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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멀리 사라져버린
루 버니 지음, 박영인 옮김 / 네버모어 / 2019년 5월
평점 :
품절
오래전멀리사라져버린 (2019년 초판)
저자 - 루 버니
역자 - 박영인
출판사 - 네버모어
정가 - 15800원
페이지 - 557p
남겨진 자가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
여기 강도살인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실종된 언니를 찾아 헤메는 간호사도 있죠.
자, 오늘은 누군가를 잃고 살아남은 무게를 짊어지고 사는 남녀를 만나보겠습니다.
네버모어의 신작 [오래전 멀리 사라져버린] 입니다.
*메커비티상 최우수 작품상
*에드거상 최우수 작품상
*앤서니상 최우수 작품상
*배리상 최우수 작품상
영미 유수의 추리/범죄 문학상을 휩쓸며 미국을 뒤흔든 미스터리 화제작이 네버모어에서 출간되었다. 육중한 볼륨과 화려한 수상내역으로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 치솟던중 출간과 동시에 작품을 영접했다. 지울 수 없는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두 남녀를 통해 상실의 아픔과 고통에 힘겨워하고, 남겨진자가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에 짖눌려 신음하는 모습을 보면서 진정한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깊이있고 진중한 작품이었다.
[26년전]
(와이엇, 15살)
오클라호마시티...여름, 블록버스터의 계절, 쇼핑몰과 함께 있는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와이엇은 일과를 모두 마치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이 있던 방의 문을 두드리전 사람이 영화관 관리자 빙엄씨가 아닌 가면을 쓴 권총강도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얼마후...가면과 스타킹을 뒤집어쓴 3명의 강도에 이끌려 영사실 바닥에 엎드린채 숨죽이던 6명에게 곧이어 지옥의 심판이 내려진다. 탕....탕....탕...탕....탕.......경찰에 의해 잃었던 정신을 차린 와이엇은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후두부에 총상을 입고 참혹한 시신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오로지 와이엇만이 유일한 생존자였던 것이다......
"왜 난 여기 이렇게 살아 있고, 다른 사람들은 전부 죽은 거죠?"
(줄리애나, 12살)
마을에서 열린 박람회장에 언니 제네비에브와 함께 구경온 줄리애나는 수많은 사람들과 떠들썩한 분위기, 풍선터트리기 게임으로 딴 핑크팬더 인형을 품에 안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날은 점차 어둑해지고, 13살부터 마약을 흡입해온 언니는 또 약생각이 났는지 줄리애나에게 10달러를 건네주고 15분뒤에 돌아온다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인파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그게 줄리아나가 언니 제네비에브를 본 마지막 순간이되버렸다....
"시끄러워. 15분이면 돼. 알았지? 잠깐이라도 여기서 좀 벗어나야겠어."
[26년후, 현재]
(와이엇, 41살)
과거의 트라우마를 영리하게 숨긴채 탐정업을 하던 와이엇은 절친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는 밟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던 고향 오클라호마시티를 십수년만에 방문한다. 절친의 의뢰내용은 5살 딸과 함께 힘겹게 살아가던 이혼녀 캔디스가 우연히 유산으로 라이브홀을 인수하게 되었고, 그 홀을 인수한 직후부터 누군가로부터 해꼬지를 당하고 있으니 그 누군가를 찾아내 중지시켜달라는 것이다. 처음엔 가벼웠던 해꼬지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악랄하고 위험해지면서 와이엇은 캔디스의 주변인물들을 만나며 범인을 찾아나서고, 그런 정신없는 와중에도 와이엇의 뇌리를 파고드는 그날의 처참한 기억이 와이엇을 괴롭히는데.....
(줄리애나, 38살)
26년간 끊임없이 언니를 찾아 헤메는 줄리애나는 병원의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그날의 기억을 수없이 되뇌이고 그 안에서 실종된 언니의 실마리를 찾기위해 노력한다. 그러던중 언니가 줄리애나를 위해 따낸 핑크팬더를 건네던 풍선게임지기의 소식을 듣게되고, 망나니로 소문난 그를 만나기 위해 홀로 그가 자주찾는 술집으로 향하는데.....
참혹한 범죄에 희생당한 가족이 그 아픔을 이겨내지 못해 삶이 피폐해지고 점차 망가져가는 모습을 그리다가 종국에는 그 절망을 집념으로 승화시켜 살인자에게 복수하는 식의 미스터리 스릴러는 그동안 다수의 작품으로 만났던것 같다. 하여 이 작품의 다소 강렬한 도입부와 이후 등장인물들의 행보를 보며 이 작품도 역시 여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사건을 잊지 못한 관계자의 끈질긴 수사로 인한 단죄로 마무리되는 작품일 것이라 생각했다. 허허...그러나 보기좋게 나의 예상은 빗나가 버렸다. 이 작품은 다른 작품들과는 다른 좀 더 깊이있는 정서를 다룬달까...원죄 자체에 포커스를 맞춘다기보다는 그 예상치 못한 범죄로 남겨진 자에게 촛점을 맞추는 작품이었다. 그들 내면의 고통과 갈기갈기 찢겨버린 마음의 상처가 26년이란 시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우리에게까지 생생하고 처절하게 다가오는...심오하면서도 서정적이고 슬프고도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이 작품이 유수의 범죄 문학상을 석권한 것은 이 끝을 알 수 없는 깊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작품은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발생되었던 두 건의 실제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1987년에 벌어진 레스토랑 체인에서 발생한 살인사건과 1981년 주정부 박람회에서 2명의 소녀가 사라진 사건을 각색하여 그려낸다. 작품에서 그리는 두 건의 사건이 실제 사건을 얼마나 충실히 재현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작품에 대한 현실감과 무게감은 증가하니, 작품을 더욱 공감하고 몰입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어찌됐던...26년간 철저히 외면해오던, 26년 내내 끈질기게 집착해오던...두 남녀는 생각지도 못한 순간, 예상치 못한 우연으로 그들을 끈질기게 붙들고 있던 비극적 사건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극적 단서를 얻게된다. 그리고 흐릿하게 감춰져있던 진실이 비로소 명백하게 드러나는 마지막 결말의 순간....다른 의미로 또 한번 놀라게 된다. 우리가 갖고 있던 고정적 관념을 깨끗이 무시하는 결말이 주는 울림에 말이다. (그러나 이 결말로 인하여 호불호가 갈릴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기억에 갖혀 헤어나오지 못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남겨진 자들의 죄책감에 공감하고, 흐릿한 기억의 단서를 따라 사건을 되돌아보며 어지러져 있던 퍼즐을 맞춰가는 추리의 재미를 선사한다. 치밀한 플롯과 1인칭으로 전개되는 과감하고 독창적인 서사는 캐릭터에 오롯이 감정이입하게 만든다. 언제나 웃는 얼굴로 위트와 재치 넘치는 농담을 던지는 와이엇의 미소 뒤에 가려진 진짜 얼굴과 마주하는 횟수가 늘어나는 만큼 이 작품이 주는 여운의 깊이는 더욱 더 깊어지리라....생각해보면 이 작품에 앞서 네버모에에서 출간했던 작품 [네온 레인]과 더불어 범죄를 통해 인간이 받게되는 비극을 함축적 은유로 아름답게 그려내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오래전 멀리 사라져버린 그들을 잊고 족쇄같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그들 자신의 인생을 위해 살기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