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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재단
시마모토 리오 지음, 김난주 옮김 / 해냄 / 2020년 6월
평점 :
여름의 재단 (2020년 초판)
저자 - 시마모토 리오
역자 - 김난주
출판사 - 해냄
정가 - 15000원
페이지 - 262p
신체를 끊어버리듯 가혹했던 그 여름의 재단
[퍼스트 러브]로 강렬한 인상을 안겨준 '시마모토 리오'의 초기작품이 출간되었다. 아쿠타가와상 후보작이라고? 문학성도 겸비한 작품인가 보다. 라며 아무생각없이 책일 펴고 읽었다. 물론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미스터리 작품일거라 생각하면서 -_-;;; 그런데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한 여성의 절절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처음 생각했던 이야기가 아니었음에도 마지막 페이지까지 몰입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스토리나 소재 보다 일단 본인의 마음에 꽂힌 작가의 전작 위주로 작품을 읽는 취향 탓에 이번 같이 예상치 못한 독서를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경우 둘중 하나인데 취향이 아닌 작품을 꾸역꾸역 읽어야 하는 고역의 시간 이던가 아니면 이번 [여름의 재단]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던가 말이다.
나오키상 수상 작가 시마모토 리오가 그려낸 귀기 어린 걸작 심리소설
띠지만 보고 심리 스릴러 일거라 예상한 내가 바보였던가...-_-;;;; 좌우간 귀기는 모르겠다만 유년시절의 아픈 상처를 입은 한 여성이 성인이 되어서까지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픔에 몸부림치는 심정이 본인에게 까지 전달됐고 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이 가슴 절절하게 와닿았다.
술집을 운영하던 엄마를 따라 가게를 지키던 어린 치히로는 가게를 자주 찾던 단골 남성에게 성적으로 모멸감을 갖는 일을 당한다. 유년 시절의 기억은 트라우마가 되어 성인이 된 이후에도 남자와의 관계에서 거부감과 공포심을 느끼게 된다. 소설가가 된 치히로는 우연히 술자리에서 출판사 편집자 시바타와 만나게 되고, 시바타의 격의 없는 행동에 거부감이 일면서도 자신과 비슷한 내면의 어둠을 발견하고 끌리게 된다. 몇 번의 만남 속에서 시바타의 이상 행동은 치히로에게 다시금 상처를 남기고, 홀로 살고 있던 도쿄를 떠나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계신 고택에서 할아버지가 평생 모아왔던 고서적들을 재단 한 뒤 디지털화 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새로운 남자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는데....
여름의 재단 중 '재단'이 책의 등을 잘라낸 뒤 낱 페이지를 스캔한다는 재단일 줄은 미처 몰랐다. 어찌됐던, 책을 잘라내는 행위와 그 여름 시바타와의 만남으로 다시 받았던 지독한 사랑의 상처 때문에 치히로의 손 발이 잘려나가는 듯한 재단의 의미가 중첩되는 의미가 되면서 나아가 손발이 잘리듯 아픈 고통도 새로운 만남을 통해 치히로를 지독히도 괴롭히던 고통을 마침내 잘라 버리는 재단의 의미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마주하게 된다.
남자로서 치히로의 아픔과 시비타와의 비정상적인 만남을 비롯해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선술집에서 처음 만난 남자를 집으로 들여 몸을 섞는 심리를 100프로 이해할 순 없었다. 다만 그런 그녀를 향한 부모의 철저한 무관심,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에서 기인했다는 자책감, 행복을 갈구하지만 껍질에 쌓여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는 두려움 등등 그녀의 공포와 중압감은 너무도 선명하게 다가왔고 그렇기에 세상을 향해 한걸음을 내딛는 그녀의 발걸음이 더욱 크게 와닿았던것 같다.
모든게 떠나가 버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마음이 어디에도 없는 게 들여다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_178p
내 상각만 하고, 그런 걸 상대가 이해해주지 않으면 옳지 않다고 단정해왔다.
그러나 타인끼리 알 수 있는 건 사실은 별로 많지 않다.
_252p
앞서 말했지만 이 작품은 아쿠타가와상에 노미네이트 된 작품이라고 한다. 비록 수상은 못했지만 작가는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대중 작품의 집필을 선언했고 3년뒤 [퍼스트 러브]로 나오키 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문학적 작품성을 추구하는 아쿠타가와상, 대중적 작품성을 추구하는 나오키상. -_-;;; 그동안 일본 소설을 꽤 읽어 오면서도 두 상의 차이를 지금에서야 알았다. 허허...
[퍼스트 러브]와 같은 유년시절의 성적 트라우마라는 기본 골격은 같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두 작품을 비교하면서 읽어도 좋을 것 같았다. 책을 덮은 뒤에도 굉장히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었다. 밀도 있는 심리 묘사와 성장소설의 감동을 주는 강렬하면서도 부러질듯 위태로운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