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을 보니 비가 내리는 군요.
군에 간 아들 녀석이 고등학교 때 끄적거린 `비의 고정관념`을 올렸습니다.
청량함을 주는 파아란 하늘이 시커먼 잿빛 구름에 뒤 덮일 때면, 나는 왠지 모를 우울함과 함께 곧 있을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허둥지둥 회색빛 건물을 향하여 달려가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다 문득 `나는 왜 비를 피하려 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하지만 그러한 의문도 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로 인해 이내 부질없는 생각으로 치부되어 버린다.
그렇게 비를 피하기 위해 급하게 달려가는 나의 머릿속 한 켠에 의심의 구름이 묵직한 중량감으로 찾아온다. 그렇다 보니 달려가던 나의 몸은 어느새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그 걸음의 방향은 굳이 회색빛 건물 하나에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자유와 해방감이 여울이 되고, 소용돌이가 되어 나의 뇌리를 지배했다 .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비를 맞는다고 하여 지금 당장 내가 죽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비를 피하기 위해 그렇게 안간힘을 다하는 것인가? 단순히 비에 젖은 옷이 주는 찝찝함과 끈적함 때문일까? 아님, 조건반사적으로 비가 오면 피해야 된다는 무의식의 발로인가?’
해답을 구하기 위해 던진 질문은 아니었기에 나는 그저 편한 마음으로 내 자신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리고 이 질문에 굳이 답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나의 생각은 수많은 물음표로 채워졌고, 그것은 이내 알 수 없는 충만감으로 내 정신을 가득 채웠다.
톡톡톡!
조금씩 채워지는 정신적 충만감에 묘한 만족을 느낀 나는 쉬지 않고, 내 머리와 온 몸을 때리고 있는 빗방울들의 존재를 느꼈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내가 한 자리에 서서 빗방울들을 맞고 있다는 사실들을 알 수 있었다. 순간 알 수 없는 희열이 온 몸을 헤집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내 자신에게 던졌던 수많은 물음표들이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빗방울들의 독특한 퉁김이 자유로운 개방에 의해 활짝 열린 감각에 고스란히 잡혔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귀엽고도 발랄한 몸짓으로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렇다. 그것은 나의 생명을 앗아갈 만큼 위험한 것도 아니었고, 찝찝함과 끈적함을 주지도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나는 또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실상 회색빛 건물은 나에게 진정한 피난처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자유를 속박하는 족쇄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이 들자
나는 보금자리처럼 따스하고, 듬직한 것으로만 인지하고 있던 회색빛 건물이 도리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흉신악찰의 모습으로 비쳤다. 하지만 그것 또한 내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장면이자 허상이라는 사실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회색빛 건물은 인간이 만들어낸 건물일 뿐. 그것 자체가 내 자신의 자유를 빼앗아 가진 못한다. 도리어 내 자유를 빼앗아가는 것은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고정된 내 사고다.’
머릿속 가상이자 현실의 공간인 정신적 세계에서 주체인 나의 자아가 그렇게 나름의 결론을 내리자 무언가로 채워졌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더할 나위 없이 가볍고,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지금껏 내가 느꼈던 충만감과 만족도 진정한 자유가 아니었다.’
두두두두!
끝없는 사고의 바다를 유영하며 시간과 공간마저도 인지하지 못했던 내가 현실세계로 돌아오자 가장 먼저 나를 반기며, 나의 감각을 건드린 것은 다름 아닌 비가 주는 가벼운 무게감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내 몸을 두드리는 비의 정겨운 감촉을 느꼈고, 감았던 두 눈을 뜨자 공간을 장악하고 있는 셀 수도 없이 많은 빗방울들이 모여 수 많은 선들이 공간을 긋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나는 묵묵히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바닥에 통통 튕기는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을 하며 작은 웃음을 입가에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걸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