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열린책들 세계문학 227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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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값진 삶을 살아간다는 말이겠지만, 그 길에 이르는 과정은 결코 쉽지만은 않다. 스스로 진정 무엇을 원하고 있는 가에 대한 확신을 - 본인임에도 불구하고 - 갖기 어려울 뿐더러, 어떤 삶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문제 역시 나름의 답을 내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옳다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진리가 아니였으며, 옳지 않다고 믿었던 것에 대한 끌림과 그로써 발생하는 혼란과 죄책감이 우리 앞을 항상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이 같은 고민은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아니, 어쩌면 삶의 모든 과정은 자아를 찾기 위한 여정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외롭고 고단한 기나긴 여정에 위로와 도움을 주는 친구가 하나 있으니, 그것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다.

 

이 책의 주인공 - 싱클레어는 크로머와의 일화를 기점으로 자신이 속한 밝은 세계가 붕괴될 위험에 처한다. 사랑이 충만한 정의의 세계인 밝은 세계에 안정을 느끼면서도 악이라 불리우는 것들의 집합인 어두운 세계에 이끌리는 그였지만, 밝은 세계에서 내쳐질 수 있다는 현실은 그에겐 큰 두려움과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런 그 앞에 데미안이 나타나고, 그는 싱클레어에게 카인의 표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흔히 ‘데미안’하면 그 유명한 문구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 힘겹게 싸운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가 떠오르겠지만, 카인의 표식에 대한 이야기 역시 그 못지 않은 상징성을 가진다. 우리가 ‘진실’이라 알고 있었던 것이, 다른 방향에서 본다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구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싱클레어가 처음으로 인식하게 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아브락사스와 카인의 표식 이야기는, 세계는 선(밝은 세계)과 악(어두운 세계)의 이분법적인 세상으로 나뉘어진 것이 아닌 둘의 조화로 구성돼있으며, 그런 세계에서 무엇을 허용하고 무엇을 금지할 것인지는 결국 스스로가 찾아내야만 한다는 걸 알려준다. 이는 결국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후에 싱클레어가 상급학교 진학 후 고민하는 내용들 역시 그런 과정의 하나이다. 데미안은 자아가 완전히 확립된, 카인의 표식이 있는 자이며 그는 싱클레어에게도 카인의 표식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전쟁을 겪은 후, 마침내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하나가 되었다. 데미안의 도움 없이도 자신의 내면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붕대를 감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그 후로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이따금 열쇠를 찾아서 나 자신 안으로 침잠하면, 검은 거울 위로 몸을 굽히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나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나의 친구이면서 인도자인 그와 똑같은 모습이. (226p)'

 

이따금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나를 둘러싼 안정된 세계에만 집중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삶인가 하는 물음이 내면에서 들려올 때면 더욱 그렇다. 내가 누리고 있는 안락함이 다른 이의 고통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 세상을 안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질문과 함께 말이다. 그리고 그 답은 오로지 나만이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자아를 찾아가는 길목에서 함께하면 좋을 책, 데미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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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의 옹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지음, 손영미 옮김 / 연암서가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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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에서, 그 중 대한민국에서 여성들의 지위는 학대라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많은 차별대우를 받았었다. 유교를 기본으로 했던 조선시대만 보더라도 여성들은 그저 남편을 위해 밥을 해다 바치는 부억데기 정도의 취급을 받으면서 식사할 때 남자들과의 겸상은 꿈도 못 꾸었으며, 오로지 일만 하는 존재로 취급 받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변해도 너무나 변했다. 공직엔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많이 진출하고 있고, 직장 내에서 여성상사를 모시는 게 평범한 일상이 되었으며, 심지어 대한민국 군인의 상징인 육사에까지 여성들이 진출한 걸 보면 이제는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우월한 존재이자 더 강한 유전자로 거듭나고 있다. 이러다 미래에 가서는 남성들은 여성들의 출세를 돕는 들러리 정도로 전락할지도 모르겠다면 너무나 큰 비약일까?

 

여기 한 여성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255년 전 영국에서 태어나 혁명을 사랑했고,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여성들을 억압하는 사회부조리에 대해 해방을 꿈꾸었던 여성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1759~1797), 그리고 그녀가 여성들의 인권과 권리 신장에 관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가가 이 책 《여권의 옹호》속에 가득 들어있다. 대한민국에 여성들이 핍박받던 조선시대가 있었다면 유럽에는 17세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유럽 전역에 전파된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자유와 평등에 대한 요구가 빗발치고 있었는데 중요한 것은 계몽주의와 낭만주의가 입으로는(사적으로는) 자유와 평등을 외치고 있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공적으로는) 여성들을 배제한 채 남성들끼리 반쪽짜리 자유와 평등을 외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사회에서 필요하거나 부족한 부분이 있을 땐 여성들에게 그 부족분을 채우려 했지만 사회의 부정적인 상황에 닥쳐서는 철저하게 여성들을 이용하려고만 했으니 여성들이 느끼는 상실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혁명 후 삼부회(三部會) 의원 탈레랑이 의회에 제출한 교육 법안에 반발해서 쓴 반론서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쓴《여권의 옹호》란 책이고, 이 책 속에 정치.경제.사회.문화에서 여성들이 불평등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나아가서 남성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평등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여성이 남성과 똑같이 누려야 할 권리들을 요구하면서 나는 그들의 결점을 감싸려는 게 아니라 그게 모두 그들이 받은 교육이나 사회적 지위 때문에 빚어진 자연스러운 결과임을 입증하려 했다. 그러니 여성에게 육체적.도덕적.법적 자유가 주어지면 그들도 자신의 성격을 바꾸고, 잘못된 행동과 어리석은 짓들을 바로잡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합당할 것이다.

(본문 350쪽 中)

 

이 책에서는 서두에 인간의 권리와 의무, 여성에 대한 선입견이나 여성의 이미지 등 여성과 관련된 여러 견해들을 먼저 밝히면서 그것들을 풀어나가는 방법에 있어서 여러 명제를 분류하는 연역적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인데, 이 점을 무시한 채 17세 유럽 대부분 지역의 문명은 계급과 재산, 그리고 왕권의 세습에 의해 불공평해졌고, 이 부패한 권력과 재산으로 인해 남자들의 폭정이 정당화됐으며 ,이로 인해 여성들은 남자들의 폭력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더 웃긴건 그 당시의 지식인이라 불리면서 여성의 교육과 풍속에 글을 썼던  작가들(루소, 그레고리)이 그들의 펜으로 여성들을 더 불평등하고 나약한 존재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여성의 여권 신장을 위해 글을 써도 모라잘 판에 여성들을 차별의 구렁텅이에 빠트렸으니 그들이 여성들의 불평등에 일조했다는 사실이 씁쓸함을 가져다 줄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약 250년 전에 정치, 사회을 넘어서 인간이 참여하는 모든 부분에 있어서 여성들의 권리를 주장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참 대단한 여성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그녀의 주장이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사조를 탄생시킨 원동력이 됐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거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그녀가 주장했던 ‘여권의 옹호’가 지금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권리를 대변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길 바라면서, 그녀에 대한 고마움을 많은 여성분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현재를 열심히 사는 여성분들께 이 책을 권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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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식민사관 - 해방되지 못한 역사, 그들은 어떻게 우리를 지배했는가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만권당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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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역사공부와 관련된 책을 읽으면서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레임을 세워서 공부해야 한다는 팁을 얻었었는데 그 팁을 그대로 실천 중에 있다. 한국사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 틀을 알면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을 쉽게 공부할 수 있다고 해서 하고는 있는데 쉽지만은 않다. 워낙 역사에 흥미도 없었거니와 암기하는 것을 싫어해서 국사와는 담을 쌓고 살았었는데 역사에 뼈대를 세우고, 거기에 피와 살을 붙이려니 쉽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시작됐으며 어떤 길을 걸어 왔는지, 우리의 역사와 뿌리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야 한다고 본다. 대한민국 역사에 있어서 고조선이 어떤 나라이고, 언제 세워진 나라인지도 모른다면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등한시하고 있을 때 우리의 주변국인 중국과 일본은 한반도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넓히기 위해 역사를 조작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다. 동북공정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를 자신의 역사로 만들어놓은 중국과 독도는 일본땅이고 동해는 일본해라면서 때만 되면 일본 전범들이 안치돼 있는 신사를 참배하며 한국을 조롱하는 일본의 모습에서 공포감마저 드는 게 사실이다. 한국에서도 중국과 일본의 이런 행태들을 저지하기 위해 기존에 있던 고구려연구재단을 흡수해서 동북아역사재단을 출범시켰는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 《우리 안의 식민사관》에서는 대한민국 도처에 숨어 있거나 활동하고 있는 식민사관을 고발하고 있다. 이 중에서 ‘동북아역사재단’도 예외는 아니다. 동북아역사와 한반도 주변국(중국, 일본)들의 역사왜곡을 바로잡아야 할 동북아역사재단이 역사적 사실을 바라보는데 있어서 대한민국의 관점이 아닌 일본 및 중국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본다면 할 말 다하지 않았겠느냔 말이다. 간도는 원래부터 중국의 영토였다고 말하는 ‘동북아역사재단’의 모습에서 일본과 중국은 대한민국의 땅을 어떻게든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면서 역사를 왜곡, 조작, 날조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는데 대한민국은 우리의 것을 지키지는 못할망정 우리 땅을 남의 땅이라고 동네방네 말하고 다니고 있으니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는지 모르겠다.


동북아 역사재단은 대한민국 학생들이 민족 주체적 관점의 역사 교육을 받는 것이 두렵기 그지없다. 동북아역사재단이 ‘학계’라고 쓰면 ‘식민사학계’라고 읽으면 맞다고 앞서 말했다. 한국 학생들은 계속 조선총독부 관점과 중국 동북공정 관점으로 교육받아야 한다고 확신한다. 이들은 일왕의 살아 있는 신민이자 중국의 흑인(黑人:호적이 되어 있지 않은 중국인)이다. 문제는 일왕의 신민이자 중국의 흑인들이 대한민국 국가 기관을 장악하고 역사 관련 국민 세금을 독식한다는 점이다. 필자 같은 사람들은 땀 흘려 번 돈으로 대한민국 역사 주권 수호에 나서고 동북아역사재단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세금으로 매사賣史에 나서는 것이 대한민국 현실이다. (본문169쪽 中)


독립 운동가의 눈으로 바라본 역사관과 조선총독부의 눈으로 바라본 역사관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이 책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한사군’의 위치가 어디에 있었고, ‘임나일본부’가 실제로 있었는지에 대해 두 개의 역사관이 너무도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데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교육의 현장이나 역사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 독립 운동가의 눈으로 역사를 가르쳐야 하는 게 당연하게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현실과는 정반대라는 게 이덕일 선생의 주장이자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 독립운동가 역사관과 조선총독부 역사관의 충돌이 짧게 보면 해방 이후 70여 년간, 길게 보자면 인조반정으로 친명 사대주의가 득세한 때부터로도 볼 수 있으니  400여 년 가까이 이 충돌이 계속된 셈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들은 중, 고등학교 때 아무 것도 모르고 ‘한사군’은 남한 바로 위인 평양이나 대동강 근처에 있었고, ‘임나일본부’가 백제 근처에 존재하면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설을 외우면서 공부했으니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관은 독립 운동가의 역사관이 아닌 조선통독부의 식민사관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고, 그 속에서 우리 민족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치욕과 굴욕을 당해야만 했다. 그 치욕과 굴욕을 견뎌내고 지금의 위치에 오른 대한민국이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리고 분한 감정이 쏟구쳐 오른다. 아픈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이기에 앞으로 이런 치욕을 당하지 않으려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우리의 것, 우리의 땅을 지켜야 함과 동시에 우리의 역사를 올바른 역사관을 가지고 배워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식민사관이라는 거대한 그늘에 가려 친일파가 차려놓은 밥상에 친일파가 준비한 식민사관으로 굶주린 배를 채우고 있으니 몸똥이는 대한민국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마음은 아직도 식민지 시대를 살고 있는 그때와 무엇이 다르리요? 이 책을 읽으면서 무조건 이 책이 맞다고 말은 못 하겠으나 틀린 말 또한 하나도 없기에 이 책에 대한 평가는 여러분의 몫으로 맡겨두고 싶다. 중요한 것은 아직도 대한민국엔 친일파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고, 역사계에 있어서는 史피아가 건재하다는 사실이다. 혈연과 지연, 학연으로 똘똘 뭉쳐서 잘못된 것을 잘못된 것이라 말하지 못하고, 진실을 왜곡해서 말하는 지금의 한국사 학계의 상황이 호부호형(呼父呼兄)하지 못하는 조선시대의 홍길동과 무엇이 다르겠느냔 말이다. 이 자리를 빌어 식민사학 해체를 위해 노력하는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고,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의 장을 역임하고 계시는 이덕일 선생께 대한민국의 식민사학이 해체되는 그날까지 진심으로 힘을 보태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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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은 왜 이디야에 열광하는가 - The EDIYA Story
김대식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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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경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사 웨베르의 권유로 처음 커피를 마신 것을 계기로 대한민국에 들어온 커피가 지금은 안 마시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됐다. 이것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한집 건너 하나씩 커피전문점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커피업계를 주름잡던 별다방, 콩다방 속에서 한국의 토종 브랜드가 하나 둘 눈에 띄더니 이제는 이마저도 포화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지금은 치열한 커피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두가 고군분투중인데 이런 포화상태에 이르렀으면 당연히 커피값이 떨어져야 상식에도 맞거늘 반대로 올랐거나 오를 조짐이 보이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공급이 많으면 가격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건데 경제학에서 배운 논리가 커피시장에서는 맞지 않으니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모르겠다. 이런 상황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커피를 찾고, 커피를 마시고 있다. 그리고 본인도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커피 한잔에 밥 한 끼 하는 세상에서 합리적인 가격으로 커피업계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온 브랜드가 있다. 나도 처음엔 가격이 싸서 반신반의 하면서 사 먹지 않았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마신 커피가 내 입맛을 사로잡았고, 그 브랜드가 바로 이디야커피(EDIYA COFFEE)였다. 조용하게 시작한 이디야가 지금은 국내 커피 브랜드 최초 1,000호점을 개설한 뚝심의 아이콘, 열정의 아이콘으로 대변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디야의 경영방식이 어떻길래 그 길고 난다는 해외 브랜드 커피와 국내의 대기업들의 커피전쟁에서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이디야의 힘이 궁금했다.



디야의 직원들에 대한 복리후생정책만 보더라도 이디야가 이처럼 치열한 커피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간다. 업계 최고 수준의 연봉 및 성과급, 인센티브는 차치하더라도 1년에 한번씩 직원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전 직원 모두가 해외 워크숍을 떠나고, 가을 야유회와 송년회에서는 이디야가 표방하는 기업 문화인 행복하고 즐거운 회사를 만들기 위해 잘 놀고 잘 즐길 수 있는 락樂한 자리를 마련한다는 것이 이디야가 직원들에게 큰 점수를 받는 부분일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디야의 직원들 모두가 유능해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문창기 대표가 고안해낸 한 달에 한번 책을 읽고 쓰는 독후감 과제는 문 대표가 전 직원에게 내준 숙제이자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진리 아닌 진리를 직원들과 함께 실천하고 있는 이디야만의 기업문화라고 생각한다.


​자인이 독특한 엠블럼, 거기에 이디야는 우리에게 싼 가격과 우수한 품질의 커피를 제공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가격과 품질을 비례관계로 보지만 이디야 커피만큼은 가격과 품질이 반비례 관계다. 가격이 싸도 품질이 좋은 커피를 쓸 수 있다는 것을 이디야가 실천하고 있다. 타사 브랜드 커피보다 가격은 30~40% 정도가 저렴하지만 원두는 값이 비싸고 품질이 좋은 아라비카 품종을 쓰는 곳이 바로 이디야인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타 업체가 커피의 질은 뒤로한 채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고급 인테리어에 신경쓰며, 목 좋은 자리에 카페를 오픈시킬 때 이디야는 오로지 커피를 위해, 커피의 질을 위해 노력한 결과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외활동이 많은 것도 이디야만이 가지는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새터민에게 전달하는 사랑의 김장 담그기 행사부터 남아공의 결식아동을 돕고, 아프리카에 식수를 지원하는 ‘아프리카 우물 사업 B-water 캠페인’ 등의 사회공헌활동과 책과 관련된 ‘리딩 캠페인’, 이디야 고객들을 초청해서 콘서트를 여는 ‘이디야 뮤직 페스타’, 젊은 예술인을 후원하는 문화예술 관련 사업들, 그리고 전시회 티켓을 증정하는 행사 등 사회공헌활동과 문화활동이 함게 어우러져서 지금의 사랑을 받는 이디야가 탄생되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EDIYA COFFEE에 대한 사랑은 앞으로도 계속 진행형이 될 것이다.




이디야는 이미 대한민국 지도에 1,300개가 넘는 랜드마크를 만들어냈다. 웬만한 동네라면 “이디야에서 만나자”라고 약속을 해도 이상하지 않다. 합리적인 가격의 맛있는 커피로 대한민국 커피시장을 평정하다시피 한 것이다.(본문 151쪽 中)


 

대한민국에서는 1년에 약 242억 잔의 커피가 팔리고 있다. 어마어마한 양의 커피를 우리가 마시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마시고 있는 커피가 오리지널 커피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커피를 마시는 게 아니라 커피 회사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주고, 커피회사의 임대료를 대신 내주고 있으며, 인테리어를 새로 해주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비싼 돈을 내고 품질이 좋은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커피 속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이중성을 가진 커피에 돈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디야 커피를 사 먹으란 말이 아니다. 평가는 여러분의 몫이고, 맛이 없다면 이디야 커피를 사먹지 않아도 좋다. 단지 기억할 것은 이디야 커피는 고객이 낸 돈을 커피의 질을 높이는데 사용하고 있다는 데 있다. 고객이 지불한 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소비자들에게 합리적인 가격의 질 좋은 커피를 제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이디야 커피에 큰 박수를 보내면서, 지구 반대편에서도 이디야 커피 EDIYA COFFEE를 빨리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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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 - 김갑수의 살아있는 날의 클래식
김갑수 지음 / 오픈하우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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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한자 중에 불광불급(不狂不及)이란 말이 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뜻으로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미칠 정도로 열심히 해야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권력의 법칙』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로버트 그린의 『마스터리 법칙』에서도 거장이나 마스터 등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강박에 가까울 정도의 흥미와 열정을 가지고 2만시간에 가까운 연습의 과정을 거쳐야 그 분야에서 마스터나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하고자 하는 일에 미쳐야 성공할 수 있고, 노력해야만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상황에서 내가 하는 일에 스스로 미칠 수 있다면 성공에 있어서 가장 완벽한 시나리오가 될텐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야속할 따름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이 남자처럼 미칠 수 있을까? 시인이자 평론가라는 타이틀에 비춰보자면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는 미쳤다고 볼 수 없을 듯 한데 그가 좋아하는 취미생활에는 완전히 미친 사람이 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자신이 하는 일에 있어서 성공하려고 노력하겠지만 그는 그의 취미생활에 완전히 홀릭되어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의 전작 『지구위의 작업실』을 잠깐 살펴 보면 비원(B1, 지하에 있는 방 호수가 B1이라 B1), 비원(悲願, 나를 버리고 떠난 그녀의 간절함 때문에 悲願), 비원(秘苑, 혼자 노는 비밀 공간이라는 뜻에서 秘苑)이라 불리는 지하의 작업실에서 커피향에 취하고, 오디오(스피커)에 한번 더 취하며, 클래식에 완전히 그로기가 되어버리는 남자가 바로 문화평론가 김갑수다. 그의 작업실 벽면만 보더라도 3만 장의 LP 판에 4천 장의 CD가 장식을 하고 있으니 그의 음악에 대한 사랑은 특별하고, 3만 장의 LP 대부분이 클래식 음반이라고 본다면 그의 클래식에 대한 사랑은 특별함을 넘어 각별하기까지 하다. 이 책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도 이런 클래식의 각별함에서 나온 책이자 그가 클래식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반증할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책에서는 클래식을 세분화해서 우리에게 잘 설명하고 있다. 먼 나라에 여행을 가서 이방인의 은밀한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슈만’이나 ‘리스트’ 같은 현란하면서 세련한 음악이 좋고, 몸이 아플 땐 ‘메시앙’의「세상의 종말을 위한 4중주곡」을 들으면서 극심한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이 곡을 만들었을 메시앙을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또, 절망적인 상태이거나 넋을 놓으면서 처지가 형편없음을 한탄하는 낙백落魄의 상태에서는 원시 전례의 분위기를 풍기는 칸타타곡인 ‘카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가 제격이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르프의 아내이나 작가였던 ‘루이제 린저’의 모습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린저의 두 번째 남편이었던 카를 오르프는 밤마다 집에서 나와 죽음의 속도로 차를 몰아대는 취미가 있었으니 그를 지켜본 부인의 마음이 오죽했겠느냐 말이다. “나는 날마다 남편의 죽음을 대비해야 했다.”고 말하는 린저의 모습에서 「카르미나 부라나」로 위로받았을 그녀의 모습이 애처롭게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덧붙이자면「카르미나 부라나」는 한 시간 이상 소요되는 대곡이기에 대단한 인내심을 갖고 들어야 하는 클래식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누구든 겪어 보면 안다. 절망은 멋이 아니다. 그냥 죽음이다. 그 죽음에서 깨어나면 다른 인간이 되어 있는데 아주 더럽다. 강한 인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강인한 인간은 참 더럽다고 생각한다. 다시는 절망하지 않는 내성이 생긴 것이다. 순결을 잃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까. 「카르미나 부라나」의 거창한 도입부는 이런 대사로 시작한다. 
오, 운명의 여신이여! (본문 73쪽 中)

클래식은 다른 음악들과 달리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들 한다. 하지만 처음은 무엇이든 어려운 법, 찾아서 듣다 보면 클래식과도 자연스레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클래식과 그렇게 친하진 않지만 듣다 보면 귀가 편하고, 몸이 먼저 좋다고 반응을 하는 음악이 클래식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이 책의 저자인 김갑수 문화평론가처럼 하지는 못 하겠지만 우리 생활 곳곳에 클래식이 들어와있는 만큼 내가 먼저 다가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야 겠다. 내 수줍은 손을 잡아줄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전율이 예사롭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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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6-01-23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르미나 부라나>는 며칠 전에 요엘 레비 지휘로 KBS 방송교향악단에서 연주하는 걸 `생방송`으로 들었어요. 연주시간이 1시간 5분 정도였는데, 실황공연을 직접 보지 못한 게 너무 아쉽더군요. 라디오에서도 자주 혹은 가끔씩 듣는 곡이지만 짧게만 들려주고, 녹음곡을 `재생`해서 들려주니 생생한 맛이 덜한데, 실황 연주를 생방송으로 들으니 확실히 감동이 다르더라구요.

어제 저녁엔 강추위를 뚫고(?) 빈소년합창단의 공연을 보고 왔어요. 아이들이 너무나 어린 모습이어서 많이 놀랐고, 소규모 편성(소년 26명과 지휘자 1명, 피아노 한 대와 바이올린 1대, 기타 간단한 타악기 몇 개가 전부였어요.)에도 적잖이 실망했지만 `좋은 음악`을 직접 들을 수 있어서 참 좋았어요.

작년에 비엔나에 갔을 때 빈 슈타츠오퍼, 무지크페라인에 들러 음악연주회를 직접 보고 듣고 왔지만, 음악에 대한 욕심은 정말 끝이 없는 듯해요... 어제 그 소년들이 들려준 멋진 앵콜곡(무려 4곡..) 가운데 `아리랑` 은 정말 감동이었지요. 온갖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피부 색깔조차 저마다 다른 아이들이 어찌나 정확한 발음과 서정을 담아 우리의 민요인 그 노래를 애절하도록 아름답게 부르는지 절로 뜨거운 눈물이 나더군요.. 공연 끝나고 오면서 옆지기한테 그 얘길 했더니 `옆에 앉은 아줌마도 많이 울더라`고 하더라구요. 음악이 주는 감동은 늘 정말로 특별한 듯해요...

그러니 김갑수 님의 책 제목에도 공감할 수밖에요.. 생생하게 읽히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