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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 1 ㅣ 지식을만드는지식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시리즈 3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정아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3년 6월
평점 :
천육백 페이지가 넘는(지만지 출판, 김정아 번역) 『악령』을 다 읽고 든 생각은 도스토옙스키는 정말 세계적인 대문호가 맞다였다. 책의 절반인 팔백 페이지를 넘어가기 전까진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힘들어도 되나를 무한 반복으로 되뇌었다. 오에 겐자부로의 난해함도 없는데, 그렇다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소한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닌데 처음부터 지리멸렬한 도스토옙스키의 잡설에 지쳐버렸다. 그렇다고 분량이 적은 것도 아니고, 한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이렇게까지 온갖 장광설을 풀어야 하는지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소설을 다 읽기 전까지는.....
책의 마지막 장을 읽고 난 후 제일 먼저 도스토옙스키가 이 소설을 쓰기까지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였다. 젊은 나이에 받은 사형선고와 그 위기에서 벗어나 시베리아에서의 유형 생활과 강제 군 복무로 10년을 살고 나왔는데 그 10년이 도스토옙스키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혈기왕성한 이십 대에 몸 바쳐 충성했던 아나키스트가 이제는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고, 모국인 러시아만을 위해 충성을 맹세하는 완전한 슬라브주의자(극우주의자)로 변해버렸으니 지난날의 악몽 같은 10년은 도스토옙스키에게 닥칠 세상을 살아가는 자양분 같은 역할을 했으리라. 이런 그에게 도박과 알코올은 험난한 미래를 살아가기 위한 도파민이었고, 뇌전증은 지난 10년 동안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인식표였다.(뇌전증이 생긴 이유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사망을 목격한 후라는 이야기도 이 책 마지막에 있다.) 이렇게 방황하는 도스토옙스키를 잡아준 건 그의 소설을 받아쓰던 속기사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스닛키나였다. 그보다 26세나 어렸지만 도스토옙스키가 소설 쓰기에만 집중하도록 가정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중심을 잡아줬기에 지금의 도스토옙스키가 이렇게 대문호란 칭호를 받았다고 본다.
도박빚 때문에 독일의 드레스덴으로 도피한 도스토옙스키가 그곳에서 쓴 소설 『악령』은 그렇게 탄생했다. <악령>의 1, 2부가 그렇게 장광설이 많은 것도 쪽(페이지) 수에 따라 받는 원고료 때문인 것도 있지만 타향에서 지켜보는 러시아의 모습이 그만큼 위태위태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모든 걸 차치하고서라도 도스토옙스키는 많은 사람들에게 좌절과 불안을 남긴 역대의 수작 『악령』을 탄생시켰고, 본인이 바라고 본인이 원하는 세상을 『악령』에 고스란히 그려놓았다.
크게 보자면 『악령』은 실제로 벌어진 네차예프 사건(1869년)을 모티브로 농노해방을 통해 서구주의가 러시아에서 싹트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긴, 타향에서 고향인 러시아에 전하는 도스토옙스키의 망국에 대한 경고장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그 경고장을 통해 러시아가 변할 수만 있으면 세계 최고의 민족이 될 거라는 자부심과 함께. 하지만 도스토옙스키 눈에 러시아의 모습은 암담함 그 자체였다. 러시아 정교를 바탕으로 농촌공동체를 부활하고, 러시아 국민이 똘똘 뭉쳐 이걸 수용하고 받아들인다면 세계 최고의 슬라브 민족이 될 것인데, 그의 눈에 러시아는 온갖 악령(사회주의, 허무주의적 서구주의)이 판을 치고 있는 돼지우리 같은 곳이었다. 그 더럽혀진 러시아를 심판하고 바로잡기 위해 도스토옙스키의 영혼이 투영된 인물들(스타브로긴, 샤토프, 키릴로프, 스테판 트로피모비치, 표트르 스테파노비치)을 전면에 내세워 러시아를 바꾸려 하지만 한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하는지는 우리 모두가 알 것이고, 그 결과는 소설 속에서 확인했으면 한다. 결론은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를 무척이나 사랑했고, 그 사랑을 통해 자신이 겪었던 종교적, 사상적, 내면적 흐름을 『악령』에 풀어놓았다고 생각한다. 그 흐름을 따라잡기가 무척이나 힘이 들었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수많은 사건과 논쟁을 다 겪은 도스토옙스키였기에 이렇게나 울림이 큰 소설이 탄생되지 않았나 싶다.
책을 읽고 난 후, 책 내용보다는 고뇌에 찬, 삶의 의미를 상실한, 그렇지만 어떻게든 이 위기를 극복하려 애쓴 도스토옙스키가 정말 대단해 보였다. 소설을 읽으면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다. 『악령』이란 소설은 교묘하게 내 감정선을 건드려 그의 영혼에 들어가게끔 만들었다. 막대한 분량과 도스토옙스키 특유의 난해함 때문에 책 읽기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한건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알코올과 도박, 뇌전증 등 정신적으로 힘든 나 자신을 위해 타지에서 소설을 써야만 하는 그의 정신적인 고뇌를 지켜보는 거였다. 책을 통해 힘듦이 카타르시스로 변화되기도 했다. <악령>에서 샤토프가 스타브로긴의 뺨을 후려칠 때는 얼마나 흥분이 되던지(-?-).
마지막으로 다른 출판사의 책으로 읽다가 너무 집중이 안 돼 지만지의 『악령1, 2』를 읽었는데 완전 대만족했다. 외국소설은 번역을 까다롭게 보는 편인데 김정아 번역가를 처음 들어보기도 했고, 이력이 색달라서 꺼려 했는데 도스토옙스키(슬라브 문학)를 연구한 박사님은 달랐다. 번역도 유려했고 문장을 읽는데 막힘이 없었다. 마지막에 60여 페이지에 달하는 해설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김정아 번역가가 『악령』을 다 읽은 독자들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했거니와 작품 해설을 읽고 감동받은 건 비밀로 해두자. 책 말미에 『악령1, 2』 번역을 끝내며 이렇게까지 홀가분한 적은 없었다고, 섭섭함은 하나도 없다는 김정아 번역가의 말씀에 저 또한 공감하면서 『악령』을 안 읽은 분들이라면 이번 기회에 꼭 읽어서 도스토옙스키가 전하는 악령의 세계에 빠져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