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 용서받을 자격과 용서할 권리에 대하여
시몬 비젠탈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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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죽을 때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저질렀던 악행이나 비리에 대해 참회를 하는 경우가 많다. 용서를 바라는 의미도 있겠고, 반성의 의미도 있을 거라고 본다. 하지만 이런 행위가 자기 자신에게는 참회나 반성의 계기가 될진 몰라도 그 행위로 인해 고통받았고, 현재도 계속 고통받는 사람들에겐 너무나도 잔인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참회하고 반성하고 있으니 자신의 죄를 사하여 준다거나, 이제 죽을 때가 됐으니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짐을 조금이나마 덜었으면 한다는 그들의 참회가 어떻게 생각하면 화가 난다. 물론 그들의 진정성 있는 고해나 고백을 폄훼하고 싶지는 않다. 단, 거기까지다. 어느 누구도 가해자의 범죄나 악행으로 인해 희생이 된 사람들의 용서를 대신할 수 없다. 용서는 피해자가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는 하늘에서 가해자를 지켜보며 읊조릴 것이다. “당신이 죽어서 무덤에 묻혔을 때 그 무덤가에 피어나는 해바라기조차도 보기 싫다고, 그 해바라기를 뽑아 없애버리고 싶다”고 말이다.


킬링필드로 불리는 캄보디아 내전, 르완다의 종족 분쟁, 보스니아 내전, 그리고 지금도 진행 중인 시리아 내전은 학살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손에 꼽는 게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인데 학살된 수만 해도 600만 명이 넘으니 정말 인간의 광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한 가운데 있던 군인 한 명(카를)이 시몬 비젠탈에게 사죄와 반성을 하게 되면서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는 시작한다. 죽어가는 나치 병사가 유대인 강제수용소에 수감 중인 한 유대인에게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용서를 구했지만 그 유대인은 침묵했다. 그 침묵이 용서의 의미였을 수도 있고, 그 용서의 거절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나치 병사의 용서에 침묵한 시몬 비젠탈은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남긴 채 53명의 답변으로 그 질문을 대신한다. 53명의 면면에는 티베트의 불교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도 보이고, 후기 산업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남긴 철학자인 허버트 마르쿠제도 용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남겼다. 영화 <킬링 필드>의 실제 주인공인 디트 프란, 198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데스먼드 투투 등 세계에서 정치, 역사, 윤리, 문화, 종교 등 각 분야 유명 인사들의 답을 통해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지, 아닌지를 밝히고 있다.


다른 고결한 행동들과 마찬가지로 용서라는 행위는, 용서받는 당사자들을 포함한 타인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즉, 내가 베푼 자비조차도 가까이서 뜯어보면 일종의 오만한 행위로 드러날 수 있다. 어쩌면 내가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내가 상대방보다 우위에 선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즉, 내가 상대방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보게 된다. “도대체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누군가를 용서하는가?” (본문 201쪽 中)


53명의 ‘용서’에 대한 답변에는 카를의 참회를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의 목소리도 있었고, 종교라는 이름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통해 카를을 용서했어야 한다는 입장도 있었다. 그중에서 같은 종교인이면서 ‘용서’에 대해 다른 목소리를 낸 유대교 신학자 앨런 L. 버거와 가톨릭 수녀인 호세 호브데이의 답변은 많은 걸 생각하게 했다. 내게 죄를 짓는 사람은 용서할 수 있지만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사람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앨런과 망각과 용서는 다른 듯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이고, 자신이 당한 악행을 떠올릴 때마다 용서라는 단어가 떠오르기에,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호세 호브데이 수녀의 말에서 용서라는 단어 속에 포함된 함의가 얼마나 깊고 넓은지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해바라기는 기다림을 상징한다. 공교롭게도 이 책은 <해바라기>라는 이름으로 1976년에 출간됐다. 여기서 해바라기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가해자의 무덤 옆에 조용히 피어나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참회하고 반성하기만을 기다렸을 거라고 본다. 그 참회와 반성을 피해자가 받아주고 용서해주는 것은 다음의 문제다. 먼저 자신의 잘못을 뼈저리게 뉘우치고, 거기에 대한 죄를 달게 받는 것이 가해자가 피해자를 위한 최선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아직까지도 이 세상엔 용서받지 못할 일들이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학살이 자행되는 그곳에서 죽음을 당했던, 지금도 죽음을 당하고 있는 그들의 마음속이 어떠할지를 생각해본다면 과연 용서가 아름다울 수 있을지는 시몬 비젠탈처럼 침묵으로 대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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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9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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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봤던 영화가 자꾸 생각난다. 자기 자신을 ‘범죄자’라는 파멸의 길로 내몬 것도 사랑이었고, 그로 인해 희망도 없이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핏기 없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짓게 하는 것도 사랑이었는데, 그 사랑은 시애틀의 자욱한 안개처럼 ‘애나’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 채 홀연히 떠나가 버렸다. 양손에 든 커피를 집어던진 채 ‘훈’을 찾아 나선 애나의 그 애절한 모습에서, 교도소에서 출소한 후 카페에 앉아 오지 않을 훈을 기다리면서 담담하게 뱉어내는 애나의 독백에서, 완연히 깊어가는 가을의 쓸쓸함을 엿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을만 되면 <만추>가 생각나고, 사랑이 두려웠던 애나의 표정을 통해 쓸쓸하고 고독한 가을의 감성을 느낄 수 있어서 난 <만추>란 영화가 참 좋다. 이제 곧 완연한 가을이 올 테고, 그 가을을 핑계 삼아 난 오늘도 애틋한 로맨스를 꿈꾼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도 가을과 딱 맞아떨어지는 책이다. ‘폴’, ‘로제’, ‘시몽’이라는 세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애매모호한 사랑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한 작품이 바로《브람스를 좋아하세요...》다. 분량도 짧고, 내용도 어렵지 않아서 쉽게 읽히는 책이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이 녹록지 않기에 쉽게 읽을 수만은 없는 책이기도 하다. 6년 동안 사귀고 있는 폴과 로제의 관계에서부터, 권태롭고 위태위태한 폴과 로제 사이에서 새로운 인물인 시몽의 등장으로 인해 이들이 어떻게 변해가는지가 이 소설의 큰 플롯이라 하겠다. 그 플롯을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과 그 감정을 통해 변해가는 모습들이 사람들마다 다를 수 있기에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도 각자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많이 다를 거라고 본다. 그 다름을 생각하면서 이 소설을 읽는다면《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훨씬 친절하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커플에게 가장 치명적인 적은 ‘권태’가 아닐까? 그 권태가 익숙함이 되는 순간 서로 오가는 말투부터 날이 서게 될 것이고, 그 칼날이 모욕감으로 되돌아올 때 두 사람은 이별이라는 수순을 밟는 게 대부분의 장수 커플이 겪는 고통이자 아픔이다. 폴과 로제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서로에게 너무 익숙해져 버린 나머지 폴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고, 로제 또한 폴이 아닌 다른 여자들과의 유희를 통해 그 권태를 벗어나기에 급급했다. 그 찰나에 시몽이 나타났고, 폴은 시몽의 열정적인 구애에 심하게 흔들린다. 그 흔들림 속에서 폴의 마음에 남아 있던 건 다름 아닌 익숙함이었다. 익숙함이 폴과 로제를 소원하게 했고, 묘하게도 그 익숙함이 폴과 로제를 다시 재회하게 만들었다. 이 대목에서 서로에게 익숙해진 연인들이 느끼게 되는 소외와 고독, 외로움이 다시금 익숙함으로 덮어지는 과정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폴은 익숙함을 선택했고, 그 결말에 많은 이야깃거리가 담겨 있기에 여러분들은 책을 통해 익숙함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확인했으면 한다.


겨울의 단조로운 나날, 고독한 그녀 앞에 끝없이 펼쳐진 집과 상점 사이의 똑같은 길들, 로제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수치심과 더불어 수화기를 든 것을 후회하게 만드는, 지독히도 배신감을 느끼게 하는 전화, 그리고 영영 되찾을 길 없는 긴 여름에 대한 향수, 그 모든 것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무슨 일인가 일어나야 한다.’라는 절박감과 더불어 그녀를 무력하고 수동적으로 만들었다.(본문 95쪽 中)


 사랑이라는 뜨거운 감정을 오롯이 상대에게 집중해도 그 유효기간은 3년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그 기간이 넘어가면 다들 익숙함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을 알아달라고 상대의 가슴을 상처 내기에 바쁘다. ‘브람스’보다는 ‘모차르트’가 좋다고, 왜 유명한 모차르트를 놔두고 브람스를 듣냐고 아우성이지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보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알았으면 한다. 가을에 정말 어울리는 책이었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커플이나 너무 오래 만나 권태감을 느끼는 연인들이 읽으면 더없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 안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다시 한번 불태우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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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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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희생하거나 공공선(公共善)에 자신의 몸을 바치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준다는 거 자체가 고귀하거나 순수함을 넘어서 사람이라면 하지 못할 그 어떤 선을 넘어서까지 지키고자 한 것에 대한 대리만족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예부터 내려오는 심청전이 대표적이다. 줄거리는 정말 단조롭고 뻔한 결말을 가지고 있지만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이의 희생정신이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중국 작가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 또한 피를 팔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허삼관의 이야기다. 어찌 보면 피를 파는 단순한 이야기지만 <허삼관 매혈기>속에는 중국의 감추고 싶은 역사가 들어 있고, 그 속에서 허삼관과 그 가족의 치열한 고군분투와 위화라는 작가의 글솜씨가 더해져서 이 작품이 많은 분들께 사랑을 받지 않았나 싶다.


이번 책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은 카라얀을 능가하는 지휘 솜씨로 관객을 휘어잡았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위화의 무대에서의 문학과 음악을 지휘하는 손놀림은 눈이 부셨다. 소설이 아니라 산문집이라서 좀 더 자유로운 점도 있겠으나 그의 현란한 지휘 솜씨에 넋이 빠졌다고나 할까. “작가의 견해” 라는 말로 보르헤스의 소설에 갈증을 해갈하고, 멘델스존의 선율을 통해 개인의 경험과 상상을 훌륭하게 연주하더니 마지막에 가서는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재해석하면서 멋지게 앙코르를 끝마쳤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위화는 한점의 오차도 없이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작가(음악가)들의 문장과 음악 전체를 진두지휘하는 지휘자처럼 이끌었고, 때로는 시체를 검안하는 부검의처럼 정확하고 자세하게 문학의 선율과 음악의 서술을 해부해냈다.


작가들의 작품과 그 작품을 통해 나타난 작가들의 삶에 대한 비유와 평가 또한 이 책을 읽은 재미 중 하나다. “향수도 없고, 군더더기 화장이나 치장도 없이 맨발로 어슬거린다”는 표현을 통해 작품과 삶을 나란히 한 윌리엄 포크너가 얼마나 소박한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었고, 경계 없는 작품 세계를 통해 ‘광활한 문학세계란 이런 것이다‘를 표현한 멕시코의 소설가 후안 룰포 부분을 읽으면서는 생소한 작가지만 그 작가의 작품세계가 무척이나 궁금해서 그가 쓴 작품들을 메모까지 하게 했다. 거기에 무한적으로 부드러움의 상징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극단적 날카로움의 상징인 카프카를 비교하는 문장에서는 ‘위화가 작가들의 면면을 정확하게 이해하면서 통찰하고 있구나’를 느낄 수 있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서술에서 응시를 통해 영혼과 사물의 거리를 단축시킨다면 카프카는 절단으로 그 자리를 넓힌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육체의 미궁이라면 카프카는 심리의 지옥이며,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만개한 양귀비꽃처럼 혼곤한 잠으로 이끈다면 카프카는 혈관에 헤로인을 투입한 듯 강렬한 흥분을 일으킨다.(본문 41쪽 中) 이 문장만으로도 야스나리와 카프카의 문학에 빠지고 싶지 않은가? 아름다운 첫 문장으로 손꼽히는 <설국>도 유명하지만 이 책에서 소개하는 <이즈의 무희>를 통해 야스나리 특유의 부드러움을, 카프카의 <유형지>를 통해 카프카 작품의 명료함과 날카로움을 여러분들도 함께 음미했으면 좋겠다.


정치적인 용어 중에 ‘확증 편향’이라는 말이 있다. 정보의 객관성과는 상관없이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나 성향을 선택적으로 수집하는 걸 말한다. 한마디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는 것만 믿는 현상을 뜻하는데, 사상뿐 아니라 예술에서도 이 확증 편향의 편식이 심하다. 이 현상을 위화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작곡가인 차이콥스키를 통해 확증 편향에 대한 경계의 메시지를 보낸다. 차이콥스키의 내적 역량과 음악적 순결함을 곱씹어 보고, 다시 읽기를 통해 차이콥스키와 톨스토이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부탁하고 있다. 그렇다. 문학과 음악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누구나가 감정을 표출할 수 있다. 다만 그 감정으로 인해 이유 없이 거장들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사유를 갉아먹는다는 점을 명심했으면 한다. 위화의 책 제목처럼 문학에서 선율을 느끼고, 음악에서 서술을 보았다면 그것 또한 여러분의 정신적인 성숙도를 한 단계 높이는 기회가 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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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위안 - 어느 날 찾아온 슬픔을 가만히 응시하게 되기까지, 개정판
론 마라스코 외 지음, 김설인 옮김 / 현암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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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태풍을 시샘하기라도 하듯 밖에는 비가 내린다. 강한 바람과 함께 창을 내리치는 빗소리가 그리 싫지만은 않다. 뜬금없는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 빗소리가 슬픔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모조리 쓸어가 버렸으면 좋겠다. 그럴 리 없겠지만. 책 한 권을 읽고 이렇게 마음의 동요가 일었던 적도 없었지 싶다.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견디지 못할 슬픔이 찾아온다면 어떻게 될까? 이 질문에 수없이 머리를 짜내어보지만 뚜렷한 해답은 보이지 않고, 지난 추억이나 흘러가버린 강물처럼 언젠가는 견디지 못한 슬픔도 희석되어 견디게 되고, 그 견딤을 계기로 새로운 날을 살아가겠다란 막연하고 원론적인 생각만을 해보게 된다.


슬픔 중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이 인간에게 닥치는 가장 극한의 슬픔이라고 생각한다. 병이나 불의의 사고, 노화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거나 죽게 되었을 때 곁에 있던 사람들이 느끼는 슬픔과 상실감은 우리가 생각하는 거 이상으로 무거울 것이다. 그 무거움을 감당해야하는 사람들에게 무게를 덜어주기 위해 같이 들어준다고 해서 그들의 슬픔이 가벼워질까? 그 슬픔을 같이 애도한다고 해서 그 상실에 대한 빈자리를 채울 수 있을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 슬픔은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고, 그 어떤 것으로도 충족될 수 없다. 슬픔에 빠진 사람들은 고통스럽고, 괴롭다. 거기에 ‘소외감’이라는 감정이 슬픔에 달라붙는 순간 그 감정은 순식간에 한 사람을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가기에 충분하다. 그렇기에 슬픔에도 위안이 필요한 것이고, 그《슬픔의 위안》을 통해 슬픔을 긍정할 수 있고 희석할 수 있다면 슬픔이라는 감정 또한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꼭 연습해야 하는 하나의 통과의례라고 생각한다.


슬픔에는 절대적인 것이 없다. 쉽게 견딜 비법도 없고, 빠져 나갈 구멍도 많지 않다. 사별의 슬픔처럼 개인적인 경험을 이해하고 나면,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사람과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슬픔을 이해하는 자신만의 길을 찾아야 한다. 책은 그 길을 가는 동안 동행해줄 뿐이다. 슬픔은 아주 개인적인 경험인 만큼, 책을 읽다 보면 분명 당신은 독특한 상황에 맞는 길을 찾아낼 것이다. 부디 그러길 바란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존재 이유다. (프롤로그 中에서)


책에서는 슬픔에 맞닥뜨리고, 슬픔에 빠지고, 슬픔에서 빠져나오고, 나중에 가서는 슬픔의 흔적이 남는 과정을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한다. 큰 슬픔을 경험했을 때 사람들은 참을 수 없다고 말을 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했을 때 그 죽음에 대한 슬픔은 참을 수 없다. 하지만 ‘슬픔은 참아야할 무엇이자 우리가 짊어져야할 무거움’이라고 책에서는 말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뒤 떠오르는 생각이나 영상들은 그 슬픔의 무게를 구성하고 이 슬픔을 참을 수 없게 만들어버리지만 그 무게는 누구에게나 무겁고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나를 힘들게 하는 슬픔의 짐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짊어질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죽은 사람의 물건(소지품) 또한 슬픔을 배가시키는 한 요소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 당일엔 막상 슬프지도 않고,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는 분들의 얘기를 종종 듣는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신발장에 가지런히 놓아둔 엄마의 신발을 보거나 옷장 속에 걸려 있는 아빠의 땀 냄새가 베인 점퍼를 본 후 극도의 슬픔을 표출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모든 게 물건 속에 들어있는 의미가 가볍지 않아서일 것이다. 죽은 사람의 물건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는 우리의 중요한 일부이자 흔적이기에 떠난 사람의 소지품을 버리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이런 물건들이 내 손을 떠나 바깥세상에 나간다면 나만큼 그 물건들을 가치 있게 여기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물론 그 물건이나 소지품이 나에겐 무척이나 소중하겠지만 그 물건들을 언제까지 내 곁에 둘 수 없을 테니 죽은 사람의 물건이나 소지품에 그렇게 큰 미련을 두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 바로 ‘탐닉’이었다. 그 중에서도 사별이나 죽음을 경험한 사람에게 탐닉은 큰 위안이 될 수 있다는 부분에서는 큰 충격이었지만 이 부분을 읽고 난 후엔 탐닉도 위안이 될 수 있다는 말에 공감을 하게 됐다. 사별이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로하는 흔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탐닉’이다.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 속에서 불현듯 식욕에 대한 욕구가 찾아오고, 사랑하는 이를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빠져들고 싶은 탐닉의 또 다른 영역이 충격적이게도 섹스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테지만 먹는 것이나 성적 욕망을 품는 것, 사랑하는 것 ,무언가를 미치듯이 탐닉하는 것들은 인간의 육체적인 본능임과 동시에 영혼의 본능이기도 하다는 것을 전제로 두자. 그리고 그 전제를 바탕으로 죽어가는 누군가를 보살피고 있거나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고 있다면 죽음과 멀리 있다고 느끼려는 이 탐닉을 정상적으로 이해하고 바라봐달라고 책에서는 당부하고 있다. 슬퍼하는 사람에게 여유를 주면서 그 슬픔 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그 무언가에 집중하는 그들의 탐닉 속에는 죽음에 대한 분노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길 바라면서.


음식과 달리 오명이 따를지 모르지만 사실 섹스에 대한 탐닉은 음식에 대한 충동과 그 뿌리가 같다. 생명에 대한 갈망이자 생명의 힘을 손끝으로, 온몸으로 느끼고자 하는 욕구인 것이다.( 책 본문 中)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죽음을 경험한다. 그 죽음을 통해 슬픔이 발생하고, 그 슬픔의 무거움과 가벼움 속에서 우리는 슬픔이라는 여행 속에 빠져든다. 책에서처럼 슬픔의 무게를 경험하고, 슬픔과 맞닥뜨려서 슬픔에도 빠져보고, 슬픔에서 빠져나오면서 지난 슬픔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는 리허설이 없고, 그 죽음은 갑작스럽게 찾아오기에 슬픔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이 책《슬픔의 위안》이 죽음 때문에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분들께 그 슬픔을 반감시킬 순 없겠지만 책 제목처럼 슬픔을 위로하고 마음을 편하게 해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될 거라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많은 분들이 슬픔의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고, 그 위로를 통해 직면한 슬픔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났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다른 책을 읽다가 책 속에서 작가에게 소개받아 읽은 책이 바로《슬픔의 위안》이었는데 죽음에 대해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들게 한 책이고, 우리말로 번역도 잘 돼 있어서 막힘없이 읽을 수 있었음에 관계자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이렇게 괜찮은 책을 읽고 나면 책을 출판한 출판사가 괜히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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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삶 - 사유와 의지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 / 푸른숲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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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사유에 대한 보고서


개인은 전체 속에서 존재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바탕으로 국가권력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간섭하고 통제했던 전체주의는 파시즘, 나치즘, 볼셰비즘, 군국주의 등 나라마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 중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잔인하고 악랄했던 사건을 뽑으라면 아돌프 히틀러의 ‘홀로코스트(Holocaust)’와 스탈린의 ‘볼셰비즘 독재’라고 본다. 1940년 당시 유럽에 살고 있던 유대인 600만여 명을 인종청소라는 명목 아래 체계적으로 학살한 히틀러의 만행은 정말 치가 떨릴 정도로 잔인하고 무자비했다. 스탈린 또한 공산당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들(농부들)을 강제노동수용소인 ‘굴라크(Gulag)’에 감금하면서 강제노동을 시켰는데, 그 굴라크에서 죽어 나간 숫자만 600만~1,500만 명에 이른다고 하니 스탈린의 독재 또한 히틀러 못지않게 정말 끔찍하면서도 너무 잔인했다. 이렇듯 전 세계에서 ‘전체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독재와 학살을 보고 자란 독일 태생의 유대인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에게 전체주의가 저지른 만행은 여러 생각을 갖게 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예루살렘 법정에서 진행된 아이히만 재판을 참관하면서 자신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 죄가 없다는 그의 말에서 한나 아렌트의 상징이 된 ‘악의 평범성’이 탄생되기에 이른다.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에서 한나 아렌트는 그가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함 속에서 특징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이 유대인 학살의 주범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가운데 드러난 사유하지 않음이었다. 아이히만을 통해 ‘사유의 부재(무사유)’를 발견한 한나 아렌트는 사실적 경험에서 형성되는 도덕적 질문들에 대한 어떤 의심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그 의심을 해부한 책이 바로 한나 아렌트 철학의 정수를 담은 《정신의 삶》이다.


그녀의 전작인 <인간의 조건>에서 ‘전체주의적 과정’과 그로 인한 근본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이 필요 없는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는 목표 아래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쓸모없게 만드는 것이 전체주의적 과정이고, 그 과정을 통해 인간을 쓸모없게 만들어버리는 전체주의적 체계가 ‘근본악’을 만들었다”고 말이다.(‘인간의 조건’ 31쪽 中, 한길사) 그러면서 인간의 조건의 핵심이자 근간을 이루는 노동, 작업, 행위를 활동적 삶의 주요 테마로 삼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정신적 삶》에서는 우리의 삶에서 정신의 삶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하면서 그 근간으로 사유, 의지, 판단을 조명하고 있다. 사유, 의지, 판단이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에서 경험하는 근본적인 활동임에도 이러한 정신활동이 직업적인 철학자들의 몫이었기에 접근하기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정신적 삶은 활동적인 삶과 더불어 철학자들을 포함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경험하는 것이기에 정신적 삶을 이해하고 노력하는 것은 우리들 삶을 이해하는 과정이고, 그 과정 속에서 사유, 의지, 판단의 중요성을 한나 아렌트의 《정신적 삶》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사유]

한나 아렌트는 기존에 있던 형이상학적 전통을 비판하면서 사유를 시작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세계를 [존재=현상]이라는 명제를 통해 정신적 삶과 정치적 삶의 원초적 본질에 대해 고대부터 현재까지를 아울러서 ‘정신의 삶’으로서 사유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하나의 현상에서부터 출발해서 현상세계 속 정신 활동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유란 무엇을 의미하고, 우리는 왜 사유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근대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칸트, 마르크스 등의 철학자들을 통해 현상의 우위성과 사유의 원형, 사유, 이성, 의미의 관계를 중심으로 사유에 대해 살피고 있다. 관조적 삶이 활동적 삶보다 우위에 있다는 기존의 틀을 과감히 깨부수고, 활동적 삶과 정신적 삶은 서로 대조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계 속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게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사유의 필수조건이다.


[의지]

사유와 이성, 의미의 상관관계와 그 원형을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살폈다면 의지의 중심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있다. 의지와 지성, 자유의 연관성과 그 의미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 사도 바울, 에픽테토스, 아우구스티누스의 의지이론을 통해 의지를 소개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토마스 아퀴나스와 둔스 스코투스를 통해서는 의지와 지성의 우위성에 대해 밝힌다. 아퀴나스는 지성이 의지보다 우위에 있다는 입장이고, 둔스 스코투스는 지성보다 의지의 우위성을 주장한다. 마지막에 가서는 독일의 관념론과 니체와 하이데거를 통해 의인화된 의지의 개념(독일의 관념론은 의지를 형이상학적 범주로 설정)과 의지를 존재론적 범주가 아닌 인간 능력으로서의 의지에 정면으로 도전한 니체의 영원회귀와 초인, 하이데거의 ‘존재의 역사’ 이념을 통해 의지를 설명한다. 이렇듯 ‘의지’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한나 아렌트는 여러 철학자들을 등장시켜 그들의 주장을 서로 반박하게 하면서 의지 활동의 역사가 반대와 대립의 연속이었음을 상기시킨다.


[판단]

‘판단’의 중심엔 칸트가 있고, 그의 저서인 <판단력비판>을 통해 ‘판단’을 다루는데 한나 아렌트는 이 책 ‘의지’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유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는 이 난관은 다른 정신 능력, 즉 시작 능력 못지않게 신비스러운 능력인 판단 능력에 대한 호소를 통한 경우를 제외하고 열리거나 해결될 수 없다.” (698쪽 中) 이렇듯 ‘판단’은 정신의 삶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정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인데 한나 아렌트는 ‘의지’ 원고를 끝내고 얼마 되지 않아 심장마비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게 된다. 고로 ‘판단’을 집필하지 못한 것은 한나 아렌트가 생전에 강의한 칸트 정치철학 강의 발췌문으로 ‘판단’을 대신하는데 이 부분은 한나 아렌트의 역작인《정신의 삶》에서 크나큰 오점이자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나 아렌트를 생각하면 사유한다는 자체가 사치로 느껴질 만큼 정신 활동에 대한그녀의 학문적 열정과 그 깊이는 정말 대단했다. 700페이지가 넘는《정신의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해 그녀의 전작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인간의 조건>을 읽었지만 그녀가 말하는 사유와 의지, 판단에 대한 철학들은 너무나 깊고 난해했다. 그래서 말인데 평생을 바쳐 사유에 대해 연구한 한나 아렌트를 생각한다면 이 책《정신의 삶》을 읽을 땐 한나 아렌트처럼은 아니더라도 사유에 대한 지식을 공부하면서 읽으라는 조언을 해주고 싶다. 소크라테스부터 아우구스티누스, 하이데거, 니체, 칸트에 이르는 철학자들의 논리와 철학을 이해하고 이 책을 읽는다면 조금은 수월하게《정신의 삶》에 접근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아이히만이 보여준 ‘사유의 부재’를 통해 ‘악의 평범성’의 무서움에 대해 알게 됐다면, 이제 우리는 한나 아렌트의《정신의 삶》을 통해서 사유하고, 의지하며, 판단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곧 내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무엇이 우리를 사유하게 하는가라는 질문은 우리는 왜 사유하는가라는 질문과 연계된다.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에 사유한다. 사유한다는 것은 진정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691쪽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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