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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
김영미.김홍길 지음 / 북하우스 / 2007년 3월
평점 :
무엇이든 집어삼킬 듯 격렬하게 출렁이는 바다. 그리고 그 위에 떠있는 배 한 척. 그 안에 살아 숨쉬는 사람들. 굽이굽이 명멸하듯 파도치는 물의 우두머리. 고요 속의 외침, 일렁이는 바다 속에 파묻히는 말소리와 여정의 기나 김. - 자잘한 단상들이 내 머릿속을 채운다. 이러한 모습들로 보아 이 책은 꼭 『15소년 표류기』와 『보물섬』을 닮았다. 일기 전 넘쳐 오르는 기대감과 흥미진진한 구도, 물의 잔영 위에 투영되는 이험의 그림자……. 그러나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다. 그 점이 내 주의를 끌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이야기가 실화라는 것이다.
2006년 4월 4일 경, 동원호 선원들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선원들이 작업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 때 스피드보트를 타고 해적들이 들이닥쳤고, 동원호는 순식간에 장악 당했다. 정적, 그리고 긴장의 순간이었다. 그렇게 동원호는 나포되었고, 폭음의 땅이라 불리는 소말리아로 피랍당한 선원들의 생고생, 즉 해적들에게 몸값으로 치부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한 편 동원호 대부분의 선원은 조선족이었는데,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팠다. 그들은 소말리아에서 조국의 구조를 애타게 기다렸을 것이며, 또한 그리운 가족 생각에 몸서리 쳤을 것이다. 해적의 본거지에서의 생활,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 일인데 그들은 어떻게 그 긴 117일을 견뎌냈을까. 띄엄띄엄 작성한 선원의 일기 구석구석에는 그 당시의 긴박함과 두려움, 그리고 절망감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지금 한국에선 무슨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일까?’ - 우리나라 선원의 물음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또, 떠올리기도 싫었다. 국민의 몸값을 두고 해적들과 흥정이나 하고 있는 볼썽사나운 낯짝이란! 기껏 자기들에게 물자와 외화를 공급하는 고마운 일꾼들에게 이 무슨 배은망덕한 모습이란 말인가? 화가 났다. 조국에게, 내 삶의 터전을 향한 분노의 불길이 번지는 듯 하였다.
내가 생각하는 나라와 국민간의 관계는 서로 도와주는 협력자로서의 관계이다. 국민은 나라를 위해 일을 하고, 나라는 국민들을 위해 안전과 자유를 보장하는 협력자의 관계말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국민은 안전과 자유, 그 둘 모두를 결속 당했고, 어미에게 버림받은 가냘픈 오리새끼처럼 끊임없이 가슴을 울부짖었다. 나를 구해주세요. 어서요, 어서. 제발 부탁이에요……. 하지만 돌아온 것은 매정한 현실뿐이었다. 선원들은 117일을 그렇게 외롭게, 고통스럽게 홀로 견뎌내야만 했다.
하지만 나의 분노는 금방 사그라졌다. 새끼를 버린 어미 오리의 매정함보다 어미에게 버림 받은 새끼 오리의 울음소리가 더 컸던 것이다. 분노를 잠식시킬 정도의 처절함과 긴박함이었다. 해적들은 날마다 선원들의 옷과 신발을 훔쳐대고 음식에 침을 뱉었다. 그리고 가끔씩 총성을 울리곤 했다. 총성 소리를 상상하니 『보물섬』의 총격전이 떠올랐지만, 『보물섬』의 그것과 이 책의 그것은 흥미진진함과 처량함으로 확연히 구분되었기 때문에 금세 떠오른 생각을 제쳐두었다. 차라리 『보물섬』이 더 안전해 보일 정도였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선원들이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상황 속에서 필요한 것은 바로 희망이 아니었을까 싶다. 좀만 더, 좀만 더를 되새기며 인내에 인내를 거듭한 선원들의 의지가 그들의 생존 확률을 조금씩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선원들에게 희망을 심어준 것은 어쩌면 기자들의 목숨을 건 취재였을지도 모른다. ‘이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며, 실낱같은 희망을 한 덩이의 실몽당이로 뭉치도록 도와준 한 올 한 올의 실이 바로 기자들인 셈이다. 그들의 고귀한 열정과 발로 뛰는 결연한 정신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당신네들이 새끼 오리 여러 마리를 살렸구먼! 꽥꽥-
이렇게 격정적이고 또 한편으로는 처연하게 읽은 이 책의 해피엔딩 아닌 해피엔딩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 앤지 모를 허탈감과 왠지 알 것만 같은 자유로움. 결국엔 풀려나게 된 그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겉으로는 한없는 자유가, 속으로는 뼈저린 흉터가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흉터는, 깊이 아로새겨진 흉터는 깊은 애정만으로 다시 푸르른 살결으로 돌아오리라.
끝으로 그들이 풀려난 날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이곳저곳에서 온 수많은 인파로 붐비는 항구, 동원호가 멈춰 선다. 그리고 선원들이 내린다. 그때, 나는 아무 말 않고 그들을 멀리서 지켜본다. 갈 때 무정할 땐 언제고 돌아올 때는 뜨거운 관심으로 맞이하는 사람들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에 한껏 경멸을 느끼며, 그들의 자리를 내어준다.
자, 어서 지나가십시오. 어미의 매정함은 잊어버리고 이제부터라도 자유를 만끽하십시오. 잊혀지지 않을 크나큰 아픔의 흉터가 남긴 하겠지만 말입니다.
크디큰 흉터 자국은 당신의 넓은 자유의 날개로 감싸 덮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