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의 어른입네 하며 더러운 쌍판 내밀던 양아치들을 시원하게 밟아주신 영미 누님.

난수표나 미해독 문자 같은 현대시들을 읽을 때면 자괴감을 느끼곤 했다. 그와 달리 최영미 시인의 작품은 화살처럼 날아와 가슴에 박힌다. 그냥 ‘꽂혔다‘.

기성출판사들이 출간을 꺼려 최영미 시인이 직접 출판사를 세워 펴낸 시집이다. 부디 흥하길!

˝목숨을 걸고 뭘 하진 않았어요
(왜 그래야지요?)
서른다섯이 지나
제 계산이 맞은 적은 한 번도 없답니다!˝
- 밥을 지으며

˝장미넝쿨이 올라온 담벼락에 기대어
소나기 같은 키스를 퍼붓던 너.
...
침대가 작다고 투덜대는 내게 너는 속삭였지

사랑한다면 칼날 위에서도 잘 수 있어˝
- 마지막 여름 장미

˝싸움이 시작되었으니
밥부터 먹어야겠다.˝
- 독이 묻은 종이

˝보석처럼 빛나지는 않지만,
너희들은 서로의 가슴에 별이 되거라˝
- 여성의 이름으로

˝인생은 낙원이야.
싫은 사람들과 같이 살아야 하는 낙원.˝
- 낙원

˝길이 보이지 않아도

나는 다만 이 햇살 아래
오래 서 있고 싶다˝
- 1월의 공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흔일곱 살 노인이 며느리 사쓰코에게 사랑받고 싶어한다. 그녀가 자신을 지배하길 원하며 그 지배를 통해 쾌감을 얻고자 한다. 다소 쇼킹한 소재. 아들의 정혼대상(줄리엣 비노쉬)과 예비 시아버지(제레미 아이언스) 사이의 사랑을 다룬 영화 ‘데미지‘와 묘하게 겹친다. 이 소설이 그 영화보다 30년 앞서 나왔다.

부유하나 병원과 약에 잔뜩 신세를 진 채 말년을 보내는 노인은 일기를 쓴다. 일기에 자신의 일상 말고도 아무에게나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남긴다. 바로 며느리를 향한 심정. 급전이 필요하다는 딸의 부탁은 매몰차게 거절하지만 며느리에게는 300만 엔짜리 캐츠아이 반지를 덜컥 사주기도...

˝어머니의 아들인 내가 손자며느리의 매력에 빠져 그녀에게 페팅을 허락받는 대가로 300만 엔을 투자하여 묘안석을 사 주는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어머니는 아마 놀라서 기절했을 것이다.˝

˝- 가끔 기모노를 입는 것도 나쁘지 않군. 귀고리나 목걸이를 하지 않은 게 세련됐구나.
- 아버님 꽤 센스 있네. ˝

˝내게 하느님이나 부처님이 있다면 사쓰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쓰코의 입상 아래 묻히는 것이 내 소원이다.˝

˝- 자네 발바닥을 뜨게 해줘. 그렇게 해서 이 백당지 색지 위에 주묵으로 발바닥 탁본을 뜰 거야.
- 그걸 뭐에 쓰게?
- 그 탁본을 바탕으로 사쓰짱 발을 본뜬 불족석을 만들거야. 내가 죽으면 뼈를 그 돌 아래 묻을 거야. 그게 진정 대왕생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 시 ‘소년‘에서

윤동주.
전태일에 앞서 왔다가 떠나간 아름다운 청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순 초중반인 여성 화자는 요양 보호사로 일한다. 딸은 서른이 넘었고 대학교 시간강사다. 어머니인 화자는 어머니로서 딸애가 결혼할 생각은 없 ‘여자 파트너‘를 데려와 집에 같이 머무는 게 마음에 안든다. 딸의 연인임이 분명한 ‘그 애‘는 더 거슬린다. 화자는 정상가족을 구성하지 않고, 해고된 시간강사를 위해 발벗고 나서는 딸이 요양원에서 자기가 돌보는 한 여성 환자처럼 늙게 될까봐 두렵다. 독신으로 살며 입양아와 이주노동자를 위해 헌신하다가 이제는 치매에 걸려 찾아오는 가족 하나 없는 노인 말이다.

온당한 비교인지 모르겠는데, 그리고 뒷북일 수 있는데 소설 ‘82년생 김지영‘에 쏠린 주목이 이 책으로도 많이 옮겨가길 바란다. 퀴어, 정상가족, 여성의 이중노동/그림자 노동, 이해와 연대 등 여러 이슈가 녹아 있는 소설이다. 예순 넘은 여성의 심리를 자연스럽게 그렸고 그녀의 관점과 행동이 미묘하게 변화하는 것도 설득력 있다. 의미 있으면서도 잘 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너희가 가족이 될 수 있어? 어떻게 될 수 있어? 혼인 신고를 할 수 있어? 자식을 낳을 수 있어?

엄마 같은 사람들이 못 하게 막고 있다고는 생각 안 해?˝

˝이건 이해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에요. 이해해 달라고 사정해야 하는 문제도 아니고요. 이건 그냥 권리잖아요.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갖는 거요. 그리고 사생활은 일과 별개예요. 제가 요구하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요? 일과 사생활을 구분해 달라는 것. 강사의 기본적인 권리를 지켜 달라는 것. 그건 너무 당연한 거잖아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환경 생태 분야의 고전 반열에 오른 도서. 대학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책을 이제야 읽었다. 몇 년 전 헌책으로 구했는데 한참 묵혔다가 드디어 펼쳤다. 아무래도 5월 초 풀무질 서점에 다녀온 영향 때문일 것이다. 풀무질서점은 90년대에 이 책이 널리 알려지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스웨덴 출신 여성학자인 지은이는 1975년 히말라야 고원에 자리잡은 ‘라다크‘를 방문했다. ‘작은 티베트‘로 불리는 이곳은 자급자족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였다. 지은이는 16년 동안 라다크에서 지내며 평화롭고 깨끗한 곳이 서구식 산업주의의 개발 아래 파괴되고 오염되는 걸 지켜보았다.

˝내가 라다크에 온 첫해에는 전에 본 일도 없는 어린아이들이 내게 달려와서 살구를 손에 쥐여주곤 했다. 지금은 낡은 서양옷을 입은, 디킨스 소설에 나옴직한 초라한 어린아이들이 외국인들에게 빈 손을 내밀며 인사를 한다. 그들은 이제 라다크 아이들에게 새로운 주문처럼 된 ˝한닢만, 한닢만˝이라는 말을 하며 졸라댄다.˝

˝여기는 가난 같은 건 없어요. - 체왕 팔조르, 1975년

당신들이 우리 라다크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린 너무나 가난해요. - 체왕 팔조르, 1983년˝

지은이는 라다크의 전통적 생활과 경제에 지속가능한 삶을 이어나가게 하는 지혜가 있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현대 산업문명의 폭력성을 거부하고 자립경제, 소박한 소비, 태양에너지 같은 적정기술 사용 등을 대안으로 모색해 가는 운동을 벌인다. 책 제목처럼 ˝진정한 미래는 오랜 옛 지혜 속에 있다˝(옮긴이의 말 인용)는 관점을 견지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돌아가고 싶어도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나 올바른 미래를 찾는 우리의 노력은 불가피하게 자연-인간본성을 포함하는-과의 더 큰 조화를 이루는 어떤 근본적인 패턴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상 수천년 동안 존재해왔던 가치-자연 질서 속에서의 우리의 위치, 우리 서로서로의, 그리고 우리와 지구 사이의 뗄 수 없는 연관성을 알아보게 하는 가치를 재발견하는 일이다.˝

신음하는 지구와 초만원인 대한민국 수도권을 두고 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당장할 수 있는 일이 욕심을 줄이고, 덜 쓰고, 일회용품 쓰지말고 다회용품 사용하기인 건 안다. 일단 가까운 곳부터 살피며 살겠다.

* 지은이가 한국어 번역본 출판을 녹색평론사에 다시 허락하지 않고 중앙일보 계열사로 갈아탄 건 정말 ‘깬다‘.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를 생각하자면 역대급 반전이 아닐 수 없다. 녹색평론사 출간본은 절판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