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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변화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9년 6월
평점 :
사소한변화 (2019년 초판)
저자 - 히가시노 게이고
역자 - 권일영
출판사 - 비채
정가 - 13800원
페이지 - 410p
나를 나로 규정짓는 조건
사회파 제왕 '히가시노 게이고'가 또 돌아왔다. 안그래도 내는 작품의 속도도 빠르고 출간된 작품도 많은데 2005년 [변신]으로 출간 후 14년만에 출판사를 달리하여 새로운 이름, 새로운 옷을 입고 출간되니, '게이고'월드는 끝도 없이 확장되는구나 -_- 어쨌던, 1994년작으로 15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현재의 미스터리 트렌드와 비교하여 위화감이 없고 오히려 '게이고'만의 서스펜스가 폭발하고 있으니 실로 대단한 작가임엔 분명한듯...
부동산에 들이닥친 권충강도는 사람들을 위협하며 돈가방에 돈을 담으라고 종용한다. 우연히 강도사건에 휘말린 청년 나루세는 가만있으라는 강도의 말을 어기고 도망치려는 어린 소녀를 목격한다. 강도 역시 소녀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권총의 총구가 소녀를 향하는 순간....몸을 날려 소녀를 보호한 나루세....탕!.....정신을 차린 나루세는 자신이 병원에 있음을 깨닫는다. 오랜시간 병원에서 의사들의 관심속에 재활치료를 하던 나루세는 자신이 강도가 쏜 총에 머리를 얻어맞아 죽을뻔했고, 가까스로 때마침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한 청년의 뇌를 이식받아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사고를 담당하는 뇌의 일부분을 타인의 뇌로 이식받은 나루세의 수술 후 경과는 놀랍도록 좋아졌고, 마침내 퇴원하여 집에 돌아가게 된다. 사고전부터 교재해오던 메구미와의 감격스러운 재회이후 언제나 그렇듯 메구미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던 나루세는 전과는 다른 메구미의 모습에 혼란스러워 하는데......
내가 나일 수 있는 이유....이번 작품에서 '게이고'가 던지는 질문은 나를 나로 규정짓는 조건은 무엇인가? 라는 정체성의 탐구이다. 사실 나온지도 오래된 작품이거니와 출판사에서 공개한 플롯만으로도 작품 전반의 줄거리가 충분히 파악되리라. 장르 영화, 소설 등등 매체에서 수없이 사용되었던 장기이식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제목이 기억나지 않지만 심장이식 수술을 받은 주인공이 점차 귓가에 들리는 정체불명의 목소리를 듣고 범죄를 저지르는 내용의 작품을 읽은 기억이 나는데 당시 작품을 읽고 사람의 영혼이 깃든 곳이 심장이라는 의미를 담은 작품이라 생각했었던것 같다. 하물며 심장만 바꿔도 영혼이 바뀌느니 어쩌느니 하는데 사고와 기억과 논리를 관장하는 뇌가 타인의 뇌로 바뀐다니....-_-;;; 외면만 그대로면 뭣하나 내면은 쌩판 남인것을....이건 다른이의 혼령이 씌인 빙의와 다름 없는것 아닌가...
소심하고 평화주의자였던 나루세가 수술 이후 점차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처럼 광폭해지고 분노조절장애로 극단적 행동을 서슴치 않는 모습을 보면서 뇌를 제공한 도너의 정체와 나루세가 겪게 되는 혼란이 불을보듯 뻔하게 예상되는데 이런 진부하다면 진부한 설정임에도 시시각각 더해가는 서스펜스와 페이지를 순삭케 만드는 극강의 가독성은 오히려 '게이고'의 여타 작품들보다 뛰어나니..이 무슨 아이러니한 상황인지 모르겠다만, 점차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는 자의식과 강렬한 폭력성으로 자신을 독점하는 타의식의 대립과 그사이에 휘둘리는 나루세의 혼란스러운 심리가 휘몰아치면서 강렬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스토리, 반전, 결말이 전부 예상되면서도 이렇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니....이런 경험은 또 처음인듯....
내 머리속을 점거하고 있는 의식의 충동에 의한 행동은 나의 책임인가? 실체 없는 타인의 책임인가?...실제로 실현가능한 이야기인진 모르겠으나 날로 발전해가는 의학기술로 볼때 언젠가는 논란이 될 수도 있는 문제이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24인의 인격을 가진 '빌리 밀리건'이 무죄를 선고 받았듯 나루세의 경우도 만약 법정에 서게된다면 무죄를 선고 받을 수 있지 않을까...생존을 위한 마지막 방편이었겠지만 누군가가 내머리속을 휘저으며 서서히 주도권을 쥐어간다고 생각했을땐 너무나 불쾌하고 몸서리처지게 싫을것 같다. 이제 14번째로 읽는 '게이고'의 작품인데, 아직도 읽지 않은 수십편의 작품이 남아있으니...ㅎㅎ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덧 - 비슷한 설정으로 인간의 뇌하수체와 생식기를 개에게 이식한 뒤 벌어지는 일을 그린 러시아 풍자SF '미하일 불가코프'의 [개의 심장]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