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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4월
평점 :
편지 (2019년 초판)
저자 - 히가시노 게이고
역자 - 권일영
출판사 - RHK
정가 - 14800원
페이지 - 481p
본인 뿐만 아니라 본인의 소중한 가족까지 완전히 망가트려 버리는 일
RHK출판사의 계약종료임박 '히가시노 게이고' 리커버 시리즈의 이번 주자는 [편지]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름 조차도 모르던 작가에 출간된 작품도 백 편이 훌쩍 넘어가니 리커버가 됐던 베스트셀러건 내겐 전부 생소한 작품이다. -_-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인데, 2006년 발표되어 출간 한달만에 130만부가 팔려나간 괴물같은 작품이고, 2006년 국내 초역 후 13년만에 새로운 옷으로 다시 세상에 나왔다. 소재, 장르 가릴것 없이 다양한 이야기를 선보이는 작가의 이번 작품은 살인자 형을 둔 동생이 세상에 나와 범죄자의 가족이라는 지울 수 없는 꼬리표를 달고 편견과 차별의 대상으로 겪게되는 고난의 이야기를 그린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동생을 위해 일찍부터 학업을 포기하고 몸을쓰는 고된 직업으로 생활을 꾸려나가던 츠요시는 동생 나오키의 대학등록금 마련을 위해 해서는 안될 짓을 저지르기로 마음먹는다. 이삿짐 센터 알바를 하면서 눈여겨 봤던 홀로사는 할머니가 사는 부잣집에서 돈을 훔치려는 것이다. 집에 전화를 걸어 받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창문을 뜯어 집안에 침입한 츠요시는 불단이 모셔진 서랍에서 두둑한 돈봉투를 발견하고 품속에 넣고 조용히 집을 나가려 한다. 그런데 츠요시의 마음을 잡은 것은 불단방을 지나가며 본 식탁위의 군밤 한봉지...동생이 군밤을 유달리 좋아하는 것이 생각난 츠요시는 발길을 돌려 식탁의 군밤을 집어드는데, 갑자기 안방에서 나오는 주인 할머니와 눈이 마주치고...비명을 지르며 전화를 거는 할머니를 말리려던 츠요시는 얼떨결에 갖고 있던 드라이버로 목을 찌른다. 범죄를 저지른 당일 경찰에 붙잡힌 츠요시에게 징역 15년형이 선고되고, 졸업을 앞둔 고등학생 나오키만 세상에 홀로 남겨진다. 안그래도 어려운 집안사정으로 힘겹게 살던 나오키에게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꼬리표가 추가되고...홀로 세상의 냉혹한 시선과 싸워야 하는 나오키의 운명은....
강력범죄가 아니라 단순 범죄만으로도 범죄자의 신상이 밝혀진것도 아닌데 주위의 시선이 두려워 살던 곳을 떠나는 경우를 종종 시사프로그램을 통해 본 것 같다. 하물며 단순절도 같은 (성범죄는 논외로 하더라도) 경우도 그런데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살인사건의 가해자가 나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나의 친척...가족...나의 친형이라면...과연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까?...살인자의 동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오키의 인생이 철저히 망가져 버리는 현대판 연좌제의 모습을 보면서 어찌보면 작가는 이를 통해 피해자와 그의 가족 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주변까지 철저히 파괴시켜버리는 범죄라는 행위 자체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가 깔려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너무 비약인가...-_-;;)
츠요시의 징역형이 확정된 순간부터 나오키의 친구들과 선생들의 분위기는 미묘하게 변화하고, 집세를 낼 수 없어 집에서 쫓겨난 나오키는 고등학교만이라도 졸업하기 위해 형의 일을 숨긴채 식당 아르바이트를 한다. 하지만 감추려하면 할수록 범죄자의 가족이라는 족쇄는 끊임없이 나오키를 따라오고 결국 꿈을 잃고 희망을 포기한채 고된 하루벌이 일을 전전하는데...그냥 그렇게 인생의 실패자로 끝났다면 이렇게 안타깝진 않았으리라...얄궂게도 재능은 왜이리 타고 났으며, 얼굴은 또 왜 그리 잘생겼고, 왜그리 근면 성실한건지...-_-;;;; 전도유망한 청년이 어떻게던 연좌제의 늪을 벗어나려 혼신의 힘을 들여 고군분투 하지만, 인생을
뒤바꿀 결정적 순간에서 나오키에게 날아오는 편지 한통...감방에 있는 츠요시가 보내는 옥중 편지 한통이 산통을 깨면서 그동안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다. 악마가 보내는 편지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최적의 타이밍에 전달되는 편지....그래서 제목이 [편지]인 것인가...
물론 작가의 가학적 성향이 의심되는 악질적 타이밍에 전달되는 편지 때문에 제목이 [편지]는 아니다. 작품 전반에 걸쳐 가해자와 피해자의 속죄와 용서에 대한 의문이 이 [편지]를 매개로 끊임없이 독자에게 물음을 남기기 때문이다. 자신이 저지른 일도 아니고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로 인생이 꼬여버린 나오키에게 얼마나 더 오랜 시련을 겪어야 사회는 나오키를 받아 줄 수 있을까?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규정할 수 있을까? 가해자가 얼마나 속죄해야 가해자에 대한 분노의 마음을 놓을 수 있을까?...죄와 용서...머라 딱히 규정지을 수 없는 이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가 나오키의 인생을 통해, 츠요시의 옥중편지를 통해 평행선을 달리듯 어느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담담하게 그려진다. 작품의 열린결말 역시 속죄와 용서라는 질문을 독자 개개인의 생각에 넘기는 작가 나름의 답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회에 깊숙히 자리잡은 차별과 편견에 대해 이토록 처절하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게이고'만의 천부적 스토리텔링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된다. 어찌보면 진부하고 어찌보면 신파적이고 통속적인 이야기임에도 오백여 페이지가 순식간에 사라지는건 대중의 코드를 날카롭게 캐치하고 대중의 입맛에 맞는 서사를 통해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게 만드는 필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리라. '히가시노 게이고'의 [죄와 벌]이라는 말이 절로 이해가 되는...실로 묵직한 휴먼 드라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