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Morning - 나를 바꾸는 아침
사토 덴 지음, 위귀정 옮김 / 지니북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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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적혀있는 영문 제목에 하마터면 원서인 줄 착각할 뻔했다. ‘GOOD MORNING 나를 바꾸는 아침’ ― 제목부터가 심상하면서도 심상치 않았다. 매일같이 짜증을 내며 잠에서 빠져나오는 나의 아침이 나를 어떻게 바꾼다는 건지, 표지 속의 뭉실한 구름을 바라다보며 다시 이전의 무감각 상태로 되돌아갔다. 아침, 무감각. 왜 아침을 떠올리니 무감각이 자연스레 뒤따라왔을까 하는 생각은 뒤로한 채, 허겁지겁 책가방을 챙기느라 분주한 나의 엉망진창 꼴의 아침이 생각났다. 여덟시 종이 땡 하고 울리는 그제야 교문 앞을 통과하는 나의 부지런함(?)이란! 그래서인지 좋지 않은 기억들로 가득 차있는 나의 아침이, 지금 생각해보니 참으로 처연하게 느껴진다. 다른 사람들의 아침이 제각각 상쾌한 순간을 맞이할 때, 나의 아침은 구석에 쪼그려 앉아 물끄러미 나를 소심하게 바라보고 있었을 텐데…….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 잠재의식을 움직여라. 아침 시간을 소중히 하라……. 아침 시간을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이 책은 낱낱이 가르쳐주고 있다. 우선 무엇보다도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로인해 늘어난 시간을 어떤 곳에 투자할 것이며 어떻게 뜻 깊은 아침을 보낼 수 있는지, 마치 ‘아침가이드’처럼 조목조목 설명해주는 저자가 괜스레 친숙하게 느껴졌다. 자, 나를 따라오세요! 당신의 아침을 책임집니다!


아침에 잘 못 일어나는 나로서는 ‘일어나는 방법’에 대한 내용이 무척이나 절실했고, 반가웠다. 아침 햇빛을 시계 삼아 눈을 뜬다든가, 자명종 시계는 제쳐두고 일종의 자기 최면과 확고한 의지로 기상한다든가, 일어나면 침대에서 10초간 정좌 자세를 유지한다든가 하는 등의 구체적인 기상 방법은 다양해서 흥미로웠고, 또 직접 해볼만 하다고 느꼈기에 공감 가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내일은 이렇게, 모레는 저렇게, 글피는 이러저러쿵하게 잠자리에서 화려한 비상, 아니 화려한 ‘기상’을 해보자는 다짐을 하는 진정한 수확을 하게 된 점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기쁜 일이다.


그렇다고 이 책을 읽는 내내 기쁜 감정만 느낀 것은 아니다. 나의 부끄러운 행동을 지적하는 듯한 예리한 면모 ― 예를 들면, 아침밥을 먹으라는 조언이나 TV를 켜지 말라는 충고 ― 를 보여주기도 하여 적잖이 당황했으며, 나의 아침이 점점 더 황폐화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감에 휩싸일 지경이었다. 그 불안감 바로 너머에는 햇빛 찬란한 아침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나는 그동안 나의 아침을 어젯밤처럼 여전히 재우고 있었다. 이제 나의 아침을 깨울 때가 된 것 같다. 아니, 그보다 먼저 내가 깨야할 것이다. 졸린 탓에 부어올라있는 나의 우스꽝스러운 얼굴과 이제는 결별을 선언하겠다. 안녕, 게으름뱅이 얼굴아!


워크북과 잔잔한 CD가 같이 겸해있어 더욱 좋은 독서시간이 되었다. 이 책에서 말했듯이 정말로 아침에 느긋한 음악을 감상하며 은은한 차 향기를 마셔보기도 했고, 여러 가지 대책들을 하나하나씩 실천해 나가는 중이다.


파란 하늘 속 뭉게구름을 올려다보며 다시 한 번 이 책을 떠올려본다. 그 잔잔함과 풍요로움이 담겨있는 책 속 풍경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된다. 아, 소중한 아침이여! 나는 왜 그걸 몰랐을까. 이제야 비로소 아침의 소중함을 조금이나마 깨달은 나의 후회스런 외침이 굽이굽이 흘러가는 뭉게구름 곳곳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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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죽음의 가면 기담문학 고딕총서 2
에드거 앨런 포 지음, 김정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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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충동. 흥분. 탐닉. 보복. 피해. 강렬. 베일. 발작. 구덩이. 감옥. 광기. 백일몽. 흉악. 무시무시. 해악. 포악. 넋. 은둔. 절망. 불안감. 저주. 냉정. ―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단어들이다. 물론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붉은 죽음의 가면]에서도 위와 같은 단어들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단어들은 작품 속에서 그 빛을 발한다. 내가 단어 뒤에 쉼표가 아닌 마침표를 찍어놓은 것은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의 이미지와 관련이 깊은데, 포의 작품은 숨 가쁘게 이어지는 쉼표의 도가니가 아니라 서서히 가슴을 조이면서 대번에 뚝뚝 찍어 내리는 마침표의 엑스터시와도 같기 때문이다. 아차, 그러고 보니 단어 하나를 빠뜨렸다. <공포>. 위 단어들이 다다르는 한 갈래의 목적지이자 기나긴 행렬의 종착점. 그것이 바로 공포다.


이 책에서 내가 주목한 점은 혼돈의 이야기들 간의 버무려짐이었다. 때로는 죽음에 대한 실험정신으로 또 어떤 때는 광기어린 복수심에 불타오르며 저주의 이야기들은 얼기설기 뒤엉킨다. 결국엔 원초적인 공포감으로 자리 잡는 이야기들을 읽으며 나는 타들어가는 두려움과 이름 모를 중독성에 빠져들었다. 정말로 두려운데, 그래서 심장이 쿵쾅쿵쾅 방망이질 치는데도 나는 이 책을 놓지 않았다. 아니 놓지 못했다. 사방에서 흘러들어오는 물결의 공포가 마침내 한가운데 뭉쳐 거대한 소용돌이의 공포로 응결되는 과정 한가운데, 나는 두 팔을 사정없이 퍼덕이며 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실질적으로 느끼지 못했다. 진정한 공포는 두려움의 감각마저 마비시킨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 다음으로 눈에 띈 점은 바로 추리와 별개적인 점이었다. 여태까지 공포소설보다는 추리소설을 선호해온 나로서는 어딘가 색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공포와 추리, 두 가지 개념에 어떠한 상관관계가 얽혀있는 건 사실이지만 엄연히 다르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이유는 내가 발견한 색다른 점에서 찾아볼 수가 있는데, 추리소설과는 다르게 포의 공포소설은 고뇌하지 않게 만들었다. 여러 사건이 복잡하게 꼬여있는 추리소설에서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대응해야만 하지만, 포의 공포소설을 읽을 때는 고뇌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느끼고 본능적으로 감정을 불러일으키면, 아니 불림당하면 그만이었다. 저 건너편에서부터 이어 늘어진 실 자락을 움켜쥐면 그만이므로 나는 정말로 본능에 충실하며, 실을 타고 내려오는 전율을 실감하며, 에드거 앨런 포 그와 그의 이야기와 광기와 그리고 공포를 읽었다.


<침대에 남은 것은 거의 물로 변해버리다시피 한 흉측하고 역겨운 부패물 덩어리뿐이었다.> ― 『M. 발드마 사건의 진실』의 마지막 구절이다. 죽어가는 친구를 향해 최면을 건 주인공이 최면을 통해 사경의 헤맴을 연장시킨 뒤 비로소 최면을 푼 직후의 장면으로, 내게 극한의 한기를 체험하게 해주었다. 불과 십 초 전까지만 해도 살아있는 인간이었던 존재가 단박에 부패물 덩어리로 전락하는 모습에서 진심어린 두려움이 느껴졌다. 한순간에 저렇게 될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해보니 상황은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왔고,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난 셈이었다. 왜냐, 이 구절을 읽기 전까지 이런 두려움을 느낄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감정의 기복 없이 스멀스멀 진행되던 이야기가 급변하여 나에게 공포의 총구를 겨누고 있었으니. 포의 소설은 이런 식의 소설이 대부분인 것 같다. 전반적으로 격정적인 것이 아니라, 잠식되어 있던 것을 어느 순간 끌어올리는 혼돈의 힘. 한동안 그 힘이 나를 정복했다.


나를 정복한 힘의 둘레에는 충실한 소재의 지지대들이 존재했다. 검은 고양이나 구덩이와 시계추, 가면 등과 같은 소재들은 내 주위에서 나를 포위했으며, 제각각이 아니라 한데 어우러져 제 몫을 다했다. 이야기의 전개뿐만 아니라 소재의 느낌과 인상이 나를 더욱 더 이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 것 같다. 직접적인 표현 대신에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느낌을 지니고 있는 소재의 선택으로 충분히 그 느낌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 같은 경우에는 더욱 무서웠고, 치가 떨렸다. 소재라도 한 수 물러주지, 하는 말도 안 되는 칭얼거림도 해보았고, 또 한편으로는 작가의 치밀함에 놀랐다. 치밀함을 자연스레 읽을 수 있다는 것에서 더욱 치밀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나중에는 소재들의 성격만을 탐색해보기도 했다. 일관성 있는 소재를 통해 작가는 끊임없이 공포, 초자연적인 공포를 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 여겨지는 부분이 있었다. 왜 강렬한 광기와 죽음, 공포가 환상적이게 느껴지는 것일까. 아래로 추락하는 그 모습들이 어떻게 생각해보면 환상적이라고 생각되기도 했다. 물론 그것들을 추구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단지 생의 이면이, 광기 어린 빛의 발산에 환상적인 감이 없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인간들에게 있어 죽음이나 공포와 같은 것들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는 미지수다. 그것들을 경험하고 표현해내기가 참으로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에드거 앨런 포는 공포소설을 쓴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살아 숨쉬는 생생함의 바깥에서도 환상은 존재할 수 있다는, 가혹한 환상의 존재 여부를 소설로 풀어낸 것이 아닐까. 


두려움을 한껏 느끼고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회상이었다. 무엇에 대한 회상? ― 방금 전에 읽은 [붉은 죽음의 가면]에 대한 회상. 읽은 지 몇 분이나 되었다고, 책에 대한 단상들이 두둥실 떠오르는 걸까. 아직도 두렵다. 왜일까. 대체 왜 지워지지 않는 것일까. 마지막 장에 이어 끄트머리 없는 책장의 행진이 계속 해서 이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이대로라면 오늘 밤에 악몽을 꿀 지도 모른다. 아, 사라져버려. 사라져버리란 말이야! ― 하지만 사라지지 않았고, 그 현상은 며칠간 지속되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와중에도 끊임없이 이러한 단상들이 두둥실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예전처럼 두렵지만은 않다. 세상의 이면을 비춰보며 그 색다르고 오묘한 단면을 속속들이 파헤쳐보는 내가. 극한의 공포를 맛보았기에 시시껄렁한 일에는 기죽지 않을 내가. 죽음을 안 이후로 살아있음의 생생함과 소중함을 예전보다 뼈저리게 느끼는 내가. 그런 내가. 비로소 공포에 맞닥뜨리며 이색적인 전율을 맛볼 수 있는 감각의 혀를 지닌 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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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실패를 믿지 않는다 - 오프라 윈프리의 일과 성공과 사랑
로빈 웨스턴 지음, 이정임 옮김 / 집사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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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오프라 윈프리, 이름만 질리도록 들어봤지 그녀를 이렇게 만나보기는 처음이었다. 우선, 그녀의 외양을 살폈다. 책 표지 속의 그녀의 외양을. 생김새는 알고 그녀를 파헤쳐보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그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터이니 말이다. 찰칵! 육안 카메라에 그녀의 외양이 담긴다. 제일 먼저 찍힌 것은 자신감 넘치는 웃음. 분명히 의도적인 웃음일 테지만 어쩜 그리 자연스러운지, 사진 찍힐 적에 웃지를 못하는 나로서는 부러움이 샘솟는다. 그 다음 필름을 장식한 외양은 까만 피부. 흑인 여성이라더니 듣던 대로구나, 함과 동시에 건강미 흘러넘치는 듯한 느낌의 까만 피부가 마음에 든다. 그 이후로는 하늘빛 귀고리, 풍성한 머리칼, 짙게 그린 눈썹 등에 플래시가 터진다. 음, 좋아! 이제 카메라 워크는 그만, 낱낱이 파헤쳐보자고!


괜찮아요?

 

위풍당당해 보이는 그녀의 베일 속에는 이름 모를 아픔이 숨어있었다. 어린 시절, 이혼한 부모 사이에서 전전하며 혼란스러워 했던 오프라는 그 뿐만 아니라 친척들에게 간헐적인 강간을 당했으며, 한 때 방황의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항상 쌩쌩하던 그녀의 모습은 이러한 아픔을 뒤로한 채 보이고 있었다. 세계 최고의 토크쇼 진행자이기 이전에 그녀는 여린 소녀였을 뿐인 것이다. 그래서 안타깝기도 했고, 그에 반해 대단하다는 존경심까지 일었다. 실패라는 과정을 즐기면 실패가 아니라고 했던가? - 그 말이 맞았다. 오프라는 실패의 과정을 즐겼다. 일렁이는 바다 한복판에서 여유로이 파도타기를 하듯, 그 스릴과 참맛을 즐겼다. 그리고 그녀는 높이 도약했다.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그 순간의 아슬아슬함을 멋진 도약으로, 세인의 허를 찔렀다. 푹- 그러자 성공의 팡파르가 울린 것이다!


멋진데요?

 

오프라 윈프리가 단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식의 갑부였다면 나는 이 책을 집어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프라는 역시, 역시라는 말이 썩 어울리게 빈민들과 기아들 그리고 어린 소녀들에게 방방곡곡으로 따뜻한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있었다. 지금도 자신의 이름으로 학교를 세우기도 하며, 정기적으로 빈민층을 위해 지원을 해주고 있는 실정이다. ‘말솜씨로 돈 버는 군. 나 같은 사람은 서글퍼서 어떻게 산대?’ 라고 생각했던 나의 좁은 견해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녀는 ‘말솜씨’로 돈을 벌었지만, ‘마음씨’로 돈을 나눈 사람이었다.


당신이군요!


아르바이트로 라디오 지역방송을 한 것을 시작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토크쇼의 버팀목으로까지 도달한 그녀. 그녀의 자서전을 읽으며, 원래는 책을 읽을 때 ‘저자를 읽는다.’고 하지만 이번만큼은 ‘오프라를 읽는다.’는 느낌이 강한 인상을 주었다. 내가 읽은 것은 바로 그녀, 오프라 윈프리였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그러나 내려다 볼 줄도 아는 그녀의 자신감에 박수갈채를 보내며 <그녀 읽기>를 끝냈다. 아니 그냥 끝냈다는 표현은 부적절하다. ‘일부분’을 끝냈다. 그녀의 일부분을 읽으며 참 행복했다. 그녀의 행복이 나에게까지 전해져 나를 기쁘게 해줄 줄이야. 


끝으로 책 표지 속의 그녀를 다시금 바라다본다. 처음에 그녀의 외양을 살폈다면, 이제는 그녀의 내양을 살핀다. 카메라 워크 작동! - 찰칵! 넉넉함이 넘치는 미소. 미소뿐만 아니라 그녀의 마음도 온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 찰칵! 살색 피부. 좌로 보나 우로 보나 그녀의 피부는 단지 ‘살색’일 뿐이다. 어쩌면 살 속의 색은 훨씬 더 새하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찰칵! - 어라? 카메라 워크가 고장이 났나? 왜 뜬금없이 뭉게구름에, 그 사이를 날아다니는 희미한 형상이 보이는 거지? 희미한 형상을 향해 크기 확대 기능을 누르자 그곳에는 바로 그녀가 있다. 뭉게구름 사이를 부드럽게 날아다니며, 자기 바구니 속에 채워진 별조각을 뿌리고 있는 오프라 윈프리. 그녀의 바구니는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지만, 그녀의 표정 속의 기쁨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까만 천사, 그게 바로 당신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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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
김영미.김홍길 지음 / 북하우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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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집어삼킬 듯 격렬하게 출렁이는 바다. 그리고 그 위에 떠있는 배 한 척. 그 안에 살아 숨쉬는 사람들. 굽이굽이 명멸하듯 파도치는 물의 우두머리. 고요 속의 외침, 일렁이는 바다 속에 파묻히는 말소리와 여정의 기나 김. - 자잘한 단상들이 내 머릿속을 채운다. 이러한 모습들로 보아 이 책은 꼭 『15소년 표류기』와 『보물섬』을 닮았다. 일기 전 넘쳐 오르는 기대감과 흥미진진한 구도, 물의 잔영 위에 투영되는 이험의 그림자……. 그러나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다. 그 점이 내 주의를 끌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이야기가 실화라는 것이다.

 

2006년 4월 4일 경, 동원호 선원들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선원들이 작업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 때 스피드보트를 타고 해적들이 들이닥쳤고, 동원호는 순식간에 장악 당했다. 정적, 그리고 긴장의 순간이었다. 그렇게 동원호는 나포되었고, 폭음의 땅이라 불리는 소말리아로 피랍당한 선원들의 생고생, 즉 해적들에게 몸값으로 치부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한 편 동원호 대부분의 선원은 조선족이었는데,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팠다. 그들은 소말리아에서 조국의 구조를 애타게 기다렸을 것이며, 또한 그리운 가족 생각에 몸서리 쳤을 것이다. 해적의 본거지에서의 생활,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 일인데 그들은 어떻게 그 긴 117일을 견뎌냈을까. 띄엄띄엄 작성한 선원의 일기 구석구석에는 그 당시의 긴박함과 두려움, 그리고 절망감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지금 한국에선 무슨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일까?’ - 우리나라 선원의 물음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또, 떠올리기도 싫었다. 국민의 몸값을 두고 해적들과 흥정이나 하고 있는 볼썽사나운 낯짝이란! 기껏 자기들에게 물자와 외화를 공급하는 고마운 일꾼들에게 이 무슨 배은망덕한 모습이란 말인가? 화가 났다. 조국에게, 내 삶의 터전을 향한 분노의 불길이 번지는 듯 하였다.

 

내가 생각하는 나라와 국민간의 관계는 서로 도와주는 협력자로서의 관계이다. 국민은 나라를 위해 일을 하고, 나라는 국민들을 위해 안전과 자유를 보장하는 협력자의 관계말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국민은 안전과 자유, 그 둘 모두를 결속 당했고, 어미에게 버림받은 가냘픈 오리새끼처럼 끊임없이 가슴을 울부짖었다. 나를 구해주세요. 어서요, 어서. 제발 부탁이에요……. 하지만 돌아온 것은 매정한 현실뿐이었다. 선원들은 117일을 그렇게 외롭게, 고통스럽게 홀로 견뎌내야만 했다.

하지만 나의 분노는 금방 사그라졌다. 새끼를 버린 어미 오리의 매정함보다 어미에게 버림 받은 새끼 오리의 울음소리가 더 컸던 것이다. 분노를 잠식시킬 정도의 처절함과 긴박함이었다. 해적들은 날마다 선원들의 옷과 신발을 훔쳐대고 음식에 침을 뱉었다. 그리고 가끔씩 총성을 울리곤 했다. 총성 소리를 상상하니 『보물섬』의 총격전이 떠올랐지만, 『보물섬』의 그것과 이 책의 그것은 흥미진진함과 처량함으로 확연히 구분되었기 때문에 금세 떠오른 생각을 제쳐두었다. 차라리 『보물섬』이 더 안전해 보일 정도였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선원들이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상황 속에서 필요한 것은 바로 희망이 아니었을까 싶다. 좀만 더, 좀만 더를 되새기며 인내에 인내를 거듭한 선원들의 의지가 그들의 생존 확률을 조금씩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선원들에게 희망을 심어준 것은 어쩌면 기자들의 목숨을 건 취재였을지도 모른다. ‘이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며, 실낱같은 희망을 한 덩이의 실몽당이로 뭉치도록 도와준 한 올 한 올의 실이 바로 기자들인 셈이다. 그들의 고귀한 열정과 발로 뛰는 결연한 정신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당신네들이 새끼 오리 여러 마리를 살렸구먼! 꽥꽥-

 

이렇게 격정적이고 또 한편으로는 처연하게 읽은 이 책의 해피엔딩 아닌 해피엔딩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 앤지 모를 허탈감과 왠지 알 것만 같은 자유로움. 결국엔 풀려나게 된 그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겉으로는 한없는 자유가, 속으로는 뼈저린 흉터가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흉터는, 깊이 아로새겨진 흉터는 깊은 애정만으로 다시 푸르른 살결으로 돌아오리라.

끝으로 그들이 풀려난 날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이곳저곳에서 온 수많은 인파로 붐비는 항구, 동원호가 멈춰 선다. 그리고 선원들이 내린다. 그때, 나는 아무 말 않고 그들을 멀리서 지켜본다. 갈 때 무정할 땐 언제고 돌아올 때는 뜨거운 관심으로 맞이하는 사람들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에 한껏 경멸을 느끼며, 그들의 자리를 내어준다.

 

자, 어서 지나가십시오. 어미의 매정함은 잊어버리고 이제부터라도 자유를 만끽하십시오. 잊혀지지 않을 크나큰 아픔의 흉터가 남긴 하겠지만 말입니다.
크디큰 흉터 자국은 당신의 넓은 자유의 날개로 감싸 덮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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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없는 동화 - 독창적 논술을 위한
조대현 외 지음, 안준석 그림 / 그린북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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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동화:’ 이라는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어떻게 쌍점을 찍어놓고 아무런 표기도 않은 채 오로지 공백만으로 제목을 대신할 수가 있지? ‘제목’이라는 개념을 항상 접해온, 그래서 그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나로서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리고 충격을 뒤따라 온 것은 소용돌이치는 호기심과 붉은 하늘과도 같은 신선함이었다. 제목이 없어서 그런지 동화의 내용을 추측할 수 없었고, 그로 인해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은 증폭되었다. 제목 없는 동화라! 기가 막힌 발상이다. 제목을 없애버림으로서 독자들의 눈길과 호기심을 쏠리게 함과 동시에 자유롭게 제목을 붙일 수 있도록 하는 그 여유로움이란! 희번덕한 제목이 붙기는커녕 제목이 없어서 더욱 기대되었다.


이 책은 어린이들의 생각의 힘과 논술 실력을 길러주기 위한 취지로 출간된 동화책답게, 이야기를 읽고 좀 더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과 직접 제목을 붙여보는 공간이 따로 배치되어있었다. 난 어린이가 아니었지만, 직접 질문에 답하고 제목을 짓다보니 어린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보다 심도 있게 감상, 해석할 수 있었고 흥미진진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나이 많은(?) 나에게도 이토록 좋은 영향을 끼치는데 파릇파릇한 어린아이들에게는 얼마나 좋을지, 이 책이 너무도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제목 없는 동화>여, 나의 동생들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키워다오.


다만 우려되는 점은, 아이들이 순수한 동화를 굳이 꼭 해석해야만 하는 일종의 ‘문제’로 여기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냥 자연스레 느끼고 감동하면 되는 것을 괜스레 이렇게 저렇게 바꿔보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 따지며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고, 어떠어떠한 표현이 쓰였는지 살피는 것은 그리 좋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순수함과 이야기의 결정체인 동화가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벗어나 버리는 것일 테니 말이다.


물론 <제목 없는 동화>의 경우에는 그렇게 큰 문제의식은 없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도를 지나친 파악’이지만, 이 책은 그 정도를 적당히 잘 조절한 것 같다. 만일에 <제목 없는 동화>가 시리즈로 나온다면, 동화에 대한 아이들의 환상이 깨지지 않도록, 상상의 날개를 활짝 펴고 날 수 있도록, 너무 높게 날아 날개가 태양에 불타버리지는 않도록 잘 해주길 바란다. 또 그렇게 믿고 있다.


이제 ‘논술’에서 ‘동화’로 화두를 바꿔보자. 아홉 편의 멋들어진 동화는 아주 내 맘에 쏙 들었다. 동화를 읽으면서 그러고 보니 동화 본 지도 오래되었다는 생각을 했고, 내가 너무 현실에 ‘찌들어’ 살았나 하고 후회스럽게 개탄했다. 오랜만에 읽는 동화. 그것들은 순수하게 ‘이야기’ 자체로 재미가 작용했고, 마음이 정화되는 듯한 행복한 기분이 솟구쳤다. 동화를 읽는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뒤늦게 재경험을 하며 이제는 동화 편독 증상이 생기지는 않을까, 짜릿한 기우를 만끽해본다.


아홉 편의 동화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동화 하나가 있는데, 한 닥나무의 이야기이다.

골똘이라는 별명을 가진 닥나무가 있었다. 그 닥나무는 평소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을 동경했는데, 자신은 그러지 못한다는 현실에 가슴 아파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수가 찾아와 닥나무를 베어갔고 그 닥나무는 한지로 거듭나게 되었다. 골똘이는 왜 자기가 이렇게 변했는지 궁금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연’이 될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후 골똘이는 연 할아버지에게 팔려 멋진 연으로 만들어졌고, 그토록 바라던 하늘 날기의 소원을 끝내 이루었다.


어찌 보면 뻔한 얘기 같지만,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참된 동화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골똘이가 연이 되어 하늘을 날다 바람에 찢겨졌다고 이야기를 바꾼다면 그 동화는 아이들에게 걸맞지 않은 것이다. [이상의 실현의 제지], [지극히 현실적인 세상] 이런 주제의 동화를 어찌 아이들에게 선보인단 말인가? - 그래서 난 동화가 좋다. 마음 푸근하고 따뜻한 동화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끝으로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에 대해 한마디 하겠다. 이 책에서 영감(?)을 받아 나도 한번 제목을 붙이지 않아봤다. 내 서평을 읽은 사람이라면 덧글로 이 글의 제목을 붙여주어도 좋다. 자, 그럼 어서 내 서평에 제목을 달아주기 바란다. 당신의 독창적 논술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어디 한번 지켜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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