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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말
최민호 지음 / 황금가지 / 2018년 1월
평점 :
창백한말 (2018년 초판)
저자 - 최민호
출판사 - 황금가지
정가 - 12000원
페이지 - 323p
새로운 계급사회
황금가지에서 꾸준히 진행하는 ZA(좀비 아포칼립스) 문학 공모전에서 당당히 장편으로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
출간되었다. 기존의 마냥 물어뜯고 썰어대던 식상한 좀비물과는 확실한 차별점을 둔 이번 작품은 그야말로
한국형 좀비장르의 새로운 탄생이라 봐도 무방할만한 새로운 시도의 작품이었던것 같다. 대부분의 좀비물이
바이러스의 발생을 시작으로 빠른 시간내에 무차별 확산되어 아비규환 아수라장이 되는 대공황의 상황을 그리는
좀비아포칼립스인 반면 이번 작품은 대공황 이후 생존자들의 생활을 다루는 좀비홀로코스트인 점이 다르다.
좀비 바이러스 보인자 수진은 좀비 억제 신약을 만드는 구인제약의 하청회사에서 좀비 바이러스 경보팔찌를
생산하는 라인에서 근무한다. 보인자이기에 면역자와는 달리 무리한 노동강도와 착취에 가까운 낮은 급여에도
불평 불만 없이 일해야만 한다. 그러던 어느날 청소아줌마의 쉼터 청원서에 사인한 이유로 직장에서 잘려
버린 수진은 당장 어린 딸 미나에게 고가의 좀비 억제약을 먹여야 하지만 가진 돈이 없어 막막해진다.
면역자이자 경보팔찌 회사의 사장 석호를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며 도움을 구하지만 보인자를 벌레처럼 바라
보는 석호에게 깔끔히 무시당하고 미나의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는데...
구인제약의 연구원인 세영은 기자로 활동하는 동생 미나가 구인제약의 불법행위를 취재하다 시체로 발견된
소식을 듣고 동생의 사망사건에 구인제약이 연관 되었을거라 짐작하고 사설탐정 명철과 함께 사건을 파헤
치는데....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한 이후의 한국사회는 새로운 계급사회가 탄생된다.
면역자(고위층:좀비 걱정 없는 섬에서 생활) > 면역자(일반계층:장벽 위 북쪽에서 생활) > 보인자(장벽 아래
남쪽에서 격리생활) > 좀비(남쪽 아래 장벽에 차단됨)
면역자는 바이러스에 면역되어있기 때문에 좀비에게 물려도 좀비화 되지 않는다. 하지만 억제약을 먹는 보인자
는 좀비에게 물리면 몇시간 내에 좀비로 변해 버린다. 당연하게 면역자와 보인자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계층과
차별이 발생하고 면역자는 보인자를 착취하고 그들이 약을 사기위해 지불하는 돈으로 호위호식한다. 작품이
그리는 디스토피아는 좀비라는 소재만 제외하면 지금의 갑과 을의 지배,피지배 계급사회와 너무도 일치하기에
공포 소설을 읽는다기 보단 현실 세태를 고발하는 사회고발 소설을 읽는듯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사실 작품과 비슷한 소재로 좀비홀로코스트를 다룬 작품이 있는데 2013년에 개봉한 좀비 영화 [리턴드]이다.
바이러스 감염으로 하루에 한번 백신을 투여해야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는 보인자들은 백신의 재고가 바닥 났다
는 소식을 듣고 공포와 공황상태에 빠지고 줄어드는 백신을 보며 인간답게 살기 위한 고뇌를 보여주는 작품인데
영화가 남녀 연인을 주인공으로 그들의 심경을 그린다면, 이 작품 [창백한 말]은 연인을 수진과 미나라는 모녀관계
로 치환시켜 슬프고 애절한 신파를 그려낸다. 부조리한 사회와 극단으로 치닫는 불신과 광기 때문에 희생 당하는
모녀의 이야기는 너무나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모녀의 이야기와 더불어 동생의 사망사건을 따라가는 세영의 이야기도 추리 소설로서의 재미를 선사하니 공포,
추리,SF를 망라하는 경계를 무너뜨리는 장르적 재미를 톡톡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차라리 식욕만 남아있는 좀비가
순수해 보일정도로 극악의 이기심과 욕망의 민낯을 드러내는 지배자들과 그들을 무너뜨리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
혁명을 꿈꾸는 레지스탕스들의 대립이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드는 좀비들 보다 더욱 긴장감 있게 펼쳐지는 작품이었다.
작가가 그려낸 신선하면서도 익숙한 세계에 개성 넘치는 인물들이 얽히고 설켜 그려내는 파멸의 지옥도는 현실과
너무나 닮아 있어 더욱 공포스럽게 다가온다.
덧 - 언젠가 미국에서 실제로 좀비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를 진행 했다는 카더라를 들은 적이 있는데...이거 제약
회사에서 맘만 먹으면 언제든 실현 가능한 시나리오 아닌가...-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