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관과 객관 - 과잉 정보의 시대, 본질을 보는 8가지 규칙
키코 야네라스 지음, 이소영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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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독후감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하며 산다.

오늘 점심 메뉴 같은 가벼운 결정부터, 투자의 방향이나 정치적 지지처럼 삶의 궤적을 바꾸는 무거운 결정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이때 우리 뇌가 가장 먼저 꺼내 드는 도구는 ‘직관’이다.

수만 년의 진화 과정을 통해 축적된 이 본능적 감각은 빠르고 효율적이다.

하지만 저자는 <직관과 객관>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신뢰해 마지않는 그 직관이, 복잡해진 현대 사회에서는 오히려 우리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 ‘인지적 함정’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저자는 직관이 유용한 도구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원시 시대, 수풀 속의 부스럭거림이 바람인지 호랑이인지 통계적으로 분석하고 있었다면 인류는 진작 멸종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정보 생태계는 수풀 속 포식자보다 훨씬 교묘하고 복잡하다.

저자가 강조하듯, 오늘날의 정보는 단순히 많은 것을 넘어 ‘과잉’ 상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직관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확증 편향’에 취약해진다.

저자는 우리에게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하라고 주문한다.

이는 단순히 차가운 이성을 갖추라는 도덕적 훈계가 아니다.

데이터와 근거를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익히라는 실천적 권고다.

그는 직관이 주는 ‘확신’의 안락함에서 벗어나, 데이터가 말하는 ‘진실’의 불편함을 마주할 용기가 객관성의 시작이라고 역설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도구로 수학과 통계를 제시한다.

대중에게 수학은 흔히 골치 아픈 계산으로 여겨지지만, 저자에게 수학은 ‘세상의 노이즈를 제거하는 필터’다.

데이터와 근거를 평가하고 검증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통계적 사고는 필수적이다.

우리는 흔히 자극적인 사례 하나에 매몰되어 전체의 흐름을 놓치곤 한다.

뉴스에서 보도되는 극단적인 사건이 마치 세상의 일반적인 모습인 양 착각하는 ‘가용성 휴리스틱’이 대표적이다.

저자는 이러한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평균, 확률, 상관관계와 인과관계의 구분 등 통계적 개념을 일상에 들여와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데이터는 그 자체로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데이터를 어떻게 해석하고 검증하느냐에 따라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이 되기 위해 데이터를 사용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데이터를 다루는 인간의 편향이 데이터에 투영될 때 오류는 더 정교하게 포장된다.

저자는 통계를 이용하면서도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문제점, 즉 샘플링의 오류나 기저율 무시 등을 조목조목 짚어낸다.

특히 정보 과잉 시대에 우리가 겪는 ‘선택적 인지’는 객관성을 가로막는 가장 큰 벽이다.

알고리즘이 짜준 맞춤형 정보에 갇혀 자신의 편견을 공고히 하는 현대인들에게, 저자는 끊임없이 ‘반증 가능성’을 확인하라고 조언한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가정, 그리고 내 판단의 근거가 되는 데이터가 오염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태도야말로 이 책이 말하는 진정한 객관성의 요체라고 해야겠다.

결국, 저자가 읽는이에게 강조하는 것은 기술적인 통계 지식보다는 ‘객관성을 대하는 태도’다.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우리는 더 많이 아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로는 더 깊게 편향될 위험에 처해 있다.

저자는 이를 타파하기 위해 다음 세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멈춰 서기: 직관적인 판단이 고개를 들 때, 잠시 멈춰 그 근거가 무엇인지 자문하라.

둘째, 근거의 질 따지기: 단순히 숫자가 있다고 해서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데이터의 출처와 수집 과정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라.

셋째, 확률적으로 사고하기: 세상에 100%는 없다. 흑백논리에서 벗어나 모든 가능성을 확률의 스펙트럼 위에 올려놓고 판단하라.

이 책 <직관과 객관>은 우리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창을 열어준다.

직관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엔진이지만, 객관은 우리가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브레이크다.

저자가 안내하는 수학과 통계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역설적으로 우리는 인간 인지 능력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이 책은 단순히 '데이터가 최고다'라고 외치는 데이터 만능주의 서적이 아니다.

오히려 데이터 뒤에 숨은 인간의 욕망과 오류를 직시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지적인 겸손함'을 요구하는 책이다.

정보가 넘치는 시대, 우리가 가져야 할 최고의 무기는 화려한 분석 기술이 아니라, 언제든 내 판단을 수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 유연하고도 객관적인 마음가짐일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덮고 나면 우리는 더 똑똑해졌다기보다, 덜 확신하게 된다.

그러나 그 덜 확신하는 상태야말로 저자가 말하는 객관성에 가장 가까운 지점일지도 모른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직관과 객관>은 판단을 날카롭게 만들기보다는, 판단 앞에서 스스로를 한 번 더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라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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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정치적인 글쓰기 - 뼛속까지 정치적이면서도 가장 예술적인 문장들에 대해
조지 오웰 지음, 이종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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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독후감입니다.]


<조지 오웰의 정치적인 글쓰기>는 정치 비평서라기 보다는 한 작가가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처럼 읽힌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단순해보인다.

나는 왜 쓰는가.

그리고 이 질문은 곧 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정치적으로 쓸 수밖에 없는가.

1장 [나는 왜 쓰는가]에서 오웰은 글쓰기의 동기를 네 가지로 정리하지만, 읽는 우리는 곧 그것이 균형 잡힌 분류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차리게 된다.

자기과시나 미적 열정, 역사적 충동 역시 중요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것은 정치적 목적이다.

오웰에게 정치란 정당 활동이나 선거 구호가 아니라, 세상을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려는 모든 시도가 된다.

이 정의에 따르면, 작가는 이미 정치 안에 들어와 있다. 다만 그것을 자각하느냐, 외면하느냐의 차이만 남는다고 생각된다.

이 지점에서 오웰이 독립노동당 가입 경험을 언급하는 대목은 단순한 이력 소개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중립적인 관찰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글쓰기 이전에 이미 한쪽을 선택했고, 그 선택은 관념이 아니라 현실 속 행동이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는 읽는 이에게도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정치적 글쓰기를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위치와 시각에 대해서는 끝까지 말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회피가 아닐까 하는 질문 말이다.

4장 [정치적인 글쓰기]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날카롭게 정리한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오웰은 ‘정치적 글쓰기의 위험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정치적 글쓰기가 언제든 선전으로 타락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 위험을 이유로 언어를 흐리게 만들고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라고 말한다.

오웰이 반복해서 경고하는 것은 ‘거짓’보다 ‘모호함’이다.

정치적 언어가 병들 때, 그것은 대개 노골적인 거짓말이 아니라 의미를 비워낸 문장, 책임 주체를 지운 표현, 판단을 유예시키는 관용구의 나열 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이 맥락에서 오웰이 제시한 글쓰기 규칙들, 그 중에서 특히 “뺄 수 있는 단어는 빼라”는 원칙은 단순한 문체론이 아니다.

이는 사고를 단순화하라는 주문이 아니라, 사고를 끝까지 밀어붙이라는 요구에 가깝다.

불필요한 단어를 제거한다는 것은 생각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핑계와 회피를 제거하는 일이다.

그래서 이 규칙은 저자의 또 다른 작품인 <1984>의 '신어(뉴스피크, Newspeak)'와는 정반대의 윤리와 사고를 지닌다.

신어가 사고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언어의 축소라면, 여기설 말하는 "뺄 수 있는 단어는 빼라"는 간결함은 사고와 주장을 책임 있게 만들기 위한 언어의 절제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결국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오웰이 정치적 글쓰기를 ‘기술’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로 다룬다는 데 있다고 보인다.

그는 명료함을 미학으로 칭송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도덕적 선택으로 제시한다.

쉽게 쓰는 것은 독자를 배려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작가 스스로에게 변명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웰의 규칙들은 작가를 보호하기보다 오히려 계속 불편하게 만든다.

<조지 오웰의 정치적인 글쓰기>를 1장과 4장을 중심으로 읽고 나면, 이 책은 하나의 주장으로 수렴된다.

정치에서 벗어난 글쓰기는 없으며, 정직함을 포기하지 않는 한 글쓰기는 언제나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오웰은 우리에게 정치적으로 쓰라고 설득하기보다 이미 정치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얼마나 비겁한지를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특정 이념의 옹호서라기 보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하기 어려운 윤리적 질문을 남기는 그런 책이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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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
피오나 매덕스 지음, 장호연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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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독후감입니다.]



낭만주의의 거장으로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내게는 사실 낯설다.

그동안의 난 조지 윈스턴이나 유튜버인 피아니캐스트 등의 음악을 즐겨들어왔지 정통 클래식 연주자의 곡을 제대로 들어보지 않았기 때문이겠다.

오늘 책을 통해 라흐마니노프라는 사람을 만나본다.

제목이나 작곡가를 정확히 알지 못해도, 어쩌면 난 그의 음악을 이미 여러 번 들어봤을 지도 모르겠다 싶다.

영화 속에서, 광고 속에서, 혹은 누군가의 연주 영상에서 흘러나오던 그 음악은 어떤 느낌을 내게 주었을까?

영화를 본 것은 아니지만 우리 영화 <탈주>에서 구교환의 연주 (일부분만 직접 연주했다고 하던데... ^^)로 들어본 "프렐류드 op.23 no.5" 는 조금은 쓸쓸하고 격정적이면서도 그러나 동시에 지나치게 감상적이지 않은 품위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만난 라흐마니노프에 대해 이 책 <라흐마니노프, 피아노의 빛을 따라>는 바로 그 음악 뒤에 서 있던 한 인간의 삶을 조심스럽게 비춘다.

이 책은 위대한 작곡가의 업적을 찬양하는 전형적인 전기와는 조금 결이 다른 듯 싶다.

피오나 매덕스는 라흐마니노프를 ‘천재’라는 단어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좌절하며, 자기 의심 속에서 음악을 붙들었던 한 인간으로 그려진다.

특히 교향곡 1번의 실패 이후 깊은 우울에 빠졌던 시기, 그리고 그 침묵을 뚫고 다시 음악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새롭게 대하도록 만드는 듯 싶다.

그가 만들어낸 장대한 화성과 깊은 서정성은 타고난 재능의 결과이기 이전에,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선 시간의 흔적처럼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불어 인상 깊었던 하나는 그가 '피아니스트'와 '작곡가' 사이에서 겪었던 분열과 고뇌에 대한 부분이라고 해야겠다.

대중은 그의 연주에 열광했지만, 정작 본인은 연주 여행의 피로 속에서 작곡할 시간을 빼앗기는 것에 괴로워했고, 20세기 초 현대 음악의 물결이 거세게 몰아칠 때 "나는 구시대의 유물인가"라고 자문하며, 당시의 음악 경향이 실험과 해체의 방향으로 나아갈 때 그는 여전히 낭만주의의 언어를 고집했다.

하지만 저자는 그 선택을 보수성이나 한계로만 보지 않는다.

그런 점으로 인해 라흐마니노프가 늘 ‘시대에 뒤처진 작곡가’라는 평가를 받아왔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저자는 라흐마니노프가 자신의 음악적 정체성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유행과 평가의 소음 속에서도, 그가 끝내 지키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소리’였다는 것이다.

망명 이후의 삶 또한 이 책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조국을 떠난 예술가로서의 고독, 성공한 연주자이면서도 작곡가로서는 늘 갈증을 느꼈던 모순된 위치는 라흐마니노프를 더욱 복합적인 인물로 만든다.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그 명성이 곧 내면의 평안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며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유독 ‘그리움’이라는 감정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이 책이 남기는 인상은 한 음악가의 삶을 이해했다는 만족감보다는, 그의 음악을 다시 듣고 싶어진다는 충동에 가깝다.

라흐마니노프의 선율은 이제 단순히 아름다운 음악이 아니라, 한 사람이 견뎌낸 시간의 무게로 다가오는 듯 싶다.

그래서 이 책은 전기라기보다, 음악을 통해 한 인간을 이해하려는 것으로 느껴진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가 왜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마음을 붙잡고 있는지, 그 이유를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조심스럽게 납득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지금 영화 속에서 들려지는 "프렐류드 op.23 no.5"를 다시 듣는다.


#피오나매덕스 #장호연 #위즈덤하우스 #라흐마니노프피아노의빛을따라 #매일책읽기 #독후감쓰기 #도서리뷰 #서평단 #위뷰

#전기 #인물평전 #라흐마니노프 #러시아피아니스트 #위인전 #프렐류드op.23no.5 #낭만주의의거장 #그리움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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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장, 일곱 계절을 쓰다 - 7인 7색 문장을 따라 쓰며 찾은 나답게 살아가기
김은정 외 지음 / 미다스북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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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명의 작가가 일곱 개의 계절을 들려준다.

관계의 계절, 위로의 계절, 극복의 계절, 철학의 계절 그리고 치유, 격려, 온기의 계절을 말이다.

그 각각의 계절에는 그 계절 이름에 해당되는 설명이 딸려있다.

그래서 관계는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 인연에 따라 얽혀있는 수많은 관계들 중에서 나와 너 사이에 대한 것임을 알게해주며, 이어지는 나머지 여섯 계절이 담아내려고 하는 마음들을 좀 더 명료하게 알려준다.

책은 글들을 필사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마음에 머릿 속에 담아두고 싶은 글들을 한 번쯤 옮겨 쓰는 것은 그 마음의 실천적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나도 되새겨봄직한 몇 몇 글들을 조심스레 써본다.

그래도 책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 하얀 백지에 따로이... ^^

그리고 한 번 생각해본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살아가는'과 '사는'이라는 단어에서 묘하게 느껴지는 수동적과 능동적이라는 서로 다른 기분은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에 대한 우리들 각자의 태도가 가리키는 방향성이라는 느낌이 든다.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이 누구에겐 부족하고 누구에겐 한갖지다면 그것은 마음의 여유가 주는 차이일까?

가끔 시간은 내게 불공평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주체할 수 없을만큼 오래 오래... 마치 도깨비처럼... 단, 도깨비 방망비는 필수라는 조건이 이루어져야만 말이지... ^^

<오늘 하루를 버텼다. /.../ 그래도 끝까지 해냈다. /...>

어느 순간부터 하루를 버틴다는 기분이 더 강하다.

무언가를 해냄으로서 얻는 어떤 뿌듯함이라는 것을 잊어가고 있는 듯 싶다.

그래도... 하루를 끝까지 해냈다... 그러니까... 또 하루를 버텨서 살아냈다...

응원은 하지만 왠지 박수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응원해본다...

<경제적 빈곤이 가장 먼저 무너뜨리는 것은/우리의 마음이다>

그렇게 무너진 마음엔 여유가 없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점점 더 주변을 둘러볼 수도 없다.

이런 마음을 치유할 셀프 처방전이 절실하달까...

책에는 일곱 명의 작가들이 꼽아서 들려준 좋은 글 들이 많이 있지만 훅하니 내 눈에 들어온 글들을 옮겨 써봤다.

그리고 이유를 알 지 못하겠지만 한 사람이 생각났다.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조금씩 의자를 옮겨가며 지는 해와 노을을 바라보고 있던...

어린 왕자는 내가 꼽아본 글들에 부합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면서...

하기사 사람마다 생각과 기분에 따라 다를 일이겠지만...


#하루한장일곱계절을쓰다 #윤진선 #미다스북스 #필사 #철학 #치유 #관게 #온기 #극복 #격려 #온기 #어린왕자 #도깨비의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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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의 역습 - 인간 본성은 우리의 세상을 어떻게 형성했고, 구원할 수 있는가
하비 화이트하우스 지음, 강주헌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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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독후감입니다.]


인류는 수천 년간 눈부신 문명을 일구었으나, 정작 그 문명을 움직이는 동력인 '인간 본성'은 수렵 채집 시절의 구식 하드웨어에 머물러 있다.

인류학자 하비 화이트하우스는 이를 '진화적 불일치'라 명명하며, 현대 사회가 겪는 총체적 위기가 사실은 우리 본성의 역습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한다.

하지만 그는 절망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멸망으로 이끄는 그 '본성' 속에 인류를 구원할 열쇠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제시한 세 가지 본성—순응주의, 종교성, 부족주의—이 어떻게 현대의 병폐를 치료하는 약이 될 수 있는지 들여다보자.

순응주의와 이에 따른 기후위기에 대한 해법으로 '군중 심리'를 '생존 전략'으로 하자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순응주의가 초래한 무분별한 과소비와 자원 고갈이 기후 위기의 주범임을 지적한다.

우리는 남들이 사는 것을 사고, 남들이 누리는 방식을 따르려는 본능 때문에 지구를 파괴해 왔다.

그러나 저자는 이 '사회적 학습'과 '모방'의 본능을 역이용하자고 제안한다.

단순히 "환경을 보호하자"는 도덕적 구호는 본성을 이기지 못한다.

대신, 저탄소 생활 방식이 사회적으로 '쿨(Cool)'하거나 '지배적인 관습'이 되도록 설계를 바꿔야 한다고 말이다.

즉, 친환경적 행동이 집단 내에서 인정받는 새로운 '순응의 기준'이 될 때, 인류는 유례없는 속도로 기후 위기에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성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본성이 향하는 방향을 틀어버리는 전략이다.

변질된 종교성과 자본주의를 '의례'의 힘을 통해 가치를 회복하자고 말한다.

현대 자본주의는 인간의 종교적 본성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브랜드를 숭배하게 만들고 소비를 통해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믿게 한다.

저자는 돈벌이로 전락한 이 기괴한 종교성에 대항하기 위해, '강력한 사회적 결속을 만드는 의례(Ritual)'의 본질에 주목한다.

과거 인류는 함께 고통을 나누는 강렬한 의례를 통해 '심리적 융합'을 경험했다.

자본주의가 개인을 고립시키고 소비자로만 대할 때, 우리는 공동체적 가치를 공유하는 새로운 형태의 '세속적 의례'를 복원해야 한다.

이는 이익만을 쫓는 시장 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인간 존엄성과 상호 부조를 우선시하는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심리적 토대가 된다.

부족주의의 두 얼굴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의 범위를 확장하자고 말한다.

부족주의는 이 책에서 가장 위험하면서도 강력한 에너지로 묘사된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숭고함과 '그들'을 향한 잔인한 공격성은 동전의 양면이다.

저자는 이 파괴적인 부족주의를 극복하는 길로 'Identity Fusion'의 확장을 제시한다.

전쟁과 갈등의 원인이 되는 협소한 부족주의를 넘어, '인류 전체' 혹은 '지구 시민'이라는 거대한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고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공상적인 세계 시민주의가 아니다.

스포츠, 대규모 문화 행사, 혹은 인류 공통의 위협(전염병, 기후 재앙)에 맞서는 공동의 경험을 통해 '우리'라는 경계선을 국가와 인종 너머로 넓히는 구체적인 사회 공학적 접근이다.

저자의 이러한 제안은 매우 현실적이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특히 본성을 부정하지 않고 이를 도구로 활용하겠다는 '인류학적 실용주의'는 기존의 공허한 윤리 담론보다 훨씬 힘이 있다는 기분이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누가 본성의 방향을 설계하는가?"라는 점이다.

만약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해 대중의 순응주의를 조작하거나, 부족주의를 특정 정치적 목적을 위해 확장하려 한다면 이는 또 다른 형태의 전체주의나 통제로 이어질 위험이 있는 것은 아닐까?

저자가 제시한 해법이 빛을 발하려면, 이러한 설계 과정이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이 아닌 투명하고 민주적인 합의를 거쳐야 한다는 전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인다.

<인간 본성의 역습>을 읽으며 느낀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운영체제'를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인간 본성을 결코 바꿀 수 없는 저주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세상을 파괴할 수도, 구원할 수도 있는 강력한 엔진으로 묘사한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무의식적인 본성에 이끌려 멸망의 벼랑 끝으로 걸어갈 것인지, 아니면 우리 안의 순응주의와 부족주의를 지혜롭게 길들여 더 큰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사용할 것인지를 말이다.

이 책은 현대 문명이 직면한 위기의 근본 원인을 명확히 짚어주는 동시에, 그 위기를 돌파할 '인류학적 매뉴얼'을 제공해 주는 듯 싶다.

우리가 가진 본성의 역습을 멈추고 이를 구원의 에너지로 전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거대한 진화이지 않을까 싶어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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