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노래처럼 - 노래로 부르는 시, 시로 읽는 노래
소래섭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토막말

                         -  정양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p. 71, <시는 노래처럼> 제 4장 '시와 감성, 99 퍼센트의 초콜릿' 중



출 근길 지하철은 오랜만에 한산하였다. 럭키!!를 외치며 착석, 무릎 위로 곧장 책을 얹어 놓고 제 4장을 다소곳이 펼치자마자 이게 왠 걸, 토막말의 토막질에 댕겅, 하고 매가리가 잘려 나갔다. 마치 소주 서너 병으로 밤을 꼴딱 새우고선 아침 첫 차로 서해 갯펄로 좀비처럼 기어가 칼칼한 바닷바람을 오도카니 맞선 덕에 눈이 다 시렵고 목이 따끔거리는 듯, 숙취 가득한 지랄 맞은 시공간에 빠져버렸다. 부들거리는 팔을 한 번 쓸어보고선 고개를 들어보니, 6월의 때이른 더위에 지나친 에어콘 가동으로 냉방병이 오신다는 소식.(이라며 오돌도돌 닭살들이 속삭여주네.)

이 모든 지랄을 홀로 감당키가 억울하단 생각에 이르르자 혀를 빼죽 내밀곤 페이스북에 시 전문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남겨 둔 토막말.


여름은청승을위한계절이못돼더서글프다씨펄.


요 못난 토막말에 H군과 L군, 그리고 K군이 '좋아요'를 꾸욱 눌러주시니 지랄맞은 시공간에 벌써 동지가 셋이네. 하고 기뻐하였다. 곧이어, 아직도 헤어진 애인을 못 잊는 친구 W군과 담소를 나누니 기쁨이 두 배, 좌절도 두 배.



W : 선생님 씨펄은 바다의 진주 아닌가요?? (좋아요 1)

삽하나 : @W 그럼 네 다음 애인 별명으로 가져다 쓰렴. 썩 괜찮네요. (좋아요 1)

W : 우라질 (좋아요 1)


가 을 바달 여름으로 끌고 온 것도 잘못이라면 잘못이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 맘 때 이 시가 맘에 '꼭' 들어차는 것도 차암 적절치 못하다. 6월은, 여름은 청승을 위한 계절이 못 돼 서글프기만 하다. 씨펄, 씨펄 하다보니 가을 바다와 더욱 가까와지고, 손과 발은 보다 얼어붙고, 무거워진 코끝이 떨군 쇄골 언저리에서는 짠내가 끊임없이 뭍어나오는데, 요것 참 어지간히 성가시다. 토막말에 토막말을 잇다보면 퇴근길 9시 무렵이 벌써 새벽 3시를 넘어서고, 가을을 넘고, 또 겨울까지 훌쩍... 그리곤 으레 봄이 그리워지기 마련이다.


적거

                                    -조용미


당신이 없는데 탱자나무에 꽃이 피었다

당신이 없는데 당신 사진이 웃고 있다
보리밭에 보리들이 술렁인다
당심 책상에 앉아 밤새 개구리 울음소릴 듣는다 당신 없이
걸어다닌다 술을 마신다 여행을 한다
돌아와서 나 혼자 우울한 음악을 듣는다
어쩌다 당신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나면
때려눕힌다

벽지에 탱자나무 흰 꽃이 사방연속무늬로 피어났다




' 때려눕힌다'에 여러 번 거칠게 밑줄을 긋고나니 올 봄엔 탱자탱자 꽃이 피어나도 씨펄, 하는 입버릇은 버리지 못할 것 같다. 저자 소래섭은 시인의 절망을 즐기지는 말라고 누누이 강조를 하고 있지만, 자고로 인간이란 그늘 좀 품을 줄 알아야 양지 바른 곳도 좇을 줄 아는 법. 우주를 보여주는 건 낮이 아니라 '밤'이듯이 반짝이는 하늘의 별을 헤아릴 줄 아는 낭만은 다아 어둠 속에 있는 법.

 
이 렇듯 시를 읽는다는 것에는 정답이 없다. 5개의 보기를 제시하며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고 묻는다면 독자를 '존나게' 무시한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같은 노래를 이 사람 부르면 다르고 저 사람 부르면 다른 것처럼 - 어쩌면 제 멋대로 보일지 몰라도 - '그' 만의 감성과 코드가 맞으면 '그만'이다. 또 좋은 시와 노래는 (정답 따위 없이도) 알아서들 두루두루 찾게 마련이지 않나.


< 시는 노래처럼>이 십 년만 일찍 나왔더라면 국어과목을 가장 좋아하는 국문학도가 되었을테지만, 지금의 나는 영어과목을 가장 좋아하는 국문과 출신 사람(혹은 그냥 '술꾼') 정도 밖에 되지 않아 조금은 겸연쩍다. 그만큼 책이 알차다. 완독 후엔 보람 차기까지 하다. '시'라면 개미 환각에 시달리듯 몸서리부터 치는 주변의 많은 지인들에게 1차 도서로 권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