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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곡
윤재성 지음 / 새움 / 2019년 3월
평점 :
화곡 (2019년 초판)
저자 - 윤재성
출판사 - 새움
정가 - 13000원
페이지 - 368p
화마에 모든 것을 잃은 남자
무엇이든 태워 버리는 방화범
언젠가 인간이 느끼는 최고의 통각 순위를 본적이 있는데, 그중 화상치료가 최상위쪽에 랭크된 것을 본 기억이 난다. 피부와 근육의 수분을 빼앗아 수축되고 엉겨붙는데다 수포와 진물은 쉴새없이 흐르고, 작열감과 고통은 완치 이후에도 환상통으로 환자를 괴롭힌다. 지옥같은 드레싱과 치료를 마치고 붕대를 풀고 났을때 마주하게 되는 처참한 흉터는 남아있던 마지막 자존감 마저 무너트릴 정도로 처참하다. 최악의 고통과 완치할 수 없는 상흔을 남기는 화재...그런의미에서 이 화재를 인위적으로 일으키는 방화범은 묻지마식 범죄자중 가장 악질이고 가장 최악의 범죄자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것을 앗아가고 시꺼먼 재만 남겨놓는 최악의 재난 화재...이 화재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화상으로 얼굴을 잃고, 남은것은 시든때도 없이 찾아오는 극심한 고통과 발작...그리고 알콜중독...이 저주받은 남자의 마지막 목표는 화재를 일으킨 방화범을 잡는것 뿐이다. 모든 것을 잃은 남자의 인생을 건 마지막 대결이 펼쳐진다.
3년째 경찰을 지망하는 고시생 백수 형진은 남다른 의협심으로 오늘도 거리를 돌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민다. 사람들을 돕고, 알바를 마치고 늦은저녁 살고 있는 원룸으로 귀가하던 형진은 벽앞에서 무언가를 뿌리고 있는 의문의 남자를 목격한다. 수상하게 여긴 형진은 남자를 불러새우고, 그에게 다가가려는 찰나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액체가 얼굴과 몸에 흩뿌려진다. 비릿한 피냄새와 함께 풍기는 시너냄새...순간 마스크를 벗은 남자의 입에서부터 시작된 불길이 형진의 온몸을 덮친다. 온몸에 중증화상을 입고 수일간 혼수상태에서 극적으로 깨어난 형진에게 불에 전소된 원룸과 안에서 자고 있던 여동생의 죽음이란 비극적 소식이 전달되고, 괴로움에 미칠듯 발광하던 형진은 경찰서로 뛰쳐나가 방화범의 방화사실을 전하지만 돌아오는건 미친놈 취급 뿐이다. 복수의 칼을 갈며 자신의 손으로 방화범을 잡겠다며 서울시내 화재사건을 따라다닌지 8년...화재보험금도 떨어지고 노숙자 신세가 된 형진은 때때로 찾아오는 작열통을 잊기 위해 깡소주를 들이키는 알콜중독자가 되었다. 그런 어느날 흉물스러운 화상자국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는 형진에게 나타난 미모의 여성...그녀는 자신을 사회부 기자라고 소개하는데.....
입에서 불을 뿜는 미치광이 방화범과 복수심에 불타는 형진...그리고 8년만에 발생한 대형 화재사건....그놈이 다시 나타났다!!
라고...미스터리한 방화범과 형진의 극한 대결이 펼쳐지리라 생각했는데, 그것만으로는 모자라다 생각했는지 의외의 발런들이 추가투입된다. 불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조절하지 못해 반복적으로 방화를 저지르는 병적방화범에 모종의 음모를 세우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방화를 저지르는 목적방화범까지...확실히 1:1 대결보다 1:2 대결로 확장된 스케일과 스릴감이 배로 늘어나는건 사실이다. 여기저기 동시에 대형화재가 터지고 형진과 특종을 위해 형진을 돕는 사회부기자 정혜가 이를 막기위해 이리뛰고 저리뛰고 고군분투하기 때문이다. 허나 문제는 비중이다. -_- 출판사에서 공개한 스토리나 광고문구로는 형진과 미친방화범의 치밀한 두뇌싸움이 펼쳐진다고 써놨지만 막상 까보면 계획방화범의 비중이 훨씬 높다. 병적방화범과 계획방화범의 비율이 3:7 정도인데 어차피 같은 방화범인데 문제될게 있냐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두 방화범의 성질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그에 따른 장르 자체도 갈린다. 병적방화야 집요한 추적이 주를 이루는 스릴러인 반면, 계획방화는 정치가의 더러운 음모로 인한 정치깡패 소위 조폭이 연루되면서 하드보일드에 가깝게 흘러간다. 머...스릴러와 하드보일드 두가지 재미를 모두 만족하는 뛰어난 작품인건 맞는데, 막상 책을 펴들던 내가 기대했던 스릴러와는 달리 조폭물이 펼쳐지니 살짝쿵 당황스러웠달까...-_-
하지만 초반의 기대와 달랐다는 불만을 덮어버릴 정도로 재미있었던것도 사실이다. -_- 방화범을 잡기위해 모든걸 내던졌지만 세상의 멸시에 불을 싸지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는 형진의 혼란스러운 감정도 충분히 이해되고, 방화범을 추적하면서 외면의 상처를 극복하고 감춰져 있던 자신의 진면목을 발견하고 인생의 새로운 목표를 잡아 성장해 나가는 모습도 충분히 설득력있었다. 단순히 방화범을 잡는것 외에 이런 형진의 내면적 성장스토리가 이야기에 깊이를 더해주고 캐릭터에 감정이입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한다. 물론 개성강한 캐릭터와 빌런들은 말할것도 없을테고...전체적으로 재미있게 읽었지만 몇가지 아쉬움이 남는데, 첫번째로 미스터리한 방화범의 정체...이건...[X맨] 뮤턴트인가?...현실성이 확 떨어지면서 막바지까지 가져온 긴장감을
여지없이 뭉개버린다...ㅠ_ㅠ...한가지 더, 한국영화 결말에 꼭 맥락없이 감동코드를 집어넣는게 관행처럼 반복되는데, 여기에도 막바지 조폭과의 집단대치, 방화범과의 마지막 결투 장면에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감동 비스무리한 무리수를 던지면서 쌓아뒀던 점수를 깎아 먹는다...
무려 대통령을 넘보는 야욕의 정치가의 더러운 흑막...물불 가리지 않는 정치깡패의 악랄한 범죄행위...입에서 불을 뿜는 미스터리한 방화범...이 모두와 맞서 외롭게 투쟁하는 혈혈단신 붕대맨 형진의 혼신의 추적이 타오르는 불꽃처럼 뜨겁고 스피디하게 펼쳐진다. 눈에 띄는 반전보다는 처음의 긴장을 끝까지 묵직하게 끌고나가는 우직한 스릴러였다. 데뷔후 두번째 작품이라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원숙한 완성도를 보이는 작품이었고 그래서 차기작이 더 기대되는 작가인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