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죽음의 가면 기담문학 고딕총서 2
에드거 앨런 포 지음, 김정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죽음. 충동. 흥분. 탐닉. 보복. 피해. 강렬. 베일. 발작. 구덩이. 감옥. 광기. 백일몽. 흉악. 무시무시. 해악. 포악. 넋. 은둔. 절망. 불안감. 저주. 냉정. ―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단어들이다. 물론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붉은 죽음의 가면]에서도 위와 같은 단어들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단어들은 작품 속에서 그 빛을 발한다. 내가 단어 뒤에 쉼표가 아닌 마침표를 찍어놓은 것은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의 이미지와 관련이 깊은데, 포의 작품은 숨 가쁘게 이어지는 쉼표의 도가니가 아니라 서서히 가슴을 조이면서 대번에 뚝뚝 찍어 내리는 마침표의 엑스터시와도 같기 때문이다. 아차, 그러고 보니 단어 하나를 빠뜨렸다. <공포>. 위 단어들이 다다르는 한 갈래의 목적지이자 기나긴 행렬의 종착점. 그것이 바로 공포다.


이 책에서 내가 주목한 점은 혼돈의 이야기들 간의 버무려짐이었다. 때로는 죽음에 대한 실험정신으로 또 어떤 때는 광기어린 복수심에 불타오르며 저주의 이야기들은 얼기설기 뒤엉킨다. 결국엔 원초적인 공포감으로 자리 잡는 이야기들을 읽으며 나는 타들어가는 두려움과 이름 모를 중독성에 빠져들었다. 정말로 두려운데, 그래서 심장이 쿵쾅쿵쾅 방망이질 치는데도 나는 이 책을 놓지 않았다. 아니 놓지 못했다. 사방에서 흘러들어오는 물결의 공포가 마침내 한가운데 뭉쳐 거대한 소용돌이의 공포로 응결되는 과정 한가운데, 나는 두 팔을 사정없이 퍼덕이며 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실질적으로 느끼지 못했다. 진정한 공포는 두려움의 감각마저 마비시킨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 다음으로 눈에 띈 점은 바로 추리와 별개적인 점이었다. 여태까지 공포소설보다는 추리소설을 선호해온 나로서는 어딘가 색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공포와 추리, 두 가지 개념에 어떠한 상관관계가 얽혀있는 건 사실이지만 엄연히 다르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이유는 내가 발견한 색다른 점에서 찾아볼 수가 있는데, 추리소설과는 다르게 포의 공포소설은 고뇌하지 않게 만들었다. 여러 사건이 복잡하게 꼬여있는 추리소설에서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이성적으로 대응해야만 하지만, 포의 공포소설을 읽을 때는 고뇌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느끼고 본능적으로 감정을 불러일으키면, 아니 불림당하면 그만이었다. 저 건너편에서부터 이어 늘어진 실 자락을 움켜쥐면 그만이므로 나는 정말로 본능에 충실하며, 실을 타고 내려오는 전율을 실감하며, 에드거 앨런 포 그와 그의 이야기와 광기와 그리고 공포를 읽었다.


<침대에 남은 것은 거의 물로 변해버리다시피 한 흉측하고 역겨운 부패물 덩어리뿐이었다.> ― 『M. 발드마 사건의 진실』의 마지막 구절이다. 죽어가는 친구를 향해 최면을 건 주인공이 최면을 통해 사경의 헤맴을 연장시킨 뒤 비로소 최면을 푼 직후의 장면으로, 내게 극한의 한기를 체험하게 해주었다. 불과 십 초 전까지만 해도 살아있는 인간이었던 존재가 단박에 부패물 덩어리로 전락하는 모습에서 진심어린 두려움이 느껴졌다. 한순간에 저렇게 될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해보니 상황은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왔고,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난 셈이었다. 왜냐, 이 구절을 읽기 전까지 이런 두려움을 느낄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감정의 기복 없이 스멀스멀 진행되던 이야기가 급변하여 나에게 공포의 총구를 겨누고 있었으니. 포의 소설은 이런 식의 소설이 대부분인 것 같다. 전반적으로 격정적인 것이 아니라, 잠식되어 있던 것을 어느 순간 끌어올리는 혼돈의 힘. 한동안 그 힘이 나를 정복했다.


나를 정복한 힘의 둘레에는 충실한 소재의 지지대들이 존재했다. 검은 고양이나 구덩이와 시계추, 가면 등과 같은 소재들은 내 주위에서 나를 포위했으며, 제각각이 아니라 한데 어우러져 제 몫을 다했다. 이야기의 전개뿐만 아니라 소재의 느낌과 인상이 나를 더욱 더 이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 것 같다. 직접적인 표현 대신에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느낌을 지니고 있는 소재의 선택으로 충분히 그 느낌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 같은 경우에는 더욱 무서웠고, 치가 떨렸다. 소재라도 한 수 물러주지, 하는 말도 안 되는 칭얼거림도 해보았고, 또 한편으로는 작가의 치밀함에 놀랐다. 치밀함을 자연스레 읽을 수 있다는 것에서 더욱 치밀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나중에는 소재들의 성격만을 탐색해보기도 했다. 일관성 있는 소재를 통해 작가는 끊임없이 공포, 초자연적인 공포를 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 여겨지는 부분이 있었다. 왜 강렬한 광기와 죽음, 공포가 환상적이게 느껴지는 것일까. 아래로 추락하는 그 모습들이 어떻게 생각해보면 환상적이라고 생각되기도 했다. 물론 그것들을 추구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단지 생의 이면이, 광기 어린 빛의 발산에 환상적인 감이 없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인간들에게 있어 죽음이나 공포와 같은 것들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는 미지수다. 그것들을 경험하고 표현해내기가 참으로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에드거 앨런 포는 공포소설을 쓴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살아 숨쉬는 생생함의 바깥에서도 환상은 존재할 수 있다는, 가혹한 환상의 존재 여부를 소설로 풀어낸 것이 아닐까. 


두려움을 한껏 느끼고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회상이었다. 무엇에 대한 회상? ― 방금 전에 읽은 [붉은 죽음의 가면]에 대한 회상. 읽은 지 몇 분이나 되었다고, 책에 대한 단상들이 두둥실 떠오르는 걸까. 아직도 두렵다. 왜일까. 대체 왜 지워지지 않는 것일까. 마지막 장에 이어 끄트머리 없는 책장의 행진이 계속 해서 이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이대로라면 오늘 밤에 악몽을 꿀 지도 모른다. 아, 사라져버려. 사라져버리란 말이야! ― 하지만 사라지지 않았고, 그 현상은 며칠간 지속되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와중에도 끊임없이 이러한 단상들이 두둥실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예전처럼 두렵지만은 않다. 세상의 이면을 비춰보며 그 색다르고 오묘한 단면을 속속들이 파헤쳐보는 내가. 극한의 공포를 맛보았기에 시시껄렁한 일에는 기죽지 않을 내가. 죽음을 안 이후로 살아있음의 생생함과 소중함을 예전보다 뼈저리게 느끼는 내가. 그런 내가. 비로소 공포에 맞닥뜨리며 이색적인 전율을 맛볼 수 있는 감각의 혀를 지닌 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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