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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충동
오승호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1년 2월
평점 :
하얀충동 (2021년 초판)
저자 - 오승호 (고 가쓰히로)
역자 - 이연승
출판사 - 블루홀6
정가 - 16500원
페이지 - 491p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당신은 죄 만을 미워할 수 있는가?
제일교포로 일본 유수의 미스터리와 문학상을 수상하며 가장 핫한 작가로 거듭나고 있는 '오승호'작가의 신작이 출간됐다. [도덕의 시간], [스완]에 이은 세 번째 국내 출간작으로 앞선 두 작품과 같은 선상의 사회파 미스터리이지만 이번 작품의 주역이 심리상담사, 카운슬러라는 점에서 캐릭터간의 대화를 통한 심리묘사와 긴장감의 수위는 앞선 작품들과 차원이 다른 급을 보여주는 듯 했다.
"저는 사람을 죽여보고 싶어요."
흥분이라고는 없는 담담한 선언이었다.
이쪽을 똑바로 향하고 있는 감정의 색이 없는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다.
"될 수 있으면 죽여 마땅한 사람을 죽이고 싶어요."
지하야는 대답을 신중히 골랐다. 그러나 그전에 아키나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선생님께서는 거슬리는 사람 없나요?"
"뭐?"
"제가 그 사람을 죽일 수 있게 허락해 주시지 않겠어요?"
_44p
어느날 중고등부 심리 카운슬러인 지하야를 찾아온 소년은 이렇게 말했다. 웃음기 없는 진지한 얼굴에서 튀어나온 말에 지하야는 한동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다만 소년의 발언이 장난이 아닌 진심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지하야는 상담을 통해 소년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무진한 노력을 한다. 하지만 소년조차도 자신의 이상 충동에 힘겨워 하고 있으며 무수한 고민 끝에 지하야를 찾아왔음을 밝힌다. 지하야는 고민한다. 순수한 살인 충동을 가진 고등학교 1학년생 소년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말이다.
언젠가는 사람을 죽일 것 같은 두려움에 떠는 소년. 소년은 살인에 이르는 병에 걸린걸까? 살인에 이르는 병에 걸린 소년을 위한 치료법은 뭘까? 시한폭탄 같은 소년을 계속 동급생들과 함께 둘 수 있는 걸까? 아직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소년을 격리해야만 하는 걸까? 살인 충동이라는 독특한 개성외에 소년은 평범한 학생과 다를바가 없다. 아니 오히려 다른 이들보다 섬세하고 똑똑하기까지 하다. 내가 만약 카운슬러 지하야라면 어떻게 해야 바르게 대처하는 것일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도 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는다.
한편, 세 명의 소녀를 강간하고 잔혹하게 신체를 훼손한 희대의 싸이코패스 범죄자가 15년 만에 감옥에서 출소한다. 그리고 일반인들이 군집한 사회에 갱생의 첫 발을 들인다. 은밀하게, 조용하게 몸을 사릴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범죄자는 보란듯이 일탈행동을 선보이다. 알루미늄 야구배트를 들고 쇳소리를 내며 거리를 활보하는 범죄자.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리고 새롭게 일어날 범죄를 두려워하며 공포에 휩싸인다.
범죄자와 함께 사는 마을사람들이 집단적 패닉에 이어 범죄자를 마을에서 내치기 위해 집단 행동을 벌이는 것은 자명한 일. 범죄자 추방 운동에 선봉자로 나서는 지하야의 남편을 보면서 지하야는 혼란에 빠진다. 범죄자와 자신이 카운슬링 하는 소년이 겹쳐 보이는 것이다. 끔찍한 범행으로 공공의 적이 되었지만 어찌됐던 죗값을 모두 치르고 출소한 범죄자를 우리는 편견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사회적으로 다양한 의견이 대립하는 첨예한 문제를 소재로 하는 사회파 미스터리로서 이번 작품 [하얀 충동]의 사례는 굳이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우리도 바로 얼마전 만기 출소한 극악한 범죄자의 귀가를 매스컴에서 생중계하고, 혹여 범죄자를 기습하는 상황이 발생할까 우려해 그의 신상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일개 경찰 중대가 일렬종대로 라인을 치고 경호하는 장면을 우리 눈으로 지켜보지 않았던가.
아이러니 하지만 그만큼 복지국가로서 나라가 잘 돌아가고 있다고 안심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이건 아니라고 통탄해야 할지 솔직히 모르겠다. 지하야의 마음이 딱 본인의 마음과 같다. 이성과 감정의 대립. 이성적으로는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사회가 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만약 내가 사는 집 근처라면 과연 본인은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심리적 갈등. 정확히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이기에 고민과 고뇌는 깊어만 간다. 사실 작품에서 제시하는 결과를 보면서 그런 결과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작가의 고민을 엿볼 수 있었다. 작품을 읽는 독자를 위해서라면 아마도 그럴 수 밖에 없었으리라.
여튼.... 극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이 카운슬러라서인지 대화의 수준이나 심리학에 기반한 비유들이 많았고 그로인한 긴장감의 조성, 섬세한 심리묘사가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대화체의 작품에서 쫀쫀한 긴장감을 유지하게 만든다. 언제 사람을 찌를지 모르는 소년과 지하야의 대화를 통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팽창한 풍선을 보는 듯한 아슬아슬함을 느끼게 된다. 사실 이번 작품의 반전은 웬만한 미스터리 팬이라면 충분히 눈치 챌만한 수준이다. 다만 중심이 되는 메인 반전보다 사이드 반전이 본인에겐 더욱 충격적이었으니 마지막 페이지까지 긴장의 끈을 놓치지 말기를 바란다.
'오승호'는 이 작품으로 '오야부 하루히코 상', '요시카와 에이지 신인상'등 일본의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사회파 미스터리로 받아낸 문학상이라는 말인데 작품을 읽어보면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간결한 문장과 주제의 시의성. 작품 전체의 완결성 등 장르문학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문학성을 말이다.
때묻지 않은 도화지 같은 순수한 충동. 그렇기에 더욱 위험하고 치명적인 [하얀 충동]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