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수첩 : 사진 명작 수첩
발 윌리엄스 지음, 박우정 옮김 / 현암사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물적 본능에 의하면 녀인들은 대개 시각말고 분위기에 보다 홀린다고들 하지만 나님은 욕심쟁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시각에 분위기까지 더한 모둘 충족시켜주는 그런 숭고(?)한 대상이나 행위를 좇길 좋아(만)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예술 작품 감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그 장소로는 미술관이 제격 - 여기에 '(잘 다려진) 짙은 단풍색 면바지가 어울리는 고운 뒤태'를 가진 남자와 함께라면 더더욱 - 이겠으나,



딱히 데이트라는 뚜렷한 목적이 있지 않는 이상은 뭐, 술과 안주가 근사한 곳을 보다 찾게 되는지라, 풍요로운 문화 생활이란 곧잘 곤두박질만 칠뿌우우우우우우우웅 뿡!뿡! 망할 커플들 뿡!뿡! 이다!... 라는 방식으로 귀결되는 모자란 생각을 봐서라도 고상하게 예술작품을 보는 눈이라도 키워야할텐데... 라는 참에 들어온 명작수첩 시리즈는 정말 괜찮은 녀석들입니다, 여러분. ('나는 아니야'라고 애써 마음 먹는 그대의 얼골이 여기 모니터 위로 살며시 떠오르네. RUDE. RUDE)



궁상맞게 혼자 이 전시 저 전시 기웃거리다 커플 지옥에 멘붕오지 마시고 개당 15,000에 이 책 사보세요. 책 구경 좀 시켜드리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로저발렌, <쌍둥이 드레지와 캐시>, 서트란스발, 1993
p.86,87/ 명작수첩-사진/ 현암사



쌍둥이 형제 드레지, 캐시의 완강하고 경계 가득한 시선. 연출된 것임에 분명하지만, 작가와 모델의 호흡이 굉장합니다. 빈곤층으로 보이는 이들에게서 '품격'이 느껴진다는 건 정말정말 기분좋은 충격입니다. 짝짝짝!


▲테오 판 두스뷔르흐, <부조화의 역구성XVI>, 1925
p.136,137/ 명작수첩-미술/ 현암사


대각선과 수직선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요. 테오 판 두스뷔르흐는 "각각의 불필요한 선, 잘못 자리잡은 선, 생각이나 조심성 없이 배치한 색은 모든 것, 즉 영혼을 망친다" 라고 말했다고 하지만 무지한 저는 작가의 고약한 강박 증상의 하나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베고 자야 딱 좋을 것만 같은 두껍고 어려운 예술사 교과서에 비해 책장이 시원하게 넘어갈 뿐더러, 작품의 종류, 주제 등으로 분류가 깔끔하고, 각기 달린 부연설명은 감상의 포인트를 명쾌하게 제시합니다. 액자로 걸어도 좋을만큼 인쇄의 질도 나쁘지 않습니다. 벼락치기로 걸작 공부하고 싶은 이들에게 딱 권합니다. 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이 은인입니다
홍순재 지음 / 씽크스마트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면에 줄줄 풀어 놓은 지난 날이 마치 삼십여년 전쯤은 된 것처럼 풀어놓은 이 사람 홍순재씨로 말할 것 같으면 올해로 나이가 꼴랑, 에게, 고작, 서른 다섯이다. 우연찮게 뛰어든 부동산업에서 돈벼락을 맞아 차 안에 현금 1억을 갖고 다니기도 했지만 눈 깜짝할 사이 노숙자로 추락하였고, 가까스로 극복한 현재, 창업 교육가로 활동 중이란다. 

그의 성공 노하우는 무엇이었는지, 또 지금 어떻게 잘 살고 있는지 등등을 떠나서 우선 이 잘난 청년이 어떻게 노숙을 버텼는지 몹시 궁금해졌다.   

지난 해 모 경제지 선배 기자 하나가 특집 기사를 뽑기 위해 뛰어든 사흘간의 노숙자 체험담은 듣기만 해도 뼈가 삭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는데, 이런 노숙이 체험이 아닌 현실 그 자체였던 홍씨의 이야기는 조지 오웰의 수기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못지 않았다. (물론 오웰이 한 수 위긴 하지만서도)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지만, 텅 빈 속으로 아스팔트에 누워 있으면 뼛속이 에이는 것은 물론이고 뇌가 얼어붙는 느낌이 뭔지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신문지나 박스를 몇 겹 깔아봤자, 지구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것만 같은 그 놈의 냉기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보통 지옥이라면 지옥 불을 떠올리는데, 이런 경험을 해보면 냉기 공격도 불 못지않게 끔찍하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p.17
홍씨의 노숙은 대학 시절에 이미 체험한, 나름의 낭만과 호기를 적당히 부릴 줄 알면서 익히 경험했던 것이기에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연코 부러 노숙을 하는 사람은 절대 없다. 

시 동아리는 각별히 좋은 점이 또 하나 있었다. 동아리 방에서 노숙을 할 수 있따는 것이었다. 밤에는 늘 동아리 방에서 시를 썼기에 주변에선 나를 진정한 시인으로 알았지만, 사실은 잘 곳이 없어 동아리 방에서 노숙을 했을 뿐이다. p. 85
노숙으로 가장 망가진 것은 몸이 아니라 자아였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내가 이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대로 거리에서 죽을 것이라는 체념을 받아들인 것이다. p. 53
 
동거동락하던 개 하나를 잃어버리더라도 시 동아리 출신 답게 꿈에서의 그 암시가 예사롭지 않다. 

 어느 날, 꿈에서 이상하게 나를 자꾸만 깨우는 예쁜 여자가 나왔다. 털이 무지하게 많은데도 불구하고 예쁜 여자였는데, 그녀가 슬프게 우는 것을 보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오랜만에 푹 자고 일어난 나는 깜짝 놀랐다. 나를 반기던 패키가 보이지 않았다. (...) 노숙자의 개는 없어졌다면 사라있을 확률이 거의 없다. 노숙자들은 자기는 안 먹어도 개는 잘 먹인다. 유일하게 자기를 따르는 존재이자 동반자여서다. 고로 노숙자들의 개는 살이 통통하게 올라있고, 사람도 비교적 잘 따른다. 그러니 없어지면 거의 찾기가 힘든 것이다. p.59

책장을 덮고나니 소주 한 잔이 절실한 건 비단 나 뿐만이 아닐 터. 젊은 청년이 대단하네, 라고 치켜세워주기 보다는 힘들었지, 하며 궁디팡팡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고픈 마음이 드는 사람 또한 나 뿐만이 아닐 터. 그러니 오라버니, 한 잔 어떠합니까. (응?)

그리고 이 리뷰가 베스트 오브 베스트로 선정이 된다면, 그리고 어찌어찌하여 순재씨와 소주 한 잔을 할 기회를 얻게 된다면, 85쪽 6째 문단 첫 번째와 두 번째 줄에 걸쳐 언급되어 있는 이 문장이 참말인지 아닌지 직접 인증에 나설 참이다. 


'당시 나는 솔리드라는 남성 그룹 중 한 명과 헤어스타일이 비슷했고 랩도 잘했기에 종종 축제에 불려 나가곤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설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4
제인 오스틴 지음, 원영선.전신화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희생이고 나발이고


이별, 마지막 이별의 비참함 속에서도 가장 큰 위안이 되어 준 것은 그것이 신중한 결정이며, 그의 행복을 우선시한 자기 희생이라는 믿음이었다.



기 희생이라니.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가 따로 없다. 이를테면 전쟁통에 서로 적국의 두 남녀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시달리다 이러쿵 저러쿵 끝에 둘 중 하나가 기여코 죽음을 감안, 살아남은 이의 행복을 바라며 굳빠이를 날리는 시추에이션에 견주기란 앤의 처지는 너어무 약소하다는 것. 하물며 로미오와 줄리엣의 원수지간인 두 가문의 비극적 조합을 떠올려 옆에 두고 보자니 좌우 고갯짓만 격해진다. (로렌스 신부 앞에서 이처럼 자기 희생을 나불대다 당장 무릎 꿇고 신께 용서를 구하라며 등짝 스매싱을 당할 앤의 모습을 굳이 그려보고 삐죽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는 이 녀자도 함께 용서하소서)


십 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그 분처럼 종교적인 헌신과 희생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으나, 사람 남녀간의 사랑에 있어서 자기 희생을 갖다 붙이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심지어 아슬아슬하고 위험해보이기까지 한다. 헤겔도 헌신적 사랑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지 않나. 함부로 자기 희생 운운했다가는 되려 '여성의 소외'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며 이렇게 한 팔 걷어 주신다.


헤겔은 청년기에 종교에 대해 탐구하면서 헌신적 사랑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초월적 절대자에게 헌신하는 인간의 태도는 '동등성'을 쉽게 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초월적인 것을 상정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외적 권위를 상정하고 외적 권위에 기초하는 규범들을 절대화함으로써, 인간의 자발성과 내면적 자유를 훼손하게 되기 때문이다. (중략)  그러므로 '헌신적 사랑은 미덕'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여성의 능력과 동등성을 사장시키고 여성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사랑의 철학(이정은)' 중에서>


' 청승맞던 지난 날 '로 간결히 압축해 두었으면 이렇게까지 몰아세우지 않았을텐데…. 그녀가 8년이라는 시간을 겪으면서 ' 신중을 기하기 위해 걱정만 앞세우는 건 인간의 노력에 대한 모독이며 신의 섭리에 대한 불신이 아닌가 ' 하고 신중과 걱정의 성격을 구별할 줄 알게 된 점은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용하다는 점쟁이에게 ' 생각하는 시간을 줄여라 '는 충고를 받은 적이 있다. 앤의 꼬라지를 보자마자 엉뚱하게도 요 선녀보살이 떠올랐다. 시집은 가급적 늦게 가라 일러두며 ' 국회의원감을 만나 굉장한 뒷바라지를 하게 된다 '고 윙크짓을 해보였더랬지. 그 날이 오면 내 주변에 ' 레이디 러셀 '들은 어떤 반응을 하게 될까. 난 또 어떤 설득에 휘말리게 될까...


하고 엉뚱한 상상을 하는 새벽 12시 40분이란(하아)….  



2. 사랑할 땐 꼴리는대로


현재의 저를 의심하지 말아야 했어요. 사정이 달라졌고, 제 나이도 어리지 않은 걸요. 설사 한때 남의 설득에 따랐던 것이 잘못이었다 해도 모험이 아니라 안전을 권하는 설득에 따랐다는 점을 기억해주세요. 전 그분 뜻에 따르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 경우엔 그 어떤 의무감도 끼어들 여지가 없지요. 제게 애정이 없는 남자와 결혼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온갖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고, 또 모든 의무를 저버리는 일일 거에요. <324쪽, 설득, 제인 오스틴, 문학동네>



렇다. 이 언니의 사정은 달라졌다. 그치만 ' 그 남자의 사정 '도 달라졌다는 사실은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하겠다. 그 남자의 사정은 꽤 눈부시게 변모, 8년 전 첫사랑의 심장을 백번 천번 흔들어 놓는것도 모자라, 결혼 시장 내 우수한 성적으로 고평가되었고, 아래와 같이 월터 경의 뭐뭐같은 취미 생활에 즐거운 활력소로 작용하기에 이르렀다.



월터 경은 이 결혼을 진실로 기뻐할 만큼 앤에게 애정이 있지도 않았고, 이 결혼으로 그의 허영심이 채워진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가 둘의 결합을 탐탁지 않아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웬트워스 대령을 보면 볼수록, 그리고 밝은 대낮에 여러 번 찬찬히 살펴볼수록, 그의 뛰어난 외모라면 앤의 우월한 지위에 견준다 해도 부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듣기에 그럴싸한 그의 이름도 마음에 들었으므로, 마침내 월터 경은 작위 명부에 이 혼사를 적어 넣기 위해 흔쾌히 펜을 들 수 있게 되었다. <330쪽, 설득, 제인 오스틴, 문학동네>



둘의 성공적인 재결합에 (얼떨결에) 박수를 보내다 문득, 이 모든 이야기가 제인 오스틴이 제시한 '설득'이라는 현실적인 키워드에는 저언혀 관련없이, 그 정반대의 '로맨스'라는 판타지물로 꽁꽁 포장되어 잡혀 들어오네. 웬트워스의 ' 꼴리는 ' 편지 한 통이 아니었다면 영영 뭍히고 말았을 그 여자, 앤의 사정은 이렇게 물에 물타듯 술에 술타듯 신데렐라 스토리로 세탁된 것이다. 이런 류의 마무리엔 신물이 날 법도 하건만 전혀 그렇지도 못한 것이 실상 우리의 가슴은 해피 엔딩에 ' 꼴리기 ' 때문이 아닐까.


저자 제인 오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할 땐 결코 설득 당하지 마라. 사랑을 할 땐 너님 꼴리는 대로. HAPPILY EVER AFTER .


이하 동영상은 이 시대의 앤을 위함.
언니들을 위해 바치는 은꼴키쓰. 은.근.히. 꼴.리.는. 키.쓰.신.


 >클릭<



# 이 책은 네이버 카페 독서공동체 <달의 궁전>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돈 혹은 한 남자의 자살 노트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5
마틴 에이미스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빗줄기는 가늘었고 공기는 자동차 배기 가스처럼 불쾌했으며 하늘은 아예 없었다. 정말 하늘이 없었다. 런던의 여름은 호흡기가 좋지 않은 노인 같다. 자세히 들어 보면 지쳐 흐느끼는 소리가 그 숨소리에 섞여 들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스럽지 않은 런던. 심지어 그 이름에서조차 심한 스트레스가 느껴진다.

가 끔 길을 걸어가다 날씨와 싸움을 할 때가 있다. 나는 날씨의 신들을 상대로 달려든다. 발로 차고 주먹을 날리며 한바탕 뒹군다. 사람들이 쳐다보며 웃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다. 맥주 통처럼 퉁퉁한 몸으로 가라테 킥을 날리고, 하늘을 향해 박치기를 해 댄다. 그 와중에 소리도 많이 지른다. 사람들은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가끔은 정말로 날씨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날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돈 혹은 한 남자의 자살 노트 1, p.149>




날 씨를 받아들이지 못해 허공에 투실한 몸을 들이받는 정신나간 이 남성은 '존 셀프'라는 런던의 잘 나가는 CF 감독입니다. 우연히 비행기에서 만난 헐리우드 영화 제작자 '필딩 구드니'의 제안으로 첫 장편영화를 제작하게 된 그는 런던과 뉴욕을 오가는 삶을 살게 되지요. 하지만 독자는 그가 영화 제작을 위해 무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돈이나 펑펑 써 제끼며 술, 여자, 마약, (망할) 패스트푸드에만 탐닉할 뿐입니다. (아, 난 정말 패스트푸드가 끔찍하게 싫어요)

쾌락에 미친 요런 술주정뱅이. 라고 쓰고 보니 왠지 거울에 삿대질을 하는 기분이라 영 머쓱하구만요.

아. 한국의 여름은 어떤가요. 저기 첫 문단에 런던을 한국으로 치환해보니 꽤 그럴듯한 기분이 드는 건 저 뿐인가요. 이런 날씨에 술을 마시면 절대 취할 리가 없지요. (주당들만 통한다는 그것...!)




술 을 마시면 기분이 좋게 취할 줄 알았는데 대신 멍해지기만 했다. 정말이었다. 나는 그런 상태를 벗어나 보겠다는 안쓰러운 희망으로 계속 술을 주문했고, 결국 이렇게 많이 마시고 말았다. 더 이상한 점은 어젯밤에 룸서비스를 잔뜩 시켜 먹으며 늦게까지 텔레비전을 보고 잤는데도 아침에는 몸 상태가 너무너무 좋았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종류의 시차를 겪는 걸까. 아니면 내 몸 전체가 최후의 반란을 준비하고 있는 걸까? <돈 혹은 한 남자의 자살 노트 1, p.213>



하물며 글이 눈에 들어올리가.




독 서에는 시간이 많이 든다. 여러분은 그 점을 발견 못 하셨나? 예를 들어 21쪽에서 30쪽까지 읽으려면 진짜 시간이 오래 걸린다. 우선 23쪽을 지나야 하고 다음에는 25쪽, 27쪽, 그리고 29쪽을 지나야하고, 중간중간에 짝수 페이지도 지나야 한다. 그래야 30쪽이 나온다. 그 다음에는 31쪽, 33쪽…… 끝없이 이어진다. 다행스럽게도 동물농장은 그렇게 긴 소설이 아니지만 소설은 보통…… 소설은 다 길다. 그렇지 않은가? 내 말은 소설은 하나같이 너무 길다는 것이다. <돈 혹은 한 남자의 자살 노트 2, p.44>



< 돈 혹은 한 남자의 자살노트>는 한 마디로 '존 셀프의 멘붕 일기' 라고 보셔도 될 것 같네요. 꽤 저속하고 더러운 표현들이 거침없이 쓰여있지만요. <팩토텀>의 작가, '찰스 부코스키'를 좋아하신다면 (찰스에 비하면 약과) 그다지 거슬리진 않을 거에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멘붕'인 분들이라면 꼬옥 읽어보시길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는 노래처럼 - 노래로 부르는 시, 시로 읽는 노래
소래섭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토막말

                         -  정양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p. 71, <시는 노래처럼> 제 4장 '시와 감성, 99 퍼센트의 초콜릿' 중



출 근길 지하철은 오랜만에 한산하였다. 럭키!!를 외치며 착석, 무릎 위로 곧장 책을 얹어 놓고 제 4장을 다소곳이 펼치자마자 이게 왠 걸, 토막말의 토막질에 댕겅, 하고 매가리가 잘려 나갔다. 마치 소주 서너 병으로 밤을 꼴딱 새우고선 아침 첫 차로 서해 갯펄로 좀비처럼 기어가 칼칼한 바닷바람을 오도카니 맞선 덕에 눈이 다 시렵고 목이 따끔거리는 듯, 숙취 가득한 지랄 맞은 시공간에 빠져버렸다. 부들거리는 팔을 한 번 쓸어보고선 고개를 들어보니, 6월의 때이른 더위에 지나친 에어콘 가동으로 냉방병이 오신다는 소식.(이라며 오돌도돌 닭살들이 속삭여주네.)

이 모든 지랄을 홀로 감당키가 억울하단 생각에 이르르자 혀를 빼죽 내밀곤 페이스북에 시 전문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남겨 둔 토막말.


여름은청승을위한계절이못돼더서글프다씨펄.


요 못난 토막말에 H군과 L군, 그리고 K군이 '좋아요'를 꾸욱 눌러주시니 지랄맞은 시공간에 벌써 동지가 셋이네. 하고 기뻐하였다. 곧이어, 아직도 헤어진 애인을 못 잊는 친구 W군과 담소를 나누니 기쁨이 두 배, 좌절도 두 배.



W : 선생님 씨펄은 바다의 진주 아닌가요?? (좋아요 1)

삽하나 : @W 그럼 네 다음 애인 별명으로 가져다 쓰렴. 썩 괜찮네요. (좋아요 1)

W : 우라질 (좋아요 1)


가 을 바달 여름으로 끌고 온 것도 잘못이라면 잘못이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 맘 때 이 시가 맘에 '꼭' 들어차는 것도 차암 적절치 못하다. 6월은, 여름은 청승을 위한 계절이 못 돼 서글프기만 하다. 씨펄, 씨펄 하다보니 가을 바다와 더욱 가까와지고, 손과 발은 보다 얼어붙고, 무거워진 코끝이 떨군 쇄골 언저리에서는 짠내가 끊임없이 뭍어나오는데, 요것 참 어지간히 성가시다. 토막말에 토막말을 잇다보면 퇴근길 9시 무렵이 벌써 새벽 3시를 넘어서고, 가을을 넘고, 또 겨울까지 훌쩍... 그리곤 으레 봄이 그리워지기 마련이다.


적거

                                    -조용미


당신이 없는데 탱자나무에 꽃이 피었다

당신이 없는데 당신 사진이 웃고 있다
보리밭에 보리들이 술렁인다
당심 책상에 앉아 밤새 개구리 울음소릴 듣는다 당신 없이
걸어다닌다 술을 마신다 여행을 한다
돌아와서 나 혼자 우울한 음악을 듣는다
어쩌다 당신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나면
때려눕힌다

벽지에 탱자나무 흰 꽃이 사방연속무늬로 피어났다




' 때려눕힌다'에 여러 번 거칠게 밑줄을 긋고나니 올 봄엔 탱자탱자 꽃이 피어나도 씨펄, 하는 입버릇은 버리지 못할 것 같다. 저자 소래섭은 시인의 절망을 즐기지는 말라고 누누이 강조를 하고 있지만, 자고로 인간이란 그늘 좀 품을 줄 알아야 양지 바른 곳도 좇을 줄 아는 법. 우주를 보여주는 건 낮이 아니라 '밤'이듯이 반짝이는 하늘의 별을 헤아릴 줄 아는 낭만은 다아 어둠 속에 있는 법.

 
이 렇듯 시를 읽는다는 것에는 정답이 없다. 5개의 보기를 제시하며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고 묻는다면 독자를 '존나게' 무시한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같은 노래를 이 사람 부르면 다르고 저 사람 부르면 다른 것처럼 - 어쩌면 제 멋대로 보일지 몰라도 - '그' 만의 감성과 코드가 맞으면 '그만'이다. 또 좋은 시와 노래는 (정답 따위 없이도) 알아서들 두루두루 찾게 마련이지 않나.


< 시는 노래처럼>이 십 년만 일찍 나왔더라면 국어과목을 가장 좋아하는 국문학도가 되었을테지만, 지금의 나는 영어과목을 가장 좋아하는 국문과 출신 사람(혹은 그냥 '술꾼') 정도 밖에 되지 않아 조금은 겸연쩍다. 그만큼 책이 알차다. 완독 후엔 보람 차기까지 하다. '시'라면 개미 환각에 시달리듯 몸서리부터 치는 주변의 많은 지인들에게 1차 도서로 권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