치 여행과 같은 경험이다. 익숙한 풍경을 벗어나 낯선 곳에서 새로운 것을 경험할 때 우리가 느끼는 그 생동감과 활력이 손끝에서 피어난다.

왼손 필사의 또 다른 매력은 문장을 진정으로 음미할 수 있다는 점이다. 빠르게 읽어 내려갈 때는 스쳐 지나가던 문장들 이, 한 글자 한 글자 왼손으로 옮겨 쓸 때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헤밍웨이의 간결한 문체가 지닌 힘, 한용운의 시어가 품은 깊은 슬픔과 희망, 루미의 시가 전하는 영적인 울림이 손끝을 통해 온몸으로 스며든다. 글을 읽는 것과 쓰는 것 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읽을 때는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지만, 쓸 때는 그 정보가 내 안을 통과하며 재해석된다. 특히 왼손이라는 서툰 매개체를 거치면 그 과정은 더욱 느려지고 깊어진다.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라는 위로의 문장도 왼손으로 천천히 쓰다 보면 글자 이상의 무게를 갖는다. 각 글자가 형성되는 동안 그 의미가 마음속 깊이 새겨 지고, 어느새 그 문장은 남의 말이 아닌 나 자신의 다짐이 된다.

왼손 필사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얼마나 예쁜 글씨를 쓰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시간 동안 얼마나 현재에 머물렀는가, 얼마나 나 자신과 대화했는가가 중요하다. 완성된 페이지를 채우는 것도 의미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느낀 평온함, 마주한 나 자신의 모습, 발견한 내면의 소리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의도적으로 느려지는 시간이 아닐까.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일부러 속도를 늦추고 불편함을 선택하는 용기. 왼손 필사는 그런 작은 실천이다. 큰 결심이나 거창한 준비가 필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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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부의 본질 현대지성 클래식 73
크세노폰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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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안다고 생각한다. 아테네 광장에서 청년들을 현혹했다는 죄목으로 독배를 마신 철학자, "너 자신을 알라"는 금언을 남긴 현자. 그러나 크세노폰이 기록한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아는 그 초월적 사상가와는 사뭇 다르다. 그는 세 차례 전쟁터에 나간 중장보병이었고, 가정을 경영하는 방법을 논했으며, 올리브와 포도 농사의 수확 시기를 정확히 알고 있던 실천가였다. 플라톤이 이데아의 세계로 소크라테스를 끌어올렸다면, 크세노폰은 그를 땅 위에 단단히 세워두었 다. <소크라테스 부의 본질>은 그래서 독특하다. 책에는 영혼의 불멸이나 진리의 탐구 같은 거창한 주제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가산을 늘리는 법, 아내와 역할을 분담하는 법, 관리인을 근면하게 만드는 법, 황폐한 땅을 사서 가치를 높이는 법이 나온다. 형이상학이 아니라 형이하학, 사유가 아니라 경영, 관념이 아니라 현실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이 기원전 362년에 쓰였다는 사실이다. 인류 최초의 경영학 교과서라 불릴 만하다. '오이코노미코스'라는 원제는 '집(오이코스)'과 ‘관리(노모스)'의 결합이다. 오늘날 경제학(Economics)의 어원이 된 이 단어는, 당시에는 가정의 모든 관리 활동을 포괄 하는 개념이었다. 재산 관리, 노예 관리, 가족 구성원의 역할 분담, 농업 경영, 심지어 도덕적 실천까지 포함했다. 동양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와 닮아 있다. 개인의 수양에서 출발해 가정을 바로 세우고, 그것이 국가 경영의 토대가 된다는 사고 방식 말이다.


책은 소크라테스와 크리토불로스의 대화를 이야기 한다. 크리토로스는 큰 재산도 있지만 늘 돈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가진 것이 거의 없지만 스스로를 부유하다고 말한다. 이 역설적 대화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재산'의 정의 를 새롭게 세운다. 그에 따르면 재산이란 '어떤 사람의 소유물 전체'가 아니다. 정확히는 그 사람이 사용할 줄 아는 것 만이 재산이다. 피리를 연주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피리는 재산이 아니다. 말을 다룰 줄 모르는 사람에게 말은 짐일 뿐이다. 심지어 적까지도, 활용할 줄 안다면 재산이 될 수 있다. 이 논리는 가혹하면서도 명료하다. 소유는 능력 없이 무의미하다. 이 정의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날카롭게 꽂힌다. 우리는 투자 정보를 수집하고, 자산을 불리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정작 그 자산을 '어떻게 배치하고, 언제 써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은 부족하다. 부동산을 여러 채 가지고 있어도 불안하고, 주식 계좌에 큰 수익이 났어도 허전한 이유는 무엇인가. 소크라테스라면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지휘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책에 등장하는 이스코마코스는 이 책의 핵심 인물이다. 그는 아테네에서 '아름답고 좋은 사람(칼로카가토스)'으로 불리는 모범적 가장이다. 소크라테스는 그에게 가정 경영의 비법을 묻는다. 그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질서입니다:" 이 스코마코스는 열다섯 살에 시집온 아내에게 화장법이나 요리가 아니라 '질서'를 가르쳤다. 집 안의 모든 물건에는 제자리에 가 있어야 하고, 모든 역할에는 담당자가 있어야 하며,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합창단이 제각각 노래하면 소음이지만, 질서 있게 화음을 이루면 음악이 된다. 가정도 마찬가지다. 그는 아내를 동침의 대상이 아니라 동반자로 대했다. 함께 자녀를 교육하고, 재산을 지키며, 노년을 준비하는 파트너. 이것이 공동의 이익이자, 가정 경영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 대화 속에는 고대 그리스의 가부장적 시각이 묻어 있다. "아내가 대관절 무엇을 알고 있었겠습니까" 같은 표현은 불편하다. 하지만 그 시대적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역할 분담과 상호 존중에 기반한 경영 철학은 여전히 유효하다. 흥미로운 대목은 화장과 외모에 관한 대화다. 짙은 화장을 하고 높은 굽의 신발을 신은 아내에게 이스코마코스는 꾸짖지 않는다. 대신 질문한다. "당신은 나를 속이려 하는가, 아니면 함께 진실하게 살려 하는가?" 그리고 땀 흘려 일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며 말한다. "건강한 몸과 성실한 노동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화장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거울 치료'다. 상대를 변화시 키려면 먼저 자신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농장 경영에 관한 이야기다. 현대 독자에게는 다소 낯선 주제일 수 있지만, 여기에 이 책의 정수가 담겨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농사를 지어본 적 없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스코마코스와의 대화를 통해 깨닫는다. 자신이 몰랐다고 생각한 것을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이것이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의 핵심이다. 질문을 통해 상대 안에 잠재된 앎을 끌어내는 것이다. 이스코마코스는 말한다. "잘 가꿔진 땅은 사지 마십시오." 역설적이지만 이유는 명확하다. 이미 완성 된 땅을 사면 그저 유지하는 수준에 머문다. 하지만 버려진 땅, 잡초만 무성한 헐값의 땅을 사서 가꾸면 가치는 몇 배로 뛴다. 물론 이것은 농사를 사랑하고, 땀 흘릴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그는 또한 강조한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기술은 핑계를 댈 여지가 있다. 시장이 나빠서, 운이 없어서, 경쟁자가 강해서. 하지만 농사는 다르다. 씨를 뿌리고 가꾼 만큼 정확히 수확한다. 방치된 땅은 주인의 게으름을 적나라하게 증언한다. 이것은 비즈니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시장을 탓하기 전에, 자신이 얼마나 성실히 준비하고 실행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관리인의 자질에 관한 대화도 인상적이다. 이스코마코스는 근면함을 최고의 덕목으로 꼽는다. 그러나 근면함만으로는 부족하다. 주인은 관대해야 하고, 공정해야 하며, 신상필벌을 명확히 해야 한다. “묵묵히 제 몫을 다하는 훌륭한 일꾼이 가장 낙담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자기 일을 다 해내고도, 게으름뱅이와 똑같은 대우를 받을 때입니다." 이 한 문장은 조직 경영의 본질을 꿰뚫는다.


책에는 페르시아 왕의 일화가 등장한다. 왕이 좋은 말을 빨리 살찌우고 싶어 전문가에게 물었다. 전문가는 단 한단어로 답했다. "주인의 눈." 이 말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다. 아무리 좋은 시스템을 갖추고, 유능한 관리인을 두어도 주인의 눈이 닿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그러나 '주인의 눈'이란 감시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관심이고, 이해이며, 책임이다. 내가 책임지는 영역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관찰하며, 개입하는 태도. 오늘날 많은 경영자들 이 데이터와 보고서에 의존하지만, 정작 현장의 온도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소크라테스는 묻는다. "당신은 당신의 가산을, 사업을, 삶을 정말 보고 있습니까?" 또한 이스코마코스는 ' 다스리는 능력 '에 대해 논한다. 진정 강력 한 지휘관은 가장 힘센 자도, 창을 잘 던지는 자도 아니다. 병사들이 " 불 속이라도 저 사람을 따르겠다 "는 마음을 먹게 만드는 사람, 그가 진짜 강력한 지휘관이다. 이것은 가정 경영에도, 사업 경영에도 적용된다. 진정한 리더십은 위계나 권위가 아니라 신뢰에서 나온다. 이스코마코스는 스스로를 이렇게 해명한다. "나는 아무도 부당하게 대우하지 않고, 내 능력이 닿는 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건넵니다." 이것이 그가 존경받는 이유다. 소크라테스는 이 대화를 통해 깨닫는다. 다스리는 능력은 단번에 터득할 수 없으며, 체계적 교육과 좋은 성품, 그리고 '신적인 탁월함'이 필요하다고. 여기서 신적 탁월 함이란 초월적 능력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개선하려는 의지를 뜻한다.


책을 읽으며 가장 큰 수확은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을 체험했다는 점이다. 그는 일방적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질문을 던지고, 상대의 답을 경청하며, 함께 진리를 찾아간다. 그 과정에서 상대는 스스로 깨닫는다. 자신이 몰랐다고 생각한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음을, 자신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가능함이다. 존중의 태도다. 상대를 가르침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의 파트너로 대한다. 심지어 이스코마코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질문을 던진다. 위계가 뒤바뀌는 순간이다. 이것이 진정한 평등이다. 지식의 양이 아니라, 서로의 경험을 나누며 함께 성장하는 관계다. 우리는 일상에서 얼마나 자주 상대를 존중하며 대화하는가, 대부분의 대화는 설득이거나 설명이다. 나의 의견을 관철시키거나, 나의 지식을 전달하는 데 급급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보여준다. 진정한 대화는 상대 안에서 답을 끌어내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나 역시 배운다는 것이다. 2,400년 전 소크라테스가 던진 질문은 오늘날 더욱 절실하다.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지만 판단의 기준은 희미하다. 투자 정보는 넘쳐나지만, 내 삶을 지휘하는 감각은 약하다. 재산은 늘어나지만,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 다. 소크라테스는 단언한다. 질서 없는 풍요는 가난보다 위험하며, 관리되지 않은 재산은 결국 주인을 지배하게 된다고. 중요한 것은 '얼마나 가졌는가'가 아니라 '가진 것을 얼마나 질서 있게 다룰 수 있는가'다. 이것이 부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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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받아치는 기술 - 무례한 말로 선 넘는 상대에게 보내는 통쾌한 스톱 사인!, 개정판
이오타 다쓰나리 지음, 서수지 옮김, 주노 그림 / 사람과나무사이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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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며칠 전, 회사 복도에서 한 선배와 마주쳤다. 그는 내 옷차림을 훑어보더니 "요즘 너무 편하게 입고 다니는 거 아니야? 좀 더 신경 써야 하는 거 아냐?"라고 말했다.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면서 머릿속이 하얘졌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와 하루 종일 그 말이 맴돌았다. '내가 그렇게 이상하게 보였나? 아니, 애초에 저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분노와 자책이 뒤섞였다. 비슷한 경험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중학교 때 친구가 내 외모를 놀렸을 때, 대학 때 선배가 내 전공 선택을 비웃었을 때, 가족 모임에서 친척이 내 연애사를 공개적으로 물었을 때. 그때마다 나는 말문이 막혔고, 뒤늦게야 '그때 이렇게 말할 걸'이라는 후회만 쌓여갔다. 그 후회들은 오래도록 가슴속에 남아 가끔씩 떠올라 나를 괴롭혔다.


되받아치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하기 때문이다. 평화롭게 일상을 보내다가 갑자기 날아온 무례한 말은 우리의 사고 회로를 순간적으로 멈춰버린다. 그리고 '내가 예민한 걸까?', '혹시 내가 정말 잘못한 건 아닐까?'라는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또 다른 이유는 관계의 파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특히 직장 상사나 오랜 친구, 가족처럼 계속 마주쳐야 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맞섰다가 더 큰 문제가 되면 어쩌지?', '분위기 망치는 사 람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입을 막는다. 결국 참는 것이 더 쉬운 선택처럼 느껴지고, 우리는 그 순간을 넘긴다. 하지만 그렇게 넘긴 순간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속에 켜켜이 쌓여 응어리가 되고, 어느 순간 폭발하거나 스스로 를 갉아먹는 독이 된다. 나는 그런 감정들을 너무 오래 품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되받아친다는 것은 상대를 공격하거나 복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 자신을 지키는 행위다. 내 감정과 존엄성을 보호하고, 상대에게 '이 선은 넘으면 안 된다'는 경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최근에 나는 작은 실천을 시작했다. 후배가 농담이 라며 내 외모를 지적했을 때, 예전 같았으면 어색하게 웃고 넘겼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런 말은 농담이어도 기분 나쁘거든. 다음부턴 하지 말아줘."라고 차분하게 말했다. 후배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사과했고, 그 이후로 비슷한 말은 하지 않 았다. 놀라운 건 그 한마디를 하고 나서 느낀 해방감이었다. 가슴속에 쌓여 있던 무언가가 조금씩 풀리는 느낌이었다. '아, 나는 내 감정을 표현해도 되는구나. 불편함을 말해도 관계가 무너지지 않는구나'라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모든 상황에서 같은 방식으로 대응할 수는 없다. 상대와의 관계, 맥락, 그리고 내 감정 상태에 따라 적절한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책에서 여러가지 상황에서의 대처법을 정말 명확하게 설명해 준다. 책을 읽으며 이런 기술들을 알게 된 후에도, 실제로 적용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특히 권위 있는 사람이나 나이가 많은 사람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부장님이 회의 중에 내 의견을 무시하며 "경험도 없는 사람이 뭘 안다고"라고 말했을 때,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되받아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직 내 위계와 평판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가로막았다. 또 다른 어려움은 타이밍이었다. 무례한 말을 듣는 순간에는 너무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다가,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적절한 대응이 떠오르곤 했다. 그때 가서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자니 어색하고, 그렇다고 그냥 넘기자니 억울했다. 가장 힘든 것은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받는 무례함이었다. 친한 친구가 습관적으로 나를 낮춰 말하거나, 가족이 내 선택을 존중하지 않을 때, 관계를 지키고 싶은 마음과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했다. '이 정도는 참아야 하는 거 아닐까?', '내가 너무 예민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그럼에도 나는 조금씩 연습하기 시작했다. 작은 상황부터 시작했다. 카페에서 잘못 나온 주문을 그냥 받던 습관을 버리고, “죄송한데, 제가 주문한 건 이게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친구가 약속 시간을 어겼을 때, "괜찮아"라고만 하지 않고 "다음엔 미리 연락해줘. 기다리는 게 힘들어"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떨렸다. 목소리도 떨렸고, 말하고 나서 '내가 너무 심한 건 아닐까?' 하는 자책도 들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말을 받아들였 다. 오히려 내가 명확하게 의사를 표현하자 상대도 편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서로 눈치 보지 않고 솔직하게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중요한 깨달음은, 되받아치는 것이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오히려 건강한 경계를 세우는 것 이 관계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내 불편함을 참고 쌓아두는 것보다, 그때그때 표현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훨씬 나은 관계 를 만들었다.


물론 여전히 어려운 순간들이 있다. 특히 악의가 없이 무례한 사람들을 마주할 때가 그렇다. 그들은 자신이 선을 넘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나는 네 친구니까 이 정도 말할 수 있지", "농담인데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여?"라며 오히 려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려 한다. 이럴 때는 더욱 명확하고 단호해져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그 말이 불편해. 농담이어도 듣고 싶지 않아."라고 반복해서 말해야 한다. 한 번에 바뀌지 않더라도, 계속 내 경계를 표현하다 보면 상대도 서서히 이해하게 된다. 만약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관계를 유지할 가치가 있는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또 힘든 것은 조직 문화나 사회적 분위기와 싸워야 할 때다. "원래 후배가 참아야지", "여자가 너무 따지는 것 같아", 분위기 파악 좀 해"라는 말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런 압력 속에서 나 자신을 지키는 것은 때로 외롭고 지친 일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내 편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다짐한다.

조금씩이지만, 내 삶에 변화가 생겼다. 가장 큰 변화는 내 감정을 더 존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내가 예민한 건가?' 하며 내 감정을 의심했다면, 이제는 '내가 불편하다면 그것이 정당한 이유다'라고 믿게 되었다. 내 감정을 신뢰하게 되니, 다른 사람의 평가에 덜 흔들리게 되었다. 또 다른 변화는 에너지를 아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무례한 말을 듣고도 참았다가, 집에 돌아와 혼자 속앓이하며 에너지를 소진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자리에서 바로 표현하고 정리 하니, 불필요하게 감정을 끌고 가지 않게 되었다. 밤에 잠들기 전 '그때 왜 그랬을까' 하며 괴로워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조금 더 당당해졌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고, 원하지 않는 것에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나를 더 자유롭게 만들었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무례함에 내 하루를 빼앗기지 않게 되었다.


되받아치는 기술은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배워가는 중이고, 때로는 실수하기도 한다. 너무 감정적으 로 대응해서 후회한 적도 있고, 반대로 너무 약하게 대응해서 아쉬웠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 자체가 성장이라고 믿는다. 중요한 것은 완벽하게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시도하는 것이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지키려는 의지를 잃지 않는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무례한 말들과 마주칠 것이다. 세상에는 선을 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을 것이고, 때로는 그들로 인해 상처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내가 침묵할 필 요는 없다는 것을. 내 목소리를 낼 권리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나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되받아치는 기술은 결국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내 감정을 소중히 여기고, 내 경계를 존중하며, 나 자신의 가장 든든한 편이 되어주는 것. 그 여정을 나는 계속해서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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