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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변의 피크닉 ㅣ 스트루가츠키 형제 걸작선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평점 :
노변의피크닉 (2017년 초판)
저자 - 아르카티 스트루가츠키, 보리스 스트루가츠키
역자 - 이보석
출판사 - 현대문학
정가 - 14000원
페이지 - 379p
러시아식 퍼스트 컨택트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작품 [종말전 10억년]을 처음 접한건 지금으로 부터 11년전 2007년 이었다. 당시만 해도 SF소설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안된 시기라서 SF소설하면 무지막지한 과학문명을 가진 외계인들이 때거리로 지구로 침공하는 [우주전쟁]류의 작품만을 생각하던 꼬꼬마 시절이었는데, 독특한 제목에 끌려 읽었던 [종말전 10억년]으로 SF소설에 대한 인식 자체가 바뀌게 된것 같다. 나비효과로 인한 10억년이라는 억겁의 세월을 관통하는 깊은 통찰력을 가진 형제의 이야기에 매료되었고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받은 작품으로 남았는데......그랬는데..,..-_-;;; 어찌된것인지 더이상의 초역없이 [종말전 10억년]이 [세상이 끝날때까지 아직 10억년]으로 제목이 바껴 재간되더니 그 이후부터는 잊을만 하면 표지갈이만 해서 재출간되는 영겁의 무한 로테이션....ㅜ_ㅜ.. 그래서 이번 1988년 [종말전 10억년] 초판 발행 이후 무려 29년만에 현대문학에서 새롭게 초역된 스트루가츠키 형제작가의 초역 [노변의 피크닉]은 내게도, SF팬에게도 정말 많은 의미를 갖는 작품인듯 하다. 솔직히 말하면 그저 감개무량할 따름이라는게 솔직한 심정이다...이번 형제의 작품은 SF소설에서 흔한 소재인 퍼스트 컨택트류인데 불곰국의 퍼스트 컨택트는 이렇게 어둡고 기묘하고 기괴한가보다...
러시아의 도시 하몬트에 방문자가 다녀가고 그들이 다녀간 곳엔 방문자들의 부스러기들이 남게된다. 그들이 다녀간 지역은 구역으로 불리며 구역 곳곳엔 상식적으로 이해가지 않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벌어진다. 초문명의 외계인이 버린 쓰레기 조차 인류에겐 무궁한 과학 자원이니 군대가 격리 해놓은 구역을 몰래 들어가 방문자의 부스러기들을 훔쳐다 팔아넘기는 스토커가 등장하고 전문적인 스토커질로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이 증가한다. 그러나 구역 곳곳엔 몸을 흐물하게 만드는 '젤리'나 중력중첩으로 신체를 짜부러지게 만드는 '모기지옥'등 온갖 트랩들로 위협을 가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는다. 평범한 외계문명지부 연구원이던 레드릭 슈하트는 스토커가 되어 사랑하는 연인과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는데.....
하몬트 지역의 사람들은 구역의 비공식적 영향 때문에 이주가 금지되고 비좁은 마을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릎쓰고 가족을 위해 구역에 들어갈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엄청난 공포와 맞서야 하며 끔찍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작품은 내내 담담한 분위기를 유지한다...(불곰국 러샤에선 이정도 공포는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그래서 더욱 몸서리처지게,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공포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방문자들로 오염된 구역에 다녀온 사람들(스토커)은 정체모를 질병을 얻고, 신체가 변형되며 접촉한 사람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기괴한 외모의 돌연변이가 태어나는등의 설정은 그야말로 방사능 사고와 그로 인한 후폭풍에 대한 이야기로 보인다. 1970년에 구상된 이 작품이 1986년에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예견한건 아니겠지만 하몬트의 격리된 구역의 으스스한 풍경은 그야말로 유령도시로 변해버린 체르노빌과 겹쳐 보였다.
생계를 위해 스토커가 가져온 외계의 쓰레기들을 개조하여 무한동력으로 달리는 자동차를 만드는등 초고도 문명을 나름대로 개조하여 사용하는걸 보니 마블 히어로 영화인 [스파이더맨 홈커밍]에서 '마이클 키튼'이 연기했던 생계형 소시민 빌런 벌처가 떠오른다. 벌처나 스토커나 가족을 위해 살기위해 일을 시작했으나 결과적으로 처음의 목적을 잃고 행위 자체에 잠식당해 파국을 맞게 되는 결말 또한 서로 닮아 있는것 같다. 그래서 레드릭 슈하트에게 더욱 정감이 가고 부던히 노력했지만 장애를 가진 딸아이는 치유될수 없을 정도의 상태로 변하고 웃음이 끊이지 않던 가정은 더 이상의 희망이 없는...파멸로 치달아가는 그의 운명에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작품 내내 구역중 가장 위험한 곳에 위치해 애써 외면하던 소원을 이루어주는 황금빛 구체를 향해 가는 레드릭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그는 그 황금빛 구체에 어떤 소원을 빌려 했을까...많은 생각이 들게 만든다.
이렇듯 익숙하지 않은...전에 없던 설정의 작품 [노변의 피크닉]이 여타 SF들의 첫번째 접촉과는 다른 가장 특이한 점은 바로 제목처럼 외계인이 지구에 접촉했다 사라진것이 외계인의 입장에서 노변의 피크닉을 즐기듯 지구로 소풍을 즐기다 온갖 쓰레기를 남기고 떠난것 일지도 모른다는 독특한 시각이다. 지구의 자원을 약탈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지구로 달려와 다짜고짜 총질을 해대는것이 아니라 이미 외계인은 지구는 그저 잠시 쉬었다 가는곳일뿐이고 비루한 인류가 그나마 쓰레기라도 차지하기 위해 지지고 볶는다는 탈 지구적, 전 우주적 시점인 것이다...-_-;;; 아...이 얼마나 냉소적인가!!!!
러시아 작품이라 해서 길고긴 이름을 걱정 했는데 그런거 하나 없었고, 철학적 은유나 메타포등 사전 지식 그런거 없이도 정말 작품 자체만으로도 재미있게 즐긴것 같다. 그저 작가가 이끄는대로 따라가면 SF, 공포, 서서히 무너지는 절망의 나락을 경험할 수 있다. 아..정말 이런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것에 감사하고 형제의 다른 작품도 꼭 보고 싶은 바램이다...설마 또 다시 29년이 걸리는건 아니겠지....-_-;;;;
덧 - 마지막 레드릭이 소원을 말하지 못한 이유는 수능금지곡 '링딩동', '암욜맨' 때문에 사고가 마비되서 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