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살이, 모든 삶이 기적인 것처럼 - 귀촌과 심플라이프를 꿈꾸다
박중기 지음 / 소동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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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촌과 심플 라이프를 꿈꾸다

표지 내 부제...

내가 꿈꾸는 노년의 시골살이...

조그만 시골 집...

그 집은 방, 거실, 부엌, 화장실, 현관, 창고 등등등으로 오밀조밀 칸막이가 복잡하게 있는 집은 안된다.

그저 최소한의 구분만 되어있는...

현관은 넓어야 한다. 추운 날 두꺼운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둘 수 있어야 하고, 들일을 하고 실내로 들어오기 전 적어도 발은 씻을 수 있는 수도를 옆에 둔...

화장실은 욕실을 겸해도 된다. 다만 밭일을 하고 묻은 먼지와 땀을 바로 씻을 수 있게 외부와 연결된 문이 꼭 있어야...

거실에는 별다른 가구없이 그저 마주보고 앉아 밥먹고 커피마시고 이야기할 수 있는 너른 탁자와 편안한 의자가 있으면 된다. (의자는 너무 편하면 안된다. 적당히 긴장감이 있어서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아야 한다...)

베란다는 꼭 있어야 한다. 날 궂은 날 빨래를 널어야 하니...

창이 클필요는 없다. 꼭 실내에서 밖을 바라볼 필요는 없으니 그저 채광이 좋을 정도만...

집 주변 울타리는 필요없다. 키 작은 나무를 빙 둘러 심어놓을 터이니...

울타리 안쪽은 집사람만의 정원이 될 것이고...

구석에 무서워하는 닭을 오로시 계란 확보와 여름철 보양을 위해 좀 키울 것이고...

조그만 화덕을 지어 거기에 솥 걸어놓고 주변에서 뜯어온 나물을 삶고 말리고...

울타리 너머 조그만 텃밭이 있어 내 먹을 정도 자급할 수 있는 정도면 되고...

바라기는 나중에 취미로 해보고 싶은 바다 낚시를 할 수 있으면 다행이고 안되면 말고...

왜 시골가서 살려고 하는가...

더 이상 나를 고용해주는 곳이 없어지고 나면 도시의 집에서 난 뭘할까? 할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할까?

그저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닐까?

무릎과 허리가... 눈이 괜찮을 때까지 산에 다니고 산책로를 걷고 벤치에 앉아 뭔가를 바라보다가 밥먹고 자는 일과?

난 이게 무섭다.

시골에서의 낭만? 별로 기대 안한다. 힘들겠지.

내가 농사를 해봤나? 몸을 써서 일해봤나? 시골의 불편함을 겪어봤나?

모두 아니요... 일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시골로 가려고 한다. 왜?

잘모르겠다.

나같은 사람에게 저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다더군요.

'인생을 사는 방법은 딱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적이 없는 것처럼 사는 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인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시골에선 '모든 것이 기적인 것처럼'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살고 있습니다.

p015

그래... 모든 것이 기적인 것 처럼 느낄 수 있는 지 확인하러 가자...!!

다양한 이야기를 저자는 들려준다.

어디서 살 것인가에 대한 터잡기부터...

집짓기...

산골의 일거리...

거름...

잔디와 조경...

개 犬...

이방인의 방문...

두레 모임...

주변 사람들...

산골 짐승들...

시골 축제와 시장...

난로와 장작...

병원, 문화생활...

수리, 수선...

절절하다. 꼭 필요한 부분이다. 그래 이거야 싶다.

특히 두가지... 쫌 새롭다...

거름 만드는 것 하고... 그리고... 사람 흔적 찾기 힘들다는 지금의 시골 마을의 현실이...

시골 살이에 대한 로망을 가진 지 꽤 되는 나는 일정 부분 많이 들어봤고, 어떤 것은 경험도 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주제의 책을 계속해서 찾아보고 읽는 것은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확신없고 목표없는 내가 갖고 있는 무서움을 조금이라도 떨쳐버리고 싶은 것이라고 해야겠다.

책을 마무리하며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봄 날... 벚꽃 가지 사이에 비치는 눈부신 햇살과 살구꽃, 연두의 낙엽송에 둘러싸인 눈부시게 아름다운 집을 본다.

그 집을 향하던 마을 어귀 어느 집의 담장을 지나 골목 어귀에서 만나는 구부정한 허리의 할머니와 적막 그 자체인 조용한 거리를 본다. 누구에게는 이 고요가 따분함과 외로움이 되어 몸서리칠 수도 있단다.

저자는 당부한다.

자신의 성향이 어떤지 잘 알아보라고...

시골 생활이 주는 행복함보다 이런 고요와 적막 속에서 잘 버텨낼 수 있는 지를...

존재하는 작은 차이가 좌지우지하는 행복할 수도, 견딜 수 없이 괴로운 일상이 될 수도 있기에...

시골 살이도 도시 살이도 결국 "선택의 문제" 라며...

나도 책읽기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생각해본다.

너무 많은 고민과 생각은 자꾸 나 스스로를 머뭇거리게 한다.

스스로의 가스라이팅에서 이젠 벗어나보자...

앞으로 5년 정도 남았다.

그때까지는 아이들을 위해 도시에서 살아가고...

이후는 나와 내 부모님을 위해 시골로 가자...

이제 실질적인 준비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작성한 독후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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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여행자를 위한 인문학
김상근 지음, 김도근 사진 / 시공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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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라하는 김성근 교수의 책이다.

방송에서 처음 봤는 데 목소리도 외모도 부러웠던 기억이... ^^

"여행자를 위한 인문학"은 시리즈로 되어 있는 듯...

로마, 베네치아, 피렌체... 그리고 시칠리아다.

2019년부터 시작된 시리즈가 벌써 4년 째에 이르러 있다니...

이 시리즈의 끝은 어디가 될까 자못 궁금할 따름이다.

영화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에서 영감을 얻어 지었다는 이 책의 제목은 과연 잘 어울리는 것일까?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라는 말은 러시아 속담이란다.

울어봐야 소용없다는 의미라나...

우린 눈물을 믿지 않아요. 이 땅, 시칠리아에 내일 따위는 없어요.

p9

지나가는 행인들의 얼굴에 그렇게 씌여져 있다고 느끼는 저자의 감상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시칠리아는 장장 2800여년 동안 외세의 지배를 받아왔단다.

우리의 일제 강점기 35년은 정말 새 발의 피 정도로 여겨질 정도다.

페니키아, 그리스, 로마, 반달, 동고트, 비잔틴, 사라센, 노르만, 독일 호엔슈타우펜 왕가, 그랑스 카페 왕조, 스페인 아라곤 왕조, 사보이아 ,합스부르크, 부르봉 왕조, 통일 이탈리아, 그리고 자치 구역에 이른 오늘 날까지...

곡물 창고로 불릴 정도로 너른 평야에 곡물이 풍성하게 자란 탓도 있을 것이고...

이탈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 사이를 징검다리처럼 연결시켜주는 지리적인 탓도 있을 것이다...

여튼 이리 저리 휘둘린 그런 곳... 시칠리아되겠다.

저자는 고대로부터 이어진 이러한 시칠리아의 역사를 지배층의 변화에 따라 시간적으로 구분하여 우리에게 들려준다.

읽다가 느낀 감상 몇가지...

시칠리아의 하부 구성원 (처음에는 원주민이었겠다. 외부인들이 계속 교차하듯 반복해서 유입되다보면 원주민과 섞이고 섞여 이 사람들이 원주민 맞는 지 의아할 수도 있겠다. 여튼... 피지배층을 에둘러서 말해서 하부 구성원이라고 해보자...)은 그래도 힘이 있었나 보다.

맘에 안들고, 그들의 의사를 거스르거나 억압할 때 지배층을 무력으로 몰아내기도 하고 바꿔버리기도 했으니...

그런데 딱 여기까지 같다.

지배층을 몰아내고 스스로 지배층을 이루어서 자치 정부를 구성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저 또 다른 세력을 지배층으로 옹립하고 만다.

어쩌면 주인이 없으면 우왕좌왕하듯 어쩔 줄 모르는 수동적인 그리고 전형적인 피지배층인지 모르겠다.

우리 민족과는 다른 모습인 듯...

숱하게 바뀐 지배 세력들은 각자 자기 문화를 알리는 무언가를 만들었고 지금 그 자취를 느끼고 알아볼 수 있단다.

하지만 사라센 문화의 흔적은 찾기가 힘들단다.

그저 어느 건축물에 사용된 기법 (벌집 모양의 구조, 아치, 모스크의 돔과 비슷한... 뭐 이런...) 정도를 찾아볼 수 있단다.

그것은 비이슬람 문화에 속하는 민족이 지배층을 이루면 이슬람 문화의 흔적을 아주 적극적으로 말살하고 파괴했던 결과라고 한다.

사라센이라고 통칭된 이슬람 문화권의 사람들이 약 170여년 간 시칠리아를 지배하는 동안 이전 문화의 자취들은 남아있는 데 왜 그 반대는 그렇지 않을까?

기독교 (이 당시에는 카톨릭과 그리스정교로 구분될) 문화는 그만큼 배타적이었다는 것에 대한 방증일까?

시칠리아는 제주도의 14배 정도되는 면적을 가진 섬이라고 한다.

대충 경상도와 전라도를 합친 면적보다 조금 작은...

우리의 삼국 시대 고구려가 세력이 많이 좋았을 때 백제와 신라를 합쳐놓은 그런 정도의...

우린 나라가 두 개, 그러니까 지배 세력이 둘이라는 말인데 시칠리아에선 도시 단위로 참 많은 세력이 있었고, 여차하면 서로 싸웠단다.

어찌보면 제네바, 피사, 피렌체, 베네치아...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라고 불리는 이 나라들도 툭하면 싸우고 대립했었던 것을 보면 이탈리아의 민족성이 그런 것인지 여튼 엄청도 투닥거린다.

수영을 못하거나 배가 없으면 달리 도망갈 곳도 없는 섬에서 왜 그리 투닥거리며 싸우다가 외세에 시달림을 당했던 것일까 시칠리아는...

그 긴 세월 외세에 의해 지배받던 시칠리아는 통일 이탈리아의 구성원이 된다.

하지만 시칠리아를 비롯한 남부 이탈리아의 열악한 경제 상황과 생활 수준으로 인해 북부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멸시와 차별, 그리고 억압은 이어진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시칠리아의 마피아는 또 다른 악의 축으로 피어나 한 쪽은 2차 대전의 패전과 함께 사라졌지만 다른 한 쪽은 여전히 시칠리아 사람들의 생활을 팍팍하게 하고 있다.

인문학자로서의 김상근 교수를 느끼게 되는 부분이 두군데 있는 듯하다.

하나는 파시즘과 마피아를 바라보는 시각과 분석에서 영화 '대부' 중 피살당한 딸을 안고 절규하는 알 파치노의 연기를 보며 눈물없는 소리없는 오열을 이야기하는 부분이고...

하나는 성모 마리아를 바라보는 두 관점을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수태고지"라는 그림을 통해 성모의 눈, 시선에서 '공포에 질린 섬 (시칠리아)의 심리 상태'를 읽어내고...

카라바조의 "산타 루치아의 매장"이라는 그림을 통해 시라쿠사의 성녀 산타 루치아의 유해까지도 빼앗기고 빈 무덤만을 가진 시칠리아 사람들의 절망을 본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빼앗긴 사람들에게 남겨진 마지막 위로는 실현되지 못할 미래를 위해 희망의 삽질을 계속하는 것"일 수 밖에는 없는 것일까...

저자는 표지에서 보이는 늙은 어부를 찍은 사진을 보고나서 시칠리아를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공포에 질린 섬의 심리 상태'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사진으로, 경계하는 눈동자와 가늘게 떨리고 있는 입을 통해 시칠리아를 보았다고 한다.

절망과 공포에 매몰되기 전에 젊은 시절에 벗어나야 하는 섬 시칠리아...

2800년 동안 외세에 시달리고 자기 문화 하나 제대로 빚어내지 못한 섬 시칠리아...

그래도 저자는 늙은 어부의 얼굴에서 공포만이 아니라 그 긴 고난의 시간을 이겨내고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시칠리아를 기억하라고 말한다.

거기에 하나 더 눈물을 믿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작성한 독후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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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컨스피러시 옥성호의 빅퀘스천
옥성호 지음 / 파람북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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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롯 유다는 과연 희생자일까 아니면 배반자일까... 종교적 관점을 놓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좀더 객관적으로 판단해보면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신화는 신화로, 이야기는 이야기로, 신앙은 신앙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저자의 시선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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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컨스피러시 옥성호의 빅퀘스천
옥성호 지음 / 파람북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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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독자가 이야기는 이야기로, 신화는 신화로 보도록 하는 데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썼다.

p276, 에필로그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라면 논쟁을 피해야할 주제가 두가지 있단다.

정치하고 종교...

각자 가지고 있는 신념과 믿음이 확고하면 할 수록 대화가 이루어지기 보다는 논쟁과 비난으로 이어지기 쉽기에 그렇게 이야기되는 지도 모르겠다.여튼... 조심스러운 주제이고 보니 막상 독후감을 쓰는 것도 조심스럽다는 뭐 그런 설레발... ㅎ

저자 옥성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기독교 성향이 강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과 상식이 사라진 한국교회를 깨울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가기 위해 이와 같은 주제의 책을 쓰고 있단다...

일단 종교가 무엇이고, 종교에 대한 모독이냐 아니냐는 잠시 접어두고 단지 한사람의 주장이라 생각하고 읽어보자.

현란한 혀놀림(이건 책이니깐 손기술일까??? ^^)으로 현혹될 수도 있다. 그것이 무섭다고 무시하는 것은 쫌 그렇다.

혹시 아는가... 그동안 어쩡쩡했던 부분들을 좀더 명확히 할 수 있는 계기가 될지... 책 내용과 결론과 무관하게 말이다. (일단 서론이 길었다. 일기장에 쓰는 것이 아니다보니... ㅡ.ㅡ)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 인류를 구원했다.

그리고 돌아가신 지 삼일만에 부활하여 하늘로 돌아가셔서 후일 다시 오셔서 인간을 심판하신다고 한다.

여기서 인간의 죄를 대신해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대목에 집중...

성경에서는 예수를 유대인에게 넘겨주어 십자가 형을 받게 한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이 자가 예수다!!!"하고 외쳤다는 (꼭 외쳤다는 건 아니고... 가리켰다는 의미로... 너무 드라마적인가??? ㅠㅠ) 그 사람... 바로 가롯 유다다.

저자는 묻는다.

가롯 유다는 유죄인가?라고...

성경에서 구약 舊約에서 예언된 바가 이루어진 사건에 대한 기술을 해놓은 것이 신약 新約이다.

독생자 예수의 속죄양이 되어 죽음을 맞는다는 예언은 구약에 있고, 예언은 이루어져야 하며, 그렇기에 유다의 밀고와 배반은 예정되어 있었으니 유다는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다...라고 하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예수가 막판 인간적인 마음으로 십자가 형을 받아 죽는 것에대한 공포심으로 흔들림을 보였을 때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옶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눅22:42, 개역한글) 유다가 밀고하여 붙잡혀가게 하여 예언이 이루어지도록 도운 조력자였을 뿐이다...라고 하는 주장이 또한 있을 수도 있다.

여기서 논점은...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유다가 어찌하든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이루어져야 했고 이루어져야 할 필수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유다는 예수를 배반하고 밀고하여 유대인들로 하여금 로마에 대한 반역자로서 십자가라는 과하디 과한 형벌로 죽게 만드는 그 상황으로 이끌어가는 부수적인 역할을 했다는 게다.

유대인이 예수를 구태여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만들었다는 상황을 강조하기 위한...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신약의 4대 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이다.

누가 썼는 지 모호한 저자 미상의 이 4대 복음은 씌여진 순서로보면 마가-마태-누가-요한 복음의 순서란다.

마가 복음에서는 유다를 밀고의 키스를 날리는 배반자로 이미지를 형성했다.

마태 복음에서는 이런 유다를 돈을 예수를 팔아넘기는 돈벌레로 강조했다.

누가 복음에서는 더 나아가 유다는 배반자, 유대인은 예수를 죽인 족속으로 확장했다.

이와 같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을 그리스도를 메시아를 죽인 족속...

저자가 4대 복음의 내용을 논하며 지적하는 사항들이 있다.

저자들이 보지도 듣지도 못했을 그런 내용을 어떻게 기록했을까?

저자들이 듣지고 보지도 못한 내용은 성령이 알려주었을 지도 모른다.

성경은 성령이 임하여 기록자의 손을 빌려 써진 것일 터이니...

하지만 사탄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말려야 하는 존재 아니었을까?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 그의 정신과 영혼을 지배함으로 배신했다고 하는 복음서 내의 주장은 그래서 모순되는 것은 아닐까?

이런 것들 외에 여러 가지 것들도 모두 사람의 머리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 감화로 그냥 믿어야만 하는 것일까?

저자의 결론은 이렇다.

기독교 (구교와 신교, 즉 천주교와 기독교를 모두 아울러서 말하는 것이다. 천주교는 좀 서운하다할 지 모르겠다. 뭐라고 해야할 지 모르겠다... ㅠㅠ)는 예수의 죽음으로 원죄 原罪를 사함받고 예수를 믿음으로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교리가 바탕이 되는 종교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유대인과 유대교가 예수의 존재, 그리스도의 존재, 메시아였던 예수를 부정하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부정 否定이고,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으로서의 결격 사유가 될 뿐이다.

하여 예수는 그리스도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며... 원죄에 대한 대속자다.

이런 상황에서 유다의 배신과 밀고가 없다고 십자가의 죽음이 방해받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그러므로 유다의 역할은 있으나 마나한 사족 蛇足과 같으며...

유다는 희생자일 뿐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결코 유다를 희생자로 받아들일 수 없다. 유다가 희생자가 되는 순간, 예수가 가해자가 된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기독교 구원교리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다는 죽어야 한다. 예수가 살기 위해서는 지난 2000년 동안 그랬듯, 유다는 오늘도 죽어야 한다.

p277

저자가 말했듯 이야기는 이야기고 신화는 신화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믿음의 대상이며, 믿겨지는 사실이다.

이런 주장에 판정은 그 진실을 아는 자가 하겠지...

오늘 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그런 새로움을 느낄 따름... (난 잘 모르겠다는 말이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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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생긴 서울을 걷는다 - 제10회 브런치북 대상 수상작
허남설 지음 / 글항아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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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생긴 서울...

저자의 눈에 못생겼다는 것은 무엇일까?

재개발 재정비 뉴타운...

참 다양한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부시고 다시 짓는 그 행위를 통해 서울은 한두세대 이전의 모습에서 얼마나 많이 바뀌었을까?

난 한동네에서 반백년을 살았다. 지금도 그 동네에서 산다.

반백년 전의 모습에서 지금의 동네 모습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다.

많은 달동네 판자촌 들이 사라졌다.

이름만 들어봤던 백사마을도 개발을 피해갈 수 없는 모양이다.

개발의 후유증은 어느 정도 있을 수 밖에 없지만 가장 큰 것은 내가 살던 곳에서 살지 못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개발 전의 동네를 생각해봤다.

이사를 여러번 했지만 동네 안을 전전했었다.

철거 전 그 전에 살던 집은 철거 때 까지 퐁당퐁당 푸세식 화장실이었고...

어떤 골목은 두사람 지나가기도 힘든 좁은 골목이었다.

그래도 살 만했다.

개발이 된다고 소문이 나기 시작해서 부터는 아무도 집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

벗겨지고 퇴색한 페인트로 그냥 그대로 두고... 금이 가서 위태위태한 담 벼락도 그대로...

그리고 그렇게 개발이 시작되었고... 집이 비어지고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철거라고 빨간 글자가 써지고... 그리고 집들이 부서지고... 공터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반듯한 도로가 나고 높다랗게 아파트가 들어서고 단지와 단지를 구분짓는 울타리로 경계지어졌다.

집과 집 사이의 골목길은 없어지고 단지 내 조경된 산책로와 놀이터가 남았다. 단지 내 사는 사람들만 공유할 수 있게 감시되어 가며...

백사마을 개발은 좀 다르게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동안 자연스레 만들어진 골목과 경계를 그대로 남겨 골목길이 가지는 그 정취를 남기겠다고...

아파트로의 개발은 최소화하겠다고...

이익을 극대화하지 않는 이 방법은 이익의 축소분만큼 시간과 논의의 확대분을 필요로 하고 있는가 보다.

그렇다고 그냥 놔두고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나름의 방법과 수고를 통해 알아서 하라고 하는 것이 최선일까?

난 이 책을 통해 그런 것을 듣고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던 재개발의 후유증에 아픈 사연 하나 더 얹어 놓은 듯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해야겠다.

언젠가 유현준 교수의 책에서 빌딩과 빌딩의 간격에 대한 이야기를 봤었다.

풍경의 변화, 다양함 뭐 그런 것에 대한...

하지만 여전히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그 이야기를 가지고 개발의 방향을 세워 살고 있던 사람들이 다시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개발은 없을까 싶었다.

여전히 난 골목길에서 놀던 어릴 때의 생각 속에 묻혀 사는 고리타분한 사람인 듯 하다...

다시 맨 앞의 질문을 생각해본다.

못생겼다는 것은 뭘까?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운상가 위에 올라가서 종로2가부터 동대문까지, 종로-청계천-을지로의 모습을 보면서 분노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정말 참혹합니다.' (서울특별시의회 2021)

p224

그 누군가의 눈에 비친 그 "참혹"함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누더기 판자촌? 가파른 경사길? 차도 다니기 힘든 좁다랗고 구불거리는 골목길? 아니면...

직사각형 아파트... 규격화되고 획일적인...

저자의 생각에선 "건물 위에서 내려다본 세운재정비촉진지구는 조잡하고 촌스러운 파란색 철제 지붕 혹은 반세기 전에 판자촌을 덮었을 듯한 슬레이트 지붕. 그것도 아니면 마치 거적때기처럼 낡은 천 조각을 뒤집어 씌우고 타이어로 적당히 눌러놓은 지붕으로 범벅인" 그 풍경이었던 것 같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이해할 인간의 이해의 폭에서...

지금 누군가의 보금자리일 그 곳을 바라보며 느꼈을 저 '참혹함'을 정화할 방법이 저 사람에겐 무엇이 될 것인지 어떤 것이 될 것인지 너무 너무 궁금해졌다.

가끔씩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 골목길이 그립다.

초등학생 (아~~ 난 국민학생이었다... ㅠㅠ) 땐 집 앞 골목이 운동장만 했었는데... 피구도 하고 짱뽕도 하고 돈까스, 얼음 땡, 오징어, 123... 다 할 수 있었는데...

담장 넘어 간 공 꺼내달라 띵똥 띵똥 참 벨로 많이 눌렀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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