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해설
<도덕경>은 약 2500여년 전에 노자가 쓴 것으로 동서 고금을 통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읽어 온 동양의 고전이다.그것은 81장 5000여자로 구성되어 있다.'道'자로 시작하여 도의 내용을 가지고 있는 "도경"(1~37장)과 '德'자로 시작하여 덕의 내용을 가지고 있는 "덕경"(38~81장)을 합쳐 <도덕경>이라 부른다.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며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이라고 알았을 때 거기서 추함이 생겨난다.세상 사람들이 모두 선을 선이라고 알았을 때 거기서 악이 생겨난다.
결국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아주고, 쉽고 어려움은 서로를 이루어주며, 길고 짧음은 상대를 드러내주고, 높고 낮음은 서로를 다르게 하며, 음과 소리는 서로 화답하고, 앞과 뒤는 서로를 뒤따른다.
이리하여 현인은 행하지 않고 사물을 처리하고 말없이 가르침을 설명한다. 만물이 제각각 생겨나고 그러면서도 현자는 그것들로부터 떠나지 않는다. 현인은 그것들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그러면서도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현인은 행하고 그러면서도 착복하지 않는다. 이룩하고 그러면서도 무엇하나 공적을 주장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공적을 주장하지 않는 탓으로 그 공적을 현자에게서 빼앗아갈 수가 없다. 도는 텅 빈 그릇이니 그것은 퍼내도 다하는 일이 없고 헤아릴 수 없도다.
골짜기 신은 결코 죽지 않는다. 그것은 신비스런 여성으로 불린다 신비스런 여성의 문 그것은 하늘과 땅의 근원이다 면면히 그것은 존속한다 그것을 이용하면 쉽게 도움이 된다.
활을 끝까지 잔뜩 잡아당기면 알맞은 데에서 그만 두어야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칼에 담금질을 하여 날카롭게 하면 날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금은보화가 저택을 채우면 그것을 안전하게 지킬 수가 없을 것이다. 부나 명성을 자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멸망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공을 이루면 물러나는 것 그것이 하늘의 도(道)이다.
서른 개의 바퀴살이 바퀴통 주위로 모인다. 그러한 없는 것(바퀴의 가운데 구멍)에서 수레바퀴의 효용이 나온다. 점토를 반죽하여 그릇을 만든다. 그 없는 것(그릇의 빈곳)에서 그릇의 효용이 나온다. 집에 문과 창문을 뚫는다. 그들 없는 것(텅빈 공간)에서 집의 효용이 나온다. 그러므로 사물의 존재에 의해서 우리는 이익을 얻고 사물의 비존재가 우리들에게 도움을 준다.
옛날의 현자들에게는 미묘한 지혜와 이해의 깊이가 있어서 그 깊이는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들은 헤아리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부득이 그들을 이렇게 묘사하는 수밖에 없다.
그 신중함은 겨울의 강을 건너는 것 같고 그 주저함은 주위의 위험을 두려워하는 것 같고 그 예의 바름은 손님으로 행동하는 것 같고 그 자기 연마는 녹기 시작한 얼음과 같고 그 순박함은 거죽을 벗기지 않은 나무 토막 같고 그 마음의 열림은 골짜기 같고 그리고 그 자유로운 교제는 흐린 물과 같다.
누가 혼탁한 세계에서 안식을 찾아낼 수 있겠는가? 조용히 누움으로써 그것은 깨끗해진다. 누가 그 온화함을 오래 보존할 수 있겠는가? 활동에 의하여 그것은 생명를 되찾는다. 이 도(道)를 확고히 신봉하는 자는 지나침에서 몸을 삼간다. 지나침에서 몸을 삼가기 때문에 그는 벌어짐이나 고쳐 만듦도 초월하고 있다.
수동성의 심오함을 깨치고 고요함의 기반을 견고히 지켜라.
만물이 형태를 취하여 활동을 일으킨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들이 원래의 안식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지켜 본다. 마치 풍요롭고 무성하게 자라는 초목도 그것이 생겨난 근원(토양)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다.
그것이 사람의 천명(天命)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사람의 천명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영원의 법칙을 발견하는 일이며 그 영원의 법칙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리고 영원의 법칙을 모르는 것은 곧 재난을 초래하는 것이다.
굽히는 것이 완전한 채로 남는 길이다. 휘는 것이 곧바로 되는 길이다. 텅 비어 있는 것이 가득 차게 되는 길이다. 너덜너덜해지는 것이 새로워지는 길이다. 궁핍한 것이 풍요로워지는 길이다
많은 것을 갖는 것은 혼란스러워지는 길이다.
그러므로 성자는 '하나'를 부둥켜 안아서 세계의 모범이 된다. 성자는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그 때문에 빛나고 있다. 성자는 자기를 정당화하지 않고 그 대문에 널리 알려지고 있다. 성자는 자만하지 않고 그 대문에 사람들의 신용을 얻는다.
성자는 우쭐대지 않고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 위에 선다. 천하의 어느 누구도 성자를 논파할 수 없는 것은 그가 논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옛날 사람이 '굽히는 것이 완전한 채로 남는 길이다' 라고 한 것은 어찌 진실이 아니겠는가?
이리하여 성자는 남고 천하는 그에게 예를 다한다
상등의 선비가 도(道)를 들으면 열심히 그것에 따라 살아가려고 한다. 중등의 선비가 도를 들으면 그것을 알아차린 것 같기도 하고,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가장 하등의 선비가 도를 들으면 큰 소리로 비웃는다. 만일 그것이 비웃음받지 않는다면 도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격언에 이르기를 '도를 이해하는 자는 이해력이 느린 것처럼 보이고 도에 빼어난 자는 후퇴하는 것처럼 보이고 평탄한 길을 가는 자는 기복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최상의 덕은 텅빈 골짜기 같고 순백은 더러운 것처럼 보이고 큰 덕은 모자라는 데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견고한 덕은 약하디 약하게 보이고 순수한 가치는 더러운 것마냥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것을 빠져 나간다. 형태를 갖지 않은 것이 틈새도 없는 것을 관통한다. 이것에서 나는 무위(無爲)의 가치를 안다. 말 없는 가르침 그리고 무위의 가치는 우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최고의 완성은 미완성과 비슷하지만 그 효용은 결코 손상당하지 않는다. 최대의 풍요로움은 빈약하게 보이지만 그 효용에느 결코 결함이 없다. 가장 똑바른 것은 굽은 것처럼 보이고 최고의 기량은 서투르게 보이고 최대의 웅변은 말더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움직임은 추위를 극복하지만 가만히 있는 것은 열을 극복한다. 온화하고 조용한 자가 우주의 안내역이 된다.
문에서 밖으로 나가지 않고서도 사람은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창문에서 밖을 내다보지 않고서도 사람은 하늘의 도(道)를 볼 수가 있다.
지식을 좇으면 좇을수록 아는 것은 적어진다. 그 때문에 성인(聖人)은 분주하지 않고서도 알고 보지 않고서도 이해하고 행하지 않고서도 이루어 낸다.
지식을 배우는 사람은 매일매일 사물을 몸에 익히는 것을 지향하고 도(道)를 배우는 사람은 매일매일 상실해 가는 것을 지향한다. 끊임없이 상실해 감으로써 인간은 최후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에 귀착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이룩한다. 부득이 무엇인가를 해서는 천하를 잡는 것은 바랄 수도 없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고 그 칼을 무디게 하고 그 뒤얽힘을 풀고 그 빛을 부드럽게 하고 그 혼란을 가라앉힌다. 이것이 신비스러운 통일이다.
그렇게 했을 때 사랑도 미움도 그를 건드릴 수가 없고 이익도 손실도 그가 있는 곳까지 도달할 수가 없고 명예도 치욕도 그에게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 그 때문에 그는 항상 세상에서 존경받는 자인 것이다.
무위(無爲)를 행하고 무사(無事)를 일삼고 무미(無味)를 맛본다. 크거나 작거나 많거나 적거나 미움에는 덕을 가지고 보답하라.어려운 일은 그것이 아직 쉬운 동안에 처리하고 커다란 일은 그것이 아직 작은 동안에 처리한다. 이 세상의 난제는 그것이 아직 쉬운 동안에 처리되어야 하고 이 세상의 큰 문제는 그것이 아직 작은 도안에 처리되어야 한다. 그 때문에 성인(聖人)은 결코 큰 문제를 상대하지 않음으로써 큰 일을 이룩한다.
경솔하게 약속을 하는 자는 좀처럼 그 신의를 지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많은 사물을 가볍게 보는 자는 많은 곤란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조차도 곤란하게 하는 일이 있어서 그 때문에 결코 곤란과 만나는 일이 없는 것이다.
가만히 있는 것은 유지하기 쉽다 아직 표면에 나와 있지 않은 것은 처치하기 쉽다. 얼음처럼 연약한 것은 녹기 쉽고 미세한 것은 흐트러지기 쉽다. 형태를 취하기 전에 일을 처리하고 무질서는 퍼지기 전에 저지해야 한다. 한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도 보잘것없는 싹으로부터 시작되고
아홉 층의 계단식 밭도 한 개의 흙덩이로부터 시작되고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된다.
행동을 일으키는 자는 일을 망치고 고집하는 자는 잃는다. 성인은 행동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망치지 않고 고집하지 않기 때문에 잃지 않는다. 사람들의 일은 종종 완성을 눈앞에 두고 망쳐진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끝에 신중을 기함으로써 실패는 막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성인은 욕망을 갖지 않는 것을 소망하고 손에 넣기 힘든 물건을 귀하게 여기는 일이 없고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우고 대중이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다. 이리하여 성인은 자연의 이치에 손을 빌려주지만 구태여 간섭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천하는 모두 나의 가르침, 도(道)는 어리석음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고 한다. 그것이 광대하기 때문에 그것은 어리석음과 상통하는 것이다. 만일 어리석음과 상통하지 않으면 그것은 오래 전에 하찮은 것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나에게는 세가지 보배가 있다 그것들을 지키고 소중하게 간수해 두는 것이 좋다.
첫째는 사랑
둘째는 결코 지나치지 않음
셋째는 결코 세상의 선두에 서지 않는 것이다
사랑이 있으면 두려움을 갖지 않고 지나치는 일이 없으면 사람은 크게 힘을 비축하고 구태에 세상의 선두에 서려고 하지 않음으로써 사람은 자신의 재능을 연마하고, 그것을 성숙시킬 수가 있다. 만일 사랑과 태연함을 버리고 자제력의 비축을 잊고 뒤에 서는 것을 그만두고 선두로 나오면 그것은 사람의 운이 다함이다.
나의 가르침은 대단히 알기 쉽고 실천하기도 용이하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도 실천하지 않는다. 내 말에는 하나의 원리가 있고 인간의 일에는 하나의 체계가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나에 대해서도 모른다. 나를 아는 사람의 수가 적기 때문에 나는 뛰어나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겉으로는 남루한 옷을 입고 가슴속에는 보석을 숨기고 있다.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가 최상이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하는 자는 마음이 병들어 있다.
그러나 마음의 병을 병이라고 인식하는 자는 병들어 있지 않다. 성인(聖人)은 병들어 있지 않다. 마음의 병을 병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성인은 마음의 병에 걸려 있지 않은 것이다.
사람은 태어났을 때는 유약하지만 죽을 때가 되면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다. 사물이나 식물이 싱싱해 있을 때는 부드럽고 나긋나긋하지만 죽어 버리면 맥없이 말라 버린다. 그러니까 딱딱함이나 경직은 죽음의 동료이고 부드러움이나 다정함은 삶의 동료이다.
그 때문에 군대가 강력하면 싸움에 패할 것이다.딱딱한 나무는 벌채되어 버린다.크고 강한 것은 아래층에 속하고 부드럽고 약한 것이 정점에 속한다.
천하에 물보다 약한 것은 없지만 단단한 것을 쳐 이기는 데에는 그것을 이길 자가 없다. 그 밖에 그것에 대신할 자는 아무 것도 없다. 약함이 강함을 이기고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기는 것은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아무도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인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의 재앙을 자기 몸에 떠맡는 사람이야말로 나라의 보호자이고 세상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는 사람이야말로 천하의 왕이다.
올바른 말은 왜곡된 것처럼 보인다.
도덕경에 탄생에 대하여.
노자는 침묵 속에서 살았다.
언제나 자기가 도달한 진실에 대하여 말하기를 피했다.
또한, 다음 세대를 위하여 무엇을 써 남긴다는 생각을 뿌리쳤다. 90세가 되던 해에
그는 제자들의 곁을 떠나려고 했다.작별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나는 깊은 산으로 히말라야를 향해서 가려고 하네.
나는 거기서 죽을 준비를 하기 위해 가는 거라네.살아있는 동안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정말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좋은 일 일세.그러나 죽음이 다가오게 되면 세상으로부터 더러워지는 일이 없고 자기만의 절대의 순결과 고독 속에서'근원'으로 향할 수 있도록 전면적인 고립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다네."라고......제자들은 너무나 슬펐다.
그러나 그들이 어쩔 수 있으랴? 할 수 없이 그들은 몇 백 리 뒤를 따라갔다.그런 그들을 노자는 타일렀다.마침내 제자들은 돌아갔다.그리하여 노자는 혼자서 국경을 넘으려고 했다.그러자 국경 경비를 맡고 있는 병사가 그를 감금해 버렸다.그 병사 또한 제자들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선생님께서 책을 한 권 쓰시지 않는 한저는 국경을 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그만한 일쯤은 인류를 위해서 하셔야 됩니다.
책을 한 권 쓰십시오.그것은 선생님이 치루어야 할 빚입니다.그렇지 않고서는 절대로 허가를 내주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그래서 3일 동안을 노자는 자기의 제자에 의해서 감금당하는 꼴이 되었다.아름답다.정말 사랑이 넘쳐 있는 사건이다.그는 제자인 병사로부터 강요를 받은 것이다.그것이 이 작은 책노자의 책'도덕경(道德經:TAO TE CHING)이 태어난 사연이다.그는 그것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그의 제자가 용서해 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제자는 국경을 지키는 병사였다.그리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제자는 말썽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그래서 노자는 이 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3일 동안에 그는 그가 시키는 대로 썼다.이것이 그 책의 첫 귀절이다.
"도라 하지만, 말로 할 수 있는 도는 절대의 도가 아니다.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
이것이 그가 처음으로 쓴 책의 머리말이다."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간에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진실이라 할 수 없다."이것이 이 책의 서문인 것이다. 그것은 당신들에게 경고하고 있다."이제부터 많은 말이 이어질 것이다.그러나 말의 먹이가 되어서는 안된다."말이 아닌 것을 마음에 담아 두어라.
『老子道德經』(노자도덕경)
중국의 사상가 노자(老子)가 지은 것으로 전하는 저서이며, "노자(老子)" 또는 "도덕경(道德經)"이라고도 한다. 약 5,000자, 상하 2편으로 되어 있다. 성립연대에 관해서는 이설(異說)이 분분하나, 그 사상•문체•용어의 불통일로 미루어 한 사람 또는 한 시대의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다.
BC 4세기부터 한초(漢初)에 이르기까지의 도가사상의 집적(集積)으로 보여진다. 선진시대(先秦時代)에 원본 《노자》가 있었던 모양이나, 현행본의 성립은 한초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그 후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 상편 37장, 하편 44장, 합계 81장으로 정착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노자 사상의 특색은 형이상적(形而上的)인 도(道)의 존재를 설파하는 데 있다. '무위(無爲)함이 무위함이 아니다’라는 도가의 근본교의, 겸퇴(謙退)의 실제적 교훈, 포화적(飽和的) 자연관조 등 도가사상의 강령이 거의 담겨 있어 후세에 끼친 영향이 크다.
"노자"는 흔히 말하는 도(道)가 일면적•상대적인 도에 불과함을 논파하고, 항구 불변적이고 절대적인 새로운 도를 제창한다. 그가 말하는 도는 천지(天地)보다도 앞서고,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적 존재이며, 천지간의 모든 현상의 배후에서 이를 성립시키는 이법(理法)이다. 다시 말하면, 대자연의 영위(營爲)를 지탱하게 하는 것이 도이며, 그 도의 작용을 덕(德)이라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도와 덕을 설파하는 데서, 《노자》의 가르침은 도덕(오늘날의 도덕과는 다름)으로 불리어 "도덕경"이라는 별명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노자사상의 중심은 오히려 정치•처세의 술(術)로서의 무위를 설파함에 있고, 형이상적인 도의 논설은 그 근거로서의 의미를 지님에 불과하다. 노자는 하는 일만 많으면 도리어 혼란을 초래하고, 공을 서두르면 도리어 파멸에 빠지는 일이 흔한 세상에 비추어, 오히려 무위함이 대성(大成)을 얻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우선 의도하는 바는 아무런 작위(作爲)가 없고, 게다가 그 공업(功業)은 착실절묘하다고 설파하였다.
이 도를 본으로 하여 무위함에서 대성을 기대할 수 있다고 설파하며, 이 점에서 형이상의 도와 실천적인 가르침이 관련된다. 무위의 술(術)이란 구체적으로는 유약•겸손의 가르침이 되고, 무지•무욕의 권장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상징으로서는 물[水]•영아(兒). 여성에의 예찬이 된다. 유가가 말하는 인의예악(仁義禮樂)이나 번잡한 법제금령(法制禁令)은 말세의 것으로 배척하고, 태고(太古)의 소박한 세상을 이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궁극적으로는 세속적인 성공을 쟁취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그 논법에는, ‘도는 언제나 무위하면서도 무위함이 아니다’ ‘대공(大功)은 졸(拙)함과 같다’,‘그 몸을 뒤로 하여 몸을 앞세운다’와 같이 역설(逆說)이 많은 점이 두드러진다.
老子 道德經 1 章 ~ 10 章
1 章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오. 이름을 부친다면 진정한 이름이 될 수 없다. 이름이 없음은 하늘과 땅이 생기기 전의 것이라 그렇고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을 낳은 어머니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념•무상의 상태가 될 때 그 묘한 절대의 세계를 볼 수 있고 유념•유상의 상태일 때 그 차별함이 생기게 된다. 절대세계와 상대세계는 영구불변한 도에서 나왔으나 그 이름을 달리 하니 이것을 한가지로 말할 때 현(玄)이라 한다. 이 현하고 현한 것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만물이 나왔다.
2 章
세상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추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착한 것을 착하다고 하는 것은 착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있는 것과 없는 것도 상대에 의존해서 생기고, 어려운 것과 쉬운 것도 서로 대립해서 성립하며 긴 것과 짧은 것도 비교하므로 이뤄지고, 높은 것과 낮은 것도 아래위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소리는 여러 가지가 어울려야 조화를 이루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르므로 성립된다. 그러므로 성인은 무위로써 일을 행하고 말하지 않고도 가르침을 행하는 것이다. 천지자연은 만물이 일어나더라도 순리대로 두고, 만물을 기르게 하고도 소유하지 않는다. 일을 하고도 뽐내지 않고 공을 이루고도 그 지위에 오르지 않는다. 그 직위에 오르지 않기 때문에 이로써 떠나지 않는 것이다.
3 章
똑똑한 사람을 존중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경쟁하는 일이 없게 되고 얻기 어려운 재물을 귀히 여기지 않으면 사람들은 도둑질하는 일이 없게 된다. 욕심이 날만한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사람들의 마음은 어지러워지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성인의 정치는 사람의 마음을 비우게 하여(마음을 비우면 주천(周天)이 이루어진다) 배를 부르게 만들고(周天이 되면 덜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다) 뜻을 약하게 하여 뼈를 튼튼하게 만든다. 항상 사람들로 하여금 지식도 욕망도 없게 한다. 똑똑한 사람이 있을 지라도 감히 행동하지 못하게 한다. 무위의 정치를 하면 다스리지 못함이 없다.
4 章
도는 비어 있으나 그것을 아무리 사용해도 늘 가득 차 있고 넘치지 않는다. 깊고 넓어서 만물의 근본인 것 같다.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하고 복잡한 것을 풀며 빛을 부드럽게 하여 티끌에도 뒤섞이건만 맑고 고요함이 늘 그대로 있는 것 같다. 나는 그 도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수 없으나 아마 우주를 주재하는 상제보다 먼저 있었던 것 같다.
5 章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서 세상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강아지와 같이 여긴다. 성인도 어질지 않아서 백성들을 짚으로 만든 강아지와 같이 여긴다. 하늘과 땅 사이는 풀무와 같아서 비어 있으나 힘이 끝이 없고 움직일수록 힘이 더욱 커진다. 말이 많으면 이치에 곤궁하게 되니 가만히 있는 것만 못하다.
6 章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으니, 이것을 현빈이라 한다. 깊은 골짜기의 문은 하늘과 땅의 뿌리이다. 낳고 자라는 작용은 언제까지나 이어져 아무리 써도 지칠 줄 모른다.
7 章
하늘은 끝없이 길고 땅은 언제까지라도 존재한다. 하늘과 땅이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의 목숨을 늘리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자신을 남의 뒤에 머물게 하므로 그 자신이 앞서고 그 자신을 잊어버림으로 해서 그 자신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 개인적인 욕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능히 자신의 이익을 성취하는 것이다.
8 章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있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한다. 사람들이 사는데는 땅이 좋고 마음은 생각이 깊은 것이 좋고 친구는 어진 사람이 좋고 말은 믿음성이 있어야 하고 정치는 바르게 다스려져야 하고 일은 유능하게 함이 좋고 행동은 때를 맞춤이 좋고 오직 다투지 않는다면 잘못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9 章
가득 채워져 있는데 또 채우는 것은 그만두지 않은 만 못하고 예리해진 칼날은 오래 보존하기가 어렵고, 보물이 집에 가득하면 이를 지키기가 어렵고 부귀하더라도 교만해지면 허물을 남기게 된다. 공을 이루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
10 章
혼과 백을 엮어 하나로 하여 흩어지지 않게 하고 기를 고르고 부드럽게 하면 능히 어린아이와 같아진다. 더러운 것을 씻어내고 깨끗하게 하면 기묘한 경지에 들어가 흠이 없게 된다. 국민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은 무위로 행하여야 한다. 천문이 열리고 닫히게 하여 능히 암컷이 되며 확실히 알고 통달하여 능히 무위로 해야 한다. 만물을 낳고 기르되 이를 소유하지 않고 이를 행하고도 자랑하지 않고 키워주되 주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현덕이라 한다.
老子 道德經 11 章 ~ 20 章
11 章
서른개의 바퀴살대가 하나의 바퀴 통에 모여도 그 빈 곳이 있어야만 바퀴로써의 쓰임이 있고 흙을 빚어서 그릇을 만들지라도 빈 공간이 있어야만 이 그릇으로의 쓰임이 있게 된다. 문과 창문을 뚫어 방을 만들더라도 빈 곳이 있어야만 이 방으로써의 쓰임이 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곳은 이익이 되게 하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곳은 쓰이게 하는 것이다.
12 章
다섯 가지 색깔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다섯 가지 소리는 사람의 귀를 먹게 하고 다섯 가지 맛은 사람의 입맛을 상하게 한다. 말을 타고 짐승을 사냥하게 되면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만들고 얻기 어려운 재물은 사람의 행실을 나쁘게 만든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취하고 보이는 것을 취하지 않으니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고 한다.
13 章
총애를 입는 것과 굴욕을 당하는 것은 깜짝 놀랠 일을 당하는 것과 같고 큰 재앙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몸을 귀하게 여기는 것과 같다. 왜 총애를 입는 것과 굴욕을 당하는 것을 깜짝 놀랠 일을 당하는 것과 같다고 하는가? 사랑 받는 것은 위에서 아래로 행하여 지는 것이므로 얻어도 놀랍고 잃어도 놀라게 되는 것이니 이래서 총애와 굴욕은 깜짝 놀랄 일을 당하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이다. 큰 재앙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왜 몸을 귀하게 여기는 것과 같다고 하는가? 나에게 큰 재앙이 있음은 나의 몸이 있기 때문이다. 내 몸이 없으면 내게 어찌 재앙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 몸을 귀하게 여기듯이 천하를 다스리면 세상을 맡게도 되고 내몸을 사랑하듯이 천하를 사랑하면 세상을 맡겨도 된다.
14 章
그것은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지극히 큰 것이라 한다. 그것은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다. 그래서 아주 작은 소리라 한다.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으므로 미세하다고 한다. 이 세 가지는 말로 따져서는 알 수가 없지만 섞어서 하나로 뭉뚱 구리면 그 위는 아주 밝지 않고 그 아래는 어둡지 않으며 끊임없이 작용하므로 이름 붙일 수 없고 끝내는 무의 세계로 돌아가므로 이것을 형체없는 형상이라 하고 존재 없는 모양이라고 한다. 이를 일컬어 "황홀한 것" 이라고 한다. 이것을 맞아들이려 해도 그 머리를 볼 수 없고 따라 가려 해도 그 꼬리를 볼 수 없다. 옛날의 도를 배워서 지금 행하여 보면 옛날의 처음을 깨달을 수 있으니 이것을 일러 도의 실마리라 한다.
15 章
옛날에 도를 잘 터득한 도사는 작고 묘한 것까지 다 통달하였으므로 그 깊이를 잘 알 수 없다. 잘 알 수 없으므로 억지로 형용하여 본다. 예를 들자면 신중한 태도는 겨울에 살얼음판을 걷듯이 머뭇거리고 조심스럽기는 사방 모든 것을 경계하듯이 두려워하는 것 같고 의젓하고 엄숙하기가 초대받은 손님과 같고 부드러운 모습은 마치 봄날에 얼음이 녹아 풀리 듯하며 꾸밈 없음이 막 베어 낸 통나무 같고 마음이 시원스럽게 트이기가 골짜기 같고 모든 것을 포용하여 시비를 가리지 않는 모습은 흙탕물과 같다. 어느 누가 능히 흙탕물을 고요히 안정시켜 서서히 맑게 할 수 있겠는가? 어느 누가 안정된 것을 움직여 천천히 생하게 할 수가 있는가? 도를 터득한 사람은 가득 채우려 하지 않는다. 가득 채우려 하지 않으므로 모든 것을 다 덮을 뿐 새 것을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16 章
마음 비우기를 끝까지 하고 고요한 상태를 꾸준히 지키면 만물이 다투어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그것들이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본다. 만물은 아무리 무성하여도 각기 그 근본되는 곳으로 돌아가게 된다.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고요함이라 한다. 이것을 운명을 따라 돌아간다고 한다. 운명을 따라 돌아가는 것을 영구불변한 것이라 한다. 영구 불변한 것을 아는 것을 밝다고 한다. 영구 불변한 것을 모르게 되면 쓸데없는 짓을 하게 되니 흉하다. 영구불변한 것을 알면 받아들이게 되고 받아들이면 공평하게 되고 공평하면 왕과도 같고 왕과 같아지면 하늘과도 같고 하늘과도 같아지면 도와 같아지고 도와 같아지면 삶을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다. 이 도를 따르면 몸을 마치도록 위태로움도 없게 된다.
17 章
가장 훌륭한 왕은 백성들이 다만 왕이 있는지를 알뿐이고 그 다음은 왕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그를 칭찬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백성들이 왕을 두려워 하고 꺼리는 것이고 그 다음은 백성이 왕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왕에게 믿음성이 부족하면 백성들이 그를 믿지 않는다. 조심하여 말을 중히 여기면 공을 이루고 일을 성취하여도 백성들은 그것이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18 章
대도가 없어지니 인자함과 정의가 생겨나고 지혜가 생겨나니 큰 거짓말이 나타나게 되었다. 육친이 화목하지 않을 때 효자가 생기게 되고 국가가 혼란스러우면 충신이 나타난다.
19 章
뛰어난 재주를 없애고 지혜를 버리면 백성들의 이익은 백배로 늘어날 것이고 인자함을 없애고 의리를 버리면 백성들은 효도와 사랑으로 돌아갈 것이다. 기교를 없애고 이익을 버리면 도둑이 없어질 것이다. 이 세가지는 글로 표현해도 부족하다. 그러므로 소속하는 바가 있게 하면 소박한 마음을 갖고 사심과 욕망을 적게 하는 것이라 하겠다.
20 章
학문을 없애버리면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 "네" 하고 공손히 대답하는 것과 "응" 하고 아무렇게나 대답하는 것이 얼마나 다르겠는가? 선과 악의 거리는 얼마나 되겠는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나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과의 사이가 멀어 그 끝이 없다. 세상사람들은 기뻐서 희희덕 대며 화려한 잔칫상을 받았을 때와 같이 들떠 있고 따뜻한 봄날 높은 누각에 위에 오른 듯 즐거워하는데 나만 홀로 움직임이 없는 고요 속에서 마치 웃을 줄 모르는 갓난아이와 같구나, 나른하고 어릿어릿하여 돌아갈 곳이 없는 것 같구나. 사람들은 모두 의욕이 넘치고 있건만 나만 홀로 소외된 것 같으니 나는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무지하구나! 사람들은 모두 똑똑하고 현명한데 나만 홀로 흐리멍텅하기 만하다. 사람들은 사리에 밝고 빈틈이 없는 데 나만 홀로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기만 한 것 같다. 나는 고요한 바다와 같고 거칠게 부는 바람과 같다. 세상사람들은 모두 쓸모가 있건만 나만 홀로 완고하여 어리석은 촌뜨기 같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나를 먹여 주는 어머니( = 제26장의 식량을 실은 수레 = 周天)가 있다. 나는 그것을 가장 소중히 여기며 살고 있다.
老子 道德經 21 章 ~ 30 章
21 章
큰 덕의 모양은 오직 도에서 나온다. 도라고 하는 것은 오직 황홀한 상태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황홀하지만 그 속에 존재가 있다. 황홀하지만 그 속에 형상이 있다. 그윽하고 어렴풋하지만 그 속에 본질이 있다. 그 정기는 지극히 순수하여 그 속에 진리가 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 이름은 사라질 수 없는 것이다. 도로써 만물의 처음과 끝을 살펴 볼 수 있다. 내가 어떻게 만물의 시초를 알 수 있겠는가? 도의 오묘함 속에서 알게 된 것이다.
22 章
잘 휘어지면 부러질 염려가 없어 안전하다. 몸을 구부리는 것은 장차 펴기 위함이다. 움푹패인 곳이 있어야 물이 채워진다. 옷은 헤어져야 새옷을 입게 된다. 적게 가진 사람은 앞으로 많이 갖게될 것이고 너무 많이 갖고 있으면 걱정이는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하나의 도를 얻어서 이것으로 세상의 표준으로 삼는다. 내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므로 오히려 그 존재가 밝게 나타나고, 스스로를 옳다고 여기지 않으므로 오히려 옳게 드러나고, 스스로 뽐내지 않으므로 공을 이루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으므로 오래가는 것이다. 성인은 오직 다투지 않는 까닭에 세상이 그와 다투지 않는 것이다. 옛날에 잘 휘어지는 나무는 꺾이지 않는다는 말이 어찌 헛된 말이겠는가? 진실로 전체가 되는 것은 도로 돌아가는 것이다.
23 章
자연은 말없이 행한다. 그러므로 거친 회오리바람은 아침 내내 계속 불지 못하고 소나기도 하루종일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누가 비바람을 일으키는가? 하늘과 땅이다. 하늘과 땅도 부자연스러운 일은 계속시킬 수 없거늘 하물며 사람으로써 자연에 위배되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도를 즐겨찾는 자는 도에 동화되고 덕을 쌓는 자는 덕에 동화되고 나쁜 것을 즐기는 자는 나쁜 길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도와 동화되면 도 또한 그를 얻을 것을 기뻐하게 될 것이고 덕과 동화되면 덕 또한 그를 얻은 것을 기뻐하게 될 것이고 나쁜 것과 동화되면 나쁜 것 또한 그를 얻어서 기뻐하게 된다. 내가 믿음직스럽지 못하면 남이 나를 불신하게 된다.
24 章
발끝으로 서 있는 자는 오래 서 있을 수 없고 황새걸음으로 걷는 자는 오래 걸을 수 없다. 스스로 나타내는 자는 밝게 빛날 수 없고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는 자는 남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자기의 공적을 자랑하는 자는 공이 무너지고 자기를 칭찬하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이러한 것들을 도의 견지에서 볼 때는 찬밥이라고 한다. 모든 생명들이 미워하고 배척할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아는 사람은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25 章
발끝으로 서 있는 자는 오래 서 있을 수 없고 황새걸음으로 걷는 자는 오래 걸을 수 없다. 스스로 나타내는 자는 밝게 빛날 수 없고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는 자는 남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자기의 공적을 자랑하는 자는 공이 무너지고 자기를 칭찬하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이러한 것들을 도의 견지에서 볼 때는 찬밥이라고 한다. 모든 생명들이 미워하고 배척할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아는 사람은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26 章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가 되고 고요한 것은 불안한 것의 주인이 된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하루 종일 바쁘게 돌아 다녀도 식량을 실은 수레(甘露가 주천을 함을 의미함) 곁을 벗어나지 않으며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어도 그것에 들뜨지 않는다. 어찌 큰 나라 임금의 몸으로 세상을 가볍게 다뤄서야 되겠는가? 가볍게 여기면 근본을 잃고 조급하게 행동하면 주인을 잃게 된다.
27 章
능숙한 여행가는 바퀴자국이나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능숙한 변론가의 말에서는 흠잡을 데가 없다. 능숙한 계산가는 계산기를 사용하지 않고 계산을 하며 문을 가장 잘 잠그는 것은 자물쇠를 사용하지 않고도 열리지 않게 하는 것이며 가장 잘 묶는 것은 줄을 사용하지 않고도 풀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항상 사람을 잘 구하므로 사람을 버리는 일이 없고 항상 물건을 잘 구하므로 물건을 버리는 일이 없다. 이것을 일러 밝은 덕을 지녔다고 한다. 그러므로 착한 사람은 악한 사람의 스승이며 악한 사람은 착한 사람의 자산이다. 그 스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그 자산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비록 지혜가 있다해도 크게 미혹되게 된다. 이것을 일러 오묘한 도의 작용이라 한다.
28 章
숫 컷에 대해 잘 알고 암컷을 잘 지키면 모든 물이 모여드는 계곡과 같이 되니 세상의 계곡이 되면 덕을 잃지 않게 되고 순수한 어린 아기 같은 몸으로 돌아가게 된다. 흰 것을 알고 검은 것을 지키면 세상의 법도가 된다. 세상의 법도가 되면 항상 덕에 어긋나지 않게 되어 무극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영화로움을 알고 욕됨을 지킨다면 만물을 태어나게 하는 골짜기와 같이 된다. 세상의 골짜기가 되면 항상 덕으로 충만하게 되어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통나무를 잘라 잘 다듬으면 그릇이 되듯이 성인이 이러한 이치로 천하만민을 쓸 경우에는 그들을 관리들의 우두머리로 삼는다. 그러므로 크게 쓸 때는 세분하지 말아야 한다.
29 章
세상을 갖고자 인위적으로 노력한다 해도 쓸데없는 노력임을 나는 안다. 세상은 신기한 것이라 갖고자 하여 갖게 되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갖고자 노력해도 실패하게 되고 잡으려 해도 놓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앞서서 가는 것도 있고 뒤따라 가는 것도 있다. 어떤 것은 숨을 천천히 쉬는 것도 있고 급하게 쉬는 것도 있다. 어떤 것은 강하고 어떤 것은 약하다. 어떤 것은 올라가고 어떤 것은 내려간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지나친 것을 피하고 꾸미는 것을 버리며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
30 章
도로 왕을 보필하는 자는 무력으로 세상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 그런 일은 언젠가는 보복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병력이 주둔하던 곳에는 싸리나무와 가시나무가 우거지게 되고 큰 전쟁을 치르고 나면 반드시 흉년이 들게 마련이다. 병법에 능한 자라면 좋은 결과를 얻었으면 그치고 승리이상의 것을 취하려 하지 않는다.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자랑하지 말고 공을 내세우지 말고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 용병을 단행하더라도 부득이한 경우에 한 할 것이며 이겨도 거칠고 포악해서는 안된다. 모든 사물은 지나치게 왕성하면 곧 쇠퇴하게 마련이다. 늙어 노쇄 하는 것을 도를 따르지 않는 것이라 한다. 도를 따르지 않는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老子 道德經 31 章 ~ 40 章
31 章
군 병기는 상서롭지 못한 것이다. 세상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싫어한다. 그러므로 도를 아는 자는 그런 곳에 처하려 하지 않는다. 군자는 평소 왼쪽자리를 상석으로 하지만 용병하는 경우는 오른 쪽을 상석으로 한다. 군 병기란 상서롭지 못한 것이어서 군자가 쓸 수단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쓰더라도 편안하고 담담한 마음으로 쓰는 것이 최상이다. 싸워서 승리하더라도 이것을 미화해서는 안된다. 이기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는 자이다. 사람 죽이기를 즐겨하는 사람은 자신의 뜻을 세상에 펴지 못한다. 좋은 일에는 왼쪽을 상석으로 하고 나쁜 일일 경우에는 오른쪽을 상석으로 한다. 부 장군은 왼쪽에 자리하고 대장은 오른쪽에 자리한다. 이는 상례에 따라 좌석을 정함을 말한다. 많은 사람을 죽였으므로 슬픔과 애도로 울어주고 싸움에 승리했어도 상례로써 일을 행하는 것이다.
32 章
도는 이름이 없다. 비록 통나무 같이 작아 보일 지라도 세상에 그 보다 큰 것은 없다. 만약 군왕이 도를 갖춘다면 세상 만물은 모두 그를 따를 것이다. 하늘과 땅이 서로 화합하면 감로(甘露)가 내리게 된다. 백성들은 명령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잘할 것이다. 처음으로 나누어서 이름을 가지게 된다. 이름을 가져도 어느 한계에서 멈추어야 한다. 멈출 곳을 알면 위태하지 않게 된다.비유하여 말하면 도가 세상에 있다는 것은 시내의 물과 골짜기의 물이 강과 바다로 흘러 드는 것과 같다.
33 章
남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자기자신을 아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센 사람이고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은 진실로 강한 사람이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부유한 사람이고 억지로 도를 닦는 자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고 도를 잘 알고 있어야 할 곳을 잃지 않는 사람은 오래 사는 사람이다. 죽을 힘을 다해 삶의 길을 찾는 사람은 오래 살 수 있다.
34 章
대도는 넓디 넓어서 왼쪽도 오른쪽도 모두 다 포함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도에서 태어났지만 도는 칭찬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공을 이루고도 명성을 바라지 않고 세상 만물을 입히고 기르고도 주인행세를 하지 않는다. 욕망이 없으므로 아주 작다고도 할 수 있고 이 세상 만물이 그것에 속해 있더라도 주인 노릇을 하지 않으므로 위대하다 할 수 있다. 도는 스스로를 위대하다 하지 않으므로 능히 큰 것을 이루는 것이다.
35 章
36 章
장차 기를 죽이게 하고자 한다면 먼저 기를 펴게 해야 하고 장차 약하게 하려면 먼저 그것을 강하게 만들어야 하고 장차 망하게 하려면 먼저 흥하게 하는 것이 좋고 장차 빼앗고자 한다면 먼저 주는 것이 좋다.
이것을 은밀한 맑음이라고 한다. 부드럽고 여린 것이 단단하고 강한 것을 이긴다. 물고기는 연못을 벗어나 살 수 없다. 나라를 이롭게 다스리는 지혜는 남에게 보여 주어서는 안된다.
37 章
도는 항상 무위로 행하되 하지 못함이 없다. 왕이 만약 이것을 지킨다면 세상 만물은 장차 스스로 잘 길러 질 것이다. 만약 따르면서도 욕심을 부린다면 순박함을 주어서 욕심을 누를 것이다. 이름할 수 없는 순박 함이란 욕심이 없는 것이다. 욕심이 없으면 고요한 상태에 들게 되고 천하는 스스로 편안하게 될 것이다.
38 章
높은 덕을 가진 사람은 덕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덕이 있는 것이고 하급의 덕을 가진 사람은 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게 된다. 그것은 덕이 없기 때문이다. 높은 덕을 가진 사람은 도에 따를 뿐 스스로 의식함이 없고 하급의 덕을 가진 사람은 스스로 노력함으로 의식함이 있다. 어진사람은 노력하여 행하되 의식적인 데가 없고 의를 가진 사람은 노력하여 행하되 의식적인 데가 있다. 예를 가진 사람은 노력하여 행하되 상대방이 이에 응하지 않으면 팔을 걷어 부치고 대든다. 그러므로 도가 떨어지면 덕이 나타나고 덕이 떨어지면 인이 나타나고 인이 떨어지면 의가 나타나고 의가 떨어지면 예가 나타난다. 예절이란 진실성이 희박해 지면 생기는 것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지려는 시작인 것이다. 지성이란 도의 꽃을 피울 수 없는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대장부는 두터운 것을 취하고 천박한 것을 버리며 진실을 취하고 거짓을 버린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옛날에 오직 하나를 얻었다는 것은 하늘은 하나를 얻어 맑게 되었고 땅은 하나를 얻어서 안정되게 되었고 신은 하나를 얻어서 영통하게 되었고 골짜기는 하나를 얻어서 물을 가득 채우게 됐고 만물은 하나를 얻어서 태어나게 되었고 왕은 그 하나를 얻어서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하나이다. 하늘에 그것을 맑게 해주는 것이 없다면 장차 깨어질 것이고 땅에 안정됨이 없다면 지진이 일어날 것이고 신에게 영통함이 없다면 신의 능력은 끝나고 말 것이다. 계곡에 물을 채워주는 것이 없다면 물은 장차 고갈될 것이다. 만물을 생장시키는 것이 없다면 만물은 멸종될 것이다. 왕에게 고귀함이 없다면 장차 쫓겨 날 것이다. 그러므로 귀한 것은 천한 것을 근본으로 삼고 높은 것은 낮은 것을 바탕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왕들이 자기 자신을 고니, 과니, 불곡이니 하는 말로 낮추어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천한 것을 근본으로 삼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러므로 최고의 영예는 칭찬 받지 않은 것이며 아름다운 옥처럼 되려 하지 않고 볼품없는 돌처럼 버림 받기도 원치 않는 것이다.
40 章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도의 움직임이고 약하다 하는 것은 도의 작용하는 모습이다. 세상의 만물은 유에서 나오고 유는 무에서 나온다.
老子 道德經 1 章 ~ 10 章
41 章
가장 뛰어난 선비는 도 닦는 방법을 들으면 들은 그대로 실행하고 보통의 선비는 그것에 반신반의하고 하등의 선비는 그것에 대하여 한바탕 "깔깔깔" 웃고는 비웃는다. 하등의 선비가 한바탕 웃지 않는 도는 도라 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예로부터 이런 말이 있다. 밝은 도는 어두운 것 같고 전진하는 도는 후퇴하는 것 같고 가장 큰 도는 흠이 있는 것 같고 최고의 덕은 골짜기처럼 빈 것 같고 가장 깨끗한 것은 더럽게 보이고 넓은 덕은 부족한 것처럼 보이고 건실한 덕은 구차한 것 같이 보이고 순수하고 질박한 것은 색깔이 변질된 것 같이 보인다. 무한대의 큰 것은 모퉁이가 없고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 지며 큰 소리는 그 음을 들을 수 없고 큰 형상은 모양이 없다. 도는 숨어 있어서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도만이 세상 만물에게 잘 빌려주고 키워 줄 뿐이다.
42 章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하늘과 땅 둘을 낳고 하늘과 땅은 전기를 낳아 셋이 되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기를 등에 지고 양기를 끌어 안으며 전기로 조화를 이룬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외롭고•적고•기르지 못하는 것이다. 왕이나 제후는 이것들을 자신의 호칭으로 쓴다. 그러므로 만물 중에서 혹 덜어내는 것이 이익이 되기도 하고 보태는 것이 손해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은 나도 역시 가르친다. 함부로 강하게 구는 자는 제명에 죽지 못한다. 나는 이것을 가르침의 근본으로 삼겠다.
43 章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가장 강한 것을 부수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은 빈틈이 없는 곳에도 들어간다. 나는 이로써 무위가 유익하다는 것을 안다. 말없는 가르침과 무위가 이익이 된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잘 알 수 없는 것이다.
44 章
명예와 몸과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 몸과 재물과 어느 쪽이 더 가치가 있을까? 얻는 것과 잃은 것 중 어는 쪽이 사람을 더 병들게 할까? 그런 까닭에 재물을 지나치게 아끼면 반드시 크게 소비하게 되고 많이 쌓아두면 반드시 크게 망한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을 면하게 되고 그칠 줄 알면 위험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하면 오래 살 수 있다.
45 章
46 章
세상에 도가 쓰이게 되면 잘 달리는 빠른 말이 군마에서 물러가 똥거름이나 나르는 농사에 쓰이지만 세상에 도가 없으면 군마가 도성밖에 우글거린다. 욕심을 부리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고 남의 것을 탐내는 것보다 더 큰 허물은 없다. 그러므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언제나 넉넉하다.
47 章
집밖에 나가지 않고도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창밖을 내다보지 않고도 하늘의 도를 볼 수 있다. 멀리 나가면 나갈수록 알게 되는 것은 적어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가지 않고도 알고 보지 않고도 이름 지을 수 있으며 하지 않고도 이룰 수 있다.
48 章
학문을 하면 나날이 할 일이 늘어나고 도를 행하면 날마다 할 일이 줄어든다. 줄고 또 줄어서 무위에 이른다. 무위의 상태에 도달하면 일을 하지 않아도 하지 못함이 없다. 세상을 얻은 자는 언제나 무위로써 그것을 얻는다. 하는 일이 있게 되면 이미 세상은 취할 수 없게 된다.
49 章
성인은 집착하는 마음이 없다. 그래서 백성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다. 착한 사람을 착하게 대하고 악한 사람도 역시 착하게 대하는 것은 나 자신이 착한 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성 있는 사람을 나는 믿고 믿지 못할 사람도 내가 믿는 것은 내가 믿을 수 있는 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성인은 세상에 있으면서 마음을 집착 없는 상태로 하고 세상을 위하여 마음을 혼돈하게 하면 백성들은 그의 눈과 귀를 성인에게 주목한다. 성인은 백성들을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상태로 만든다.
50 章
사는 곳으로 나가고 죽는 곳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을 때 사는 곳으로 가는 사람이 열 명중에 세 사람이 있고 죽는 곳으로 가는 사람이 열명 중에 세 명이 된다. 살 수 있는 사람인데 공연히 죽는 곳으로 가는 사람 역시 열 명중에 세 명이 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살려고 하는 마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들은 바에 의하면 섭생을 잘하는 사람은 육지에서는 들소나 호랑이를 만나지 않고 군대에 들어가도 적과 싸우지 않는 장소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들소가 뿔로 받을 곳이 없고 범이 발톱으로 할퀼 곳이 없고 무기가 파고 들 틈새가 없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에게는 죽을 장소가 없기 때문이다.
老子 道德經 1 章 ~ 10 章
51 章
만물은 도에서 나오고 덕이 그들을 기르고 물체마다 형체가 있게 하며 환경에 따라 그들을 성장시킨다. 그런 까닭에 만물은 도를 존경하지 않는 것이 없고 덕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없다. 도를 존경하는 것과 덕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에서 태어나고 덕이 그를 기르고 생장시키고 육성시키며 형태와 질을 주어 기르고 돌봐 준다. 도는 만물을 낳지만 소유하려 하지 않고 만들었지만 자랑하지 않고 주인이면서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을 현덕이라 한다.
52 章
세상에는 시초가 있다. 그 시초가 어머니이다. 이미 그 어머니를 얻었으니 그 자식을 알 수 있다. 이미 그 자식을 알고 그 어머니를 지키면 몸이 다할 때 까지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욕망의 구멍을 막고 욕망의 문을 잠그면 몸이 다할 때 까지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구멍을 열고 번거로움을 더하면 몸이 다하도록 구제되지 못할 것이다. 작은 것을 잘 보는 것을 밝다고 한다. 부드러운 것을 잘 지키는 것을 강하다고 한다. 그 빛을 이용하여 밝음으로 돌아간다면 몸에 재앙이 닥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도를 지키는 것이라 한다.
53 章
나에게 약간의 지혜가 있다면 대도의 길을 가고자 할 때 단지 사도(가짜도)에 빠져 들지 않을 까 두려워 할 것이다. 대도는 평탄하건만 사람들은 지름길인 좁은 길을 좋아한다. 조정은 깨끗한데 농촌은 황폐해 있고 창고는 텅텅 비어 있다. 화려한 비단 옷을 입고 날카로운 칼을 찾으며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재물은 남아 돌 정도이다. 이러한 것을 도둑질하여 영화를 누린다고 한다. 어찌 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
54 章
정성들여 세운 것은 쉽게 뽑히지 않고 힘들여 껴안은 것은 그것을 벗어나기 어렵다. 이러한 도를 자손 대대로 잘 지키면 조상에 대한 제사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도로 몸을 수양하면 그 덕은 진실되게 되고 도로 집안을 수양하면 그 덕은 여유가 있게 되고 도로 고을을 수양하면 그 덕은 길게 이어지고 도로 나라를 수양하면 그 덕은 풍부해 지고 도로 천하를 수양하면 그 덕은 끝없이 넓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도로써 몸을 관찰하고 도로써 가정을 관찰하고 도로써 고을을 관찰하고 도로써 국가를 관찰하고 도를 체득하여 얻은 세계관으로써 세상을 관찰한다. 내가 무엇으로 세상의 이런 것들을 알 수 있겠는가? 즉 도에 의해서 이다.
55 章
덕을 풍부하게 갖추어서 갓난아이와 같아지면 벌도 전갈도 쏘지 않고 뱀도 물지 않고 맹수도 덤벼 들지 않으며 사나운 날 짐승도 덮치지 않는다. 뼈가 약하고 근육이 부드럽지만 쥐는 힘은 강하다. 암수의 교합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지만 몸의 상태는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다. 정기가 극치의 상태이기 때문에 하루종일 소리를 질러도 목이 쉬지 않는다. 조화가 극치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조화를 아는 것을 변함이 없는 것이라 하고 변함없는 것을 아는 것을 밝다고 한다. 생명을 억지로 연장하려 하면 일찍 죽게 되고 마음으로 기를 격하게 쓰는 것을 강하다고 한다. 만물은 강대해지면 곧 쇠퇴한다. 이것을 가리켜 도에 어긋나는 것이라 한다. 도가 아닌 것은 빨리 그쳐야 한다.
56 章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는다. 이렇게 하면 날카로움은 무디게 되고 분별심은 해소되고 빛을 부드럽게 하여 티끌과 함께 섞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현묘함과 하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가까이 할 것도 없고 멀리 할 것도 없으며 이익 되게 할 수도 없고 해가 될 것도 없으며 존귀하게 될 수도 없고 비천하게 될 수도 없다. 이렇게 하므로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되는 것이다.
57 章
나라는 바르게 다스려야 하고 전쟁은 꾀를 써야 한다. 하지만 천하는 행하지 않으므로 얻을 수 있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이것에 의해서다. 세상에 규제하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들은 가난해 지고 사람들에게 이로운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라는 혼란에 빠지게 되고 사람들이 기교를 많이 부릴수록 진기한 물건이 많이 나오고 법령이 많이 선포되면 될수록 도둑이 많이 들끓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하기를 내가 무위로 하면 백성들은 스스로 감화되고 내가 고요히 있는 것을 좋아하면 백성이 스스로 바르게 되고 내가 무위 무사하면 백성들은 스스로 풍족해 진다. 내가 욕심을 내지 않으면 백성들이 스스로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순수하게 된다.
58 章
정치가 뚜렷이 내세우는 것 없이 흐리멍텅하면 백성들이 순박해 지고 정치가 분명하고 뚜렷하면 백성들이 욕구불만이 생겨서 경쟁이 일어난다. 화(禍) 곁에는 복(福)이 기대어 서 있고 복속에는 화가 숨어 있다. 누가 그 끝을 알 수 있겠는가? 바른 것은 없는 것인가...... 바른 것도 기괴한 것이 되고 길조였던 것이 불길한 것으로 변하고 사람들이 상대의 진리를 잃어버린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방형이지만 그 모서리로 남을 해 하지 않으며 모가 나 있지만 그 모난 모서리로 남을 상하게 만들지 않는다. 곧다고 남을 찌르지 않고 몸에 빛(aura = 發氣)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지 않는다.
59 章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은 검소함이다. 검소하게 하는 것을 처음부터 도에 따른다고 한다. 덕을 많이 쌓으면 무엇이든 이기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된다. 무엇이든 이기는 것이 없게 되면 아무도 그 힘의 끝을 알지 못하게 된다. 누구도 그 힘의 끝을 알지 못하게 되면 나라를 가질 수 있다. 나라의 근본인 어미를 가지면 장구하게 될 수 있다. 이것을 일컫어 뿌리를 깊고 튼튼히 하여 장생불사하는 도의 길이라고 한다.
60 章
큰 나라를 다스리려면 작은 물고기를 불에 굽듯이 해야 한다. 도로 세상을 다스리면 귀신도 신령한 힘을 나타내지 못한다. 귀신이 신령한 힘을 내지 못하기 보다는 위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귀신이 위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람을 해치지 않을 뿐더러 성인도 역시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양쪽이 서로를 해치지 않으므로 그 덕을 서로에게 돌린다.
老子 道德經 61 章 ~ 70 章
61 章
큰 나라는 강과 바다와 같은 것이니 세상의 모든 흐름이 만나는 곳이다. 큰 나라는 세상의 암컷이다. 암컷은 항상 고요함으로 수컷을 이긴다. 그리고 고요하게 있으므로써 아래에 있다. 그러므로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 대해 겸허하게 낮은 자세를 취하면 작은 나라가 거기에 붙게 된다. 작은 나라가 겸허하게 큰 나라에게 낮은 자세를 취하면 큰 나라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은 낮은 자세를 취하므로써 남을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낮은 자세를 취함으로써 남에게 받아 들여 진다. 큰 나라가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기르려는 것뿐이고, 작은 나라가 바라는 것은 큰 나라를 섬기며 보호를 받고자 하는 것뿐이다. 만약 양쪽이 각기 바라는 대로하고 싶다면 큰 쪽이 아래가 되어야 한다.
62 章
도는 세상 만물의 근원이다. 착한 사람은 보물로 삼는 곳이고 착하지 않는 사람이 보호되는 곳이다. 아름다운 말을 하면 보답을 받게 되고 엄숙한 행동을 하면 남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착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어찌 버리겠는가? 그러므로 천자가 서고 삼공이 임명되었을 때 아름다운 구슬을 가지고 남보다 먼저 사두 마차 앞으로 달려와서 바치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도를 바치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옛날 사람들이 이 도를 귀하게 여긴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도에 의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죄가 있어도 도를 구하면 죄를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이다.
63 章
무위를 행하고 무사를 일로 하고 맛없는 것을 맛있게 여기며 작은 것을 크게 여기고 적은 것을 많게 여겨라. 원한은 덕으로 갚으라. 어려운 일은 아직 쉬울 때 처리하고 큰일은 아직 작은 일일 때 해결하라. 세상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데서 시작되고, 세상의 큰 일은 작은데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성인은 결코 큰 것을 행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능히 큰 것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대체로 쉽게 허락하는 것은 반드시 믿음성이 적고 쉽게 생각하는 일은 반드시 어려운 경우를 당하는 수가 많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쉬운 일을 어렵게 여긴다. 그러므로 마침내 어려운 일이 없는 것이다.
64 章
편안할 때 위태로운 것을 조심하면 유지 하기가 쉽고 아직 징조가 나타나기 전에 미리 대책을 세우면 계획하기가 쉽다. 단단하지 못한 것은 깨트려지기 쉽고 미세한 것은 흩어져 버리기 쉽다. 아직 아무 일도 없을 때 처리하고 어지러워지기 전에 다스려야 한다. 한 아름의 큰 나무도 털끝 만한 작은 싹에서 시작되고 구충의 높은 누각도 한줌의 흙을 여러 번 쌓는데서 시작되며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된다. 인위적으로 행하는 자는 실패할 것이고 인위적으로 잡으려는 자는 놓치게 된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무위로 행하므로 잃지 않는다. 사람들이 하는 일은 항상 거의 다 되어가다 실패한다. 시작할 때와 같이 끝맺음도 신중히 하라. 그러면 실패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욕심이 없고 얻기 어려운 보물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며 세상사람들이 배우지 않는 것을 배워서 여러 사람들의 잘못을 회복한다. 그리하여 자연 만물을 도울 뿐 감히 행하지 않는다.
65 章
옛날에 도를 잘 터득한 사람은 백성들을 총명하게 하지 않고 장차 백성들을 순박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백성들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그들에게 지혜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라를 지혜로 다스리면 나라에 해가 있을 것이고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나라에 복이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역시 법칙임을 알아야 한다. 항상 이 법칙을 아는 것을 현덕이라 한다. 현덕은 심오하고 멀어서 세속과는 반대이다. 그런 연후에야 대순에 들어갈 수 있다.
66 章
강과 바다가 모든 계곡의 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강과 바다가 가장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계곡의 왕이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성인이 백성 위에 있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말로써 백성의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까닭으로 성인이 위에 있어도 백성들이 무거워 하지 않고 앞에 있어도 백성이 방해된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사람들이 그를 추대하고도 싫어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다투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누구도 그와 다툴 수가 없는 것이다.
67 章
세상사람들이 말하기를 나의 도는 크기는 하지만 어리석어 보인다고 한다. 오직 크기 때문에 어리석어 보이는 것이다. 만약 어리석어 보이지 않는다면 이미 오래 전에 보잘 것 없이 되었을 것이다. 나에게 세가지 보물이 있어서 잘 간직하여 소중히 여기니 첫째는 자비심이고 둘째는 검약이고 셋째는 세상사람들 앞에 서지 않는 것이다. 자비심이 있으므로 용감할 수 있고 검약하기 때문에 널리 베풀 수 있고 세상 사람들 앞에 서지 않기 때문에 능히 기량 있는 자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자비심을 버리고 용감하려 하고 검소함을 버리고 또한 널리 베풀려고 하고 뒤에 따르지 않으면서 앞장서려고 하는데 이런 것을 일러 죽음을 향해서 가는 것이라 한다. 자비심을 가지고 싸우면 승리할 수 있고 자비심을 지키면 견고하여 진다. 하늘이 장차 누구를 구제하고자 할 때에는 자비심을 가지고 그를 호위하는 것이다.
68 章
훌륭한 무사는 무술실력을 뽐내지 않고 싸움을 잘하는 자는 성내지 않으며 적을 가장 잘 이기는 자는 적과 마주치지 않고 사람을 가장 잘 쓰는 자는 그들 앞에서 몸을 낮춘다. 이것을 다투지 않는 덕이라 하고 이것을 남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라 하며 이것을 하늘과 짝하는 옛날의 지극한 도라고 한다.
69 章
병법에 이런 말이 있다. 나는 공격의 주동자가 되려 하지 않고 피동자가 된다. 감히 한치도 전진하지 않고 오히려 한자씩 후퇴한다. 이것을 가르켜 전진하려 해도 전진할 길이 없고 소매를 걷어 올리려 해도 팔이 없으며 공격하지 않으니 적이 없는 것과 같고 무기를 쓰지 않으니 잡아도 잡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적을 과소 평가하는 것 보다 더 큰 재난은 없다. 적을 경시하면 나의 보물인 삼보를 많이 잃게 된다. 그러므로 군사를 동원하여 서로 결전하게 될 때에는 슬피 여기는 쪽이 승리하게 된다.
70 章
내말은 아주 알기 쉽고 또 따라 행하기도 매우 쉬운데도 세상 사람들 중에 아는자가 없고 행하는 자가 없다. 말에는 근원이 있고 사물에는 주재자가 있다. 사람들이 어리석기 때문에 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나를 아는 사람은 드물고 나를 따르려는 자도 귀하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남루한 베옷을 입은 속에 구슬(丹)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老子 道德經 71 章 ~ 81 章
71 章
알면서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알지 못하면서 모두 아는 체하는 것이 병이다. 병을 병으로 알아야 병이 되지 않는다. 성인은 병이 없다. 그것은 자기의 병을 병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병이 되지 않는다.
72 章
사람들이 무서워해야 할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곧 큰 두려움이 닥쳐 올 것이다. 사람들이 사는 고장을 업신여겨서는 안된다. 사람들의 생활을 억눌러서는 안된다. 오직 억눌르지 않는 까닭에 그들이 무거운 짐을 힘겨워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자신을 잘 알지만 과시하려 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지만 자신을 존귀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택하는 것이다.
73 章
죄를 다스림에 결단성이 강하면 죄인을 죽이고 결단성이 부족하면 죄인을 살린다. 이 두 가지 행동에는 이로운 것도 있고 해로운 것도 있다. 하늘이 미워하는 사람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성인조차도 오히려 어렵게 여기는 것이다. 하늘의 도는 싸우지 않고도 잘 이기고 말하지 않아도 잘 응하고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오고 천연히 있으면서도 잘 도모한다. 하늘의 그물망은 넓고 성긴 듯하나 결코 놓치지 않는다.
74 章
사람들이 죽는 것을 무서워 하지 않는다면 죽이는 것으로 어떻게 겁나게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사람들에게 항상 죽음을 무서워하게 해 놓고 죄를 지은 자를 내가 잡아서 죽인다면 어느 누가 감히 죄를 짓겠는가? 항상 죽이는 일을 맡은 자가 있어서 죽이는 것이다. 죽이는 일을 맡은 자를 대신해서 죽이는 것은 마치 훌륭한 목수를 대신해서 나무를 자르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런데 목수를 대신하여 나무를 자르는 자 중 그 손을 다치지 않는 자가 드물다.
75 章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은 위에서 세금을 지나치게 많이 거두기 때문이다. 그래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이다. 사람들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그 윗사람의 간섭이 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이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그 위에 있는 사람이 삶을 지나치게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다. 삶에 집착이 없는 자야말로 삶을 소중히 여기는 자 보다 더 현명한 자이다.
76 章
사람이 태어날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으면 굳고 강해진다. 초목도 살아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죽으면 말라서 부서지기 쉽다. 그러므로 굳고 강한 것은 죽음으로 가는 것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으로 가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군대가 지나치게 강하면 이기지 못하고 나무도 강하면 부러지니 강대한 것은 아래에 있고 부드럽고 연한 것은 위에 있는 것이다.
77 章
하늘의 도는 아마 활대를 펴는 것과 같은 것인가? 높은 곳은 끌어 내리고 낮은 곳은 끌어올리며 남는 것은 덜어내며 부족한 것에 보충해 준다. 하늘의 도는 남는 것을 덜어 부족한 것을 보충해준다. 사람의 도는 그렇지 않아서 부족한 자의 것을 덜어내어 여유가 있는 것에 바친다. 누가 능히 여유가 있어서 세상에 봉사할 것인가? 오직 도를 가진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인은 자신이 하고도 자랑하지 않으며 공을 세우고도 그 자리에 앉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현명함을 나타내고 싶지 않아서 이다.
78 章
세상에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다. 그러나 단단하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는 물보다 나은 것이 없다. 어떤 것도 그것을 대신 할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긴다는 것을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이것을 실행할 줄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런 까닭에 성인이 말하기를 나라의 온갖 더러움과 욕됨을 한 몸에 지는 사람을 사직의 주인이라고 하고 나라의 온갖 불상사를 한 몸에 떠맡는 사람을 세상의 왕이라 한 것이다. 바른 말은 바르지 않은 것처럼 들리는 것이다.
79 章
큰 원한을 가진 사람들을 서로 화해 시켜도 반드시 남는 원한이 있다. 이것이 어찌 선이 되겠는가? 그런 까닭에 성인은 할부의 왼쪽만을 갖고 있고 그러면서 사람에게 지불을 강요하지 않는다. 덕이 있는 사람은 좌계를 가진 사람처럼 남에게 주는 일을 하고 덕이 없는 사람은 세금을 맡은 사람처럼 남에게 받는 일을 한다. 하늘의 도는 사사로움이 없고 언제나 착한 사람 편에 선다.
80 章
큰 원한을 가진 사람들을 서로 화해 시켜도 반드시 남는 원한이 있다. 이것이 어찌 선이 되겠는가? 그런 까닭에 성인은 할부의 왼쪽만을 갖고 있고 그러면서 사람에게 지불을 강요하지 않는다. 덕이 있는 사람은 좌계를 가진 사람처럼 남에게 주는 일을 하고 덕이 없는 사람은 세금을 맡은 사람처럼 남에게 받는 일을 한다. 하늘의 도는 사사로움이 없고 언제나 착한 사람 편에 선다.
81 章
진실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진실성이 없다. 착한 사람은 잘 따지지 않고 잘 따지는 사람은 착하지 않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박식하지 않고 박식한 사람은 알지 못한다. 성인은 쌓아 두지 않는다. 이미 남을 위해 다 썼지만 쓰면 쓸수록 더 많아지고 이미 남에게 다 주었지만 주면 줄수록 더욱 풍부해진다. 하늘의 도는 이익을 줄 뿐 손해는 입히지 않는다. 성인의 도는 남을 위할 뿐 다투지 않는다.
道德經 첫째가름 : 體道
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 無名,天地之始,有名,萬物之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무명 천지지시 유명 만물지모
故常無,欲以觀其妙,常有,欲以觀其교
고상무 욕이관기묘 상유 욕이관기교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衆妙之門.
차양자 동출이이명 동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
도라고 말(규정)할 수 있는 도는 늘 그러한(영원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말할 수 있는 이름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음은 하늘과 땅의 시작이고, 이름이 있음은 모든 것의 어미이다. 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으면 그 신비함(진리)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그 가장자리(현상)만을 본다. 이 양자는 이름을 달리 할뿐 같은 곳에서 나왔다. 이 둘의 근원을 일컬어 그윽하다고 한다. 그윽하고 또 그윽하여 모든 묘함의 문이다. 해석 도는 바람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느낄 수는 있지만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도는 현재이다. 현재는 존재한다. 그러나 어디서 어디까지인지 그 깊이와 넓이를 규정지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는 도를 도라고 규정짓는 것에 반대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도를 알고 전할것인가. 이러한 연유로 노자는 非常道라고 한 것이다.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는 '늘 그러한 도가 아닐 뿐이다'는 것이다. 즉 어느 순간에서만은 규정지은 도가 타당하다는 것이다. 만약 순간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면 노자는 非道라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도는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 순간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그렇다. 도는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우리네 삶속에 흘러간다. 흐르는 강물을 그 누가 규정지을 수 있는가. 세상에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다. 우리의 삶 속에서 고정된 것을 찾을 수는 없다. 모든 것은 움직인다. 따라서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 단지 바람처럼 자신이 느끼는 느낌만이 있을 뿐이다.
도는 과정이다. 결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대상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에도 우리네 삶의 안밖에 흐르는 생명력이다. 도는 진리 근원의 다른 말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노자가 '도라고 말(규정)할 수 있는 도는 늘 그러한(영원한) 도가 아니다.'고 말하는 그 뜻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구분 짓지 않음이다. 이름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편의를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물론 도 또한 그렇게 이름붙인 것이다. 이는 말로 표현할 수없는 천지만물의 근원이다. 하지만 이 이름을 공유하지 않는 사 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름이 고정돼 그 이름 자체로 모든 의미를 표현한다면 실체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아니 이름이 실체를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름은 사람이 붙인 것이다. 따라서 인위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인위가 내재해 있지 않은 것이 하늘과 땅 -우주- 그 자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욕심이 없이 우주를 대하면 그 묘함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묘하다는 것은 나와 우주의 구분이 사라진 상태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뿐이다. 욕심을 가지고 보면 세상의 구체적 사물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사물은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의 작용이다. 그리하여 이것이 천하다거나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본질에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되어졌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무명과 유명은 같은 것이다. 사물에 이름을 지어서 천지와 만물이 다르다고 생각한 것뿐이다.또한 우주에 대해서 사람이 어떻게 보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나 이 무명과 유명의 근원은 바로 道이다. 이 도는 그윽하고 그윽한 것이다. 뭇 묘함의 문이 되는 것이다. 천지만물은 여기서 나고 여기서 살고 여기서 죽고 또다시 나는 것이다.
As for the way, the way that can be spoken of(trodden) is not the enduring and unchanging Dao(constant way), The name that can be named is not the enduring and unchanging name. (Conceived of as)having no name, it is the originator of heaven and earth, (Conceived of as) having a name, it is the Mother of all things. therefore,those constantly without desire, by this means will perceive it subtlety, those constantly with desires, by means will see only that which they yearn for and seek. These two together emerge; they have different name yet they are called the same; that which is even more profound that the profound, the gateway of all subtleties (mystery).
道德經 둘째가름 : 養身
天下皆知美之爲美,斯惡已; 皆知善之爲善,斯不善已.
천하개지미지유미 사오이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故有無相生, 難易相成,長短相較,高下相傾,音聲相和, 前後相隨.
고유뮤상생 난이상성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是以聖人處無爲之事,行不言之敎. 萬物作焉 而不辭, 生而不有,爲而不恃.
시이성인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만물작언 이불사 생이불유 위이불시
功成而弗居,夫唯弗居,是以不去
공성이불거 부유불거 시이불거
하늘 아래 모두 사람이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안다면, 그것은 이미 추한 것이다. 모두 사람이 선하다는 것을 선하다고 안다면, 그것은 이미 선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하고,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며, 길고 짧음은 서로 겨루며, 높고 낮음은 서로 기울며, 노래와 소리는 서로 어울리며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그러하므로 성인은 함이 없는 일에 처하고 말이 없는 가르침을 행한다. 온갖 것이 만들어짐에 간섭함이 없고, 생겨나게 하면서도 소유함이 없고, 일을 함에 있어 그것에 기대지 않는다. 공적을 이루어도 그에 머무르지 않고, 머무르지 아니함으로써 영원하다.
아름다움은 절대적인가. 나와 네가 느끼는 미의 기준이 같은가.
아름다움은 개별적인 인식과 시대 의식의 산물이다. 이 시대 의식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변한다. 개체에 있어서도 미의 의식은 바뀐다. 따라서 '아름답다'는 것은 상대적이다.그런데 모든 사람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을 맹목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말하는 것은 개성이 말살된 것이다.
미녀를 본적이 있는가. 그 미녀가 고정되어 있는가. 변한다. 사람(미인) 자체가 변하고,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 의식이 변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하나의 사물이나, 인물을 아름답다고 하면, 그들은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변화가 없고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죽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미를 똑같은 미로 느끼면 그것은 이미 추악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착하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행위가 어떤 사람에게는 착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잘난 체 한다고 생각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행위가 절대적으로 착하다고 규정되어 진다면, 모든 사람이 그렇게 행동해야 된다. 그러나 그런 행위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여기서 국가권력과 이데올로기를 한번 생각해보자. 국가권력은 법률 등을 통해 국민들을 통제하다. 또한 반공 이데올로기,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등의 방법으로 국민들의 자유의지를 억압한다. 이는 하나의 가치를 절대화시켜 그에 반하면 물리적 힘을 통해 죽이고 고문 등을 하는 것이다. 그 가치에서 벗어난 개개인을 이방인으로 취급하여 감시하고 감옥에 가두는 등 격리시키는 것이다. 어떤 하나의 가치가 절대화되어서 사람들을 억압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매우 추한 것이다.
길다는 것은 짧음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길다는 것이다. '길다'라는 자체가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려움과 쉬움도, 높고 낮음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성인은 함이 없는 일에 처하는 것이다.
爲라는 것은 행위 의지를 가리킨다. 처음부터 목적의식을 가지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그것에 맞추어 나가려고 한다. 이는 강제가 따르고 그에 따른 부작용을 항상 안고 있다.무위라는 것은 집착이 없이 일을 하는 것이다.
가르침은 말로하는 것이 아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이 말로써만 가능한 것인가. 노자는 남을 가르치는 것도 반대를 한다. 말없이 행하는데 다른 사람이 본받을 만하면 그 사람을 본받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만들면 그것이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려 하고 자랑한다. 인간이 세상에 나올 때 무엇을 가지고 나왔으며 죽을 때 무엇을 가지고 가는가. 무엇을 만들어냄은 한 순간의 소용일 뿐이다.
공적을 이루어도 그것에 머무르지 마라. 머무르게 된다면 자신은 그것에 안주하게 되며 발전이 없게 된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낡고 추한 것을 잉태시킨다. 그 공적에 안주하지 않고 나아가려 할 때 또다른 공적은 저절로 생기며 결국 영원히 사는 것이다.
When everyone in the world knows the beautiful as beautiful, ugliness comes into being. When everyone knows the good, then the not good comes to be. The mutual production of being and non-being, the mutual completion of difficult and easy, the mutual formation of long and short, the mutual filling of high and low, the mutual harmony of tone and voice(noise), the mutual following of front and back-These are all constants. Therefore the sages dwells on nonactive affairs and practice the wordless teaching. The ten thousand things arise, but he doesn't declines to show itself(or begin them). They grow, and there is no claim made for their ownership; they go through their process, and there is no expectation(of a reward for the results). The work is accomplished, and there is no resting in it(as an achievement). The work is done, but how no one can see; "Tis this that makes the power no cease to be).
道德經 열째가름 : 能爲
載營魄抱一,能無離乎!專氣致柔,能瓔兒乎! 滌除玄覽,能無疵乎!
재영백포일, 능무리호! 전기치유, 능영아호! 척제현람, 능무자호!
愛民治國,能無知乎!天門開闔,能無雌乎! 明白四達,能無爲乎!
애민치국, 능무지호! 천문개합, 능무자호! 명백사달, 능무위호!
生之畜之, 生而不有,爲而不恃,長而不宰.是謂玄德.
생지축지, 생이불유, 위이불시, 장이불재. 시위현덕.
혼백을 하나로 껴안아 능히 떠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기로 부드러움에 다다라 능히 갓난아기가 될 수 있겠는가? 그윽한 거울을 깨끗이 씻어 흠이 없게 할 수 있는가?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림에 능히 앎으로써 아니할 수 있겠는가?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데 능히 암컷으로 머물 수 있겠는가? 밝고 깨끗이 사방을 비추면서 능히 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것이 생겨나고 그것이 쌓여 가네. 낳으면서도 낳은 것을 가지지 않고, 지으면서도 지은 것에 기대하지 않고, 자라게 하면서도 자란 것을 다스리지 않네 이것을 일컬어 그윽한 덕이라고 한다.
혼백이라는 것은 魂과 魄을 가리킨다. 이것은 나를 이루어 주는 形이다. 도로 돌아갈 수 있는가. 그렇기 위해서는 근원의 기운을 한 몸에 싣고 하나-도-를 껴안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출발점이 부드러움을 이루어 갓난아이같이, 순수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뜨물은 곡식을 씻은 뿌연 물이다. 이런 물로 거울을 씻으면 때가 더 낄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이는 자신의 마음의 편견을 없애고 깨끗이 닦으라는 것이다.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자기의 생각을 고집하고 강요하지 말며 사랑과 무위로써 행하라고 노자는 말한다. 어떻게 강제하지 안으나 백성 스스로 그러하게 행하게 하는 것이 바른 정치인것이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은 생사의 문제이다. 생사의 문제에 초탈해서 생사가 어찌되건 평정을 이룰 수 있는냐 하는 물음이다. 그리고 자신의 빛으로 세상을 구제한다고 할 때 내가 세상을 구제한다고 하지 않을 수 있는가라고 다시 묻는다. 생사에 고요할 수 있고, 남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자신의 일을 하면 도가 생긴다. 그렇게 하면 도가 생기고, 덕이 쌓여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덕에 대해서 말한다. 덕은 태어나게 하되 소유하지 않는 것이다. 즉 저것은 내가 만든 것이다. 내 것이니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이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 자신에게서 누군가가 무엇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배워 갈 수 있다. 그리고 남에게 그러한 지식이나 앎을 전수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서 다 배웠으면 떠나게 하라. 그를 지배하고 자신의 학설만을 고집하지 않게 하라. 그는 그 자체로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길을 나의 길로 만들지 마라. 그의 길을 나의 길로 만들지 않는 것이 바로 그윽한 덕이다.
In nourishing the soul and embracing the one-can you do it without letting them leave? In concentrating your breath and making it soft;- can you(make it that of) a child? In cultivating and cleaning your profound mirror;- can you do it so that it has no blemish? In loving the people and ruling the state;- cannot he proceed without any (purpose of ) action? In opening and closing the gates of heaven;-can not he do so as a female bird? While his intelligence reaches in every direction,cannot he(appear to) be without knowledge? Give birth to them and nourish them, give birth to them but don't try to own them, Help them to grow but don't rule them, this is called profound virtue.
道德經 풀이에 대한 論.
도(道)라는 것은 가히 일컫는다면 항구불변의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이름이란 가히 이름하면 항구불변의 이름이 아니다.(名可名 非常名)
이름이 없는 것이 하늘과 땅의 원래 모습(생하여 있음)이요,(無名 天地之始)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의 차별을 지어내는 모태이다.(有名 萬物之母)
따라서 항상한 무(無)로써 그 오묘함을 자세히 살피고자 하는 것이고,(故無欲以觀其妙)
항상한 유(有)로써는 그 차별적인 가장자리(邊際)를 자세히 살피고자 하는 것이다.(有欲以觀其)
이 두 가지 무와 유는 똑같은 것이나, 나오면서(이름지워지면서) 이름을 달리 하는 것이니,(此兩者同 出而異名) 똑같다는 것은 그 현묘함을 말하느니라.(同謂之玄)
현묘하고 또한 현묘하여 온갖 오묘함의 문이니라.(玄之又玄 衆妙之門)
이 구절은 노자사상의 골수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다.노자의 도덕경에 대한 수많은 주석서가 나와 있지만 어느 한 권 권할 만한 책이 없는 실정이다.그 가운데 감산덕청(?山德淸) 선사의 해설서를 송찬우 선생께서 번역하여 [老子-그 불교적 이해]라는 책으로 출판되어 있으나, 시중에서 구하기 쉽지 않을 뿐아니라 내용 또한 너무나 심오하여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는 조금 어려운 느낌이다. 그리고 [도덕경에 대한 두 개의 강의]라는 아주 훌륭한 주석서가 번역되어 나와 있다. 이 두 권의 주석서를 읽어보면 도올 김용옥 선생이 [도덕경]을 얼마나 그릇되게 번역하고 해설하고 있는지 이 1장(章)만을 살펴보아도 충분히 입증이 되고도 남는다.
이 두 권의 책을 기초로 노자사상을 쉽게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
"道可道"에서 앞의 도(道)는 명사로써 진실하며 항상한 도(道)를 말하는 것이며, 뒤의 도(道)는 '일컫다''말하다'라는 의미의 동사이다. 이 구절은 "이름이란 가히 이름하면 항구불변의 이름이 아니다."라고 설명하는 구절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로 설명되어지고 있다. 고대에는 명(名)이라는 낱말이 지금의 문자(文字)와 같은 의미로 쓰였다. [주례(周禮)]의 외사(外史)전에 대한 정현(鄭玄)의 주(注)에 "옛날에 명(名)이라고 하는 것은 요즈음은 자(字)를 말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진실하고 항상한 도(道)의 세계를 도(道)라고 지칭하는 언어와 문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실재하는 존재사물을 언어로써 이름지울 때 그 이름에는 그 존재사물에대한 인간의 태도와 해석이 부가되어 있는 것이다. 즉 이름이라는 것은 이미 그 대상에 대한 인간의 분별의 산물인 것이다.
그래서 [섭대승론석]과 [삼무성론]에서 이름(名)과 실체적 대상(義)가 서로간에 객(客)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객(客)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다른 것(他者)이라는 의미이다. 그 설명을 간략하게 간추려 설명해 보겠다. 이름과 실체적 대상이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래와 같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존재사물에 대해 여러 가지 이름이 있는 경우도 많은데, 이 때 이름과 실체적 대상이 같은 것이라면 이름의 가지수만큼이나 많은 실체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런 경우는 없다. 또한 이름을 모르는 어떤 것에 대해서 그 물건을 보면 바로 이름을 알아버려야 할 것이다. 이미 이름과 실체적 대상인 그 물건과 같은 것이라고 전제하였으니, 그 물건을 보면 이름도 함께 우리의 인식에 드러나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와 같이 이름이 그 실체적 대상을 지칭하는 하나의 음성부호이지 그 것이 바로 실체적 대상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름으로써 그 실체적 대상을 지칭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모든 인식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자 우리가 어떤 존재사물을 어떻게 부르기로 정하여진 그 이름으로 그것을 가르키는 기능만을 성실하게 수행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이미 궁극적인 도(道)의 경지에 들어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이름이라는 언어와 문자로 말미암아 바로 번뇌하고 망상하여 버린다는 것이 문제이다.
"김용옥 선생 그게 아니올시다"라는 책에서 희론(戱論)이라는 용어를 공부하였다. 바로 이 희론이라고 하는 것이 번뇌하고 망상을 일으키는 정신적인 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속에서 그 실체적 대상에 있지 않는 허망한 분별상을 일으켜서 그 대상에 부가시키는 작용을 희론이라고 한다. 즉 여자(女子)라는 실체적 대상에 대해서 "예쁘다." "밉다."하고 분별적인 사유를 통한 허망한 표상을 부가하는 것이다. 여자라는 실체에 과연 예쁘거나 미운 것이 있는 것인가? 만약 예쁘다는 것이 그 여자에 실재하는 것이라면 누가 보아도 예뻐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세상에 없다. 단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미적 기준이라고 하는 관념에 의해 "예쁘다"는 분별적인 표상을 부가하여 예쁘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름이란 가히 이름하면 항상한 이름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名可名"에서 앞의 명(名)은 곧 명사로써 이름을 말하며 뒤의 명(名)은 동사로써 "이름하다"라는 의미이다. 바로 이름하는 작용을 일으킬 때 앞에서 설명한 희론(戱論)의 과정을 거쳐 버리기 때문에 이미 그 항상한 이름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름이 없는 것이 하늘과 땅의 원래 모습이다."라고 설파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름이 없는 것(無名)은 바로 이러한 언어와 문자가 없는 세계를 말한다.
우리는 "김용옥 선생 그게 아니올시다"라는 책에서 깨달음의 세계는 언어와 문자가 없는 세계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한 세계를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표현한다는 것도 함께 설명하였다. 궁극의 도(道)에 세계에서 바로 이렇게 희론하여 일어나는 일체의 언어와 문자를 떠난 세계이다. 이러한 정신세계에서는 인식주관이 대상을 순수하게 직관(直觀)하는 무위자연의 세계이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곧 무위(無爲)를 뜻한다. 다시 말해서 의식속에서 일체의 분별적 사유에 의해 희론하는 작위적인 인식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天地之始"를 "하늘과 땅의 원래 모습이다"라고 번역하였는데 그 이유를 살펴보기로 하자. 시(始)라는 것은 "처음" "생하다"라는 의미이다. 하늘과 땅이 인식주관에 처음으로 열려 있는 모습을 설명하는 것이다. 즉 자연(自然)을 설명하는 것이다. "스스로 그렇게 있는 모습"이다. 바로 무위의 인식주관에 펼쳐지는 세계는 바로 이 "스스로 그렇게 있는 모습"인 것이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무위(無爲)를 설명하는 것이고 "하늘과 땅의 원래 모습이다"고 하는 것은 자연(自然)을 설명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다음 구절을 읽어 보자. 그러면 보다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의 차별을 지어내는 모태이다.(有名 萬物之母)"
번역이 도올 김용옥 선생의 번역이나 다른 역본(譯本)들과 전혀 다르기 때문에 의아하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이미 인간의 인식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겠는가? 이 구절을 설명하면서 도올 김용옥 선생은 우주발생론(cosmogony)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는데([東洋學 어떻게 할 것인가] 268쪽-269쪽), 이것은 도(道)라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비롯된 잘못된 주장이다.
이름이 있고 없는 것이 우주의 발생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지구가 형성되어지면서 "나는 '지구'라고 한다."하면서 지구가 발생했는가? 이름은 인간이 존재사물에 붙여서 인식하고 서로에게 전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 이름이 있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인간의 분별적 사유의 작용에 의해 형성되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름에 의해 천지간의 만물에 대해 차별적인 인식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미 도(道)라는 것은 앞에서 인식주관과 객관의 합일(合一)을 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즉 물아일여(物我一如)를 찾고 있는 것이 동양의 도(道)의 세계이다. 대상으로서의 존재사물과 인식주관인 "나(我)"가 합일하는 것이다. 바로 앞의 "無名"을 설명하는 구절이 도의 세계인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 "有名"의 구절은 상대적으로 도(道)를 떠난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도를 떠났다"고 설명한 이유는 도(道)에 이르지 못한 범부의 세계도 도를 떠난 것이고, 도를 이룬 성인도 그 도(道)의 세계를 언어와 문자로 설명할 때도 이미 도를 떠난 것이다.
선사(禪師)들께서 이미 "입을 여는 순간 그릇쳐 버린다.(開口卽錯)"라고 설파하는 경계가 바로 도를 이룬 성인이 그 도의 세계를 언어와 문자로 설명할 때 이미 도를 떠났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萬物之母"는 이렇듯 도를 떠난 차별적 인식의 경계를 설명하는 것이므로 "만물의 차별을 지어내는 모태이다."라고 번역하여야 한다.
[도덕경]의 다음 구절들을 읽어 보면 이렇게 번역하여야 옳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항상한 무(無)로써 그 오묘함을 자세히 살피고자 하는 것이고,(故無欲以觀其妙) 항상한 유(有)로써는 그 차별적인 가장자리(邊際)를 자세히 살피고자 하는 것이다.(有欲以觀其) 이 두 구절을 도올 김용옥 선생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그 가장자리만을 본다." 이것이 노자의 사상인가? 여기에서 잠시 여배림(余培林)이라는 중국의 학자가 설명하고 있는 부분을 살펴 보자. 또 이 두 구절을 옛사람들은 대부분 "무욕 無欲", "유욕 有欲"을 한 구로 여겨 "故常無欲, 以觀其妙. 常有欲, 以觀其" 라고 읽었다. 이러한 구두법은 문장과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문장으로 말하면 앞 글과 서로 통할 수 없다. "고 故"자 역시 결말이 나지 않는다. 의미상으로 말하자면 노자는 본시 "무욕"을 주장하였지, 결코 "유욕"을 찬성하지 않는다.
3장에서 "욕심낼 만한 것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면 민심을 어지럽히지 않을 수 있다." 19장에서 "순진함을 보이고 질박함을 보전하면 사욕이 적어진다." 57장에서 "내가 욕심이 없으므로 백성은 저절로 소박해진다."라고 하였으니 모두 그 증명이 된다. 노자는 이미 인간이 "욕심을 없애고", "욕심을 적게 하고", "욕심낼만한 것을 내보이지 않아야 된다"고 했는데 어떻게 "욕심을 지니고" "무한함을 관조"하는 것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이미 "욕심을 지니고서" 어떻게 "무한함을 관조"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무욕","유욕"으로써 구로 여기는 것은 노자 사상에 전혀 합당하지 않다. 이 부분은 앞의 문장을 받아서 "무"와 "유"로써 구를 삼아야 한다. 도올 김용옥 선생처럼 "무욕"을 하나의 구로 "욕심이 없으면"하고 번역하여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 명쾌한 지적이다. 다만 "요( )"의 의미를 잘못 번역하고 있다는 점이 아쉽지만 도올 김용옥 선생과 같이 번역하여서는 안된다는 지적으로는 충분한 내용이어서 인용하여 보았다.
"항상한 무로써 그 오묘함을 자세히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무위(無爲)의 세계에서 바로 도(道)의 오묘한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즉 일체의 언어와 문자로 인한 분별적 사유가 끊어진 경계에서 그 현묘한 실상(實相)의 세계를 관(觀)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무(無)라고 하는 것은 인식주관의 분별적 사유가 없는 것을 말한다. 마르틴 하이데거(M. Heidegger)도 무(無, Nichts)에 의해 존재(存在)가 드러나 나타난다고 설명하고 있는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곧 인식주관속에서 희론(戱論)이라고 하는 정신작용에 의해 본래 존재하지 않는 허망한 분별상을 대상에 부가하여 그 대상을 정립하여 인식하는 것을 유위(有爲)라고 하는 것이며, 이러한 대상정립작용이 없는 인식작용을 무위(無爲)라고 한다. 대상사물과 인식주관이 합일하는 순수직관은 무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불교에서도 무위법(無爲法)에서 실상(實相)이 드러나 나타난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이러한 인식이론이 없다. 다만 불교에 있어서만 이러한 정교한 인식이론을 찾아볼 수 있다. 바르게 노자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철학을 살펴보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노자사상과 불교철학이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도(道)의 세계가 궁극적인 진리의 세계라고 한다면 어찌 불교에서 말하는 도와 노자가 말하는 도가 다른 것을 설명하는 것일 수 있겠는가? 어찌 서양에선들 이러한 인식의 세계를 찾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다만 그 설명하는 방식과 표현의 차이일 뿐이다.
"항상한 유(有)로써는 그 차별적인 가장자리(邊際)를 자세히 살피고자 하는 것이다.(有欲以觀其 )"라고 구절을 살펴보기로 하자. 여기에서 번역상의 난제는 "요( )"라고 하는 단어이다. 앞에 인용한 여배림이라는 분은 "무한함"이라고 번역하였고 도올 김용옥 선생은 "가장자리"라고 번역하였다. 감산덕청 선사는 "서로 맞닿아 있는 변제(邊際)"라고 번역하였다. 이 유의 세계를 이해하는데는 2장의 설명을 자세히 살펴 보아야 한다. 2장의 요지는 차별적인 인식의 세계를 설명하여 주고 있다. 아름답다느니 추하다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여 주고 있으며, 모든 차별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이 서로를 의지하여 생겨나는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바로 이렇게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개념이나 관념이 바로 유(有)의 세계이며, 이 차별적이고 상대적인 관념들이 바로 요( )이다. 그래서 감산덕청 선사는 "서로 맞닿아 있는 변제(邊際)"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나의 개념으로 말미암아 상대적이 개념이 생겨나는 것을 "서로 맞닿아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또한 요( )라는 단어의 의미는 "가장자리"라는 말단(末端)을 가르키는 것으로 한계(限界)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며, "가로막는다"라는 의미로 장애(障碍)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이 가장자리라는 한계는 곧 도(道)를 장애하는 경계이다. 즉 존재사물과 인식주관이 합일하는 순수직관을 가로막는 장애를 말하므로 차별적이고 분별적인 사유의 세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존재사물을 있는 그대로 지각하고 인식하는 경계를 "물아일여(物我一如)" 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하는 도(道)의 세계이다.
그런데 범부들은 이렇게 순수하게 직관하는 물아일여의 세계에 존재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의식속에서 대상에 대해 분별적인 사유를 통해 대상을 자의적으로 조작하는 유위(有爲)의 인식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유위(有爲)적인 세계를 유(有)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無)와 유(有)의 세계가 이렇게 서로 합치할 수 없는 동떨어진 세계가 아니다. 그렇다면 참다운 도(道)의 세계라고 할 수 없다. {김용옥 선생 그게 아니올시다}에서 공(空)과 불공(不空)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세계라는 것을 설명하였다. 마찬가지로 무(無)와 유(有)의 세계 또한 이렇게 서로 분리되어 융화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무와 유는 똑같은 것이나, 나오면서(이름지워지면서) 이름을 달리 하는 것이니,(此兩者同出而異名)"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무와 유가 똑같다고 설명하는 것이 바로 참다운 도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불교에서 체(體)와 용(用)이 동시(同時)라고 설명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즉 체라고 하는 것은 공(空)을 드러내는 것으로 노자의 무(無)와 일맥상통한 것이며, 용이라고 하는 것은 불공(不空)을 드러내는 것으로 유(有)의 경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성현은 무위법으로써 차별이 있아옵니다."라는 구절과 같은 설명이다. 무위법이라는 바로 무(無)의 경계이며, 이러한 무(無)의 경계에서 다시 차별적인 인식을 일으키는 것이 유(有)인 것이다. 무(無)와 유(有)가 동일한 인식주관에서 일어나는 경계인 것이다. 바로 존재사물과 인식주관이 합일하는 경계인 무(無)에서 유(有)라고 하는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인식을 일으켜서 모든 존재자들의 차별성을 지각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우주 만물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가능하여, 그 우주 만물이 인식주관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똑같다는 것은 그 현묘함을 말하느니라.(同謂之玄) 현묘하고 또한 현묘하여 온갖 오묘함의 문이니라.(玄之又玄 衆妙之門) 무와 유가 똑같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현묘한 도의 경계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무의 경계와 유의 경계를 대립적으로 보아서는 안되고 바로 무에서 유의 경계를 보아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것이 참다운 도(道)의 경계인 것이다. '무'다, '유'다라고 분별하는 것 또한 유의 경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다시 현묘하고 또한 현묘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무와 유마저 떠나 버린 궁극의 경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감산덕청 선사의 해설을 살펴 보자. 여기에 이르러서 다시 "이미 유와 무를 상대적으로 생각한다면 하나의 체(體)를 이루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것을 오묘한 도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하고 사람들이 의심할까 염려스러웠다. 그 때문에 그들의 의심을 풀어주기 위하여 "똑같다는 것이 그 현묘함을 말하느니라."라고 말하였다. 이렇다면 하늘과 땅은 동일한 근본이며 만물은 하나의 체(體)이다. 노자의 심오한 관찰이 이러한 경지에 이러렀으니, 어찌 오묘하다고 하지 않으랴!
노자는 다시 이를 배우는 사람들의 공부가 이 경지에 이르러 유와 무가 동일하다는 현묘함을 보았다는 의식마저 씻은 둣이 제거하지 못할까 염려스러웠다. 그 때문에 그들의 이러한 의식마저 끊어버리게 하려고 "현묘하고 또한 현묘하다."라고 말하였다. 그가 의도하는 말은 이렇다. 유와 무를 동일하게 관찰하긴 하였으나, 현묘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현묘함의 자취마저 잊지 않는다면 비록 오묘하다고해도 오묘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큰 도(道)의 자체속에서 유와 무의 명칭만 단절되었을 따름이며, 그뿐만아니라 현묘함의 자취마저 떠나야 한다는 것을 조금도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묘하고 또한 현묘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공부가 여기에 이르면 마음에 간직한 생각을 잊어버리고 대상경계(物)마저 끊어져서 나아가되 오묘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모든 오묘함의 문(門)이다."라고 말한다.
이상과 같이 동양의 도(道)의 세계라는 것은 인식주관인 사람과 대상경계를 이루는 존재사물과의 합일을 찾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물아일여"와 "무위자연"을 이해하는 것이 바르게 도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도올 김용옥 선생을 보면, 노자의 사상이 바로 "무위자연"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이렇게 구체적인 설명에 있어서는 "우주발생론"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설명을 하고 있다. 도(道)의 세계가 우주의 발생에 대한 연구라고 한다면 이미 동양에서 우주과학에 대해 깊은 탐구가 이루어져 있었어야 하지 않는가? 도덕경의 어디에서도 우주의 창조나 발생에 대한 설명은 찾아볼 수 없다. 더욱이 웬놈의 하나님이냐? 동양의 사유의 세계와 서양의 사유의 세계가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도 모르는 철딱서니 없는 소리이다. 결코 노자는 하나님을 거론하지 않는다. 더욱이 창조론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도(道)의 세계에서는 창조론이나 진화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이미 이 것은 인식주관밖의 일이다. 도의 세계는 인식주관이 어떠한 태도를 취하여야 존재사물과 합일을 이룰 수 있느냐를 논하는 것이다.
한 단어,한 구절, 한권의 책에 대한 해석이 시각에 따라 배움의 판단에 따라 이렇듯 다를 수 있다.
받아들이고 뱉는 것도 사람마다 다를 것이므로 사구는 단절한다.
道에 대한 바른 이해
스스로 어리석고 명민(明敏)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설명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을 그릇되게 인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두렵고 조심스럽다. 그렇지만 적어도 도올 김용옥 선생이 설명하는 것은 결코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는 것 정도는 분명히 밝히고도 남음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동양에는 철학이 없다고 주장하는 서양철학자들도 있는 풍토에서, 그래도 동양사상에 관심을 갖게 해주신 그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렇게 잘못 알려진다면 몇 년이 지나고 몇 십 년이 지난 뒤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전혀 잘못된 거짓말이 되어버릴 것이다. 지금 이러한 잘못된 설명과 주장들을 바로잡아 그 본래의 모습으로 돌려놓지 않는다면, 뒤에 오는 사람들이 어떻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알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한 번 되새겨보아야 할 점이 있다. 세계에서 내노라하는 학자들이 왜 불교에 대해 그토록 바르게 보지 못하고 있는가?하는 점이다. 여기에는 커다란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즉 사유의 방법의 차이이다. 동양의 사유방식과 서양의 사유방식은 그 역사와 문화 속에서 서로 다른 양상으로 발전되어 왔다. 즉 동양의 모든 학문은 인간과 자연사물이 하나로 합일(合一)하는 직관(直觀)적 사유의 방식에 기초하고 있다면, 서양의 학문은 모든 자연사물을 극복 해야하는 대상(객체)로 설정하고 분석하고 탐구하는 사변적인 사유의 방식에 기초하고 있다.
자! 서양과 동양의 철학적 관심사와 방법론이 근본적으로 어떠한 배경 속에서 형성되어 왔는가를 살펴본다면 보다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종교와 철학이 생겨나는데는 그 땅의 토양과 환경 그리고 생활방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서양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거의 떠돌아 다니며, 양을 치고 소를 키우는 유목(遊牧) 생활을 영위하고 있고, 동양은 거의 한 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는 농경(農耕) 생활을 영위하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양이나 소를 끌고 이곳 저 곳에 가서 풀을 먹이기 위해서는 이 산 저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떠돌아 다니기 때문에 어느 방향으로 가야 질 좋은 목초들이 있을 것인가 날씨는 어떨 것인가 하고 자연과 주변환경이 항상 극복 해야할 과제(課題)들 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인식주관이 대상을 탐구하고 분석하는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어지는 사유방식을 갖게 된다. 또한 항상 극복해야 하는 대자연(大自然)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감에서 절대적인 신(神)에 귀의하게 되고, 예언(豫言)이라고 하는 것을 믿고 의지하게 된다.
반면에 주로 농경생활을 영위하는 동양에서는 인간은 주어진 자연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대자연의 절대적인 존재와 자신이라고 하는 인간존재가 합일(合一)하여 가장 평안한 상태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자연에 대한 태도가 탐구하고 분석하기 보다는 대상과 인식주관이 하나가 되는 사유방식을 갖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자연에 존재하는 사물이 극복하고 정복하여야 하는 대상이 아니고, 그 사물의 본질을 순수하게 직관하여 자연환경과 적응하려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여기에서 동양의 신비로운 정신세계가 형성되어지게 된다.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탐구하지 않고서도 자연의 성질을 직관하여 우리의 삶에 활용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증거들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의학에서 수많은 약재들의 성분과 그 성분의 약리작용에 대하여 분석하지 않고서도 그 약의 효능을 충분히 이해하고 수많은 질병을 치료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아도, 쉽게 그 순수직관에 의한 깊은 통찰력을 알 수 있다.
또한 정신적인 문제에서 동양철학을 살펴보면 인간 자신의 내면(內面)의 문제에 관심이 집중되어졌던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의 내면의 세계 즉 마음이라고 하는 인식주관을 내관(內觀)하는 도(道)라는 개념을 세우게 된다. 도(道)의 기본 정신은 바로 인식주관인 인간과 이 인식주관에 드러나는 외계의 존재사물과의 정합적 일치(整合的 一致) 즉 합일을 이루는 인식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존재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순수하게 직관하는 인식이 바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하는 사상이다.
동양의 도(道)를 이해하는데는 이점을 간과해서는 결코 동양사상을 이해할 수 없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중생들이 끊임없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번뇌하고 망상하면서 스스로 고통받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그 생각들을 끊어버리면 곧 마음의 해탈을 얻게 되어 모든 고통이 없는 평안(平安)과 대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중생이 번뇌하고 망상하며 고통받는 것이 마치 스스로 무서운 그림을 그려놓고 그것을 보면서 무서워 떨고 있는 것과도 같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괴로운 생각을 일으켜서 고통받고 슬픈 생각을 일으켜서 고통받고, 애욕(愛慾)을 일으켜서 고통받는다. 그 그림을 치워버리면 곧 두려움도 없어지는 것과 같이 스스로 번뇌하고 망상하는 그 마음의 움직임을 끊어버리면 곧 그 마음은 원래의 모습대로 밝고 맑은 상태로 돌아간다. 이것이 깨달음이고 해탈(解脫)이며, 열반을 증득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을 얻게 되면 곧 모든 것을 직관(直觀)하고 통찰하는 지혜(智慧)도 생겨나게 된다. 바로 이렇게 스스로 마음의 해탈을 얻고,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그 바른 길을 보여주신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것이 전부이다. 그 이상도 없고 그 이하도 없다.
다만 그러한 정신세계를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팔만대장경이다. 다른 여타의 동양철학은 불교처럼 완벽한 인식이론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도 도(道)의 세계를 드러내 보여주면서도 인식이론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도올 김용옥 선생이 노자의 철학에 대해 심각할 정도로 그릇되게 설명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논리적으로 비판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이다. 뒤에 [도덕경]의 핵심사상이 담겨 있는 제 1장을 설명하면서 자세하게 논증해 보이겠다.
반면, 불교는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신작용을 면밀하게 분석하여 설명해 주고 있다. 마음속에서 이 생각 저 생각을 일으키는 이 마음의 작용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인 연기설(緣起說)이다. 마음속에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일으키는 이 마음의 움직임을 끊는 것이 바로 선(禪)이다. 즉 교학(敎學)은 이 마음의 움직임을 논리적으로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인식이론이고, 선(禪)은 바로 그 마음을 실질적으로 끊어 버리는 실천적 수행의 방법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깊고 불가사의한 정신세계를 언어를 통해 논리적으로 설명하다 보니, 평범한 사람들의 사유로는 헤아리려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점이다. 그러나 실망하실 이유는 하나도 없다. 실제로 여러분들로 하여금 번뇌와 망상을 끊게 해주는 것은 선(禪)이다. 바르게 선정(禪定)을 닦는다면 곧 번뇌와 망상이 끊어져서 마음의 해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앞에서 동양의 신비로운 정신세계는 이렇듯 인식주관인 마음의 내면(內面)을 관조(觀照)하므로써 얻어진다고 설명하였는데, 바로 그러한 깊은 직관(直觀)과 통찰(洞察)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경전이나 논서(論書)들로 구성된 교학(敎學)은 중생의 정신세계과 깨달음의 정신세계를 분석하여 설명하고 있는 이론이다. 즉 왜 선(禪)을 닦아서 번뇌와 망상을 끊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연기설이다. 중생이 이 생각 저 생각을 일으키며 사유하는 그 분별적 사유가 얼마나 허구적인 인식의 세계인가를 이론을 세워서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깨달은 뒤의 정신세계는 어떠한 모습인가를 설명해 주는 것이 성기설(性起說)이다. 중생이 이렇게 저렇게 사유하는 그러한 허망한 분별적 사유가 끊어진 뒤에도, 순수직관(純粹直觀)을 통해 명명백백하게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들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다만 바르게 선(禪)을 닦아 간다면 곧 그 마음의 번뇌와 망상을 끊을 수 있는 것이므로 전혀 문제가 없다.
불교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바르게 이러한 의미를 터득하고 그 깨달음의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할 것인데, 불행히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엉터리없는 말로 중생들의 번뇌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는 실정이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바르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딱 한 가지이다. 바르게 선(禪)을 닦아 보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한 번만이라고 바르게 선정(禪定)을 체험해본 사람이라면 조금은 바르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서양철학의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서양의 학문은 인식주관이 대상을 분석하고 탐구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그들의 철학은 인식주관이 대상을 어떻게 바르게 볼 수 있는가?하는 것만을 연구했다. 다시 설명하자면 인식주관과 이 인식주관에 인식되어지는 대상이 마주보고 서있는(對立) 관계로 설정하고 인식의 문제를 탐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에드문트 훗설(E. Hussurl)이 이러한 주관과 객관이 대립하는 대자적(對者的)인 인식의 자세를 부정하고, 순수직관의 인식에 대하여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즉 이 순수직관을 가능하게 하는 순수의식과 대상(對象)이 합일하는 인식의 세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현상학]이라고 하는 철학이다. 바로 이 점은 이미 수천년전에 인간과 대상이 합일하는 정신세계를 설명하여주신 부처님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이다. 훗설의 [현상학]을 읽어보면 불교에서 설명하는 인식이론, 특히 유식(唯識)과 아주 유사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완전히 일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렇듯 비로소 서양에서도 늦게나마 순수직관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데, 불행히도 불교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미 이러한 순수직관의 세계를 설명해주신 부처님의 가르침을 거꾸로 주관과 객관이 대립되어 있는 사유의 방식으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방식으로는 결코 순수직관의 사유방식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며,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단언한다.
바로 도올 김용옥 선생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한다. 비단 도올 선생의 경우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불교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책들을 보면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헛소리들 뿐이다. 상식적으로도 도저히 용납이 안되는 소리를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를 바르게 공부해 보고 싶어서 책을 사서 보면 오히려 더 헷갈린다. 지금까지도 불교에 관해 읽을만한 책이 없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이 그 명백한 증거이다. 그러다 보니 독자들에게서 철저히 외면당하여, 불교에 관한 책을 출판하기도 어렵다. 매우 불행하고 안타까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