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MBTI 성격 사전 - 명리로 살펴보는 나의 성격과 기질
허은경 지음 / 현암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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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느 순간의 증거다. 2025년 어느 겨울날 새벽, 그 시각의 하늘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 찰나의 우주적 배열이 각인되었다는 명제 앞에서, 현대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과학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이것은 미신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번에 읽은 책에서 저자는 20만 년 인류가 축적한 관찰의 결정체임을 차근차근 설득한다. 저자 허은경이 MBTI를 '보급형 명리학'이라 부른 순간, 나는 묘한 전율을 느꼈다. 외향과 내향, 직관과 감각, 사고와 감정, 이 이분법적 구조가 음 양의 사유와 닮아있다는 통찰은 새로웠다. 동서양의 지혜가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진실을 말해왔다는 것. 인간은 세상을 '나'와 '외부'로 나누고, 그 관계의 방식으로 자신을 이해한다는 것. MBTI가 현대 심리학의 언어로 포장한 이 구조를, 명리 학은 이미 수천 년 전 하늘의 언어로 기록해두었다. 흥미로운 건 두 체계 모두 인간을 고정된 범주에 가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MBTI가 16가지 유형을 제시하면서도 스펙트럼을 강조하듯, 명리학의 120가지 성격 유형 역시. 경계가 흐릿하다.

인월에 태어났다고 인의 정서만 갖는 게 아니라, 직전과 직후 월지의 특성도 함께 품는다. 이 유연함이야말로 고대 학문이 살아남은 비결이 아닐까. 인간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 기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그런데 더 정확한 질문은 이것일지 모른다. "나는 누구로 태어났는가?" 환경이 우리를 빚어내지만, 그 빚어짐의 방식은 이미 타고난 기질에 의해 결정된다. 소나무는 어떤 환경에서도 소나무다. 바람에 휘어질 수는 있어도 참나무가 되지는 않는다. 저자가 들려주는 딸의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사주상 위와 장이 약하게 태어난 아이. 유치원에서 정해진 양의 급식을 시간 내에 먹어야 한다는 규칙 앞에서 아이는 무너졌다. 타고난 체질을 인정 하고 식사량을 조절하자 아이는 다시 웃었다.

명리학의 실용적 가치를 보여준다. 약한 위장을 강하게 만들려 애쓰는 대신, 약한 위장을 인정하고 그에 맞춰 살아가는 지혜. 이것이 바로 타고난 본성을 아는 것의 의미다. MBTI 열풍도 같은 맥락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INFP인지 ENFJ인지 알고 싶어한다. 그것이 자기이해의 지름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MBTI는 4가지 지표, 16가지 조합에 그친다. 명리학은 10개의 천간과 12개의 지지로 120가지 조합을 만든다. 더 세밀한 지도다. 나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일간이 어떤 정서의 계절인 월지에 놓였는가에 따라, 나의 고유한 기질 이 드러난다. 여름에 태어난 사람은 활기를, 겨울에 태어난 사람은 고요를 부여받는다는 발상이 비과학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계절이 생명에 미치는 영향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면, 왜 계절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문제는 과학적 증명이 아니라 실용적 타당성이다. 이 120가지 성격 지도가 실제로 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생각해 본다...

전통 지식에는 '왜'가 없는 경우가 많다. 수천 년의 시행착오 끝에 '무엇'과 '어떻게'만 남았기 때문이다. 명리학도 마찬가지다. 왜 갑일간 인월생이 INTP 의 흐름과 비슷한지, 그 인과관계는 불투명하다. 하지만 수천 년간 검증되어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를 갖는다. 60진법 시간이 10진법으로 바뀌지 않은 이유도 같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시간을 10진법으로 바꾸려 했지만 12년 만에 포기했다. 1시간 60분, 1분 60초가 인간의 본성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늘의 움직임, 즉 황도 12궁과 360도 를 60으로 나눈 천문학적 질서와 일치한다. 수메르 문명 이전부터 전해져온 이 60진법을 우리는 유전자에 새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명리학은 검증 불가능하지만 반증 불가능하기도 하다.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지혜의 영역이다. 중요한 건 이것이 작동하느냐는 것. 나를 이해하고, 타인을 이해하고, 관계를 맺고, 선택을 내리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되느냐는 것이다.

MBTI가 유행하는 이유는 재미 때문만은 아니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좌표를 찾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사주×MBTI 성격 사전>은 이 물음에 대해 더 오래되고 더 섬세한 답을 제시한다. 120 가지 성격 지도는 나만의 별자리를 찾게 해준다. 융은 말했다. "진정한 치유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되 려면 먼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타고난 정서와 기질을 알고,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관리하는 것. 이것이 명리학과 MBTI가 우리에게 건네는 공통의 메시지일 것이다. 책을 읽으며 내 사주를 찾아봤다. 일간과 월지를 확인하고, 해당하는 페이지를 펼쳤다. 거기 적힌 문장들은 나를 설명하고 있었다. 우연일 수도 있다. 바넘 효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인공지능의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AI 만능의 시대에 나를 조금은 다른 접근 방법으로 이해해 본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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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 문장의 기억 (양장) - 살아 있음의 슬픔, 고독을 건너는 문장들 Memory of Sentences Series 4
다자이 오사무 원작, 박예진 편역 / 리텍콘텐츠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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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다자이 오사무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경험일까. 그것은 마치 깊은 밤 홀로 거울 앞에 서는 일과 닮아 있다. 거울 속 자신의 눈을 똑바로 마주할 때, 우리는 낮 동안 애써 외면했던 내면의 균열들을 발견한다. 다자이의 문장은 바로 그런 거울이다. 화려하게 포장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인간 존재를 비추는 것이다. 1948년 6월, 서른여덟의 나이로 타마강에 몸을 던 진 작가. 그의 마지막은 많은 이들에게 문학적 파멸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가 남긴 문장들을 천천히 읽다 보면, 역설적이게도 그 안에서 삶을 향한 처절한 갈망을 발견하게 된다. "부끄러움 많은 생애를 보냈다"고 고백하면서도, 끝까 지 펜을 놓지 않았던 사람. 죽음을 선택하면서도 동시에 살기를 갈구했던 모순적 존재. 다자이 오사무라는 작가는 바로 그 틈새에 존재한다.

<인간실격>의 주인공 요조는 "자신은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사회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에 지쳐, 자신을 인간 자격 상실자로 규정하는 그의 고백은 충격적이다. 하지만 이 극단적 자기부정 속에는 오히려 가장 인간다운 무언가가 숨어 있다. 바로 '진실이다. 우리 시대는 긍정의 언어로 가득하다. SNS는 성공 서사와 행복 인증으로 넘쳐나고, 자기계발서 는 "할 수 있다"는 주문을 되뇐다. 그런 세계에서 다자이의 문장은 불온하다. "나는 약하다", "나는 두렵다", "나는 살 자격 이 없다"-이런 고백들은 현대의 긍정 강박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러나 바로 그 충돌 지점에서 우리는 해방을 경험한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강해야 한다는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책은 필사를 권한다. 읽는 것만이 아니라, 손으로 직접 문장을 옮겨 쓰는 행위. 디지털 시대에 이것은 얼마나 아날로그적이고 비효율적인 방법인가. 하지만 바로 그 비효율성 속에 의미가 있다. 문장을 필사할 때, 우리는 작가의 호흡을 따라간다. 한 글자 한 글자 옮겨 쓰면서 그가 선택한 단어, 문장의 리듬, 쉼표의 위치까지 온몸으로 경험한다. "악당은 오래 살고, 예쁜 사람은 빨리 죽는다"는 문장을 읽을 때와 쓸 때는 다르다. 읽을 때는 지나칠 수 있는 문장이, 쓸 때는 손끝에서 멈칫 거린다. '예쁜 사람'이라는 표현 뒤에 숨은 작가의 애틋함이, 빨리 죽는다'는 예언적 선언 속 불길함이 손을 통해 가슴으로 전해진다. 특히 다자이의 문장은 필사하기에 적합하다. 그의 언어는 장식적이지 않고 직접적이다. 화려한 수사 대신 뼈만 남은 문장들. 그래서 한 줄 한 줄이 무겁다. "나에게는 인간의 생활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이 문장을 손으로 쓰는 순간, 우리는 잠시 다자이가 된다. 그의 고독을 빌려 입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다자이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음식 장면들이다. <사양>에서 가즈코가 우동을 먹으며 살아 있는 것의 쓸쓸함을 극한까지 맛본다"고 말하는 장면. 뜨거운 김 속에서 면을 후루룩 들이키는 그 순간, 그녀는 역설적으로 살아 있음을 가장 강렬하게 느낀다. 쓸쓸함으로서가 아니라, 쓸쓸함을 통해서다. 이것이 다자이 문학의 핵심이다. 그는 절망을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절망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 그것을 온전히 경험한다. 그 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비로소 발견하는 것이 있다. "행복감이라는 것은 슬픔의 강바닥에 가라앉아 희미하게 빛나는 사금 알갱이 같은 것" 문장이 말하는 진실은 명료하다. 행복은 슬픔의 반대편에 있지 않다. 슬픔 속에, 슬픔 아래에 존재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다자이를 "자기 파괴를 통해 끝내 인간을 긍정한 작가"라고 평했다. 정확한 지적이다. 다자이는 자신을 파괴하면서 동시에 구원했다. 글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그의 작품들은 일종의 '기록'이다. 무너져 내리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 그 솔직함이 오히려 보편성이 된다. 왜 2024년을 사는 우리가 1948년에 죽은 일본 작가의 문장에 공명하는가. 그것은 그가 다룬 주제들 즉,고독, 소외, 위선, 자기혐오 등 이 시대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오늘 날 더 절실하기 때문이다. 연결되어 있으나 고립된 현대인들, 성공을 강요받으나 의미를 상실한 세대들에게 다자이의 문장은 위로가 된다. 네가 느끼는 그 슬픔은 정당하다고, 네가 무너지는 것은 인간적이라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책을 통해 다자이의 문장을 읽고, 쓰고, 음미하며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 각 장마다 제공되는 필사 공간은 사유의 장으로 초대한다. 빈 페이지 앞에서 우리는 질문한다.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나는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가. 나는 정말 살고 싶은가라고 묻는다. 무겁고 어두운 질문들이다. 하지만 다자이가 증명했듯, 이런 질문들을 회피하지 않을 때 비로소 진짜 삶이 시작된다. 가면을 벗고 연기를 멈출 때, 우리는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것이 설령 고통스럽더라도 말이다. 다자이가 그랬듯이, 무너지면서도 끝내 일어서기를. 그의 문장이 어둠 속 작은 등불이 되어, 우리 각자의 밤을 비추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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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눈물에는 온기가 있다 - 인권의 길, 박래군의 45년
박래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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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곁'을 명사로 안다. 누군가의 옆자리, 가까운 거리, 물리적 위치. 하지만 박래군의45년은 '곁'을 동사로 바꾼 시간이었다. 곁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곁을 '지킨다'는 것.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책임이고, 감정이 아니라 실천이며,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이다. 어떤 사람들은 뉴스를 본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뉴스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전자가 '알게 되는 것'이라면, 후자는 '견디게 되는 것'이다. 박래군은 후자였다. 그는 의문사 현장에서, 고문 피해자의 증언 옆에서, 철거민의 마지막 저항 속에서, 세월호 유가족의 긴 침묵 곁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쌓여 하나의 질문을 만들었다. "나는 왜 여기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떻게 여기 남을 것인가?“ 책을 읽으며 깨닫는 것은, 인권운동이란 거창한 구호나 이론적 체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그 약속을 10년, 20년, 30년 동안 지키는 일이다. 세상이 다음 이슈로 넘어가도, 언론이 카메라를 거둬도, 정치가 외면해도, 그 자리에 남아 이름을 부르고 진실을 기록하는 일. 그것이 곁을 지킨다는 동사의 의미다.

박래군은 자신을 운동가라고 소개하지만, 그를 '슬픔의 번역자'라고 부르고 싶다. 그는 유가족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시설 수용자의 침묵당한 비명을, 국가폭력 피해자의 억눌린 증언을 사회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옮긴 사람이다. 동생 박래전의 죽음은 그에게 개인적 비극이었지만, 동시에 다른 모든 억울한 죽음과 연결되는 통로가 되었다. 슬픔은 원래 닫혀 있다. 자기만의 방에 갇혀 바깥과 단절된다. 하지만 박래군은 자신의 슬픔을 닫지 않았다. 대신 그것을 열쇠 삼아 다른 슬픔의 문을 두드렸다. "저도 형제를 잃었습니다." 그 한마디가 유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였을까. 번역이란 원문의 의미를 다른 언어로 옮기되, 그 감정의 온도까지 전달하는 일이다. 박래군은 고문 피해자의 떨리는 목소리를, 세월호 부모의 무너진 일상을, 대추리 주민의 마지막 저항을 단순히 '보도'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과 함께 울었고, 그 눈물의 온도를 기억했으며, 그것을 사회적 언어로 풀어냈다. 고통은 공감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아무리 큰 아픔도 사회가 외면하면 '개인의 불행'으로 축소된다. 하지만 누군가 그 고통을 증언하고, 기록하고, 연결하면, 그것은 '구조적 폭력'으로 가시화된다. 박래군의45년은 바로 이 번역의 시간이었다.

책에서 인상적인 대목은 '승리'가 아니라 '패배'를 다루는 방식이다. 대추리는 결국 미군기지가 되었고, 용산은 재개발되었으며, 많은 진상규명은 여전히 미완이다. 일반적인 성공 서사라면 이런 이야기는 지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박래군은 패배를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 패배 속에서 무엇을 지켰는지를 보여준다. 대추리 농민들은 땅을 잃었지만, 마지막까지 스스로 결정하는 존엄을 지켰다. 용산 철거민들은 건물을 빼앗겼지만, 국가폭력의 실체를 온 사회에 각인시켰다. 세월호 유가족은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었지만, "다시는 이런 참사가 반복되지 않게"라는 약속으로 슬픔을 연대로 바꾸었다. 현대 사회는 '결과'로만 평가한다. 이겼는가, 졌는가.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 하지만 인권의 역사는 다른 척도를 요구한다. 얼마나 오래 버텼는가. 누구를 끝까지 배신하지 않았는가. 어떤 원칙을 포기하지 않았는가. 박래군의 기록은 바로 이 '과정의 존엄'을 증명한다. 패배는 끝이 아니라 다음 싸움의 시작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많은 권리들, 고문 금지, 의문사 진상규명, 장애인 인권, 재난 피해자 지원 등은 모두 누군가의 '패배'가 쌓여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들이 포기하지 않았기에, 패배를 기록했기에, 우리는 조금 더 나은 사회에서 산다.

박래군의 45년은 바로 이 '기억이라는 저항'의 실천이었다. 그는 죽은 자의 이름을 불렀고, 사라진 증거를 찾았으며, 잊혀질 뻔한 사건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을 엮어 하나의 역사를 만들었다. 단편적인 비극이 아니라, 구조적인 폭력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역사. 개별 사건이 아니라, 국가와 자본과 권력이 반복해온 패턴을 드러내는 역사였다. 기억의 힘은 과거를 바꾸는 데 있지 않다. 미래를 바꾸는 데 있다.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것은 침몰한 배를 되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시는 그런 배를 띄우지 않기 위해서다. 우리가 의문사를 기록하는 것은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시는 그런 죽음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다.

박래군의 책을 덮으며 남는 것은 질문이다. 나는 누구의 곁에 서 있는가. 나는 무엇을 외면하며 살고 있는가. 나는 어떤 고통 앞에서 눈을 돌리는가. 인권은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 내 옆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누군가의 억울함, 누군가의 차별, 누군가의 슬픔.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곁을 지키고, 기억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지만 가장 중요한 일이다. 모든 눈물에는 온기가 있다. 하지만 그 온기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누군가 그 눈물 옆에 앉아, 함께 울어주고, 손을 잡아주고,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라고 말해줄 때, 비로소 온기가 생긴다. 박래군은45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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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기분 - 한문학자가 빚어낸 한 글자 마음사전
최다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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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언어는 감정의 그릇이다. 우리는 기쁨과 슬픔, 분노와 평온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지만, 정작 그 감정을 정확히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해 답답해한다. "우울해", "외로워"라는 말로는 미처 다 담아내지 못하는 미묘한 감정의 결들이 있다. 한문학자 최다정은 바로 이 지점에서 한자라는 오래된 문자 체계가 지닌 힘을 발견한다. 한자는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형상화하는 독특한 문법을 가지고 있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응축된 한자 하나하나는, 때로 긴 문장이나 두꺼운 책보다 더 정확하게 우리의 기분을 대변해준다. 저자는 이러한 한자의 특성을 "표정"이라고 명명한다. 네모난 틀 안에서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간 획들이 만들어내는 조형미는, 단지 시각적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고 감정의 질감까지 전달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한자 해석은 학술적 엄밀함과 시적 상상력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예컨대 '名(명)'이라는 글자는 저녁(夕)과 입(口)이 결합한 형태다. 인공조명이 없던 시대, 어둠 속에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던 사람들은 스스로 이름을 말해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해야 했다. 이 글자 하나에는 어둑한 길목에서 "나는 아무개입니다"라고 서로의 이름을 호명하며 반갑게 인사하던 밤의 풍경이 담겨 있다. 이처럼 한자의 자형(字形) 분석은 부수와 획수만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글자가 만들어지던 순간의 인간적 정황을 복원하는 작업이다. '坐(좌)' 자는 두 사람이 나란히 땅에 앉아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애초에 '앉다'라는 행위는 혼자가 아닌 둘이 주체였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저자는 함께 앉아 온기를 나누는 시간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다. 돗자리 하나를 깔고 나란히 앉아 체온으로 연결되던 가을날의 추억이, 한자 한 글자를 통해 보편적 감성으로 확장된다. 저자는 카페 창가에서 플라타너스 꼭대기를 바라보다가 '梢(초)'라는 글자를 떠올리고, 시인 두보와윤잉의 시구를 음미한다. 나무의 끝을 표현하기 위해 별도의 한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에서, 자연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언어화했던 선인들의 감수성을 배운다.

한자는 삶을 대하는 태도까지 제시한다. '生(생)' 자는 땅 위로 돋아나는 새싹의 형상이다. 저자는 봄날 밤, 시멘트 틈을 비집고 올라온 연약한 풀 한 포기를 발견한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자라나는 이 풀은, 생명 그 자체의 숭고함을 일깨운다. 우리는 생계를 유지하고 생활을 일구며 생존하는 일의 가치를 쉽게 잊고 산다. 하지만 태어나 숨 쉬며 살아간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귀한 일이다. '生'이라는 한 글자는 과거(태어남), 현재(살아감), 미래(살아갈 삶)를 모두 아우른다. 한 존재의 생애는 과거-현재-미래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채 전개된다. 지금 이 순간은 인생이라는 파노라마를 구성하는 하나의 장면이다. 이러한 통시적 관점을 가질 때, 현재의 고통이나 기쁨은 전체 삶의 맥락 속에서 재해석된다. '甘(감)'이라는 글자는 입 속에 맛있는 음식을 머금은 모양이다. 저자는 힘든 일을 견뎌낸 후 자신에게 달콤한 레몬 케이크를 선물한다. 입의 감각은 잠깐이지만, 빠르게 생의 의지를 돋운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처럼, 쓴 일을 견딘 끝에는 반드시 달콤함이 온다. 작은 위안이 때로는 삶을 지속하게 하는 큰 힘이 된다.

저자는 망각에 서툰 사람이다. 언젠가 쓸모 있을까 싶어 낱낱이 헤아리며 기억하고, 자신을 반성하고 미워하기 위해 되새김질한다. 하지만 작은 조각도 너무 많이 모이면 무겁고 따갑다. '忘(망)'이라는 글자는 마음(心)에서 기억이 미끄러져 달아나버리는(亡) 모습을 형상화했다. 이제는 이 글자가 시키는 대로, 지난 기억들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고 싶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반대로 '緖(서)'라는 글자는 실마리를 뜻한다. 실로 짠 천의 첫 실밥 하나를 당기면 전체가 풀린다. 복잡하게 꼬인 문제의 해결책도 결국 가장 처음, 초심에 있다. 실마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면, 돌아갈 용기만 있으면 된다. 이처럼 한자는 때로는 놓아주라고, 때로는 돌아가라고 조언한다. '箴(잠)'은 바늘이다. 흐트러진 나를 따끔하게 찔러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글이 곧 箴言이다. 가늘고 미약해 보이지만, 본성을 잃지 않게 단속하는 센 힘을 지녔다. 저자의 箴 제목은 "평정箴(平靜箴)"이다. 쉽게 초조해지는 마음을 달래 평정심을 되찾게 하는 자기만의 잠언. 우리 각자도 스스로를 일깨우는 箴을 지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한자 문화권에서 자란 우리는 한자를 통해 오래된 성정과 조우한다. 자신이 존재하는 양상을 충분히 이해받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는 한자가 하나의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수천 년 동안 축적된 삶의 지혜와 철학, 감성이 글자 하나하나에 응축되어 있다. 저자는 한자가 자신에게 영원히 권력이나 실리의 대상이 아니기를 바란다. 순수한 애정으로 한자와 한문을 공부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럴 수만 있다면, 세상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낄 때 돌아갈 곳은 언제나 한자의 세계관일 것이다. 기분이 엉망인 순간에 숨어 들어가 웅크리고 울 수 있는 곳이, 작은 한자 한 글자였으면 좋겠다는 고백은 절절하다.

책은 한자 해설서가 아니라 감정 일기이며, 학술서가 아니라 위로의 편지라 할 것이다. 저자는 한자라는 렌즈를 통해 자신의 일상을 들여다보고, 동시에 한자에 일상의 온기를 불어넣는다. 고대의 글자와 현대의 감정, 학문적 엄밀함과 시적 상상력, 개인적 체험과 보편적 정서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우리는 누구나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순간들을 겪는다. "답답해, 우울해, 슬퍼"라든가 "신나, 설레, 기뻐"라는 단어들로는 다 아우르지 못하는, 생전 처음 느끼는 복잡한 감정들. 저자는 그럴 때마다 한자 자전을 펼친다. 반드시 어떤 글자 하나는 나를 언어화해줄 수 있다. 기분을 말해줄 정확한 언어를 찾는 것만으로 덜 외로울 수 있을 것이다. 한자가 짓는 표정의 기분을 읽어 나가다 보면, 궁색했던 마음의 어느 구석이 소환되고, 비로소 그늘진 마음의 목소리를 명쾌하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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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나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 퍼스널 브랜드 전략!
안영재 지음 / 가나북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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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을 펼치기 전, 나는 ' 퍼스널 브랜딩' 이라는 말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SNS에서 자신을 포장하고, 화려한 이력을 과시하며, 끊임없이 노출되어야 한다는 강박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선입견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브랜드를 만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당신의 브랜드를 만든다"는 제프 베조스의 말처럼, 퍼스널 브랜드란 포장이 아니라 '나를 어떻게 기억되게 할 것인가'의 문제다. 중세 북유럽에서 목축업자들이 가축에 불에 달군 표식을 새긴 것이 브랜드의 시작이었다. 소유 표시에서 출발한 브랜드가, 이제는 신뢰와 정체성, 철학을 담는 그릇이 되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브랜드는 이제 감각적 경험이자 약속이 되었다. 그렇다면 개인은? 우리는 이미 누군가에게 어떤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성실하지만 존재감 없는 사람", 일은 잘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사람", 혹은 항상 바쁜데 정작 무슨 일하는지 모르는 사람" 내가 정의하지 않으면, 타인이 나를 정의한다. 책은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맥킨지는 2030년까지 약 8억 개의 일자리가 AI로 대체될 것이라 예측했다. 이미 ChatGPT는 글을 쓰고, 미드저니는 이미지를 만들며, AI는 코드를 작성하고 데이터를 분석한다. 단순 반복 업무는 물론이고, 창의적이라 여겨졌던 영역까지 Al 가 침범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남을 것인가? 저자는 명확하게 답한다."AI는 기술을 대체할 수 있지만, 신뢰와 감정을 얻는 브랜드는 대체할 수 없다." 사람들은 정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로부터 그 정보를 듣느냐를 중 요하게 생각한다. 같은 조언이라도 신뢰하는 사람에게서 들으면 설득력이 있고, 낯선 이에게서 들으면 그저 정보일 뿐이 다. 책에 등장하는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10년간 전통 마케팅만 해온 한 마케터는 AI의 등장으로 위기를 느꼈지만, 오히려 Al 도구를 자신의 경험과 결합해 '데이터 기반 AI 마케팅 전문가'로 재정의했다. 기술은 도구일 뿐, 결국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그 사람만 의 관점과 철학'이었다.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독자를 특정 유형으로 분류하고, 각자의 출발점에 맞는 전략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퍼스널 브랜딩을 9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브랜딩 무관심형;, 백지 탐색가형', '다재다능 방황가형', '의도적 리브랜딩형, '부정적 평 판 개선형' 등. 나는 자기진단표를 보며, 내가 ‘존재감 부족형’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력은 있지만 드러나지 않고, 회의에서 의견을 잘 내지 않으며, SNS나 네트워크에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항목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자는 이 런 유형에게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 노출 부족"이라고 진단한다.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해도, 그것이 보이지 않으면 존재 지 않는 것과 같다. 나는 그동안 '열심히 일하면 알아주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기다려서는 안 된다. 나를 정의하는 언어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셀프 코칭 질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것이었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어떤 문제를 해결해주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나는 답하지 못했다.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어떤 가치를 제공하는지, 사람들이 나를 떠올릴 때 무엇이 연상되는지 명확하게 정리한 적이 없었다. 이 책은 바로 그 정리를 도와준다.

책의 또 다른 강점은 실용성이다. 거창한 이론이나 추상적인 조언이 아니라, 당장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콘텐츠를 카테고리별로 나누고, 메인 콘텐츠와 서브 콘텐츠를 구분하며, 요일별 템플릿을 만들어 일관성을 유지하라는 조언은 매우 현실적이었다. 특히 AI 활용 부분이 흥미로웠다. ChatGPT에게 "이번 주 자기계발 관련 콘텐츠 아이디어 5가지를 추천해줘"라고 요청하거나, 콘텐츠 캘린더 초안을 작성하게 하는 식으로 AI를 보조 도구로 사용하는 방법은 부담 없이 따라 할 수 있었다. Al를 경쟁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확장하는 파트너로 활용하는 관점이 신선했다. 또한 저자는 "작게 시작하라"고 강조한다. 처음부터 매일 글을 올리겠다는 다짐은 오히려 부담이 되어 쉽게 포기하게 만든다. 주 1~2회로 가볍게 시작하고, 습관이 자리 잡으면 점차 횟수를 늘려가는 것이 지속 가능한 방법이다. 이런 조언은 완벽주의에 갇혀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큰 위안이 된다.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떠올린 문장은 톰 피터스의 말이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라는 브랜드의 CEO다." 처음에는 과장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는 현실로 다가온다. 변화가 빠른 시대, 회사와 직무는 사라질 수 있지만, 내가 어떤 문제를 해결해온 사람인지, 어떤 태도로 일해왔는지는 남는다. 퍼스널 브랜드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다. 저자는 퍼스널 브랜드를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쌓이며 형성되는 패턴과 구조로 설명한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단편적인 게시물 하나가 아니라, 일관되게 드러나는 세계관이다. 명품이 단지 품질로만 명품이 아닌 것처럼, 한 사람의 브랜드도 말투, 행동, 태도, 글쓰기, 사고방식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경험으로 완성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브랜딩이 자기 PR이나 포장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고 정의하는 과정임을 깨달았다. 내가 어떤 철학을 가지고 일하는지, 왜 이 일을 하는지,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명확히 하는 작업. 그것이 진정한 브랜딩이다.

책을 읽고 당장 인생이 바뀌거나, SNS를 시작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브랜드에 무관심하다고 해서, 브랜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관심했기 때문에, 나를 대신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정의해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AI는 점점 더 많은 영역을 대신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진정성 있는 사람'은 대체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정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흥미로운 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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